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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비를 맞으며’ 나누는 ‘무지개 성만찬’
[322호 커버스토리]
[322호] 2017년 08월 25일 (금) 11:46:27 임보라 섬돌향린교회 담임목사 goscon@goscon.co.kr

활짝 열려 있는 ‘성만찬’, 주님의 초대
성만찬 예식은 ‘개방적인 초대’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만찬 예식에서 ‘주님의 초대’의 기선성입니다. 그분의 초청이 희망의 축제에서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 희망의 축제는 열려진 축제로서, 이 예식의 율법성을 깨고 복음적인 것으로 비중을 바꿔 가야 함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성만찬은 십자가 위에 펼쳐진 예수 그리스도의 팔처럼, 개방적인 초대의 근거 위에서 베풀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계의 화해를 위하여 죽었듯이, 성만찬에서 세계는 화해 가운데로 초대되는 것입니다. 교파의 한계를 초월해야 하는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한계마저도 초월할 수 있는, 세계를 향한 개방된 예식으로 이해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박근원, 〈21세기 한국교회의 예배 갱신 과제〉(기독교사회연구원) 중에서

대다수 한국교회는 주일예배 중 성찬을 특정한 절기, 그러니까 연중 3-4회 정도의 제한된 횟수로 행하고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설교 중심의 예배에 치중하다보니, 그만 ‘성만찬’이라는 중요한 예전을 뒷전으로 돌린 탓이다. 필자가 담임목회를 하고 있는 섬돌향린교회를 비롯하여 공동체성을 중요시하는 작은 공동체에서는 매주일 성만찬을 행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말’ 중심의 설교가 예배의 백미가 아니라는 것을 목사도, 교인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두에 인용한 박근원 교수의 글이 강조한 바와 같이 성만찬은 ‘주님의 초대’로부터 출발한다. 주님의 초대는 말 그대로 ‘개방적’일 뿐 아니라 ‘화해’의 현장으로 이끄는 통로이다. 그러나 성만찬을 행한다고 하여 ‘개방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의 성만찬은 모두를 초대하기보다는 세례 유무와 그에 따른 나이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원고를 쓰고 있는 현재에도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측에서 작년에 무산된, 교회에서 동성애자를 추방할 수 있는 헌법 개정안을 다시 헌의한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드높다. 예장합동 헌법 제3조 목사의 직무와 관련하여 ‘본 교단 교리에 위반된 동성애자의 세례와 주례와 또 다른 직무를 거절할 수 있고 목사의 권위로 교회에서 추방할 수 있다(이단에 속한자도 이에 준한다)’라는 규정을 삽입하겠다는 입장이다. 세례를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은 성만찬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폐쇄적이고도 차별적인 교회가 되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무지개 예수’가 서울 한복판에서 ‘무지개 성만찬’을
올해로 18회째를 맞이하는 짧지 않은 역사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퀴어문화축제는 해마다 최다 참가자 수를 갱신하고 있다. 제1회 때는 50명이 참석했다고 하는데 2년 전에는 2~3만 명, 2016년에는 5만 명으로 집계가 되더니 올해는 8만5천 명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서울 시내 중심부에 있는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리는 여타 축제 중에서도 최대 규모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축제는 축제다운 즐거움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2014년에는 축제와 퍼레이드를 방해하기 위해 도로를 점거하고 드러눕는 사람들이 가시화되기 시작하더니 축제 장소를 신청하는데도 밤새고 줄서기를 해야 하거나, 노골적으로 축제를 위한 장소 허가를 취소하라는 항의가 빗발치는 가운데 매해 전쟁하듯 지난한 과정을 거친 끝에 열리고 있다.

한국 기독교계의 가장 뜨거운 쟁점은 몇 해째 ‘성소수자’다. 이른바 반동성애 운동 진영에서는 ‘성소수자’라는 말 대신에 ‘동성애’라는 말로 다양한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을 싸잡아 묶으려 든다. 어디 그뿐인가! 온갖 왜곡된 정보와 가짜뉴스들을 예배, 기도회, 부흥회에서 유포하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통해 퍼다 나르고 있으며 미디어를 통해 확산하기도 한다.

특히 퀴어문화축제 전후로는 마치 이슈를 선점하려는 양 노골적인 방해 공작이 두드러지게 발화되곤 한다. 이런 현상 속에서 적은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연대와 지지를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소수자를 가차 없이 배제하고 그 존재를 지우려는 노골적인 혐오에 맞서, ‘무지개 예수’라는 신앙 고백과 선언을 바탕으로 퀴어문화축제에서 또 하나의 작은 축제를 벌이며 예배하고 성찬을 나누고, 찬양하고 행진하고 있다.

