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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여, 낮은 청빈의 자리에 설 수 있는가?
[344호 역사에 길을 묻다: 공의회의 사회사 07] 비엔나 공의회
[344호] 2019년 07월 01일 (월) 17:47:15 최종원 goscon@goscon.co.kr
   
▲ 폴 라크르와가 그린 '비엔나 공의회'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1. 교황청의 ‘바벨론 유수’
지난 호에서 제1, 2차 리용 공의회를 다루면서, 16세기 종교개혁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구도로만 볼 것이 아니라 교권과 속권의 대립 및 세속권력의 승리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비엔나 공의회(1311) 전후로 이 흐름이 점점 구체화되어갔습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당대에는 큰 반향을 가져오지 않은 사건들이 실제로는 더 명확하게 시대상을 웅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엔나 공의회’가 그렇습니다. 공의회 역사의 관점에서만 보면 소집 목적이나 결정 내용 등이 크게 주목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 공의회는 중세말기의 변화를 이해하는 여러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 줍니다.

비엔나 공의회는 1311년 프랑스 왕 필리프 4세(1268-1314)의 강력한 요청으로,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스 5세(재위 1305-1314)가 비엔나에서 소집했습니다. 여기서 우선 세 가지를 주목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필리프 4세입니다. 다음으로, 프랑스인 교황이라는 점이며, 마지막으로 비엔나에서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기는 프랑스에 의한, 프랑스를 위한, 프랑스의 시대였습니다. 역사는 이 시기의 교회를 ‘아비뇽 유수기’라고 부릅니다. 아비뇽 유수기란 로마에 있어야 할 교황청이 프랑스 왕의 요구로 1309-1377년까지 70년 동안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 있었던 시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최초의 인문주의자라고 알려진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는 유다 왕국의 멸망으로 일어난 바빌론 유수에 빗대어 이 시기를 ‘교회의 바벨론 유수기’라고 불렀습니다.

왜, 무슨 일로, 교황청은 이런 굴욕을 당했을까요? 이 과정의 핵심에 서 있는 인물이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입니다.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재위1294-1303)와의 대립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아마 세계사나 교회사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있다면 들어봤음직한 인물들이지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필리프 4세와의 대립 와중에 ‘우남 상탐’(unam sanctam)이라는 교서를 발행합니다. 이 교서는 중세말 교권과 속권이 대립한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 자금 마련을 목적으로 프랑스 내 성직자들에게 과세를 실시합니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국가가 교황의 동의 없이 성직자에게 과세하는 것은 속권의 교권 침해라며 반발했습니다. 아울러 이를 철회하지 않을 경우 필리프 4세에게 파문이나 성무정지령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대립은 전에 서임권 논쟁에서 살폈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와 잉글랜드의 존 왕 사이에 일어난 충돌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르게 이번에는 세속권력이 승리했습니다. 1296년 필리프 4세는 프랑스의 자금이 교황청으로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고, 교황청의 외교관들을 추방했습니다.

재정 압박이 진행되고 프랑스 성직자들이 프랑스 국왕의 편에 서게 되자 교황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에 교황은 두 가지 유화책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국왕의 성직자 과세권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필리프의 조부 루이 9세-생 루이(Saint Louis)-를 가장 모범적인 그리스도교 군주로 인정하여 1297년 성인으로 시성한 것이었습니다. 성인으로 시성된 유일한 프랑스 왕이 바로 이 성왕 루이였다는 점은 교황이 처한 곤혹스러운 상황을 짐작케 해줍니다.

하지만, 필리프 4세는 프랑스 주교와 귀족들을 장악한 채 지속적으로 교황을 압박합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교황은 1302년 ‘우남 상탐’을 발표합니다. 이 교서는 가톨릭 교회에만 구원이 있으며, 세속권력은 교황권에 복종해야 한다는 ‘교황 수위권’(papal supremacy)을  주장합니다. 흔히 중세의 강력한 가톨릭을 상징하는 것으로 오해되는 이 교서는, 태동하는 국민국가 권력에 맞선 교황의 마지막 몸부림을 상징합니다.

