[322호 3인3책] 《세 여자》 1·2 /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사 펴냄 / 2017년

두 개의 풍경이 생각난다. 지난 2월, 어느 강좌에서 나는 식민지 조선의 ‘배운 여자’들을 만났다. 익숙한 이름, 나혜석을 빼고는 강경애, 박화성, 박진홍, 주세죽 등 여성 사회주의자들의 면면은 새로웠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고 문학적 예술적 재능을 갖춘 교양인이었음에도 독립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했던 그들의 저항은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또 하나의 풍경은 지난 6월 상해. 몇몇 단체 활동가들과 상해 임시 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의 유적지를 방문했다. 상해임시정부 터는 생각보다 작았지만, 나라를 잃은 식민지 조선 청년들에게 그곳은 영토 이상의 세계였고, 국가였으리라 생각하니 그 어떤 대륙 못잖게 넓어 보이기도 했다. 김구의 도피처나 윤봉길 기념관에서도 개인과 국가의 운명을 거스르는 혁명가들의 기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질문이 생겼다. ‘애국부인회’ 등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많았을 텐데 그들이 활약한 이야기는 왜 없을까? 당시 상해에는 김구 등을 비롯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뿐 아니라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도 넘실댔을 텐데 그들의 이야기는 왜 이곳에서 발견할 수 없을까? 인솔자에게 질문했더니 그는 그런 질문은 처음 받아본다며 당황했다.

지난 2월에 그 ‘배운 여자’들의 이름을 처음 접했을 때 기분이 묘했다. 그들의 존재를 아예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면 한 쪽이 잘려나간, 너덜너덜한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만 전부라 여겨온 건 아닐까? 그 강좌와 상해 여행 이후 이런 질문을 반복하던 끝에 이 책을 만났다. 《세여자》는 궁금해 하던 그 잘려나간 역사의 한 부분을 우리에게 되돌려 준다. 여성으로서 주체성을 자각하고, 식민지 조선에서 주인이나 종, 남녀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꿈꾸며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모든 걸 바친 (여성) 혁명가 -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의 일생을 소설로 복원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언어로 말하고 싶었고 이 세상 모든 항구에 정박하고 싶었”으며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모든 것이 되고 싶었”고, “맹수 이빨 사이에 끼어 있는 조선 민족을 구할 사상과 이론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던 세 여성이 식민지 조선, 중국 상해와 연안, 러시아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횡단하며 펼쳐낸 이야기는 새롭고도 흥미진진하다. 뿐만 아니라 여성동우회, 근우회 등 당시 여성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세계사의 격변기에 사회주의운동이 어떻게 부흥했는지, 한국 사회주의운동에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 그 사회주의운동이 어떻게 변질되고 멸절되었는지 비교적 자세하게 만날 수 있다. 그들의 일생은 단순한 개인사가 아니라 여전히 왕정 시대를 살아가는 “부모를 부인하고, 자신이 태어난 시대를 부인하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아”난 디아스포라, “자기 마음속의 이미지로 세상을 리셋하겠다는 야무진 포부”를 가진 근대인, “정열 있고 예민한 감정의 주인공이 되어서 자기 개성을 살릴 줄 알고 위할 줄 아는 여성”으로 살고자 했던 페미니스트의 역사이기도 하다.

읽는 내내 설레고, 아팠다. 여성이자 사회주의 혁명가로서 ‘이중투쟁’을 해야 했지만, 그 운명에 지치지 않았던 질긴 역동에 설렜고, 그럼에도 드넓은 대륙에서, 전쟁 통에,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변질되는 과정을 고통스럽게 겪어내며 쓸쓸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던, “결국 미국을 보지 못한 콜럼버스들”의 말로에 먹먹해졌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을 떠나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몰랐던, 삭제된 여성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역사를 비로소 만나게 되어 고맙다. 그들이 존재했기에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콜럼버스들이 되어가는 것 아닌가, 라는 이기적인 위안을 삼아본다. 


오수경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지만 글쓰기 울렁증이 있고, 책을 많이 사지만 읽지는 않고, 사람을 많이 만나지만 부끄럼이 많고, 내성적이지만 수다스럽고, 나이 먹다 체한 30대, 비혼, 여성이다. 사훈이 ‘노는게 젤 좋아’인 청어람에서 열심히 일하는 척하며 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공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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