‘무지개 예수’는 2016년 전환치료 근절을 위한 대책 마련과, 성소수자 인권운동가였던 육우당 추모기도회를 계기로 각 교단에 소속되어 있는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마음을 모아 첫 걸음을 시작했다. 전환치료 근절운동은 미디어를 통해 소개된 연희 씨(가명)에 대한 종교적 폭력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사건은 다름 아닌 개신교 목사들이 회복과 치유라는 미명 하에 폭력에 개입한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모인 ‘무지개 예수’는 성소수자를 귀신 들린 자로 취급하거나 이성애자로 전환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폭력을 휘두르는 한 무리의 기독교인들과는 상반된 ‘성찬상’을 차렸다. ‘무지개 예수’는 서울 한복판에서, 그것도 반 동성애가 기독교의 진리인 양 목에 핏대를 세우는 이들이 둘러싸고 있는 광장 한 쪽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아름다운 모두에게 열린 성만찬을 차렸다.

여기에서는 모든 사람 각자가 환영받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환대의 테이블 주변에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환영의 테이블은 하나님의 개선된 창조물들을 위한 다가오는 잔치의 징표요, 그 손님의 명단은 옛 이스라엘에서 희년의 선포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 그런 교회에서 목회는 교회와 사회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개방하려고 노력하는 둥근 테이블(Roundtable) 목회가 될 것이다. 그런 교회는 인종차별, 성차별, 혹은 성적 지향 때문에 역사적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을 포함시키도록 사역한다.
- 레티 M 러셀, 《공정한 환대》(대한기독교서회) 중에서

거리에서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 표징으로서의 ‘성만찬’
개방성은 포용성과도 연결된다. 초대교회 예배 전통을 회복한 예식서로 알려져 있는 리마예식서를 탄생시킨 리마문서에 따르면 성만찬은 “예수께서 지상에서의 생애 동안에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행하셨던 식사들을 항상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서 계속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억(Anamnesis)으로서, 어린양의 잔치(계 19:9)에 대한 예상(Anticipation)으로서 베푸신 것이며, 교회 예배의 중심적인 행위로서 계속해서 거행되고 있다.”

이처럼 성만찬은 ‘죽음’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기억하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예수와 함께 나누는 밥상의 모습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특히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더러 말하기를 ‘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하였다”(눅 14:21)라는 큰 잔치 비유 말씀을 상기해볼 때 성만찬에 초대되어야 할 사람, 교회가 두 팔 벌려 활짝 열어두고 포용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이 사회의 주류가 아닌 비주류, 가장자리로 밀려난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 이 사회에서 가장자리로 밀려난 주변부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또한 거리와 골목에서 과연 성만찬이 가능할까? 모든 것이 예배당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 한국 교계는 이러한 질문 앞에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초대교회의 출발점 역시 “예수와 민중이 만나는 현장”(안병무)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이 현장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단지 조직된 교회로 자신들의 안락한 예배 공간 안에서만 머물러 있다면 이들은 하나님 없는 예배와 우상의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받는 민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러 들판으로 현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 기독교가 현장으로 나와서 민중들이 아픔을 겪는 자리에 함께하여야 합니다.
-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 창립선언문 중에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함께 울기 위해 우리는 우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우는 자들에게 예배당으로 나오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울고 있는 그 자리로 찾아간다는 것은 그 사람을 만나고,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그대로 느끼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로 퀴어문화축제에서 행해진 ‘성만찬’은 주변부로 밀려나거나 늘 위협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행해지는, 우는 자들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의 신앙적 실천이다. 축제에서 울긴 누가 우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퀴어문화축제에 실제 참석해본 사람이라면 광장을 둘러싼 채로 울려 퍼지는 온갖 차별과 혐오의 소리에 울음을 터트리는 이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발신지는 ‘사랑’을 강조하고 실천한다는 기독교가 아닌가. 이렇듯 사랑 없는 실천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많은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예수 사건을 몸으로 드러내는 ‘성만찬’
필자는 퀴어문화축제에서의 성만찬뿐 아니라 해고당한 노동자들, 거리로 내쫓긴 세입자들, 평화롭게 살아가던 마을에 난데없이 들이닥친 전쟁기지로 인해 분노하는 마을주민 등 다양한 우는 자들이 있는 현장에서 성만찬을 나누어왔다. 그 현장에서 찢겨진 가슴들을 싸매면서 새로운 결의를 다지는 성만찬을 통하여, 거리를 헤매며 안아주고 손잡아 줘야 할 수많은 사회적 약자를 찾아다니는 예수의 숨결을 경험하게 된다. 

