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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진행형으로서의 종말
[339호 커버스토리]
[339호] 2019년 01월 30일 (수) 11:21:27 주원규 goscon@goscon.co.kr
   
▲ 종말 이후의 생존을 다룬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 <더 로드>의 한 장면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상상력 
장르문학이나 장르물 영화 중 비교적 견고한 마니아층을 가진 장르가 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장르가 그렇다. 이 장르는 세계 문명이 충돌하거나 좀비, 뱀파이어와 같은 돌연변이의 출현, 제3차 세계 핵전쟁이 벌어지는 상상, 혹은 환경오염이 생태계의 기본 질서를 파괴해 결국은 모두 공멸한다는 이야기가 필수 프롤로그다. 또는 외계 행성에서 온 외계인의 불시 기습으로 인해 인류가 말살한다는 전개도 가능하며, 아니면 손쉽게 우주를 떠돌던 검은 행성 하나가 지구로 돌진, ‘쾅’ 하고 충돌한 뒤 지구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우주 속 먼지가 된다는 식의 허무주의 전개 등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 가진 장르의 상상력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장르문학에서 꽤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디스토피아 중 최악의 풍경만을 골라 지구 행성의 종말을 고한다. 그런데 이후 상황이 독특하다. 지구 종말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한 사람, 혹은 소수 공동체의 생존 이야기를 다루며 이야기 시작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는 마블(Marvel)이나 DC 코믹스로 대표되는 미국의 ‘히어로/히로인’물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히어로 장르는 임박한 인류 종말과 그 종말을 조장하는 사악한 세력에 맞선 영웅들의 분투를 그린다. 그러다가 그럭저럭 세련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게 팍스-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지향하는 히로인 장르만의 상상력이다. 반면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는 종말이 들이닥친 뒤 그 종말론적 폐허를 바라보는 허무주의 내지는 생존과 관련된 본성의 휴머니즘을 다룬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대표하는 영화로 비고 모텐슨이 출연한 2010년작 〈더 로드〉(The Road)를 꼽는 편이다. 영화는 초전박살 나버린 지구, 종말 이후를 살아내야 하는 생존의 기로에 놓인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를 그린다.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휴머니티는 아버지와 아들이란 부성애에 방점을 찍고 있다. 하지만 영화 제목 ‘길’이라는 모티브처럼 영화는 관객들에게 살아서 이 ‘길’을 걸어야 하는 이유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디테일에서 변주가 생기긴 하지만 이렇듯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가 지닌 기본은 지구 멸망 이후의 이야기다. 살아남은 인류는 늘 극소수다. 극단적인 예로 윌 스미스의 열연이 돋보이는 〈나는 전설이다〉(2007)는 뱀파이어의 대량 습격으로 인해 인류가 멸망하고 주인공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극단적 설정을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이 장르는 장르적 재미와 유희 포인트를 살아남은 극소수의 처절한 생존 이야기에서 찾는다. 혹은 또 다른 세계를 몽상하거나 극소수의 폐허사회에서 유령처럼 눈 뜬 독재, 독과점으로 대표되는 인간 욕망의 지겨운 지속을 역설하는 데 몰두하기도 한다. 주목할 만한 건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 대한 견고한 마니아층 수요가 계속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소수의 마니아만이 아닌 일종의 미디어 소비 현상으로 확대할 경우, 인간 종교심의 근간에 자리 잡은 전형적 질문과 도발적 질문이 혼재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지표로도 읽을 수 있다.

전형적인 질문은 하나의 명제를 닮아 있다. ‘종말은 왜 일어나야 하는가? 종말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수는 없는 건가?’ 종말에 대한 두려움, 불안의 노출이 그렇다. 이는 전형적이긴 하지만 늘 지속될 수밖에 없는 명제다.

인류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종말을 두려워하거나 종말이 초읽기에 들어섰다는 불안의 심리에 갇혀버렸다. 인류는 불안의 감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수인(囚人)이 되어버린 현실 앞에서 신음한다. 미디어는 그러한 종말의 불안을 상쇄하기 위한 일환으로 대규모 상업 자본의 힘을 이용해 포스트 아포칼립스 같은 장르물을 통해 종말을 소재로 활용하는 하위 호환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로는 종말론적 불안이 가져다준 영향력을 아예 지워버릴 수는 없다.

