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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떡과 음료로서 예수의 몸과 피
[322호 커버스토리]
[322호] 2017년 08월 25일 (금) 13:58:39 김회권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goscon@goscon.co.kr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다시 돌아보는 성만찬
복음서에서 성만찬은 각자 자신의 노동으로 자기 몸만 먹이며 사는 옛 자아가 최후를 맞는 최후 만찬이면서 하나님 나라에서 맞게 될 영생을 희미하게 보여주는 예표적인 식사행위다(마 26:26-29; 막 14:22-25; 눅 22:14-20). 매일 세 번씩 마주하는 식탁이 기독교의 진정성을 검증하는 시금석이다. 주님과 함께 먹는 성만찬 식탁은, 누군가가 자기 발을 씻어주기를 요구하는 주인이 되려는 옛 자아가 소멸되고 주와 스승 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스스로 형제와 자매의 발을 씻겨주는 복된 노예로 거듭 태어나는 자리다(요 13:15, 33-34). 또한 주님과 함께 나누는 식탁은 주님이 환영하셨던 죄인들, 나그네, 여인들, 병자들과 함께 먹는 식탁이다.

주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거룩한 보혈을 받아낸 그 거룩한 성배(the Holy Grail)를 찾아 모험으로 가득 찬 순례길에 오른 원탁의 기사나 인디애나 존스 박사가 될 필요가 없다. 우리의 환대를 되갚을 수 없는 가난한 자, 병자, 장애인을 초청해서 환대를 베푸는 것이 성만찬이다(눅 14:12-14). 성만찬에 기독교의 알짬이 오롯이 다 들어 있다. 성만찬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주님처럼 자신의 살과 피를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떡과 음료로 선사하는 이들의 삶 한복판에 차려진다.

이처럼 누구와 어떻게 먹는가 하는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드러내는 결정적 행위다. 성만찬은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소생시키는 음식으로 내어주는 행위다. 예수의 성만찬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가장 회화적으로 설명하는 행위다.

이 글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주님이 제정하신 성만찬의 의미를 성찰한다. 주님 자신이 올 때까지 주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성만찬을 행함으로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라고 당부하신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참된 성만찬 영성으로 단련된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의 일치와 화해에 어떻게 헌신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주님의 성만찬을 잇는 한국교회의 성만찬이 인간 사회의 분열과 파쟁을 치유하는 궁극적 해결책임을 궁구해 보고자 한다.

성만찬의 다양한 성서 전승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한 성만찬에 대한 신약의 보도는 다채롭다. 사도행전에 증언된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떡을 떼는 성만찬을 예배의 핵심 의식으로 기렸다. 스티븐 니일은 《기독교 선교사》(성광문화사)에서 기도와 더불어 성만찬이 초대교회의 기둥이었다고 말한다. 성만찬의 중요성은 이 의식이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다 기록되어 있다는 데서 드러난다. 물론 요한복음에는 6장의 오병이어 표적으로 만들어진 광야식탁 본문과 13장의 성 목요일 세족식 본문이 성만찬 본문을 대신한다. 신약성경 중에서 요한복음 6장이 성만찬의 신학적 의미를 가장 자세히 해설한다.

공관복음서는 성만찬은 떡을 떼는 행위, 포도주를 붓는 행위(“전제”〔a drink offering〕를 붓다-바울의 성만찬 언어)를 강조하고 이 행위를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반복하도록 명하시는 주님의 당부를 증언한다. 특히 성만찬 제정 상황을 가장 자세히 보도하는 누가복음 22:15-20은 성만찬의 뿌리가 유월절 만찬임을 밝힌다. 유월절의 역사적 드라마에 빗대어 보면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다(요 1:28-35). 그런데 그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은 고난(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을 받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셨다(에피튀미아 에페튀메사〔I desired a desire to eat this Pascha with you before I suffer〕). ‘나는 올해 유월절 만찬을 내가 고난당하기 전에 여러분들과 함께 먹고 싶은 열망을 열망했다.’ ‘욕망을 욕망했다’는 동종목적어가 여기서 사용되었다. 예수님은 공생애 마지막 해 유월절에 아주 중대한 의미 부여를 하실 굳은 결심을 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22:16, 18은 이 유월절이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유월절 식사를 하는 날을 기점으로 보면 지상 최후의 만찬이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하시며 떡을 떼어 나눠줌으로써 예수님을 기념하라고 하셨다. 유월절 어린 양의 고기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해방과 구속을 기념하듯이 주기적으로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19절). 떡을 먹은 후 예수님은 잔에 포도주를 채워 주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에스겔 36:25-26과 예레미야 31:31-34이 가리키듯이 이 새 언약은 이스라엘의 마음에 새겨진 언약으로 이스라엘의 자발적 순종과 충성을 창조해내는 일방적인 은혜 언약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하나님의 율법을 자발적으로 지킬 능력을 주는 언약의 속박이며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다윗 언약으로 결속된 적이 있던 이스라엘은 이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성만찬을 중심으로 재결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성만찬에는 유월절의 속량 기억과 그 유월절의 어린 양 피를 통해 새롭게 창조된 새 언약 백성 창조의 예고가 있다.

