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최종편집 : 2017.9.22 금 17:10
기사검색
   
> 뉴스 > 커버스토리
       
루터 신학 전문가에게 듣는 종교개혁 이후의 성찬
[322호 커버스토리 인터뷰] 최주훈 중앙루터교회 담임목사 인터뷰
[322호] 2017년 08월 25일 (금) 11:30:53 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
   
▲ 최주훈 목사  ⓒ복음과상황 이범진

종교개혁 직후 성만찬 모습은 어땠을까? 중세 가톨릭의 그것과 구별되어 변화한 성찬의 모습은 어땠을까? 개혁 정신을 물씬 머금고 있는 당시의 성찬을 들여다보면, 오늘 우리의 성찬에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을까?

질문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답을 듣기 위해 최주훈(45) 중앙루터교회 담임목사를 찾았다. 그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신학에 근거한 루터교 소속 목사이자, 학부 때부터 루터 신학을 연구해온 신학자다.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조직신학으로 박사(Ph.D.) 학위를 받았고, 2010년부터 한국루터교회의 상징인 중앙루터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시장통 언어로 소통하라 했던 루터처럼 페이스북에서는 어려운 개념도 쉬운 말로 설명해 많은 이들이 ‘좋아요’ 한다.

인터뷰는 7월 27일 오후 3시 중앙루터교회 담임목사실에서 진행했다. 그날은 마침 같은 장소에서 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복교연)이 주최하는 공동 예배가 예정된 날이었다. 세 시간 뒤 성찬 집례자로 설 그에게 성찬에 대해 물었다.

―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 당시 목회자의 고유권한을 ‘말씀 선포’와 ‘성례 집전’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성례 집전, 더 좁혀서 성찬에 대해서 여쭈려 합니다.
루터는 복음을 순수하게 가르치고 성례전을 올바르게 집행하는 성도의 모임을 교회라고 정의합니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Confessio Augustana, 1530년) 제7항에 나와 있어요. 루터교에서 교회론을 이야기할 때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대목인데요.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성도의 모임’입니다. 성도의 모임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복음을 순수하게 선포하고 성례전을 바르게 집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 선포가 ‘보이지 않는 말씀’이고, 성례전은 ‘보이는 말씀’인 거지요.

― 종교개혁 이전과 비교했을 때, 성례전에 있어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었나요?
당시 가톨릭은 화체설(化體說)을 주장했습니다. 화체설의 핵심은 사제의 축성(consecratio, 祝聖)을 통해서 빵과 포도주가 거룩하게 변한다는 거였어요. 사제들은 빵과 포도주가 축성에 의해 어떻게 그 본질이 변하는지 그 ‘과정’을 상세하게 논했는데, 루터는 그들이 철학적 논리에는 충실한 반면 성서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루터는 예수님의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철학이 가르치는 논리보다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거지요.
1522년에 루터가 재밌는 설교를 한 적이 있어요. 화체설에 의하면 사람보다 쥐들이 더 먼저 구원을 받을 거라고요. 중세 때는 사제의 축성이 미사 전날 진행되기도 했거든요. 토요일에 사제가 혼자 축성을 하고 그것을 성체함에 보관하고 있으면, 교회 안의 쥐들이 그 빵을 갉아먹고 포도주를 찔끔찔끔 먹었어요. 고대로부터 성찬이 갖는 의미는 조금씩 변해왔지만, 성찬은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그것을 먹으면 영생(불멸)한다는 의미가 있었어요. 그래서 축성된 빵을 훔쳐가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사제가 축성한 빵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인식도 있었죠. 물론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은 신자들의 순수한 믿음이겠지요. 루터가 공격하는 것은 그런 순수한 믿음이 아니에요. 그는 성찬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빵과 포도주가 성찬으로 변화되는가의 과정 설명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믿는 ‘수찬자의 믿음’을 강조한 겁니다.

