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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333호 올곧게 읽는 성경] 초대교회의 급진적 포용주의와 성소수자
[333호] 2018년 07월 30일 (월) 11:20:11 박경미 goscon@goscon.co.kr

1. 
나는 사실 성소수자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 나름으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사실상 그것이 한 인간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일이며, 때로는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폭력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서울시 성소수자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해서, 그리고 퀴어 축제 때마다 벌이는 일부 개신교인들의 행태를 보면서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행동으로 인해 상처받고 또 한번 좌절감을 갖게 되는 사람들에게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성서를 공부하고 신학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이 문제에 무관심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내가 젊은 신학도로 한창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은 군사독재 시절이었고, 광주민주화운동은 시대의 심장을 관통했다. 정치적 억압과 물리적 폭력이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해졌던 그 시절, 특별히 운동권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명백한 불의 앞에서 자신이 느끼는 도덕적 분노를 정치적 저항 의식으로 키워갈 수 있었다. 누구는 잡혀 들어가고 누구는 고문으로 정신 줄을 놓았다는 이야기는 그저 풍문이 아니라 한 다리만 건너면 알 수 있는 주변 인물들이 실제로 겪는 일이었다. 우리 세대는 전태일에게서 이타적 삶의 고결함을 배웠고, 그것은 광주에 대한 도덕적 부채 의식으로 이어졌다.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은 이러한 도덕 감정을 신학적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를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군부 정권과 민주 진영이라는 양대 진영으로 사회가 나뉜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정의감을 배워가다 보니 도처에 복잡하게 그물망처럼 얽힌 다양한 문제들을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데는 둔했다. 심지어 20대 때 나는 동성애 문제나 생태 문제는 제1세계 여유로운 사람들의 한가한 문제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간단히 말해 나는 성소수자 문제를 민주주의와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로 자각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그것이 신앙과 신학의 문제임을 깨닫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했고, 성소수자 인권이 사회문제가 된 후에야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예전에 별다른 마음의 흔들림 없이 대했던 일들, 가령 이화여대 성소수자 동아리 ‘변태소녀 하늘을 날다’의 (대)자보를 기독교인 학생들이 훼손해서 이에 항의하는 자보를 학생관에서 읽으면서 기막혀 했던 기억, 내가 가르치던 교양과목을 수강하던 학생이 자신의 성적 지향 문제로 내게 찾아와 어렵게 말문을 열던 기억 등이 떠올랐다. 동성애자 차별에 반대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했겠지만, 당시에는 그들이 당하는 괴로움에 진심으로 마음 아파할 줄 몰랐고, 그들에 대한 일상화된 차별에 분노하지도 않았다. 가슴으로가 아니라 머리로만 그들을 대했던 것이 미안하고 부끄럽다.

이제 인간에 대해 좀 더 솔직해지고 사물을 구체적으로 보게 되면서 한 인간의 삶에서 성적 층위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성적인 문제가 단순히 분리된 부차적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존재 전체와 결부된 문제임을 깨닫게 되었다. 성소수자 문제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 즉 민주주의의 근본과 연결된 정의의 문제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신학이, 성서가 한 인간이 그 자신인 것을 부정하는 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할 의무가 신학자인 내게 있다고 느꼈다.

2. 
성소수자에 대한 일상적인 언어폭력과 제도적 차별은 그 자체로서 정치적 폭력이며, 그들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일 수 있다. 따라서 종교의 이름으로 이러한 차별과 폭력이 자행될 때 그것은 누군가를 죽음에까지 이르는 절망에 몰아넣을 수 있다. 기독교인 동성애자 육우당의 죽음은 이 점을 아프게 보여준다.(‘육우당’(六友堂)은 녹차와 파운데이션, 술, 담배, 묵주, 수면제를 여섯 친구로 여긴다 해서 스스로 지은 필명이라고 한다.)