   
▲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성만찬에는 유월절의 속량 기억과 그 유월절의 어린 양 피를 통해 새롭게 창조된 새 언약 백성 창조의 예고가 있다. 


이런 성만찬의 해방적 기제를 보충적으로 설명하는 정황이 누가복음 9장의 변화산 본문에 나온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완수할 그의 별세(exodos)를 예고했다(눅 9:31 직역: ‘영광 중에 나타나서 그들이 그가 예루살렘에서 완수하게 될 그의 탈출〔엑소돈 아우토〕을 말했다’). 예수님은 히브리 노예들을 출애굽시킨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동력을 방출하셔서, 또 한 번의 출애굽을 감행하심으로 새 언약 백성을 창조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종교권력의 중심인 예루살렘을 탈출해 어린 양의 보혈이 왕노릇하는 새 예루살렘으로 출애굽할 것이라는 의미다.

신약성경 중 성만찬의 출애굽적 해방 동력을 웅변적으로 증언하는 본문은 누가복음 24:14-35(막 16:12-13)이다. 예수님의 급작스러운 십자가 처형을 목격하고 예루살렘의 박해 분위기를 피해 엠마오로 내려가는 슬픈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신다. 이스라엘을 속량할 예언자라는 민중적 열망을 한몸에 받았던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슬픈 낙향길에 동행하시고 그들의 슬픔에 공감하신다. 부활하신 주님이 숙박하러 들어간 객사에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떼어 주시자(24:30),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 낯선 동행인이 예수님인 줄 알아보았다. 떡을 받는 순간에 그들은 자신들과 동행한 거룩한 나그네가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심을 알아차렸다(24:31). 두 제자는 즉시 일어나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한 자들에게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나타내신 상황을 보고했다(24:35). 이 본문은 초대교회가 성만찬 자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다시 만났음을 증언한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가 주님의 분부대로 떡을 떼는 성만찬을 집행하며 계승했음을 증언한다. 베드로와 사도들의 오순절 설교로 결성된 원시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2:42).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2:46). 베드로는 고넬료 개종사건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성만찬 참여 자체가 사도적 자격임을 암시한다.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10:40-41). 사도 바울도 3년간의 에베소 사역 기간 동안에 일주일의 첫날(일요일, 주일)에 신자들이 떡을 떼려고 모였다고 증언한다(행 20:7).

심지어 사도 바울은 유라굴로 광풍으로 14일 넘게 지중해를 표류하던 죄수 호송선에서도 성만찬적 식사를 주도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죽음의 위기에 내몰린 선상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성만찬을 통해 살 소망을 지펴주었다.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했던 것이다(행 27:35). 이밖에도 성만찬 관습을 암시하는 또 다른 사도행전 본문도 발견된다. 아나니아가 사울의 눈에 안수하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 즉시 그 자리에서 사울은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강건하여졌다(9:18-19).

한편 고린도전서 11장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치를 깨뜨리는 파당 문제와 빈부차별 문제를 질정하는 맥락에서 성만찬 제정 전승을 언급한다. 11:17-34은 성만찬의 원래 정신에 비추어 고린도교회에서 변칙적으로 행해지는 성만찬을 언급한다. 당시의 고린도교회 성만찬 관행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공동체를 깨뜨리는 해를 끼쳤다(11:17).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분당과 파당으로 갈라진 상황을 우려하며 교회 전체 회중에게서 옳다고 인정받는 지도자들 대신에 특정 파당에서만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득세하게 될 상황을 걱정한다. 전체 기독교 공교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고 대신 특정 파당에서는 옳다고 인정받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죄를 범한다. 수천수백 개로 갈라진 개신교 분파주의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죄를 범하는 것이며 성만찬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사태다. 따라서 바울은 보편적 공교회의 가르침을 능욕하는 분파주의자들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11:20)고 단언한다.