이 지점에서 또 하나 남은 도발적인 질문을 살피고자 한다. 그 질문은 장르적 상상력으로 종말을 맞이하는 입장이 아닌, 또 다른 종말을 대하는 인간이 가질 법한 특이한 질문이다.

‘굳이 종말을 외면해야 하는가? 그냥 받아들이면 안 되는가?’

‘종말 시장’의 막대한 지분을 가진 기독교
현대인의 무의식을 광기의 풍경으로 사로잡은 종말과 관련된 상품을 가장 활발히 수용하는 종교는 단연 기독교다. 성서 텍스트만 봐도 그렇다. 아포칼립스(Apocalypse), 묵시록이란 텍스트가 아예 정전(正傳)으로 존재하지 않는가. 어디 그뿐인가. 성서는 묵시문학이란 별도 장르로 전개된 텍스트 묶임을 담고 있어 미래에 대한 극단의 불안과 그 불안을 대하는 인류의 대오각성을 촉구하는 가르침을 당연하게 여긴다.

물론 불교나 다른 종교에도 현세 종말과 후천개벽의 도그마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전개되는 종말 장사는 대단히 공격적이고 역동적이다. 또한 기독교가 소비하는 종말은 대단히 낭만적인 영웅주의로 윤색되어 있다. 마치 미국 마블이나 DC 장르에 수없이 등장하는 히어로/히로인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종말을 어떻게 이야기해 왔을까? 다양한 신학적 입장 차이는 존재할 테니 여기서 그걸 구구절절 소개할 건 아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보인다. 종말이 필연적이고 하나님의 주권으로 대표된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종말을 언젠가 신이 정해놓은 타임라인에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 절대주권의 사건임을 강조한다. 종말이 신의 주권에 의한 필연이란 사실과 더불어 경고되는 카운트는 종말의 때에 신에게 간택 받은 성도는 신의 축복을 보장받을 것이고 그게 아니면 신으로부터 버림받아 완전한 지옥 불구덩이 속에 떨어지게 될 것을 강조한다. 쉽게 말해 종말 이후는 오직 천국과 지옥, 두 길의 택일만을 강요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다루는 종말에 관한 맥락(context)이 이렇다 보니, 기독교 문화는 임박한 종말과 그에 따른 환란을 신앙의 알파와 오메가로 설정하고 극한 긴장의 배수진 위에서 전개되는 숙명을 강요받는다. 신에게 선택받는 존재가 되느냐 버림받아 먼지 같은 존재로 주저앉느냐에 대한 택일의 불안을 가져온 게 종말인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그 불안을 잊게 해주는 것도 종말이란 점이다. 종말 시장은 임박한 종말의 카운트를 인간 삶의 시계에 세팅해놓고 그 카운트를 통해 어차피 소멸될 종말론적 삶을 구원의 삶으로 이끌어 올리려 안간힘을 쓰도록 기독교인을 채근한다. 기독교인은 그러한 안간힘의 일환으로 천국 가기 위해, 천국 백성이 되어 이 땅에서도 잘 살고 영원한 세계에서도 탈락하지 않기 위해 ‘제멋대로 사는 성공의 삶’을 평생의 목표로 삼게 된다. 비참하지만 기독교 정신 왜곡의 핵심엔 ‘제멋대로의 삶’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제멋대로의 선동 구호는 창세기 1장 28절에 등장한 세 가지 키워드 ‘생육, 번성, 충만’으로 대표된다. 

생육, 번성, 충만
종말론으로 무장된 기독교인에겐 괴상한 윤리관이 스며든다. 종말의 날은 신이 점지한 날이기에 그 날이 언제 올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날이 올 때까지는 내가 섬기는 신, 구체적으로 말해 하나님께 최선 다해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런데, 그 영광 돌리는 삶의 방식이 21세기에 접어든 기독교인, 특별히 한국의 기독교인에겐 어떻게 자리 잡았을까. 신자유주의 현실에서 무한대로 조장되는 성공과 자본 축적, 신계급사회의 최상층부 점거가 신의 영광으로 자리 잡진 않았는가.

