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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공동체의 삶, ‘베네딕트 옵션’이 대안입니다”
[327호 브루더호프 통신] 미국의 주목받는 보수 기독교인, 《베네딕트 옵션》 저자
[327호] 2018년 02월 01일 (목) 14:10:10 피터 맘슨 goscon@goscon.co.kr
   
▲ 사진: 유튜브 화면 갈무리

현대 사회가 신앙을 향해 점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플라우〉 편집장 피터 맘슨이 이 질문을 품고 〈뉴욕 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 작가 로드 드레허(Rod Dreher)를 찾았다. 미국 루이지애나의 자택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로드는 도널드 트럼프, 종교 자유, 제국주의, 박해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쏟아냈고, 왜 기독교 공동체가 해답인지 강조했다.

― 최근 블로그에 ‘베네딕트 옵션’(Benedict Op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같은 제목의 책이 발간될 예정입니다.(인터뷰는 2016년에 했고, 책은 2017년 3월 나왔다.-편집자) ‘베네딕트 옵션’이 무엇이며,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베네딕트 옵션’이라는 말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가 1981년에 펴낸 《덕의 상실》이라는 책에서 따왔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로마제국의 붕괴 직후에 빗대면서, 극도로 해체된 우리는 다시금 공동체로 사는 법을 가르쳐줄 또 다른 성 베네딕트를 기다리고 있다고 적습니다.
로마가 붕괴된 후 이탈리아 노르치아 지방에서 태어난 베네딕트는 로마로 건너가서 공부했습니다. 그곳에서 도시의 혼란과 타락상을 목격한 그는 혐오감을 느낀 나머지 숲에 들어가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께 물으며 기도했습니다. 베네딕트는 3년 동안 동굴에서 지낸 뒤 돌아와서는 남자들이 함께 사는 공동체를 설립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위한 학교’라고 불렀습니다. 후에 베네딕트 수도회로 불리는 공동체가 탄생한 거지요.

베네딕트는 사람들이 함께 살 때 지켜야 할 헌장인 《규칙서》를 썼습니다. 이 작은 문서와 수사들로 이뤄진 겨자씨만 한 공동체가 결국 서구인들의 삶에 거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른바 ‘암흑시대’를 거치는 동안 기독교를 지탱하는 역할을 한 겁니다. 수도사들은 전도를 위해 야만인 지역으로 들어갔고, 야만인들이 그들을 죽이면 공동체는 다른 형제들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천천히 서양 기독교 문화의 재탄생을 위한 기초를 놓았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요? 매킨타이어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제가 그에게서 배운 것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에게 주류 문화에 맞서고 증거하는 삶을 살, 준비되고 헌신된 이들로 이뤄진 작은 공동체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문화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낱낱이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세대를 거쳐 이어지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극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훨씬 더 의도적이고(intentional), 더욱더 공동체적이어야 합니다.

   
▲ 이탈리아 노르치아 마을. 성 베네딕트의 출생지로 그가 세운 수도 공동체들은 중세 암흑시대에도 기독교 문화를 지켜냈다. (사진: 위키미디어코먼스)