고린도교회의 파당 문제는 빈부격차를 반영하기도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고 취한 반면, 가난한 교우들은 먹을 것이 넉넉지 못해 성만찬 때 오히려 허기를 느꼈다(11:21). 이 ‘어떤 사람들’은 부자들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했다(11:22). 이 그릇된 성만찬 참여자들을 책망하는 과정에서 바울은 성만찬의 본바탕을 가르친다.

최초의 성만찬은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실행하신 유월절 식사였다(11:23; 고전 5:6-8, 순전하고 누룩 없는 떡을 떼던 식사). 주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11:24), 식후에 잔을 가지시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다(11:25).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자신이 받을 잔이라고 하셨고(막 10:38; 14:36) 이 잔은 이스라엘과 열방들에게 내린 진노의 잔을 가리켰다(사 51:17, 22; 렘 25:15-16).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내는 죄(고후 5:21)가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명 진수인 피(레 17:11; 히 9:22)를 흘린다는 것이다. 성만찬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의 대신적 대속적 피흘림을 전하는 예전인 것이다(11:26).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들은(교회의 일치를 깨는 죄와 허물을 범한 자들) 성만찬에 참여할 수 없다(참조. 고전 5:11 음행자, 탐욕자, 술취한 자, 우상숭배자, 신성모욕자, 사취자 등과 ‘함께 먹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11:27).

고린도교회의 경우에서 보듯이 초대교회도 빈부격차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기독교적 미덕과 윤리를 범한 자들의 성만찬 도발이 없지 않았다. 오늘날 교회도 주님이 친히 제정하신 성만찬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행함으로써 주님의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의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의 성만찬은 낡은 방식의 사회를 탈출하고 하나님 경외와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 으뜸계명으로 결속된 새 언약공동체를 창조하는 기폭제로 기려져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6장이 성만찬의 일상적인 재현을 돕는다. 

성만찬에 대한 심오한 해석, 요한복음 6장 ‘오병이어’ 강화
공관복음서의 성만찬 본문을 심오하게 해석하는 요한복음 6:41-51은 자신을 목수 요셉의 아들로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을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님의 강화(講話)를 담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주장해 엄청난 파란과 격쟁을 불러일으킨다. 유대인들이 이런 예수에 대해 수군거렸다(41절).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보통 이단교주들의 전매특허 수사법이다.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단교주들의 주장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함이다. 반면에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예수님의 주장은 순종과 철저한 비움을 스스로 다그치기 위한 말이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언약적 순종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예수님이 성만찬을 통해 가르친 진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드리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미래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왕도 아니고 상비군도 아니고 관료조직도 아니고 성전도 아니다. 자기 몸을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으로 여겨서 다른 사람의 음식으로 제공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참 왕이고 이스라엘의 주도세력이고 이스라엘의 미래를 담보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는 이 가르침을 100% 체현했다. 그는 자신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 나라 복음을 믿고 동포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얼싸안고 상처를 싸매주고 채무를 탕감해주고 먹을거리를 나누는 사랑의 민중적 기초공동체가 튼튼히 뿌리를 내리면, 로마제국과의 군사적 항쟁이라는 극단의 민족적 자살 행위를 하지 않고도 이스라엘 민족이 영생할 수 있으며, 민족적인 생명을 유지해갈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인 자신의 길을 따르면〔즉 선(先) 이스라엘 언약공동체의 회복과 영적 소생 후(後) 민족적 독립 성취〕 ‘멸망치 않고 약속의 땅에서 오래 지속가능한 공동체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것이 요한복음 3:16의 당대적 의미였다.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은 하나님이 나를 파송했다는 강력한 피(被)파송의식을 의미했다.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자신은 이기심을 충족시키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종교는 미지의 형이상학적인 영역에 대한 무지와 사후세계에 대한 동경 등을 이용해 사람을 지배한다. 그래서 모든 세상종교는 이원론의 모태에서 태어난다. 이 세계와 죽음 저편의 세계가 완전히 갈라져서 절대로 소통이 안 된다고 하는 이원론 때문에 세상에서 종교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엉망진창 수준의 성직자가 많아도 교회가 있는 이상 신자가 있게 된다. 아무리 허튼 자라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내세에 관하여 말하는 종교인은 추종자를 얻는다. 왜? 인간의 영이 파괴되어 하나님과 단절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사기극(詐欺劇)도 사람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예수님과 그의 참 제자들은 자신이 하늘에서 파송됐다는 주장을 내세워 성도들의 헌금을 갈취하거나 충성심을 도둑질 하지 않는다. 자기를 다그치고 자기를 희생하기 위하여, ‘나는 하나님께서 파송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자신을 친밀한 사이라고 말하는 순간 자기부인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뭔가를 말씀했다는 주장을 하고 그 레토릭의 진실성을 납득시키려면 최소한 먼저 자기희생과 자기 해체를 감수해야 한다. 그래야만 종교언어의 형이상학적 사기성을 극복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종교적 언어는 사기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살린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 양식이 된다는 말은 예수님이 살아가는 그 자기부인적 삶의 방식 때문에 원기를 얻고 영적인 소생력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 때문에 살 소망을 갖는 사람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사람이다. 이처럼 자기 몸을 다른 사람의 식사로 주려는 예수님이 인류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인류 역사를 개시한 것도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창조와 사랑이며 완성하는 것도 하나님의 자기희생과 사랑이다.

