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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329호 커버스토리]
[329호] 2018년 03월 26일 (월) 11:53:26 조미영 goscon@goscon.co.kr
   
▲ 제주4·3평화공원 다랑쉬굴 학살 현장 재현 모습 (사진: http://earthw.tistory.com/229)

미국의 정치학자 존 메릴은 제주4·3을 일컬어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처럼 치열한 민중 반란이 분출된 곳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1948년 4월 3일 무장대들의 봉기가 시작되어 붙여진 이름 ‘제주4·3 사건’. 이후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정확한 의미의 정명을 달지 못한 채 제주4.3 사건이라 불리는 우리의 역사가 있다.

제주4·3의 시작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제주4·3의 시작은 1947년 3월 1일이다. 제28주년 3·1절 기념대회를 위해 수만의 제주도민이 제주목관아 앞 관덕정 광장에 모인다. 약 3만여 명, 제주도민 10분의 1이 운집한 것이다. 조국 해방에 대한 기대감이 컸지만, 미군정 집권 이후 일제 공출 때와 다를 바 없는 미곡 수집령과 친일경찰 재등용 등으로 불만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그러니 답답한 마음에 도민들이 광장으로 모여든 것이었다.

그런데 이날 경찰이 탄 말발굽에 아이가 치이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를 모른 채 지나가는 경찰을 향해 항의를 하고, 장내가 술렁이자 경찰은 군중을 향해 발포를 한다. 경찰의 총에 어린 학생과 젊은 아낙 그리고 농부 등 민간인 6명이 숨지고 8명이 부상을 당하고 만다. 여기에 경찰은 사과는커녕 시위주동자를 체포하는 등 강경 대책으로 맞선다.

분노한 도민들은 3월 10일 도민 총파업으로 항의의 뜻을 표했고, 경찰은 다시 탄압으로 대응한다.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는 발언을 하며 도민들을 색출하기 시작한다. 1년여 만에 2,500여 명이 끌려가고 3명이 고문을 당해 죽는다. 도민들 사이에는 위기감이 팽배해 간다. 

1948년 4월 3일! 제주 전역의 오름에 봉화가 피어오르며 지서와 그 끄나풀인 서북청년회 사무소 등을 습격한다. 봉기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호소문을 통해 “탄압이면 항쟁이다” “단독정부 단독선거 결사반대!” “반미구국 투쟁”의 뜻을 밝힌다. 당시 무장대 수는 약 300여 명으로 추산한다. 이들은 99식 소총 30여 정과 죽창을 들고 산발적으로 마을을 급습한 뒤, 호소문을 붙이고 마을 사람들에게 동참할 것을 권유한다. 그리고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연설을 한다.

이 무렵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5·10선거를 추진하고 있었다. 반면 김구 등의 민족지도자들은 단독선거에 반대하며 ‘통일 조국’을 외치고 있었다. 좌우 이념 갈등이 극에 달하는 시점에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의 투표가 무산된다. 전국에서 유일한 선거무산이었다. 그 결과 이승만 정권은 정통성에 큰 타격을 입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재패해 나가던 미군정 역시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정권에 도전한 대가는 혹독했다. 1948년 10월 송요찬 9연대장은 포고령을 내린다. 해안선 5킬로미터 이상 들어간 지역에 대한 통행금지 및 야간 통행금지 명령은 이때 내려진 것이다. 이후 계엄령을 선포하며 초토화 작전을 개시한다. 중산간 마을이 불태워지고 무차별 학살이 시작된다. 이를 피해 많은 사람들은 동굴 속으로 혹은 산으로 피신한다. 빨간 동백꽃이 툭툭 떨어지듯, 꽃다운 젊은이들은 물론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르신들까지 남녀노소 분간 없이 많은 목숨이 사라졌다. 대부분의 인명 피해가 이 시기에 일어난다.

봄이 되면서 산에 숨어 있던 1만여 명이 귀순 작전으로 내려온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군법회의를 거쳐 육지의 형무소로 끌려갔지만 일부만 석방되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지 형무소에 투옥되어 있던 이들은 소리 소문 없이 처형된다. 형무소 수형인들은 물론 갑자기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끌려가 학살당하는 일들이 도처에서 발생했다.   

이후 반세기 동안 독재정권은 이 같은 역사를 지우기 위해 제주도민들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이념 갈등을 조장함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지키고 싶어 한 이승만 정권이 정권 창출에 반대한 제주도민을 불순분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희생자와 가족들은 ‘빨갱이’ 누명을 쓰고 연좌제에 의한 불이익까지 당하며 숨죽여 지내야 했다. 하지만 진실은 가려지지 않는다.