― 화체설이 무엇인지 설명을 더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루터의 성만찬 신학은 사실 꽤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다만 한국에서는 루터의 성만찬론이 가톨릭의 화체설과 같다고 오해하고 있거나, 맥락을 놓친 경우가 많아요. 일반적으로 교회 역사에서 화체(化體)는 빵과 포도주라는 실체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을 의미해요. 화체설에서 ‘화체’는 ‘Transubstantiation’을 번역한 말인데요. ‘변한다’는 의미의 어간 ‘trans’와 ‘substantia’(실체)의 합성어입니다. 이 ‘실체’라는 용어는 다시 ‘sub’(밑에)와 ‘stantia’(서 있다)로 풀어쓸 수 있지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받아들인 13세기 스콜라 학자들은 눈으로 보이는 사물의 모습과 그 모습 ‘밑에 서 있는’ 실체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고 봤어요. 그래서 눈으로 보기에는 떡이지만, 실체는 떡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으로 변했다고 본 거죠. 어떻게 변했을까요? 사제가 서품을 받을 때 그런 ‘거룩한 힘’(히에라르키아, hiearchia)을 주입(infusa) 받기에 가능해진다는 겁니다. 사제가 축성하면, 어느 순간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빵은 예수의 몸으로 ‘화체’된다는 이론이죠. 간단하게 말했지만, 인터뷰를 통해서는 설명의 한계가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곧 출간될 《루터의 재발견》(복있는사람)을 통해 접할 수 있어요. 루터의 성만찬 신학을 길게 다루었는데 전체 내용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 "루터교는 원칙적으로 매주 성찬을 해요. 가능하면 더 많이 하라고 권하고요." ⓒ복음과상황 이범진

― 루터가 화체설을 비판하며 수찬자의 믿음을 강조했다는 것은 그만큼 사제들의 권위를 파격적으로 끌어내리려 했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루터는 성찬 때 그리스도의 현재적 임재에는 동의하지만, 스콜라 신학자들과 달리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따르는 스콜라적 해석이 성서의 말씀과도 일치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루터는 성찬의 효력 발생 시점을 문제 삼는데, 사제가 축성하는 시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약속된 말씀을 믿음으로 성찬을 받는 때라고 말한 거죠. 완전히 다릅니다. 루터는 말씀에 대한 ‘신앙’을 결정적 요소로 보았어요. 이것은 늘 일관됩니다. 수찬자는 제정의 말씀(sola sciptua)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만(sola fide)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현존하는 하나님의 은총(sola gratia)을 경험합니다. 루터파 신학자들은 이를 실재설(Realpräsenz, 實在說)이라 합니다.

― 수찬자 ‘개인’에게도 성찬은 더 중요해졌겠어요.
예배의 구조가 말씀과 성찬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때, 말씀 선포가 ‘1대 다수’의 형태로 전해지는 것과 달리 성찬은 ‘일대일’로 이뤄지지요.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게 강조가 됩니다. 목사가 성찬을 줄 때 “이것은 ‘당신을 위한’ 주님의 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라틴어로는 “크리스투스 프로 메”(Christus pro me, Christ for me)라고 합니다. 떡과 잔을 주면서 ‘이것은 당신을 위한 것!’이라는 표현은 종교개혁 이전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말씀 선포가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라면, 성찬은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주는 하나님의 은사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성찬신학에서 중요한 포인트 중 한 가지는 ‘신앙의 강화’라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세례를 통한 일회적 사건이라면, 성찬은 그 일회적인 사건을 매 순간 기억하게 하면서 믿음을 다시 회복시키고 강화하는 것이라고 루터는 강조하지요.