인류 역사가 존속하는 데 기여한 이들은 자기의 살과 피를 다른 사람의 양식으로 나눠준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이 자기 살과 피를 먹게 하신 후에 우리를 제자로 삼아 주심으로 우리도 이웃을 위해 살과 피를 나눌 수 있다. 예수님 같은 성만찬적 자기희생의 실천자가 많아지면 인류가 멸망으로 치닫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된다. 예수님의 성령을 받고 예수님 때문에 힘을 얻고, 자기 몸을 떼어주는 주님의 성만찬을 먹고 이를 모방하면 자신도 모르게 우리 인생 어딘가로 내 목숨을 다른 사람의 음식으로 제공하는 삶을 살게 된다.

전체 인류 역사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인간유형을 최고로 완성된 인간으로 보는 방향으로 역사가 흘러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인류 역사가 진전될수록 세상 만민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기희생적 성만찬 실천자가 성숙에 도달한 인간이라는 결론에 합의하고 있다. 즉 인류공동체는 흡혈귀 같은 약탈적이고 포식자적인 인간을 최고의 완성된 인간이라고 하지 않고, 자기 몸을 다른 사람의 양식으로 준 자만이 참 인류라는 합의에 이르고 있다.

영생의 실천장·실험장이 되어야 하는 공교회의 성만찬
요한복음 6장에서 주님은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영생은 구약이 말하는 생명/영생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영생(永生)의 영(永)은 신령할 때 영(靈)자가 아니라 오랜 지속성을 가진 시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생은 뉴에이지 종교가 말하는 영과 직접 교통하여 엄청나게 초능력을 발휘하거나 영생불사(永生不死)할 때 영이 아니라 ‘영원히 존속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가리킨다. 시편 133:3(신 30:16)이 말하는 이상적 사회생활이 바로 영생이다. 영생은 야웨의 계명과 언약을 준수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며(레 18:5), 더 나아가 야웨의 계명을 지키고 준수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랑과 우정으로 결속된 평화로운 사회생활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6장의 성만찬 해석 강화(講話)에서 주님은 구약적 배경이 강한 영생을 얻는 길을 가르치신다. 구약적 의미의 영생은 굶주린 무리들을 잔디에 질서정연하게 앉힌 후 떡과 고기를 제공하는 것, 즉 굶주린 무리를 먹이는 일부터 시작된다. 폭도로 화할 수 있는 굶주린 남자 5천 명의 잠재적 폭력성을 잔잔케 한 것은 떡과 고기였다. 이처럼 예수님이 가져온 영생은 인간 사이의 거리를 형제자매 수준으로 극히 친밀하게 결속시키는 사회생활이다. 영생은 비상한 친밀공동체, 즉 물질적 유무상통이 실현되는 언약공동체로 접목되는 것이다.