이듬해인 1303년 필리프 4세는 아냐니의 별장에 머물던 교황을 체포하여 교황에게 돌이킬 수 없는 수모를 안깁니다. 결국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절망 속에 죽어갔습니다. 이 이탈리아 출신 교황의 죽음과 그를 계승한 같은 이탈리아 출신의 베네딕투스 11세의 8개월간의 재임 후, 교황청은 프랑스 출신이 장악하게 됩니다. 베네딕투스 11세에 이어 선출된 프랑스인 교황이 바로 비엔나 공의회를 소집한 클레멘스 5세입니다. 그는 비엔나 공의회 소집보다는 교황청을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긴 당사자라는 사실 때문에 역사에서 기억되고 있습니다. 아비뇽 유수 70년 동안 재임한 교황이 모두 프랑스인이었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교황들이 프랑스 국왕을 이롭게 하기 위해 앞장선 것도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 아니었겠는지요.

2. 비엔나 공의회의 전개와 결정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프랑스 국왕의 요청으로 프랑스 출신의 교황이 아비뇽이 아닌 짐짓 중립적으로 보이는 비엔나에서 공의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아마 프랑스 관할이 아닌 비엔나에서 공의회를 개최한 것은 속권에 무조건 무너지지 않겠다는 교황의 최소한의 자존심을 반영한 결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명의 추기경과 100여 명의 주교들, 그리고 수도원장들이 참여한 이 공의회에서 다룬 의제는 철저하게 세속권력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습니다. 70년 아비뇽 유수기의 교회는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막강한 권력을 상실한 교황청이 취한 선택지가 무엇이었는지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교회는 좀 더 근본적인 고민 속으로 들어갑니다.

공교롭게도 그 핵심의제는 세속권력과 재물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와 권력, 교회와 금력(金力)의 관계 속에서 새롭고도 급진적인 주장들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이 기간은 좀 더 근본적으로 국가와 교회 사이의 정치 원리에 대한 재고와, 교회가 그동안 쌓아왔던 부에 대해 근원적으로 고민하도록 만듭니다. 이 공의회에서 다룬 가장 중요한 의제는 성전기사단(The Order of Knights Templar)과 교회의 ‘사도적 청빈’ 논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기사단 해산
성전기사단은 대체 어떤 조직이길래 이 공의회에서 핵심적으로 다루어졌을까요? 이 기사단은 1139년 가톨릭 군사 수도회, 즉 기사단으로 공식 승인을 받아 비엔나 공의회에서 해산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존속했습니다.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 기사단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 이 기사단에서 전투원은 채 10%가 되지 않습니다. 이 기사단의 실질적인 영향력은 전 유럽에 걸쳐 강력한 경제 인프라를 구축하여 십자군이나 기타 전쟁의 재원을 조달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 재원 조달 수단으로는 그저 개인의 후원금만이 아니라, 십자군 원정을 조직할 때 원정대에 참여하는 군주와 귀족과 기사들의 재산을 신탁 관리하는 일까지 포함되었습니다.

이러한 자산 신탁 관리가 성전기사단이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비결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은행업의 초기 형태를 형성하고, 최초의 다국적 기업이라는 평가도 받습니다. 자연히 십자군 원정이나 주변국과의 전쟁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려는 군주들은 성전기사단에게 토지 등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습니다. 유럽 전역에 이 성전기사단의 자산과 토지가 확대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 역시 잉글랜드와의 전쟁 준비 및 십자군 재원 조달 등의 목적으로 엄청난 부채를 성전기사단에게 지고 있었습니다. 십자군 원정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후에도 성전기사단은 탁월한 경영 능력을 앞세워 유럽 내부에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필리프 4세는 교황을 압박하여 이 성전기사단을 해산하도록 종용합니다. 그래서 성전기사단장인 쟈크 드 몰레(Jacque de Molay)를 이단 혐의를 들어 압박합니다. 1307년 필리프 4세는 쟈크 드 몰레와 핵심 단원들을 신성모독, 동성애, 부패, 사기 등의 죄목을 적시하여 체포하고 고문했습니다. 고문에 못 이긴 이들이 죄를 자백하자, 필리프는 교황에게 요구하여 전 유럽의 성전기사단원들을 체포하고 재산을 압수하게 합니다. 나아가 교황은 필리프 4세의 압박에 못이겨 공의회를 소집하여 이 성전기사단을 해산하고 재산을 몰수하게 됩니다. 성전기사단의 해산은 교황청의 입장에서 보자면 교황 직할인 수도회의 안정적인 자금원이 사라진 셈이지요.