   
▲ 무장대 묘소인 송령이골 가는 길가에 떨어져 있떤 동백꽃. 4·3 당시 의귀초등학교 전투에서 무장대 51명이 사망했다. 일부 가족이 수습한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신이 구덩이 세개에 매장되어 있다. 사실상 방치되어 있었으나 2004년 '생명평화탁발순례단' '4·3연구소' '헌의합장묘 4·3유족회' 등이 천도제를 지냈고 이후 시민사회단체 등이 매년 8월 15일 벌초한다. ⓒ복음과상황 오지은

제주4·3의 진실 찾기
1979년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은 침묵을 강요당해온 제주4·3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비록 소설 형식이었지만 제주도 작은 어촌 마을인 북촌 학살 사건의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잔악한 진상이 알려진다. 당시 군부정권은 이를 용납지 않았다. 소설가 현기영은 이로 인해 모진 고초를 겪는다. 《순이삼촌》은 금서로 지정되어 비밀리에 유통되기 시작한다.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1987년 6월, 봄은 제주에도 불어왔다. 1989년 ‘제주4·3연구소’가 설립되고 4·3 사건 채록집 〈이제사 말햄수다〉를 출간한다. 피해자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최초의 구술서로 4·3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 후 〈제민일보〉 제주4·3취재반의 노력으로 신문 지면을 통해 4·3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기운에 힘입어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1월에 ‘제주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된다.

드디어 제주4·3은 우리 역사에 공식적으로 편입되기 시작한다. 제주4·3진상조사위원회가 발족되고, 피해실태조사가 이루어진다. 2003년에는 정부에 의해 공식 보고서가 채택된다. 이후 천인증언채록사업, 유적지정비사업, 유족지원사업, 유해발굴사업 등으로 4·3의 진실 찾기에 성큼 다가섰다. 그러고 보면 제도권에서 이뤄진 본격적인 4·3 연구 기간은 약 17년이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다.

아직도 미비한 점이 많다. 4·3은 지금도 의미 규정이 유보된 상태로 ‘제주4·3 사건’으로 불린다.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라는 뜻이다. 희생자 역시 당시 기록에 의하면 약 3만여 명으로 추정되나, 공식 확인된 희생자는 약 1만5천 명이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여전히 그간의 경험으로 미뤄 피해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희생자 신고를 미루고 있거나 희생자 신고를 할 수 없는 사정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무장대로 추정되는 이들에 대해서는 희생자 위패가 철회되기도 한다. 아직도 이념 갈등이 진행 중이라는 뜻이다. 보수정권이 집권할 때마다 4·3 흔들기가 진행되는 것도 사실이다. 각종 소송은 물론 극우단체의 공격 또한 여전하다.

   
▲ 섯알오름 가는 길에 '추돌주의'라고 써 있는 곳이 학살 전 '예삐검속'을 당한 이들이 끌려가던 길 입구. ⓒ복음과상황 오지은

제주4·3과 여성
제주4·3 연구 초창기에는 진상조사에 초점을 맞추어 시급한 사항들을 해결하기 위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좀 더 세분화된 주제별 연구를 그간 몇 번의 과제를 통해 진행해왔다. 그러나 아직 여성을 주제로 4·3 연구를 진행한 사례는 없다. 그동안 증언 채록을 통해 산발적으로 기록한 것이 거의 전부다. 1998년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이라는 주제로 열린 제주4·3 50주년 학술대회에서 잠시 소개된 적이 있을 뿐이다.

〈제주4·3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 희생자는 전체 희생자의 약 21%에 이른다. 이외의 피해는 더욱 심각한 수준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구체적인 여성피해실태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좁은 지역사회 특성상 직접적으로 언급하길 꺼리는 현실이 지배적인 탓이다. 세분하여 조사할 여력도 없었다.

현장에 나가 구술조사를 했던 경험에 비추어보면, 피해자들이 자연스럽게 제주4·3을 언급하면서 조사에 응하게 된 시기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특별법이 통과된 2000년 이후에도 많은 유가족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언급을 꺼리거나 자기 검열을 하듯 말을 가려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 인식 변화가 많이 이루어지고 사회적 분위기가 전환되어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피해의 경우는 여전히 금기시되는 듯 말을 아낀다. 또한 7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탓에 관련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언할 수 있는 이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4·3의 여성 피해는 단순히 희생자 수로 가늠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또한 여성의 성적 피해에만 초점을 맞춰서도 안 된다. 비록 살아남았지만 4·3 이후 황폐화된 제주도에서 지금껏 살아온 여성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부모를 잃고, 남편을 잃고, 혹은 자식을 잃어야 했던 여인들의 삶의 과정이 조명되어야 한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이후의 삶이 더 전쟁 같았을 것이다.
다음은 4·3 당시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유족들의 증언이다.

“우리 어머니에게서 아버지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 당연히 4·3 얘기도 안 하지. 난 굿하는 소리를 엄청 싫어해. 왜냐하면 아버지가 안 돌아오니까 어머니가 주기적으로 굿을 하는 거라. 어린 마음에 잠도 못 자고 꼬박 밤새며 절하고 하는 게 싫더라고. 내 월사금(月謝金, 매월 내는 수업료-편집자)은 못 줘도 그 굿을 그렇게 하더라고….”