멀리 갈 것도 없다. 그냥 현실로만 봐도 오늘의 한국교회는 양적 쇠퇴에 대한 대안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교회의 존재 근거를 맘몬 팽창의 욕망에 두던 그 인식에서 한 발자국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임박한 종말을 소비하는 삶의 방식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 채 나날이 미쳐 날뛰고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은 기독교 세상에 비틀린 목적을 부여하고야 말았다. 여기에 기계 문명, 비인간적 문명까지 가미되면서 인류는 지구라는 생태계의 주인인 것처럼 스스로 자격을 부여하고 그에 맞게 행동한다. 그러면서 기독교 세상은 또 한 편에서 재림 예수가 구름 타고 오시는 날이 머지않았다고 선동한다.

기독교는 한편으론 번성하라면서 또 한편으론 주님 오실 날이 머지않았다는 이중의 모순이 가져온 불안과 그 불안을 잊기 위해 극단적 모순을 행동강령으로 밀어붙인다. 임박한 종말을 두려워하며 그 마음을 종교심으로 상쇄하기 위해 신을 찾는다. 신을 찾는 과정에서, 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 세상을 더없이 열심히 살며 전리품을 취한다. 그렇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화를 생육·번성·충만이란 이름으로 극한까지 착취하고 약탈하는 것, 생태계 파괴의 아이콘인 신자유주의와 금권주의의 독주를 마음껏 흡취(吸醉)하는 것을 최종 만족지로 간주하는 것이다. 어느덧 기독교는 현대사회의 악의적 주류로 자리 잡았다.

이 맥락에서 가장 근본적인, 그만큼 뼈아픈 질문을 던지고 싶다. 과연 종말은 성서에 적힌 것처럼 신이 정한 그때, 그 절대주권이란 타임 라인에서 나타나는 걸까. 혹시 신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첫 단추부터 비틀린 상태에서 거의 생떼를 부리듯 시작된 건 아닐까. 이에 대한 답을 구하자면 지극히 부끄럽지만 단연 후자다.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
생육, 번성, 충만이란 신의 명령을 신과 인간, 신과 자연 사이에서 상호관련성을 갖고 전개되는 교류와 보존의 테마로 보지 않는 비틀린 시선은 신의 종말과 인류가 이끌어낸 종말을 철저히 분리한다.
생육, 번성, 충만의 테마가 자연 파괴의 강력한 동인이 된 것은 대량생산에 기반을 둔 산업사회와 그 산업사회를 맘몬으로 계급화해버린 자본주의다. 21세기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진짜 악마는, 이 자본을 국경, 인종, 문화, 정치 그 모든 걸 뛰어넘는 인간 지배의 아이콘으로 설정한 호모 캐피탈리스쿠스(Homo Capitalicus)의 탄생을 조장한 인간중심주의인 것이다. 여기에 신자유주의의 전 지구적 연대는 자연파괴, 환경오염의 재앙을 자본축적이란 이름으로 자행하면서 지구 생태계 전체에 치명적 교란을 일으켰다. 그 교란을 자본이란 이름하에 가속화해서 지구를 교란의 끝, 파괴의 궁극지인 절멸의 축으로까지 몰고 갔다. 문명이 낳은 괴물이 지구란 숨 쉬는 세계 자체를 공멸로 몰고 가는데, 놀라운 건 누구나 자신들은 피해자라고만 이야기하지 가해자, 공범으로 고백하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터무니없는 성서 왜곡은 이 지점에서 그로테스크한 빛을 발한다. 우리가 믿는 신이 생육·번성·충만하라고 해서 생육·번성·충만한 것뿐인데 그게 뭐가 잘못됐느냐는 게 전 지구적 위기를 대하는 기독교인의 태도다. 성서가 면죄부가 되어버렸다. 현대 사회는 그 스스로가 종말을 촉진하는 공범성은 철저히 침묵하고, 자본축적 능력에 따른 신계급 사회의 가속화와 환경 재앙에 대한 반성의 여지도 주지 않는다. 세계가 국가 단위로 고민하는 주제가 늘 추상적 논의에만 머무를 뿐, 인류 공영의 운명 문제를 함께 논의하기엔 이미 때가 늦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가지 분명하게 해두자. 지구촌의 종말을 이끌어 온 결정적 원인 제공에 있어 기독교의 책임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 문명은 2천 년 전 이후부터 심심찮게, 아니 습관처럼 길, 진리, 생명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 가르침을 철저히 왜곡했고 그 태도가 주류를 이루었다. 동시에 기독교 문명은 이율배반적으로 구름 타고 오실 재림 예수의 종말을 종교 결집 수단으로 소비했다. 임박하든 임박하지 않든 어찌 되었든 주님은 오실 테니 준비하라고 선전하는 동시에 한편으론 맘몬의 노예가 되어 환경오염과 생태계 교란의 가속화를 생육, 번성, 충만이라는 이름으로 마음껏 배설했다. 한마디로 ‘종교 장사의 끝판왕’이 되어 인류 전체를 인질로 삼은 제노사이드(genocide, 대량학살)를 단행한 것이다.