가톨릭 신자로 동성애자였던 육우당은 2003년 자신이 활동하던 동성애자인권연대 사무실에서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차별과 따돌림을 당하던 그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열정적으로 동성애자 인권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는 여러 편의 시조와 가사를 쓰면서 시조 작가가 되기를 꿈꾸었고, 연극, 성악 등 다방면에 재주가 있었던 젊은이였다. 2003년 봄 청소년보호위원회가 국가인권위원회 권고에 따라 “청소년보호법 시행령”의 청소년 유해매체물 심의 기준에 ‘동성애’가 포함되어 있던 것을 삭제하려고 하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필두로 개신교계가 적극적인 반대에 나섰다. 한기총은 “국가기관이 청소년들에게 동성애를 권장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 때문에 유황불 심판을 받았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기에 기독교계 언론들까지 가담하여 비난 일색의 기사를 쏟아냈다. 결국 육우당은 “아비규환 같은 세상이 싫다”며 동성애자인권연대 사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유서에 “수많은 성적 소수자를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반성경적이며 반인류적인지” 썼고, 천주교를 사랑한다고 했으며,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받아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또한 그는 “내 한 목숨 죽어서 동성애 사이트가 유해 매체에서 삭제되고 소돔과 고모라 운운하는 가식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준다면 난 그것으로 나 죽은 게 아깝지 않아요”라고 썼다. 그가 죽은 직후 동성애는 음란물 지정에서 해제되었고, 죽은 지 1년 뒤 청소년보호위원회의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심의 기준에서 동성애 조항은 삭제되었다. 그러나 한기총은 그의 죽음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가 아는 한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도 않았다.

   
▲ 내 혼은 꽃비 되어

육우당이 남긴 시들은 2006년 유고집 《내 혼은 꽃비 되어》로 나왔다. 여기 실린 시들은 그가 오해와 차별, 외로움으로 잠 못 이루고 지독히 괴로워했지만, 본질적으로 매우 건강한 내면을 지닌 젊은이였으며, 예민한 영혼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시들은 기독교 복음과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리라고 확신한 반면 현실 교회에 대해서는 절망했다. 그는 “이천 년 전 예수는 만민은 평등하다 말했고/ 고려시대 만적은 왕후장상 종자가 따로 없다 말하여/ 우리는 이점들을 되새기나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네/ 인종차별 학력차별 지역차별 성차별 종교차별/ 별의별 차별이 있다네/ 세상에 가짜평등이 설쳐대나/ 언젠가는 만민평등 천국같은 세상이 오리라” 하고 노래했다.(육우당, ‘만민평등기원가’, 《내 혼은 꽃비 되어》, (동성애자인권연대, 2006))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를 근원적인 평등의 선포라고 이해했고, 그것을 믿었다.

예수는 사랑하라고 가르쳤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자기혐오를 강요하고, 그를 죽음으로 밀어넣을 수 있는가? 예수는 사람들에게 “네 죄가 사함 받았다”고 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죄인으로 낙인찍을 수 있는가? 죄사유권을 독점하고 사람들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데 급급했던 예루살렘 성전체제에 맞서, 예수는 ‘죄와 벌’의 질긴 고리를 끊어버렸다. 예루살렘 성전체제가 똬리 틀고 있던 내적 토대를 무너뜨린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생명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포용한다. 오늘 있다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하신다. 예수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인상 깊게 설파했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 사람 자신인 것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부정할 수 있는가? 육우당의 죽음은 이러한 근본적인 신학적 질문을 제기한다.