— 그런 믿음이 강화될수록 교회 공동체에 끼친 영향이 컸을 듯합니다.
가톨릭은 사도적 계승권이라는 말을 자주 써요. 베드로부터 이어지는 천국 열쇠의 능력이죠. 계속해서 안수를 통해 넘겨준 능력입니다. 그냥 넘겨준 게 아니라 ‘주입된 은사’(gratia infusa)라 표현해요. 가톨릭에서는 주교의 안수권을 통해 사제를 세운다고 합니다. 주교가 안수하면 신적 능력이 사제에게 주입이 된다는 것이죠. 일단 그렇게 되면 사제에게서 그 은사를 빼앗아 갈 수 없어요. 일반인과는 달라지는 겁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 루터가 말하는 계승권은 말씀을 직무로 받은 것입니다. 본질적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요. 하나님 앞에 동등한 죄인이지요. 죄인 중에는 레벨이 없어요. 의롭다고 칭의되면? 의인도 레벨 차이가 없으니까 모두 다 주님 앞에서 똑같아요. 모두 다 사제, 제사장으로 서 있습니다. 이것이 ‘만인사제직’입니다. 모두 다 사제이지만, 각각의 직무가 구별되어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직무의 구별은 어디에서 올까요? 하늘에서 온 게 아니고 교회 공동체가 위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 공동체가 목회자에게 성찬 집례와 말씀 선포 권한을 위임한 거죠. 목회자가 그 직무를 태만하게 하거나 게을리 하면 교회 공동체는 목사를 해임할 수 있어요. 루터의 교회론 가운데 가장 파격적인 대목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직자는 교회 공동체가 세울 수도 있고, 해임할 수도 있어요. 그 당시 사제는 절대 그렇게 못 하지요. 루터가 그토록 교회 공동체에 강력한 권위를 부여한 이유는, 교회가 바로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 앞서 ‘교회는 건물이 아닌 성도의 모임’이라 말씀하셨는데요. 성찬을 중요시하면서 교회의 모양이나 형태도 변했을 것 같습니다.

   
▲ 루터의 재발견 / 복있는사람 펴냄. 2016년 청어람 가을 정기강좌 '루터의 재발견' 강의안(총 5강)을 중심으로 엮었다.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는 거의 모든 경우 단독 건물이어야 했고, 그 건물도 위에서 보면 십자가형이어야 했고, 내부 구조도 형식에 맞춰야 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초기 구상부터 함께해서 세워졌다는 개신교 최초의 교회인 토르가우 성채교회에 가보면 그런 형식들이 다 파기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하르텐펠스(Hartenfels) 성의 건물 안에 들어가 있어요. 성안에 부속 건물로 들어가 있기에 교회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문이 다 똑같이 생겼어요. 성화나 조각도 없고요.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파이프 오르간과 성찬대와 설교대, 이게 전부 다입니다. 지난 4월 CBS 다큐멘터리 촬영 때 저도 처음 가봤는데요. 토르가우 교회 사진과 자세한 이야기를 〈뉴스앤조이〉에 싣기도 했습니다(“개신교 최초의 교회, 토르가우 성채교회”-2017/5/19). 결론적으로 루터는 교회 건물이 신자들이 모여서 말씀을 듣고, 성찬을 할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교회는 ‘말씀과 성례전이 있는 신자의 모임’이니까요.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토르가우 교회의 형태를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1544년 10월 5일에 루터가 여기서 입당예배 설교를 하게 되는데, 이런 구절이 나와요. “특별한 교회 짓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모이지 못하거나 싫다면 우물가에서나 다른 곳에서 설교해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지 교회 건물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말씀과 성찬을 나눌 수 있는 장소라면 어디라도 좋고, 그 목적을 위해서 교회 건물이 필요한 것이라고 본 것이죠. 이게 개신교 교회 건축의 모델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 건축을 보면 이런 역사의 유산을 모두 간과하고 있는 것 같아 속이 상해요. 