시편 133편은 요한복음 3장이나 6장이 말하는 영생의 의미를 잘 예해(例解)한다. 시편 133편은 영생이란 아론의 머리에서 흘러내려 수염을 거쳐 옷깃까지 흘러내리는 감람유이며, 헬몬산에서 시온의 들판에 흘러내려 적시는 이슬이다. 아론의 머리와 헬몬산은 이스라엘이 공동체적으로 이룬 거룩한 사회생활, 상호부조적이고 연합적인 이상화된 언약공동체 생활을 가리키는 메타포다. 신약적인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은 친히 성령을 받으시고 교회에 성령을 파송해주신 대제사장이며 자신의 고결한 순종과 희생으로 하늘의 우로(雨露)를 내려 온 이스라엘을 윤택케 하신 헬몬산이다.

시편 133편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생지복을 촉발하는 내적 조건이라고 말한다. 형제자매가 서로 도우려는 것 자체가 신적인 간섭과 축복을 유발하는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요한 3:18과 야고보서 등 참조). 아울러 성경은 형제자매 동거 연합이 선하고(톱, tob)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한다(시 133:1). 선하고 아름답다는 말은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게 만든다는 말이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기 내어주심에 대한 묘사이다.

실제로 초막절을 비롯한 절기 내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연합하고 동거하는 연습을 연례적으로 실행했다.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마당과 부지 일대에 시온의 구릉지 일대를 야영하면서 7일을 보냈다. 이 때 동거하고 연합했다. 소득수준과 상관없이 지역과 고향의 차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데 모였다. 유월절-무교절, 초막절(광야 40년 기억:하나님의 의식주 공급하심을 기억), 수장절(곡식 추수:하나님이 주신 복을 나눔) 이 세 절기 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 큰 제물을 바쳤다. 가난한 이웃, 객과 고아와 과부를 도왔다. 실제적으로 고아와 과부는 공동체를 지키다가 전사한 아버지와 남편을 둔 사람이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생계수단을 스스로 포기한 레위인과 성직자들을 먹여 살렸다. 성전 부근에 와서 초막에 지내면서(느헤미야 8장의 수문앞 광장 초막절) 연합하여 동거함으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나라가 건재함을 실감하고 돌아갔다.

시편 133:2은 대제사장에게 기름 붓는 도유식(塗油式)을 상정한다. 이것은 대제사장 도유식이다. 대제사장은 가정과 공동체의 우두머리다. 대제사장의 머리 위에 쏟아진 기름이 수염에 이르고 옷깃에 흘러내리는 장면은 대제사장에게 임한 하나님의 복이 온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혜택을 입힌다는 진리를 말한다. 영적 지도자의 영적 위엄과 순전성을 매개로 성령의 기름이 온 공동체에게까지 흘러내리는 것이다. 아론의 머리 위에 부은 기름이 옷깃까지 흘러내리듯이 형제자매 동거와 연합이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매개한다. 성전을 관리하는 영적 대제사장에게 기름이 쏟아지듯이 형제자매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그런 효과를 낸다는 말이다.

133:3은 다른 영생 비유다. 높다란 헬몬산이 지형성 강우를 일으켜 그 산 아래 평야와 구릉지를 적시듯이, 형제자매 사랑의 고봉(高峯)과 영봉(靈峯)을 구현하는 곳에는 지형성 강우 이슬이 내린다는 말이다(시 87:1; 125:2). 높다란 형제자매 사랑을 구현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지형성 강우 이슬이 내린다. 형제자매 사랑이 실현되는 그곳에 하나님을 아는 복을 지정해 주신다. 그 복이 바로 영생이다. 하임 아드-하올람(hayyîm ‘ad-hā’ôlām), Life unto long duration. 이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생활’이라는 말로, 무시간적인 삶이 아니라 단절되지 않는 안정된 평화의 생활을 의미한다.

무한경쟁체제 시대에 던지는 성만찬의 도전
인류 역사는 형제관계가 마모되고 마멸되어 원수 대적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또 다른 한편 인류 역사는 형제자매 사랑을 위하여 자기 몸과 피를 다 바친 순교적 형제 우애의 역사다. 인류 역사는 화해할 수 없는 이 두 동력에 의해 견인된다. 인간 안에는 신적 고귀성과 악마적 비열성이 으르렁거리며 싸우고 있다.