3.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는 이성애자에 비해 말 그대로 소수일 뿐 오랜 역사 속에서 늘 존재해왔다. 그뿐 아니라 오늘날 생물학자들은 인간만이 아니라 1,500여 종에 이르는 동물들에게서 동성애가 나타남을 입증해주었다. 코끼리, 기린, 펭귄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동성애 혐오는 인간에게서만 유일하게 나타난다. 미국 심리학회는 이미 1973년 정신병 목록에서 동성애를 삭제했고, 1987년에는 DSM(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목록에서 동성애를 완전히 제거했다.(김지학, 《인권옹호자 예수: 성경과 성소수자》, (생각비행, 2018), 116-117쪽.) 또한 세계보건기구도 1992년 ICD(국제질병사인분류) 목록에서 동성애를 제거했다. 동성애는 정신병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졌으며, 동성애자를 이성애자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런데도 많은 기독교인들, 특히 개신교인들은 이러한 과학적 사실에 거슬러서 동성애는 죄이며, 고쳐야 할 질병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은 ‘2018년 한국사회 주요 현안에 대한 개신교인의 인식’을 조사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동성애가 죄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비개신교인의 응답률이 18.5%인데 비해 개신교인은 53.5%에 달했다. 또한 “동성애가 질병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개신교인과 비개신교인 간 차이를 보였다. 개신교인 45.2%, 비개신교인 23.5%가 동성애를 질병으로 인식했다. 또한 “동성애가 에이즈와 같은 질병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개신교인 55.1%, 비개신교인 35%가 “그렇다”고 응답했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2018 주요 사회 현안에 대한 개신교인 인식조사 결과〉, (2018. 4. 9 발표.)) 이 연구에 따르면 개신교인이면서 나이가 많을수록 동성애가 죄이고 질병이며 에이즈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젊을수록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그나마 희망적이다.

동성애 반대 행위는 명백한 혐오 행위임에도 어째서 많은 개신교인들이 그런 태도를 보일까? 그들에게는 그 어떤 과학적 사실로도 설득할 수 없는 그들만의 ‘진리’가 있는가? 소위 ‘기둥 같은’ 개신교 목사들은 우리 사회의 수많은 주요 현안들에 대해 무관심할 뿐 아니라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를 윤리적 아노미를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삼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어째서 유독 동성애 문제만은 그토록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까? 조잡하게 추측을 하자면, 아직 우리 사회에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이 만연해 있으니 거기 편승해서 종교적으로 동성애를 혐오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개신교 집단의 도덕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정죄한다고 해서 내가 의로워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추측일 수 있고, 실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개신교인들의 진심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들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동성애는 죄라는 성서 구절들, 그리고 거기 근거한 목회자들의 반복적인 세뇌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크게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동성애를 정죄하는 데 자주 이용되는 고작 몇 개의 성서 본문보다는 성서 전체의 메시지와 그리스도의 복음의 근본적인 의미에 근거해서 성소수자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둘째, 성서는 과거 이스라엘과 교회가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만났던 경험을 기술한 책이고, 이 때문에 성서는 인간적 경험과 주관, 편견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성서도 틀릴 수 있다. 성서에는 온갖 차별, 즉 인종차별과 성차별, 계급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구절들이 다수 있고, 실제로 역사 속에서 그러한 구절들은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어왔다. 성서를 정말로 복음으로, 인간을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으려면, 성서 본문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성서 본문이 탄생한 시대적 배경과 그 한계를 고려하고, 그리스도 복음의 급진적 포용주의, ‘사랑’에 입각해서 개별 본문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

4. 
예수가 촌락들을 중심으로 떠돌아다니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했던 떠돌이 설교가요, 귀신축출자, 치병가였다면, 바울은 헬레니즘적 도시들을 중심으로 이제 막 태어난 공동체들을 그리스도의 소식에 기초해서 키우고 가꾸어야 할 책임을 지닌 사람이었다. 바울은 예수의 해방 선언인 복음의 기본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달라진 상황 속에서 그 의미를 해석하고 실천하려 애썼다. 그래서 예수의 급진적인 해방의 소식은 바울의 선포 곳곳에서 살아 숨쉰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바로 그러한 구절들 중 하나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모두 하나임을 선포한다. 이것은 인종과 계급, 성별을 넘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인간이 하나임을 역설하는 힘찬 해방의 선언이자 급진적 포용주의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천명하는 대로 교회는 역사적으로 그 구성원의 범위를 계속해서 확대해왔다. 유대교 언저리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될 무렵 일차적인 포용 대상은 이방인이었고, 바울은 그의 전 선교활동에 걸쳐 이방인이 조건 없이 동등한 공동체 성원이 되게 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와 갈등을 일으키고 맞서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이후 교회는 이방인만이 아니라 노예와 원주민, 여성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교회의 동등한 구성원의 범위를 확대해왔다.