― 교회 공동체를 위해 전통을 유연하게 바꿀 수 있게 된 것도 큰 변화였겠어요.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 가운데 한 가지 꼽자면 ‘아디아포라’(adiapora) 신학입니다. 무엇이든 신앙에 도움이 된다면 받아들일 수 있고, 언제든 수정할 수 있다는 게 핵심이죠. 보통 교회를 구분할 때 전례교회와 비전례교회로 구분하잖아요. 전례교회는 의례화된 전통을 중시하고 비전례교회는 보통 개혁교회라고 하죠. 루터교회는 양쪽에 다 들어가는 유일한 교회입니다. 전통 예배 의식을 따르지만 그것은 교회 공동체가 함께 합의한 것일 뿐이죠. 언제든지 공동체의 요청에 의해 파기할 수도 있고 첨가할 수도 있고 수정할 수 있습니다. 루터교회는 그런 유연성이 있어요. 저도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슬리퍼에 반바지 입고 설교할 수도 있으니 놀라지 말라고요. 루터교회니까 가능한 겁니다. ‘주일 성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요일은 무조건 참석? 루터는 안식일 개념 자체가 유대인의 개념이라고 여겼어요. 꼭 지켜야 할 것은 아니죠. 다만, 어느 요일이건 함께 모여 말씀을 듣고 성찬을 받는 시간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거죠. 이 내용은 루터가 《대교리문답》(복있는사람) 십계명 해설에서 자세히 풀어놓았어요. 그걸 참조해도 좋을 것 같아요.

― 초대교회의 성찬 때부터 이어지는 전통 중 특별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을까요?
우리 교회 예배 순서에 보면 인사(salutatio, 살루타티오)가 두 번 나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사회) “주님의 종과도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회중) 성찬 의식이 시작되면 이 인사를 한 번 더 합니다. 최초의 1세기 예배 때 박해받은 경험이 반영되었기 때문인데요.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았던 이유 중 하나가 성찬이었습니다. 카타콤베에 숨어들어 성찬을 하는데,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해야 하잖아요. “이것은 나의 몸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스파이들이나 기독교를 아니 꼽게 보던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은 아이들을 죽여 인신 제사를 지낸다”는 말을 만들어낸 거죠. 아이들을 도륙하여 그 살과 피를 나누는 종교라는 소문이 났어요. 그래서 예배의 형태가 바뀝니다. 일대 다수의 설교 형태로 모두를 초청하는 예배를 한 번 드리고, 다 돌려보냅니다. 그 후에 입교한 사람들, 세례받은 사람들만 따로 모여 성찬식을 하게 된 것이죠. 지금도 같은 인사를 두 번 하는 이유입니다. (정확히는 세 번인데, 세 번째 인사는 평화의 인사로서 성격이 좀 다릅니다.) 그때 둘로 나뉘었던 것을 하나로 합쳤지만, 당시의 흔적을 남겨놓는 이유는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종교가 아니고 박해 가운데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선배들의 역사가 우리 예배 안에 고스란히 전례 의식으로 남아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죠. 이것이 예배의 힘입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대다수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요. 루터교회의 강조는 다릅니다. 신적 서비스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개신교적 예배(Gottesdienst) 신학은 언제나 하나님이 주체가 됩니다. 그래서 예배란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해 베풀어주는 은혜의 사건이고, 찬송과 기도는 그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라고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무력한 죄인을 초청해 복음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성찬으로 믿음을 강화해줍니다. 그 힘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고요. 이것이 루터교회의 예배 신학입니다.

   
▲ "일대일로 마주 선 사이에 떡이 있지요. 그때 나와 당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서로 오가는 거거든요." ⓒ복음과상황 이범진

― 설명을 듣다 보니 루터교에서 성찬식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큰 것 같습니다. 
대다수 교회는 회중석으로 떡과 잔을 돌리잖아요. 루터교회에서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아요. 항상 집례자 앞으로 수찬자가 나옵니다. 제단 앞에서 집례자가 일일이 다 떡과 잔을 줍니다. 일대일로요. 루터교는 원칙적으로 매주 성찬을 해요. 가능하면 더 많이 하라고 권하고요. 환우심방이나 지방으로 심방 갈 때는 성찬을 준비해서 가기도 하고요. 