또한 이 공의회에서는 전직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필리프 4세에게 가했던 모든 이단 혐의를 공식적으로 없애주었습니다. 물론 이미 사전에 교황 클레멘스 5세와 협상한 내용이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이 결정에 대한 보답으로 필리프 4세는 자신과 자신의 왕위를 이을 아들들과 귀족들의 명의로 6년 내에 십자군을 결성하겠다는 서신을 공의회에 보내어 낭독하게 합니다. 자신이 연로하여 그 이전에 사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아들들의 이름을 함께 서신에 넣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듬해 필리프 4세는 사망하고 십자군은 결성되지 못했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이 공의회에서 성전기사단이라고 불리는 한 군사적 성격의 수도회가 사라졌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수많은 수도회가 명멸한 상황에서 이 결정은 그리 새삼스러울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전기사단의 해산은 곧, 교회에 더 핵심적이고 근본적이며 급진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가 재산을 보유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이른바 봉건제의 가장 상층을 차지했던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이 중앙집권적인 성격을 띤 원시적인 형태의 국민국가의 등장으로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세속군주의 위협 아래 교황청은 천년 이상을 머물던 로마를 떠나 아비뇽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자연히 교회란 무엇인가, 즉 세속 사회에서 교회의 본질과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급진적으로 재고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이 목소리는 12세기 탁발수도회라는 형태로 등장하여 유럽 교회의 지형을 뒤흔듭니다. 토지를 소유하며 자급자족하는 공동체로 살던 그 이전의 수도회와는 달리 급진적으로 무소유를 주장하며 탁발(托鉢, 구걸)을 통해 생활을 유지하는 수도회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른바 ‘사도적 청빈’(apostolic poverty)를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도발적인 도전에 가톨릭 교회는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사도적 청빈’은 가능한가
중세에 개최된 모든 공의회의 일상적 의제 중 하나가 교회 개혁 관련 사안입니다. 때로는 교회 개혁의 의제로 성직자의 독신이 강조된 적이 있었고, 엄격한 성직매매의 금지를 결정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한 교회의 성사 제도를 완비하거나 교회의 재판 체제를 정비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비엔나 공의회에서 교회 개혁을 위해 내세운 의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선은 ‘베긴회’(Beguine)라고 불리는 북유럽 기반의 한 여성 속인(俗人)수도회를 이단으로 정죄한 것입니다. 베긴회는 자발적 청빈과 빈자들에 대한 환대, 종교적 헌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자취를 닮고자 했던 13세기의 ‘속인 종교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이 혼인을 부정하고 모든 세속의 삶을 부정한 과도한 금욕주의를 주창했다는 이유로 제도 교회인 가톨릭 교회로부터 수도회로 인정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로부터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물론 비엔나 공의회 이후로도 일부 세력이 유지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영향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탁발수도회와 베긴회가 공통적으로 주장했던 바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핵심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사도적 청빈’이라는 단어로 정리됩니다. 사도적 청빈은 탁발수도회가 내건 핵심적인 가치로 그리스도의 삶과 사도들의 발자취를 따라 이 땅에서 어떠한 토지를 소유하거나 재산을 모으지 않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삶의 자취를 밟아 나간다는 점에서 이 주장이 갖는 상징성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이 주장은 당대 중세 봉건제의 최상위이던 영주의 지위를 차지하고 부와 권력을 독점하던 교회의 부패에 대한 대안으로 가장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사도적 청빈을 추구하는 프란체스코회와 베긴회 같은 속인수도회는 하나의 거대한 종교 운동을 형성했습니다.

하지만 제도 교회가 안게 된 고민은 좀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교회의 부와 부패에 맞서 모든 부를 버리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은 비단 제도 교회에서만 제기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탁발수도회 내부에서도 제기된 문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프란체스코회에서는 수도회 창시자인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지켜 무소유를 실천할지, 아니면, 날로 규모가 커지는 수도회를 관리하기 위해 일정 부분 타협이 필요한지를 놓고 내부 갈등이 치열해졌습니다. 이런 갈등은 프란체스코 생전에 이미 분출되었고, 프란체스코회는 급진 근본주의를 주창하는 영성파(Fraticelli)와 현실에 맞게 변화를 추구하는 온건파(Conventual)로 나뉘었습니다.