예배의 정신화로 인해 한국교회 예배를 구성하는 모든 행위는 구술적인 것으로 대체되었고, 그 결과 육체적인 것은 모두 배제되어 버렸다. 이전에 종교적 경험의 중요한 통로였던 육체와 그것과 관련된 경험들이 한국교회 예배에서는 말, 특히 설교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 구성원들은 ‘말만 잘하는 신앙인’으로 사회화 되었고, 그래서 몸으로 세상과 환경을 인지하고 자체의 종교적 에토스를 실천에 옮기는 데 익숙하지 않게 된 것이다.
- 안선희, 《예배 이론·예배 실천》(바이북스) 중에서

성만찬은 몸으로 예수 사건을 재현하는 예배의 다양한 순서 중에서 가장 연극적 요소가 강하게 작동하는 예전(禮典)이다. 포도주와 떡을 “예수의 피요 예수의 몸”이라고 고백하고 떡을 떼면서 떡덩이를 나누어 먹는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떡과 술이 빠지지 않는 잔치 자리를 연상시키면서도 처연한 죽음을 목전에 두고 행한 비장한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 예수의 밥상공동체는 당대를 지배하던 율법을 고의로 어겨가면서 사람 사이의 경계, 즉 죄인과 의인이라고 하는 어설픈 이분법 체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이기도 했다. 하나님 앞에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기에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대며 상종해서는 안 될 사람들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한다는 말인가!

성만찬의 의미는 비록 우리가 불의, 억압, 차별 등이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지만 성만찬 식탁에서 우리는 지위, 나이, 재산 등과 관계없이 모두가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적인 질서를 맛본다는 데 있다. … 우리는 주의 만찬에서 이상적 세계, 곧 하나님 나라를 경험했기 때문에 세상의 문제 상황에 대해 그냥 방관하고만 있을 수는 없게 된다.
- 안선희, 《예배 돋보기》(바이북스) 중에서

안선희 교수의 말대로, 성만찬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 살기로 결단한 그리스도인들은 불의, 억압, 차별이 판치는 세상에서 어떤 실천이 필요한지,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신앙적 결단을 하게 된다. 이렇듯 매번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하는 것이 성만찬이다. 고로 성만찬은 예배의 한 요소로서 ‘예식’에 해당할 뿐 아니라 예수의 삶을 오늘날에도 이어가고자 하는 실천적 고백이요, 억압과 차별을 기반으로 유지되는 기존 사회체제에 대한 저항의 몸짓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성만찬에서 제외해도 된다고 여기는 것은 예수 복음의 본질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교회와 성만찬
열려 있는 성만찬은 교회가 얼마만큼 열려 있는가와 직결된다.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와 함께함을 느끼고 싶고 예수를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성만찬의 의미를 충분히 공감하는 경우에 성만찬을 열어둘 수 있을 것인가? 세례의 유무는 신앙의 깊이를 측정하는 척도일까? 죽음을 앞두고 나눈 성만찬에 이어 부활 후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라고 기록된 요한복음 21장의 ‘아침식사’, 심지어 손수 차려내신 아침상 이야기에 나타난 만찬의 의미는 성만찬과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일까?

주 예수여,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식탁에 참여할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주의 부활을 기뻐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이루려고 하셨던 그 일을 기억하며 나아가게 하소서.
- 섬돌향린교회 ‘성령강림절’ 성찬문 중에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성만찬을 나누면서도 그저 그때 그 사건으로만 기억하기 원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게 된 원인을 캐묻고 그대로 지금 살고자 한다면 대다수 종교지도자들이 자리를 보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늘 어디에선가 고난을 겪는 이들과 함께 나누는 성만찬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득권 계층에는 위협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가 부활하여 손수 상까지 차려 내다니 어깨에 꽤나 힘주는 사람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를 초대하시는 그 음성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에게 남겨 놓은 그 몫을 채우는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된다. 때론 그 자리에서 용역이나 경찰에 의해 성만찬 상이 엎어지고 부서지는 것을 보아야 할 때도 있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조롱을 당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곳은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는 그런 자리이다. 이 시대 다양한 이유로 존재가 거부되고 삭제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대상화가 아닌 ‘함께 비를 맞는’ 사람으로서 성만찬을 차리고 나누는 일에 더 많은 교회들이 동참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한다.

특권을 가진 종교적 제도를 통해서 성직자 계급이 지키고 전승해 주는 믿음의 조항들의 한 체계로서 이해된 그리스도교는 죽어가고 있다.
-하비 콕스, 《종교의 미래》(문예출판사) 중에서


임보라
서울 마포의 섬돌향린교회에서 담임목회를 시작한 지 5년째, 목회의 길을 간다는 게 참 어렵고도 험난한 길일 수밖에 없다며 탄식하곤 한다. 하지만 무지개 세상을 꿈꾸며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5살, 3살, 그리고 7개월 된 네 마리 ‘냥이’ 집사인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하며, 고양이들 옆에 누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바란다고 말을 하면서도 늘 무언가를 기획하고 구상하는 두뇌 활동을 멈추기 어려워한다.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의 운영위원, ‘무지개 예수’ 멤버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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