― 그런 삶의 방식은 일종의 도피로, 더 순결하고 성스러운 삶을 찾아서 사회를 등지는 거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와 같은 물러남 속에 일종의 이기심이 있다는 지적이지요.
그런 주장을 들을 때마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러니까 언덕 위로 달려가서 벙커 안에 살면서 종말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거지?” 하고 묻는 건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제 말은 전략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강풍을 만날 때 촛불을 지키려는 것처럼 주류 문화에서 제한적으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촛불을 꺼버릴 테니까요. 오늘날의 문화와 기독교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와 아이들이 진정한 신앙을 이루고자 한다면 일종의 ‘제한적 물러남’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냐고요? 예를 들면 자녀를 진정한 기독교 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텔레비전을 끄는 일 같은 단순한 실천도 포함됩니다. 인기 있는 문화에 너무 쉽사리 문을 열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자라면서 부모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려 한 도덕을 텔레비전이 모조리 파괴하는 걸 목격했습니다. 텔레비전은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하수관 같았습니다. 이제는 스마트폰이 그런 구실을 하지요. 제가 사는 루이지애나의 작은 동네에서도 5학년짜리 남자아이들이 스마트폰으로 아주 노골적인 포르노를 볼 정도니까요. 그런데도 이 아이들의 부모님은 그냥 눈을 감아버립니다.
이 일(제한적 물러남)은 파괴적인 것에서 도망치는 일이 아닙니다. 좋은 것으로 달려가는 일입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이곳 배톤루주에 있는 고전적인 학교에 다닙니다. 선생님들은 학부모들에게 이 점을 보여주려고 해요. “아이들을 주류 문화의 오물통에서 건져내는 부모가 제대로 된 본능을 지녔는지는 몰라도, 그저 아이들을 보호하는 일만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영혼을 세울 진정으로 좋고 아름다우며 진실한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베네딕트 옵션이 이 일을 거뜬히 해낼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대안문화의 좋은 열매를 보여주고, 동시에 복음을 전파하는 겁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일정한 의미에서 복음적이지 않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선교적 믿음을 잃은 탓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직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 않았는데도 세상의 한복판에 자신을 던져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지닌 많은 부모님이 “그래도 우리 아이들은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해요”라며 아이들을 학교에서 빼내지 않는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3-4학년 아이들이 성전환과 양성애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데도 적지 않은 부모들은 지나치게 순진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베네딕트 수사들은 이에 관해 좋은 모범을 세우고 있습니다. 수도사들은 여느 신자들의 공동체보다 훨씬 더 세상과 격리되어 사는데,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우리가 벽을 쌓은 이유는 그렇게 세상과 우리를 분리하는 벽 없이는 우리가 부르심 받은 대로 그리스도를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환대의 원칙이 있습니다. 성 베네딕트는 수도사들에게 모든 낯선 이와 손님을 그리스도에게 하듯 환영하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열린 자세 덕에 세상과 소통을 유지할 수 있고, 자신들이 지닌 좋은 것을 세상과 나눌 수 있습니다.

   
▲ 노르치아 마을에 있는 성 베네딕트 성당. (사진: 위키미디어코먼스)

― <플라우>를 발행하는 브루더호프의 구성원으로서 저는 공동체로 사는 삶이 도피가 아니라 사실은 정반대라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공동체로 산다는 것은 평화와 정의, 하나님 나라의 사랑이 손에 잡히는 삶을 사는 것, 모든 사람에게 열린 삶을 사는 것을 뜻하니까요.
동의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상대에게 삶을 약속하는 것하고 비슷해요. 다른 사람과 감정적으로나 성적으로 관련될 가능성을 차단하는 벽을 쌓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며, 배우자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깊게 하고, 새로운 열매(아이들)를 맺게 됩니다. 베네딕트 옵션을 택할 때는 이런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베네딕트 교황은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변증이 아니라 교회가 만드는 예술과 성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교회의 문화에서 참 아름다운 것들이 나와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영하면 사람들 입에서 절로 “하나님이 그 안에 있다”라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람들은 종교에 관해 이성적인 토론을 들을 인내심조차 없습니다. 논쟁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그것이 신앙을 전파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에는 우리 가슴의 사랑, 그리고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선한 실천과 자비가 제일 중요합니다.

10대였을 때 저는 아주 오만한 불가지론자였는데, 프랑스에 있는 샤르트르 대성당에 들어갔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완전히 압도되었습니다. 그렇게 조화롭고 깊은 중세풍 성당의 아름다움은 제게는 아주 낯선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누가 지은 건물인지는 몰랐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지은 게 분명했습니다. 교회 건물 안을 거닐면서 저는 그 성당을 짓도록 불어넣어진 영감을 얻고 싶어졌습니다.

복음주의의 의미를 좀 더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죄를 고백하는 기도로 이끄는 것도 전도입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사람들을 보면 신앙을 갖는 데는 간접적인 방식이 실제 효과가 있습니다. 그저 친구가 되어 주고, 자신의 신앙을 나누되 강요하지 않고,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가 밝게 빛나는 삶을 사는 겁니다.

제가 이탈리아 노르치아에 성 베네딕트가 세운 수도원을 일주일간 방문했을 때 경험한 것도 바로 그랬습니다. 수도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더라도, 얼굴에서 그들이 누리는 평화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21세기에 가장 효과적인 전도의 형태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을 지키기

― 기독교가 현대 문화의 공격을 받는다고 썼는데요. 그 위협이 어느 정도로 현실적입니까?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종교의 자유가 성적 소수자들을 박해하려는 수단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캐나다 의료계에서는 의사가 낙태나 안락사를 거부하면 면허를 취소하는 방안을 도입하려고 합니다. 작년 미국 텍사스의 포트워스에서는 교육감이 교사들에게 아이들을 ‘보이’나 ‘걸’이 아니라 ‘스칼러’(학자)나 ‘스투던츠’(학생)로 부르도록 의무화하려 했지요. 1990년대 주요 일간지에서 기자 생활을 할 때 저는 언제나 기독교인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 언론계에서 기독교인들을 향한 편견이 무척 심해서 더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겁니다. 전에는 동성애에 관한 제 견해(이성애에 관한 생각과 마찬가지로 저는 성경적 기준을 고수한다고 생각합니다)가 그저 별난 것으로 여겨졌는데, 이제는 그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거고요. 성에 관한 전통적인 믿음을 지닌 이들이 인종차별주의자들과 똑같은 도덕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지는 쪽으로 문화가 서서히 옮겨가고 있습니다.