“우리 집이 연동이었는데 그때는 건물이 없을 때니까 부두에 뱃고동이 울리면 우리 집까지 들렸어. 그러면 새벽에 어머니가 밖에 나가는 거라. 그러다 한참 있다가 돌아오는데 시무룩한 얼굴로 오더라고 그때는 어릴 때니까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를 기다렸던 거 같아.”

“집이 가난하니까 동네 산에 올라가서 나무 해오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갔는데 우리 집은 어머니, 누나 그리고 나뿐이니까 모두 모다 들어서 일을 해야 했어. 누나는 학교 갈 엄두도 못 냈지. 그러고 보면 누나도 불쌍해. 어머니는 나도 학교 가지 말았으면 했는데 장학금 받으며 스스로 가는데 그것까지 말릴 수는 없잖아. 그래서 학교 끝나기가 무섭게 나무 하는 산으로 올라가. 그러면 해온 나무를 끌고 내려오던 어머니가 나신디 나무를 넘기고 당신은 또 올라가서 그만큼 나무를 해 오는 거라. 그렇게 하며 삶을 연명했지.” 

제주4·3의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언급하기를 꺼린다. 군인이나 경찰 가족이 아닌 경우, 4·3 당시에 희생당한 것 자체가 ‘빨갱이’라는 암묵적 표식이었다. 동네에서도 친척 간에도 서로 쉬쉬하며 말을 아꼈다. 자식을 위해 말도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던 어머니는 행방불명된 남편이 돌아올 날을 기리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곱씹었을까?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아들 학비를 낼 돈조차 없었지만 돌아오지 못한 남편을 위한 영혼의 굿을 해주며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으리라.

당시는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던 시절이다. 노동집약적인 시대였다. 성인 남자의 노동력은 중요했다. 그러니 4·3으로 남편이 부재했던 이들은 어려움이 많았다. 당연히 농사를 잘 지을 수도 없고, 품팔이로 생활을 지탱하려니 생활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육지 형무소에서 죽은 남편을 찾아간 할머니의 증언이다.

“무슨 정신으로 올라간 줄도 몰라. 이미 남편은 죽어 거적대기 덮어서 누워 있고, 혼자 모셔 올 수는 어시난(없으니까) 거기 어디 모셔야 하는데 형무소 뒷마당에 무덤들이 있더라고. 그래도 호끔(조금)이라도 편한 곳에 묻어드려야 하니까 여기도 누워보고 저기도 누워보고 내가 다 누워보면서 가장 편한 자리에 묘 자리를 해서 모셨어.”  

위 사례들 외에도 유해 발굴 현장에서의 애틋한 사연을 목격하게 된다.

유해 발굴 현장의 유류품에는 안경과 신발 그리고 고무줄 등 플라스틱 재질로 된 것들이 있었다. 이중 고무줄은 주로 유골의 허리 부분에서 발견되었는데, 바지나 속옷 고무줄로 추정된다. 마디마디 몇 겹의 매듭을 묶은 고무줄 흔적은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손길과 남편을 위한 부인의 정성을 느끼게 했다.

   
▲ 고길천 작가의 <와이샤츠>. 영문도 모른 채 육지 형무소에 갇힌 한 희생자는 계절이 바뀌자 집에 있는 식구에게 와이셔츠 한 벌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하면서 식구들의 안부를 묻는다. 집에서 키우는 소와 돼지의 상태가 궁금하고 농사를 걱정하는 그저 평범한 촌부였던 그는 제주4·3 와중에 빨갱이로 몰려 형무소에 이감되었다. 결국 한국전쟁 중에 행방불명되어 영영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수감 생활 중 숟가락에 자신의 이름을 몰래 새겨 넣은 이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아직도 유족을 찾지 못해 그분의 염원을 풀지 못한 상태다.

순식간에 어그러지고 비틀어진 인생이었다. 그들을 평생 옥죄는 짐이었던 4·3은 70여 년 전의 과거가 아닌 지금 현재의 이야기이다. 그러기에 그분들의 삶을 재조명하여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이를 망각한다면 어리석은 역사는 다시 반복될 것이다.

러시아의 저널리스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신화화된 전쟁의 허상을 전했다는 이유로 사회주의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어린이와 여성의 인권을 위한 글을 끊임없이 발표한다. 2015년 노벨문학상이 그녀를 지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기억이 다 소멸되기 전에 진실을 찾아나서고 오롯이 캐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다양한 시각과 방법이 모색되어야 한다. 제주4·3연구가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의 관심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70여 년 전 제주의 역사는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만의 역사도, 제주도민들만의 역사도 아니다. 그것은 통일을 바라는 민초들의 항거였다. 제주4·3을 대한민국 역사의 한 장으로 여기며 자랑스레 되새길 그날까지 많은 이들이 함께해주길 바란다.


조미영
제주4·3 70주년 기념 범국민위원회 홍보분과 편집위원이며 제주4.3연구소 이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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