자연인으로서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서로 동거하고 연합하는 데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존재다. 이 결함은 이웃에 대하여 자기주장의지, 형제비난적인 책임전가, 형제살해적 적의로 나타난다. 한 나라가 망하고 한 민족이 멸망당하는 마지막 단계는 사회적 연대와 신뢰, 우정과 동포애의 파산이다. 《매천야록》을 쓴 황현이 남긴 글에 따르면, 일제의 한일병탄이 있기 100여 년 전부터 조선은 형제적 동포애가 거의 무너진 사회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은 헬조선이 되었다. 다음은 가난한 헬조선 동포가 자신을 노예로 사달라고 애원하는 <자매문기>(自賣文記)의 일부다.(김성동, “망나니, 철갈구리, 금송아지 그리고 농투산이,” <녹색평론> 107호(2009년 7-8월), 117-127쪽.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에 실린 글 <오하기문>(梧下記文)에서 민씨 외척 3인의 죄상 고발기록을 보고 김성동이 풀어썼다.) 

1. 이 몸은 입에 풀칠을 할 수 없을 만큼 집안이 애옥하여 굶어죽고 얼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열두 살 먹은 여식 분절이를 죽전동 사는 김귀일에게 고공비로 넘겨주니 … 분절이가 나중에 낳게 되는 아이들까지 길이길이 고공노비로 삼도록 다짐을 두노라. - 영조 7년 1731년 정월 한영이 김귀일에게 자매(自賣).

2. 이 몸은 부모와 더불어 상전댁 윗대부터 내려오는 종이다. … 어미 금분이 죽어 방에 누웠으나 장사지낼 해자가 없다. 그래서 이 몸 처인 업이와 업이가 낳게 될 아이들을 팔고자 하노라. - 순조 32년 1832년 9월 양반댁 세습노 정정옥이 서른 살 된 아내 업이와 그 전후 소생을 돈 8냥과 벼 1섬을 받고 홍주서(주서는 승정원 예하 정7품 벼슬)에서 파는 문서.

3. 이 몸은 일흔 살 먹은 늙은 아비가 얼어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공사채를 막론하고 돈을 변통할 길이 없으므로 처와 여식 하나와 그들이 앞으로 낳게 될 아이들까지 종으로 팔고자 하노라. - 철종 2년 1851년 11월 4일 박재천이 흉년을 맞아 70세 먹은 늙은 아버지가 거의 얼어죽을 지경에 돈 마련할 길이 없어 처와 딸을 이선달이라는 양반에게 파는 문서.

무한경쟁체제로 망가진 헬조선을 극복하려면 형제자매적 사랑으로 가득 찬 시민들로 이 땅을 가득 채워야 한다. 아무리 악조건이라 하더라도 형제자매가 서로 돌보며 환난상휼하면 하나님께서 위에서부터 복을 내리시고 영생공동체로 견결하게 결속하신다. 이런 형제자매적 우애와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자들에게 기대되는 삶이다(고후 5:14-2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겉사람은 후패하고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은혜가 충만하다(고후 4:16-18).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새로운 피조물(카이네 크티시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되어 이웃과 심지어 원수와도 화해하기에 최적화된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성만찬이 창조한 새 언약에 그 양심이 묶인 사람들의 세계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체제 이데올로기에 속박된 존재가 아니라 형제자매 부조적인 성만찬의 새 언약에 매인 존재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말은 원수에게까지도 화목과 평화를 나누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에게 당신을 화해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화해와 화목의 직분(디아코니아스 테스 카탈락게스)을 주셨다.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맞아들이는 선교적인 개방성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는 인류 역사에서 매우 예외적이고 우연적 경제체제임을 강조한다. 시장경제가 등장하기 전에 인간의 전 삶에서 경제는 사회적 문화적 관계에 묻혀 있었다(embedded)는 사실을 지적한다. 경제가 사회에 묻혀 있는 한 한 개인의 경제 행위는 사회규범에 영향을 받게 된다. 시장경제가 등장하기 전에 인간은 사회집단의 일원이었고 개인의 경제 행위는 비경제적 목표를 포함하는 더 넓은 범위의 사회적 관계와 결합되어 있었다. 그런데 경제가 자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면서 사회적 문화적 관계도 시장의 규칙에 종속되기에 이르렀다. 폴라니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사회적 존재라는 인간의 본성과 양립 불가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관계는 인격적 개체들 간의 관계로서의 성격이 은폐되고 그저 비인격적이고 객체화된 시장운동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그에 따라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또 자신이 살아갈 자연적 터전에 대해 가져야 할 인격적 주체로서의 책임이라는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거대한 전환》; Karl Polanyi-Lebitt & Marguerite Mendell,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홍기빈 역, 책세상, 2002, 143쪽).