   
 

― 많은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동성애를 혐오하고 성 영역에 집착하는 기독교가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러한 성의 혁명이 복음과 현대 문화가 충돌하는 지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회학자이자 세속적 유대인이었던 필립 리프는 1960년대에 《The Triumph of the Therapeutic》(의학 요법의 승리)라는 아주 중요한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당시 막 시작되던 성 혁명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성적 개인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기독교 문화의 핵심에 아주 가깝다고 관찰했지요. 리프는 교회가 그런 조류에 반대하지 않기 때문에 쇠락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1세기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으로, 당시 유대인들이 성의 순결에 관해 믿었던 내용을 믿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21세기의 서구인들이 우리가 그때 사람들보다 더 잘 안다고 단정 짓고 모든 것들을 던져버리고 있으니 놀랄 일입니다. 결혼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정의할 수 있고, 우리 몸으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러면서 우리 마음이 예수님을 향해 괜찮다고만 한다면, 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을 죄다 던져버리는 꼴이 되고 맙니다.

― 최근 미국 남침례교회 지도자인 러셀 무어는 “공공영역에서 기독교가 주변화되는 것은 미국에는 나쁜 소식일 수 있지만, 교회에는 좋은 소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동의하시는지요?
기독교의 주변화가 교회의 기독교적 문화를 정화하는 거라면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 그리스도에게 서서히 이끌려오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넘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저 기뻐하면서 “좋아요, 그렇게 하세요”라고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 ‘정화’가 결국 교회를 더 강하고 믿음 있게 만들지 몰라도 말입니다. 기독교가 소외되고 기독교적 증거에 재갈이 물리게 될 때 교회 안의 사람만 상처 입는 것이 아니라 누룩을 잃은 사회 전체도 상처를 입게 됩니다.

제 생각에 교회는 이제 더는 추구하는 이들(seeker)이 아니라 발견하는 이들(finder)에게 친근해져야 합니다. 이는 바로 제자도를 뜻합니다. 그저 일요일에 교회에 출석하거나 신자를 강단 앞으로 불러 결단하고 회개하게 하는 일을 뛰어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다음날의 생활에서 뭘 의미하는 걸까요? 기독교의 습관, 기독교의 생활방식으로 성형된다는 게 뭘 뜻하는 걸까요?

노르치아의 수도사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들은 제게 정례적 일상을 살고, 똑같은 기도와 시편을 반복해서 암송하고, 날마다 성경을 손에 쥐고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를 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일상의 보통 리듬이 기독교 신앙을 우리에게 뼛속 깊이 심어줍니다. 우리가 믿음의 공동체로 생존하길 원한다면 이것을 다시 발견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규율

― 성 베네딕토의 《규칙서》는 선생님이 제안하는 공동의 삶은 ‘규율’과 ‘상호책임’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 두 가지는 꼭 필요합니다. 미국 켄터키 주의 한 개신교 목사님과 그 주제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의 한 부부가 이혼을 진행하면서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고, 결혼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상담하러 오지도 않았다는 거예요. 그 문제는 교회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며 거부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결국 그 부부에게 교회를 떠나라고 요청했습니다. 저는 그런 조치가 아주 급진적인 것 같아 놀랐는데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교회를 떠나라고 요청하는 저희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형제자매잖아요. 하지만 진심으로 공동체를 말한다면 실제 삶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 안에 규율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치료요법 혹은 어떤 일에 관해 그저 좋은 느낌을 받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가 속한 정교회도 이 점에 관해서는 똑같아요. 제가 아는 정교회 신부들은 정기적으로 고해성사에 오지 않거나 책임 있는 태도를 지니지 않으면 아예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거부합니다.