― 매주 일대일로 성찬식을 하면 예배 시간이 길어지지는 않나요?
성찬을 대충대충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예배 시간이 길어지기도 하지요. 게다가 교인 숫자가 많아지면 한도 끝도 없이 더 길어져요.(웃음) 이게 순기능인지 역기능인지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성찬을 이런 식으로 집례하면 교회 교인 숫자는 200명을 넘어설 수가 없어요. 자동적으로 필터링이 되어서 교인 수가 조절됩니다. 대형교회가 될 수 없는 구조적인 조건이라고 할까요?(웃음) 우리 교회도 주일 예배 참석인원이 170-180명 정도예요. 보통은 예배의 모든 순서가 1시간 20분이면 마무리됩니다. 성찬과 광고까지 모두 포함해서요.

― 교인들의 이름과 얼굴을 다 기억할 수 있겠어요.
당연하죠. 다 알죠. 아이들도 앞으로 나오면 머리에 손을 얹고 직접 축복기도를 해줍니다.

― 매주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며 성찬을 집례한다는 것은 목사님에게도 특별한 느낌을 줄 것 같네요. 
성찬을 할 때 제가 교인을 일대일로 봅니다. 그때 미세한 눈빛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어요. 매주 보기 때문에 이제는 무언가 달라지면 어느 정도 감지가 됩니다. ‘슬프구나’ ‘아프구나’ 등 감정이 전해져요. 나중에 예배 끝나고 따로 이야기하면 100퍼센트 제 예상이 맞아요. 어떤 경우에는 성찬 받으러 나오면서 벌벌 떨면서 울기도 하고요. 200명 정도 되니까 교인 개개인의 상황을 다 알잖아요. 그러니 제가 성찬 준비에 사력을 다할 수밖에 없어요. 한 사람에게 떡이나 잔을 주고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기까지 몇 초 되지 않지만, 그 짧은 시간에 그를 위해 진심 어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성찬의 시간은 굉장히 소중해요. 그 침묵의 시간들이 수찬자들에게도 굉장히 귀한 시간이 될 것이고요.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몸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임하는 시간이잖아요.

― 그렇게 매주 하는 성찬이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고 일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나눠주셨고, 그것은 영생의 힘이고, 세상에서 꺾이지 않는 불멸의 힘이 됩니다. 그것을 받아먹으면 약한 내가 강해지는 것은 당연하지요. 강한 힘으로 일상에서 예수와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 식탁에서 나누고 손을 잡기 때문에 우리가 한 공동체라는 사실도 공유하게 됩니다. 일대일로 마주 선 사이에 떡이 있지요. 그때 나와 당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서로 오가는 거거든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의미를 되새기는 거지요. 예배가 끝난 후에는 세상에 나가서 예수의 힘으로 이웃을 용서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개인 신앙에서 시작하지만, 자연스레 사회 차원의 나눔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성찬이 단순히 형식적인 전통으로 남아 있는 교회도 많을 텐데요. 개신교 신앙 유산 중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한 것은, 성찬은 신비입니다. 이 작은 떡 하나에 주님이 임할 수 있다면, 보잘것없는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는 거잖아요. 이 믿음을 갖고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에 불의한 것, 불가능한 것과 맞설 힘이 생기고, ‘과연 세상이 변할까?’ 하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겁니다. 주님도 이 작은 것에 들어와서 나와 함께하셨다! 그렇다면 이 절망적인 세상도 주님이 변화시킬 수 있다! 성찬식은 단순한 형식으로 박제되면 절대 안 되는 것이죠.

 

     관련기사
· ‘함께 비를 맞으며’ 나누는 ‘무지개 성만찬’· 정교회 신앙의 최종적이고도 중심적인 사건, 감사의 성찬
· 생명의 떡과 음료로서 예수의 몸과 피· “성찬의 ‘논쟁’보다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세요”
ⓒ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복음과상황 기사제보 광고문의 제휴안내 오시는길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 506-10 산성빌딩 104호 우)120-836 | 전화 : 02-744-3010 | 팩스 : 02-744-3013
발행인 : 김병년 | 이사장 : 박종운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병년
Copyright 2008 복음과상황.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con@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