폴라니가 시장자유주의의 대안으로서 관심을 두는 비시장적 사회의 특징은 포괄적인 사회적 관계 내지는 유대(bonds)이다. 그의 사상의 주된 관심은 이런 사회적 유대를 형성시키는 것이다. 생산을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필요에 종속시키는 방식으로 현대 기술사회를 재조직하고 동료인간과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비인격적인 시장의 힘과 기술관료의 명령을 능가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행복한 삶은 사회적 연대, 우애와 공감대의 후원 아래 사는 것이다. 로마제국과 헤롯의 수탈체제는 갈릴리 농민조직을 해체했으나 예수는 갈릴리 농민들을 형제자매관계로 복원했고 원한 대신 연대가 가득 찬 세상을 만들었다(오병이어 기적).

결론
형제자매적 결속과 우정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보양할 결정적인 환경이다. 형제자매적 우애와 유대를 잃으면 이내 하나님을 잃을 가능성도 크다(삼상 26:19). 반면에 영적 지도력 아래 견실하게 결속된 언약공동체에 머물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복을 누리게 된다. 아론의 수염(출 28-29장)은 영적 지도자의 위엄을 상징한다. 영적 지도자가 하나님의 복을 매개한다는 말이다. 형제자매적 우애공동체는 대제사장적인 영적 지도력으로 더욱 굳세게 세워져 간다. 형제자매적 사랑과 우애가 싹트는 곳은 헬몬산처럼 영적 융기를 경험하고 그 융기된 산봉우리에 지형성 강우 이슬이 맺힌다. 이 높은 헬몬산 이슬이 시온의 구릉지에도 흘러내릴 것이며 시온의 들판을 적시는 우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복이다. 형제 사랑의 고봉 준봉이 솟아오른 곳에 신적 돌보심의 이슬이 내린다는 말이다. 형제자매적 연합의 핵심은 가난케 된 형제자매를 우정과 환대의 잔치에 초청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개인 구원이면서 동시에 사회구조적인 성화이자 세계의 성화이다. 구원 경험의 최소 단위가 개인이라는 점에서 개인 구원이지만 개인이 경험한 구원이 반드시 사회구조적 구원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우주적 구원이다. 이런 구원을 통전적 구원이라고 말한다. 통전적 구원은 영혼과 육체 모두의 구원이며, 현세의 모든 죄와 정욕적 지배로부터의 구원이며, 현재의 사회경제, 정치적 압제와 불의로부터의 구원이며, 다가올 종말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이자,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새 하늘과 새땅에서 새로운 인류공동체생활, 즉 영생(영속토록 지속가능한 사회생활)에 다시 참여하는 구원이다. 가난한 형제와 자매와 연합하는 것이 바로 영생이다.

곤경에 처한 형제를 부축하고 부둥켜안는 행위 자체가 영생이다. 성만찬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영생을 누리는 형제자매의 이상적 연합과 동거가 이뤄지는 세상을 동터오게 만드는 종말선취적 식사이면서, 각축과 상쟁으로 서로를 파괴하는 아담적 낡은 자아들에게 최후를 통고하는 영생의 시발점이다. 성만찬은 나사렛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식사 행위로 극화한 거룩한 연극이다. 교회는 성만찬을 하러 모인 출애굽 경험자들의 공동체인 셈이다.

이토록 의미심장한 성만찬이 교회사가 진행될수록 하나의 박제된 종교의례로 축소되고 말았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는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던 성만찬의 예전적 의미를 계승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개신교에서 성만찬은 설교에 의해 이차적인 예전으로 밀려났다. 성만찬 회복은 기독교 영생 실천의 시발점이다. 교회는 세상을 영생공동체에 접근하도록 거룩하게 변화시킬 선교적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김회권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공부했으며, ESF(한국기독대학인회)에서 회심하고 신앙 훈련을 받은 뒤 11년간 ESF 간사로 섬겼다. 장신대 신대원을 나와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석사 및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 《김회권 목사의 청년설교 1, 2, 3》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사도행전 1, 2》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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