― 이제는 좀처럼 교회에서 들을 수 없는 오래된 말이 있는 데 그건 바로 ‘회개’입니다.
미국인의 삶에서 이런 종류의 교회 권징(discipline)은 좀처럼 익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일원을 권징하지 않는 교회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돌이켜 보면 평신도 친구들이 제게 어떤 일에 해명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했을 때가 깊은 영적 성장을 경험한 때였습니다. “너 이렇게 하면 안 돼. 진심으로 신앙을 생각한다면 변하지 않으면 안 돼,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 회개라는 오래된 단어는 더는 교회에서 들어볼 수 없게 됐습니다. 하지만 베네딕트 옵션은 처음부터 끝까지 회개에 관해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유배 생활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미국인들이 회개할 방법이 있을까요?
아마도 우리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회개해야 할 가장 나쁜 일은 미적지근한 태도일 겁니다. 그저 심리적인 안정을 주는 신앙을 쫓고, 하나님이 미국 중산층의 생활 방식을 보고 미소 지을 거라며 교인들을 안심시키는 그런 태도 말입니다. 이 점을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건 한 번도 제대로 된 영적 양식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보수적 기독교인들도 국가와 민족주의를 숭배한 것, 사실상 공화당을 숭배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저는 어른이 된 뒤로 제가 기독교에 관해 진리라고 믿는 것들이 상당 부분 미국 공화당의 세계관과 거의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제 아이를 갖고 나서야, 보통의 공화당원들이 진리이며 올바른 삶의 태도라고 믿는 것과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삶의 태도라고 믿는 것 사이의 차이에 관해 생각하게 됐으니까요.

우리는 교회의 정치화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 전공 교수 로버트 퍼트넘은 《American Grace》(미국식 은혜)라는 책에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예배와 설교가 가장 정치화된 교회는 진보적인 교회라고 밝혔습니다. 이렇게 교회의 정치화는 보수적 교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진보적 성향을 지닌 이들은 빈곤과 인종주의에 주로 집중하는 데 이는 분명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편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은 낙태와 성적 경향에 초점을 맞추는 데 이 역시 중요합니다. 그런데 저는 미국 기독교계에서 이 두 가지를 제대로 아우르는 이들을 잘 찾아볼 수 없어 답답합니다. 제 친구 하나는 민주당은 정욕의 정당이고, 공화당은 탐욕의 정당이라고 꼬집는데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벗어나야 할 끔찍한 죄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과거를 무시한 일을, 그것도 일부러 무시한 일을 회개해야 합니다. 근대의 시작점이었던 계몽시대에 우리 서구인들은 과거와 단절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과거의 어떤 의무도 우리에게 족쇄를 채우지 못한다. 미래는 우리가 쓴다.” 우리는 개인적 자유를 구속당하는 것이 싫어서 과거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교회 역사를 읽고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복음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면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에 등을 돌려버리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사람들이 모든 일에 우리보다 더 잘 알았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지 않았어요. 황금시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뿌리를 뽑아버리면 결국 우리는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갑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영영 잊어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 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에 관한 기억을 잃어버릴 위험에 빠집니다. 교회 역사에 관한 기억을 우리의 아이들과 그다음 세대를 위해 잘 간직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완전히 근대화에 동화되고 맙니다. 사실 많은 기독교인이 이미 그걸 경험하고 있지요.

― 최근 쓰신 글에서 “우리의 첫 번째 충성은 교회에 있지 미국 제국에 있지 않다. 나는 신실한 기독교 저항을 촉구하며, 또 장려하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그 대목을 읽으면서 저는 마치 다니엘 베리건이나 도로시 데이 같은 진보적 급진주의자들이 미국 기독교를 비판하며 했던 말을 듣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정치적 신학적 보수주의가 진리를 독점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세요. 저는 보수적 그리스도인이에요. 우리는 너무 쉽게 공화당이 기도를 하면 그걸 교회라고 하고, 미국을 새 이스라엘로 잘못 생각해 왔어요.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저는 이 나라를 사랑하고 이 나라는 제게 은총입니다. 하지만 새 예루살렘은 아니에요. 성 어거스틴의 말대로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바빌론의 평화, 다시 말해 포로된 자의 평화가 될 겁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애국자가 되지 말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애국주의를 민족주의와 혼동하지 말아요. 그리고 언제나 우리의 첫째 충성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임을 잊지 마세요.”

저는 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지던 9·11 테러 때 뉴욕 맨해튼에서 〈뉴욕 포스트〉의 칼럼니스트로 일하고 있었어요. 그때 저는 이라크 전쟁을 큰 목소리로 옹호하게 됐지요. 저는 스스로를 아주 사려 깊고, 똑똑하고, 용감하다고 철썩같이 믿었는데 돌아보면 그저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정부에 이용당하도록 저 자신을 내어주었던 겁니다. 교회로서 우리는 정부가 하는 일에 더욱더 의문을 품어야 합니다.