초기 기독교 운동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로마 사회에서 가정 교회(오늘날의 가정과 달리 당시 가정은 혈연 가족뿐 아니라 노예까지 포함했고, 따라서 계층적으로 다양했다. ‘가정’을 나
타내는 family라는 말 역시 famulus, 즉 ‘가내노예’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는 온갖 계층의 다양한 사회적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회 단체였다. 로마 헬레니즘 사회에서는 비슷한 사회적 신분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이 상례였고, 노예나 여성, 하층민들이 가입할 수 있는 공적 단체라고는 거의 없었다. 오직 교회 공동체만이 원칙적으로 모든 신분의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단체였다. 따라서 여기에는 많은 하층민들, 특히 여성들이 참여했고 그들의 활동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초대교회의 이러한 개방성과 급진적 포용주의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다. 학자들의 결론에 의하면 갈라디아서 3장 26-28절은 바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세례고백문을 인용한 것이다. 당시 초대교회에 입교했던 사람들은 세례 때 이와 같은 고백을 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결단을 나타냈다. 28절은 구체적 실천을 담보로 하는 고백문으로서 현실에서의 객관적인 변화, 지금까지의 사회적 역할들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폭발력을 지닌다.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는 모두 하나다”라는 말은 예수운동의 인종적, 사회적, 성적 포용성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하나됨을 선언한다. 이 고백문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등’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을 말한다. 여기서 사용된 그리스어 heis, 즉 ‘하나’는 포용과 통일성을 뜻한다. 갈라디아서 3장 26-29절을 주석하면서 마틴은 이 본문이 “예전에 서로를 서로에게서 분리했던 구별이 사라지고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부터 모두 하나”라는 포괄적인 포용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했다.(J. L. Martyn(1997), 《Galatians》, (Anchor Bible 33A: New York: Doubleday), 379쪽) 차별 없는 포용이 핵심이다. 인종적, 성적, 계급적 구분은, 제거되지는 못하더라도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관념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 즉 노예와 주인, 남성과 여성의 관계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백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새로운 자세를 가지고 실제로 변화된 행동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가부장적 계급사회 안에서 명백히 하위 집단에 속했던 사람들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형제요 자매라고 불리면서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신앙고백하게 된 것이다. 이를 사회 내에서 실질적인 차별 철폐까지 요구하는 사회적 평등 선언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교회는 이러한 급진적 포용주의를 통해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안에 전혀 다른 인간관계, 전적으로 새로운 사회의 비전이 누룩처럼 번져가게 했을 것이다. 일단 누구나 차별 없이 받아들이고, 한 공동체 안에서 이질적 사회집단이 함께 부대끼면서 제기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차츰 사회적 평등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가능해진 은혜와 용서, 자비에 모두 동등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예수 사후 초기 교회에서의 평등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피오렌자를 비롯한 여성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가부장적 계급사회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대안적 사회의 비전을 제시해주었을 것이다.(엘리자베스 S. 피오렌자, 김애영 옮김, 《크리스찬 기원의 여성신학적 재건》, (태초, 1993), 255-416쪽 참조.) 당시 노예들이나 여성들은 이런 자유와 해방의 선포를 공연한 빈말로 들은 것이 아니라 진실로, 현실적으로 자신들의 삶에 해방을 가져다주는 말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들은 결코 이 말을 피상적으로 이해하지 않았고, 노예제도가 보편화된 남녀차별 사회 속에서 이 말을 충격적으로, 있는 그대로 이해했을 것이다. 사실 예수의 삶과 초기 가정교회에서 실현된 평등한 제자직에 관한 기독교의 비전은 많은 노예들과 여성들을 교회로 이끌었다. 그들은 이것을 막연한 공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를 찾게 되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초대교회의 급진적 포용주의는 공동체 밖에서도 파장을 일으켰고, 이것이 기독교가 당시 지중해 연안에서 백가쟁명하고 있던 다양한 종교들 가운데서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주요 요인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처럼 바울 공동체들의 기본바탕을 이루었던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선언은 여성들과 노예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기쁜 해방의 선언이었지만, 부유한 노예 소유자들이나 남자들에게는 오늘날 개신교인들이 동성애자를 받아들이기 어렵듯이 용납하기 어려운 말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열등한 존재로 여겨온 노예나 여성들을 형제요, 자매로 인정해야 했다. 