종교 장사의 결정적 패착은 종말에 대한 불안을 신의 절대주권 영역에 매달아 놓고, 정작 비인간성으로 무장한 문명과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에는 면죄부를 남발한 것이다. 그렇게 지구 생태계를 향해 난도질하듯 가한 제노사이드 충동을 방치했다는 점이다. 환경 재앙의 제노사이드 충동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미명하에 자행한 거라고 합리화했다는 말이다. 이 지점에서 과연 반성이나 돌이킴 따위가 가능한가. 이 시점에서 가당키나 할까. 이미 때를 놓쳤다. 놓쳐도 아주 한참 전에 놓쳤다.  

환경 파괴의 제노사이드 현상을 세심히 진단하고 살피기도 전에 이미 종말은 시작되었다. 문명, 자본, 욕망이 이끌어낸 밑으로부터의 종말, 환경 재앙, 생태계 붕괴의 종말 말이다. 단언컨대 이제는 재림 예수가 아무리 빨리 오신다 해도 인간이 이끌어낸 환경 재앙으로 인한 종말의 속도를 따라잡을 순 없다. 재림 예수가 구름 타고 내려와 ‘짠!’ 하고 종말을 고해도 인류가 자초한 종말보단 한발 늦고야 말 것이다.

다시, 포스트 아포칼립스로 돌아와서
장르의 상상력, 특히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상상력은 기독교 도그마가 가진 한계를 수월하게 비켜서게 해준다. 비켜서서 생각하는 사유의 숨길을 열어준다. 그로 인해 우리는 기독교 도그마의 중심을 다시금 투명하게 대면하게 되는 기회를 제공받는다.

그 비켜섬의 숨길엔 종말 이후의 생존 이야기가 있다. 낭만적이거나 환상적인 기독교 상상력에서 촉발된 종말 이후의 세계는 결정된 세계다. 천국 가면 환상이 극대화되고 지옥 가면 비극이 극대화된다. 하지만 천국이나 지옥 모두 생존에 대해선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서의 주요 주제는 ‘생존’이다. 인류가 자초한 종말이든, 신이 내정한 종말이든, 그게 뭐가 되었든 우리는 지겹게 살아남을 것이다. 장르의 상상력에선 그 살아남은 ‘나’를 실존이라 말한다.

실존은 ‘나’를 배제하지 않는다. ‘나’를 ‘나’로 마주 보게 한다. 장르의 상상력은 ‘나’의 위치를 종말 이후의 ‘나’로 옮겨 세운다. 종말이면 다 끝날 줄 알았던 ‘나’는 그 역시 좋든 싫든 그 자리에서 다시 생존을 말해야 한다. 환경 파괴로 재앙을 맞이했다 해도 우리 실존은 소멸되지 않고 그 어디서든 종말 이후의 삶을 버텨내야 한다는 것, 그것이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가 말하는 상상력의 핵심이다.
이 경우 ‘왜 살아 있어야 하지?’라는 식의 질문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에선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상대적으로 ‘나’라는 실존을 제외한 세상이 종말을 고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이렇게 묻는 게 합리적이다. ‘나’는 왜 살아남았지?