―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지금, 앞으로 그리스도인들의 공적 증언이 어떤 영향을 받게 될까요? 이와 관련하여 베네딕트 옵션에는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할까요?
저는 트럼프 지지자도 클린턴 지지자도 아니었고, 누가 대통령이 되든 ‘충성스러운 반대’(loyal opposition)를 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트럼프의 당선으로 베네딕트 옵션의 어떤 점이 바뀌어야 하느냐고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저는 트럼프의 당선이 우리에게 준비할 시간을 좀 더 주었다고 봅니다. 만약 트럼프가 대법원에 종교의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는 판사들을 임명하면 우리에게는 준비할 시간이 더 생기게 되겠지요. 그런데 공화당 대통령, 그것도 도널드 트럼프처럼 비기독교적인 인물이 대통령이 된 것은 수 세기 동안 진행되어온 세속화의 문화적 과정을 결박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건 참혹한 일이에요! 저는 교회의 위태로운 처지를 감사히 여기던 그리스도인들이 미국의 후기 기독교 시대에 와서, 이제 위험이 지났으니 안심해도 좋다고 생각할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건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 될 겁니다. 진정한 기독교를 위협하는 건 민주당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진짜 적은 근대화입니다. 우리가 정치에 정말로 바라야 할 일은, 교회가 회심과 문화 형성의 일을 할 수 있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교회를 위해 특정한 문제를 해결할지 모르겠지만, 동시에 새로운 문제를 만들 게 분명합니다. 저는 그래서 다시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계략에 헛된 희망을 품지 말고 준비하십시오.”

박해는 일상이다

― 지난 10년 사이 자신의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한 기독교인들의 수는 16세기 이래로 가장 많았을 겁니다.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기독교의 형제자매를 향한 우리의 책임은 무엇인가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해외의 박해받는 교회와 함께 일하는 어떤 목사님에게 제가 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우리 미국인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교회들이 받는 박해는 초대교회 시대에는 일상이었어요. 오히려 지금 서구에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상대적인 평화와 자유가 더 드문 일이었지요.” 박해는 일상입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이 나라의 상황이 악화될 때 복음대로 살지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우리는 박해 받는 교회를 최선을 다해 지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뿐 아니라 그들이 보여주는 용기의 모범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게 될 일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 성 베네딕트 동상 뒤로 보이는 지진 피해 흔적. (사진: pixabay.com)

― 미래가 암울해 보이는 이때 어디에서 희망을 보십니까? 복음의 기쁨을 잃지 않으려면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까요?
제 책에서 저는 이탈리아의 산 베네데토 델 트론토에 있는 가톨릭 공동체에 관해 썼습니다. 티피로스키라는 공동체로 ‘보통의 관점’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이들은 보통 교회를 다니면서도 공동의 식사와 봉사 프로젝트, 성경공부, 공동기도, 그리고 미사를 위해 수시로 모입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 저는 이 공동체에서 큰 기쁨을 봤습니다. 그건 자기만족의 기쁨이 아니라 창조적인 기쁨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두 명의 젊은이를 만났는데 전에 경범죄로 감옥에 갔다가 그 공동체에 와서 재활 과정을 거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다니는 학교를 방문했을 때 그들은 확신의 기운이 충만했습니다. 겁을 먹거나 세상을 피하는 태도가 아니었어요.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기쁨으로 사는 거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그것이 공상이나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지요. 살아있는 사람이 바로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티피로스키 공동체를 이끄는 마르코 세르마리니에게 제가 “걱정되지 않아요?”라고 물으니까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그럼요. 밤에 누우면 우리 아이들과 공동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을 해요. 그러면 번뜩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 주님은 당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오셨잖아. 순종 말이 아니라 당나귀를 타시고.” 당나귀처럼 단순해져서 매일 일상의 일들을 묵묵히 해 나감으로써 우리 삶을 성화할 때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난가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끔찍한 지진이 노르치아의 성 베네딕트 성당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더는 살 수 없는 곳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전에 일어난 두 개의 작은 지진 탓에 다행히 수도사들은 이미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친 천막으로 옮긴 터였습니다. 먼저 일어난 떨림의 경고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성당과 마을의 모든 교회를 파괴한 큰 지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물론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지만, 지금 그들은 재건의 현장을 지키고 노르치아의 사람들 안에 변함없이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게 될 겁니다. 수도사들은 일어난 모든 일들의 의미를 압니다. 저도 그렇고요.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성령이 교회에 하는 말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번역 - 원마루

피터 맘슨
계간 〈쟁기〉(Plough)의 편집장이며 《꿈꾸는 인생》의 저자이다. 아내 그리고 세 아이와 함께 미국 뉴욕 주 북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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