오늘날 동성애자를 있는 그대로 교회 안에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듯이, 그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공동체 안에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공동체 내의 다양한 분쟁과 갈등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또한 바울 이후 바울 계열의 저자들이 쓴 에베소서, 골로새서와 목회서신의 가정 훈령에서는 다시 신분적 성적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퇴행하고 있는데, 이 또한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 내포하는 혁명적 변화가 교회 내에서 야기한 혼란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구절들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세례고백문이 가져온 실질적인 파급력을 입증하는 역설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초대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는 누구나 인종과 계급, 성별에 따른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역할들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그들의 제자됨과 섬기는 능력에 따라 구별되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이 되었다는 바울의 선포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의 심리적 태도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존재의 변화, 새로운 사회적 관계로의 변화를 나타낸다. 새로운 공동체로의 가입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인 세례는 바로 그러한 변화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 관계로의 변화에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관계 역시 포함되어야 한다. 초대교회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있는 그대로 공동체의 동등한 성원으로 받아들였듯이, 오늘 우리는 성소수자들에게 이성애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교회의 동등한 형제요 자매로 받아들여야 한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세례받은 개인에 대한 진술일 뿐 아니라 공동체의 사회적 태도에 대한 자기정의이기도 하다. 이 구절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는 그 어떤 지배구조와 차별도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세 가지 범주로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는 인종, 계층, 성별의 구분과 무관하게 모두가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오늘의 상황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 조항이 추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하나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 당시 사회에서 혼란과 갈등을 초래했듯이, 이 새로운 조항 역시 오늘 우리에게도 혼란과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초대 교회가 혼란과 갈등 속에서도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선언을 지키고 실천해왔듯이, 오늘 우리도 동성애자를 비롯하여 성소수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의 온전한 지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가 오랜 역사적 굴곡에도 불구하고 지켜온 복음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성소수자는 이방인 고넬리오의 선교에 앞서 미리 베드로의 환상 속에 나타난, 질색하는 베드로를 향해 하나님이 먹으라고 했던 온갖 더러운 벌레들 중 마지막 남은 벌레인지도 모른다.(행 10장) 이때 거부하는 베드로를 향해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행 10:15)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성소수자를 우리가 더럽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특정 성적 지향을 죄악시하는 것은 오랜 종교적 문화적 전통에 근거해 있다. 전통과 경험, 관습에 근거한 만큼 쉽게 바뀌지 않는다. 기독교의 경우 특히 성서가 그 근거로 내세워지기 때문에 더욱 완강하다. 그러나 성서의 몇몇 구절에 근거해서 성소수자들을 정죄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존립근거인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에 근거해서 이제 기독교인들은 오랜 편견을 떨치고 살아 있는 인간, 상처받고 아파하는 이웃인 성소수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박경미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한 뒤 동 대학원에서 성서신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다. 지은 책으로 《시대의 끝에서》 《행복하여라 하느님나라의 사람들》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 등이 있고, 《요한복음 요한서신》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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