생존을 묻는 ‘나’는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지점에서부터 다시 사유할 것을 요청받는다. ‘나’라는 실존 외에 다른 모든 것이 종말을 맞이한 이유에 대해 주목하게 한다. 이 경우 홀로 살아남은 ‘나’는 그 원인을 단순하고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된다. 지구 종말을 촉진한 원인체는 인류에게 있다. 하지만 생존의 ‘나’는 그 원인을 신에게서도, 단순히 인류의 잘못으로도 몰아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선명하게 종말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인간이 잘못했네, 신이 잘못했네 하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거두고 종말을 잉태한 구조에 눈을 뜨고야 만다.

장르의 상상력은 이 지점에서 답을 유보한다. 잘 알겠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는 SF 장르의 하위 호환이다. 몇몇 주목할 만한 영화나 문학 작품들이 소개되긴 해도 여전히 이 장르는 비주류다. 그런데, 이 비주류를 맴도는 장르의 상상력이 기독교인의 실존, 그 한 자리를 환기하고 각성시킨다. 신학적 비약이 허락된다면 호세아서에서 밝힌 것과 같은 하위 호환의 비주류가 상위 호환, 즉 그들만의 카르텔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호 2:23)

이제 우리는 답을 유보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대한 기독교적인 답 내지는 방향성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종말 이후의 생존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독교인이 목도해야 할 실존의 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를 종말의 상상력이라 부른다면 이 경우 종말의 개념이 다시 이야기되길 요청받는다.

종말을 향해, 혼돈을 향해 한 걸음
기독교인에게 종말의 상상력은 더 이상 상상의 범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 종말은 이미 출현된, 그리고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으로서의 종말이다. 더 이상 징후나 불안으로 예측되는 종말이 아닌 이미 빗장이 풀린 종말이다.

종말의 심연 속에서 기독교인의 자기 위치는 너무나 미약해 보인다. 생육, 번성, 충만이란 주제에 대한 오해가 빚어낸 기독교 역사의 비극 앞에서 죄책 고백을 하는 것도 이미 시기가 늦었다. 그렇다 해서 뭔가를 할 포지션을 확보하려 하면 기독교 담론이 구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만 확인된다. 신학이 사회와 세상에 더 이상 어떤 역할도 기대할 수 없어 보이는 게 냉엄한 오늘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 냉엄한 현실이 종말의 한 중심에 서 있는 기독교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길을 보여준다. 기독교인의 실존에 자리 잡은 종말은 우려, 두려움, 불안이 아니라 이미 들이닥친 현실이다. 이는 생존에 대해 눈뜨게 하는 실존적 요청을 가능케 한다. 생존을 위해 한 걸음 내딛는 기독교인에게 보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냉엄함, 그 지독한 낯섦이 우리에게 생각과 질문이란 걸 할 수 있는 동아줄이 되어야 한다. 그 낯선 곳을 하나님 나라라고 부를 수 있다면.

생존하는 ‘나’의 실존과 조우한 기독교인은 자책의 영성이나 절대타자에 매달리는 식의 종말 장사의 굿판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광활한 종말 장사의 마켓(market)에서 벗어나거나 한 걸음 물러서서 종말 장사의 기형적 구조를 목격할 것이다. 기독교인은 지금까지 그 구조의 안팎에서 때론 억류되거나 때론 기생하면서 그 정체성을 인정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감히 시작될 것이다. 마켓의 자장이란 구조악의 불고리가 무너지는 폐허의 한 실마리에서부터 첫 단추가 다시 끼워질 것이다. 혼돈이지만 혼돈이 아닌, 종말이지만 종말이 아닌 낯선 천국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딜 것이다. 제법 열광적이거나 건조하게. 

 

주원규
목사, 소설가, 칼럼니스트.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에서 구약학을 전공했으며(Th.D) 현재는 동서말씀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소설 《열외인종 잔혹사》 《나쁜 하나님》 외 다수가 있고, 신학 관련 책 《땅의 예수, 하늘의 예수》 《진보의 예수, 보수의 예수》 등이 있다. 기독 언론사 〈뉴스앤조이〉 〈국민일보〉 등에 정기 칼럼을 기고하며, tvN 드라마 〈아르곤〉 대본을 집필하는 등 드라마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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