청빈을 둘러싼 이 논쟁은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기에 일어난 가장 치열한 논쟁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와 교회의 재산 소유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전까지 교회 혹은 교황의 영향력은 단순히 종교적인 것을 넘어 세속권력과의 견제와 균형 속에서 세속권력을 통제하는 실질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황청의 전성기는 결국 교회권력의 과도한 확장을 낳았고, 교회의 축적된 재산과 성직자의 부패는 큰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중에 고대 교회, 즉 사도교회의 모습에 대한 근원적인 회복을 내건 이들이 생겨나 영향력을 키워갔습니다. 그중에 온건파 프란체스코회는 교황청의 공식 인정을 받았고, 영성파 프란체스코회, 그리고 왈도파나 베긴회 같이 이단으로 내몰린 운동도 다수 있었습니다.

비엔나 공의회 전후로 제기된 중요한 흐름 중 하나가 이 영성파 프란체스코회가 주장하는 사도적 청빈을 공격한 것입니다. 1317년 클레멘스 5세의 후임인 교황 요한네스 22세(재위 1316-1334)는 영성파 프란체스코회를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정죄합니다. 사도적 청빈을 둘러싼 논쟁이 이로써 마무리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사도교회와 비교하여 당대 교회의 문제점을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성경의 묘사를 보면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실제로 재산을 소유하지 않은 삶을 실천했거나 지향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논의는 그렇게 간단히 마무리되지는 않았습니다. 반대편에서는 교회의 무소유에 대한 주장을 모든 것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주권(ownership)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323년 교황 요한네스 22세는 결국 그리스도와 사도의 무소유에 대한 주장을 오류와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몇 차례 엎치락뒤치락이 있은 후 결국 1328년 다수의 프란체스코회 수사들이 교황의 가르침에 복종하기로 하면서 이 논쟁은 일단락되었습니다. 끝까지 반대한 영성파는 이단으로 몰려 가혹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3. 도전 받는 교회, 무엇을 선택했는가
비엔나 공의회는 아비뇽으로 옮긴 교황청이 개최한 처음이자 마지막 공의회입니다. 교황과 추기경단이 대부분 프랑스인으로 채워져 있다고는 하지만, 보니파키우스 8세 이후 처참하게 나락으로 떨어진 가톨릭 교회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암중모색했을 것임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세속의 정치에서 행사하던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고, 영향력을 지탱하는 밑거름이 된 자금원도 크게 잃어버렸습니다. 사도적 청빈이란 교회의 이 암중모색 과정에서 화두처럼 던져진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모든 세속적 영향력과 부를 거부하고 종교적 가르침으로만 사람들을 감화했기에 교회는 세속의 모든 권력과 부를 포기하는 길을 가야 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요구는 어떤 의미에서 제도 교회가 당장 선택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도적 청빈 논쟁은 현실에 적용될 수 없는 무익한 논쟁이었을까요? 아무 의미 없는 논쟁이었을까요?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아비뇽 유수 시절인 1327년 11월을 배경으로 삼았습니다(탁월한 중세학자답게 에코는 중세를 읽어 나갈 중요한 코드들을 소설 곳곳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중요한 한 축이 바로 핍박을 피해 수도원에 도피해 있던 영성파 프란체스코회 수사들과 교황청 사절로 온 도미니크회 수사들 사이의 ‘청빈 논쟁’입니다. 그만큼 이 논쟁은 중세 말의 급격한 사회·정치·경제적 변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입니다.

뻔하고 지루한 양측의 입장이 맞서다, 결국 이전투구로 번진 이 논쟁을 지켜본 소설 속의 화자 아드소는 자신의 스승 바스커빌의 윌리엄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 받습니다.

“사부님, 그리스도의 청빈을 증명하고 논박하기 위해 내세울 수 있는 주장들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까?”
 “글쎄다. 두 입장이 다 맞는다고 할 수도 있겠지. 복음서로서는 어차피 증명도 논파도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재산을, 입고 계신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셨을 게야. 걸레가 되면 버리셨을 테니까…… 청빈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은 우리 프란체스코회의 이론보다 훨씬 대담하다. 우리는, <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사용할 뿐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퀴나스께서는, <물질을 소유하고, 그대 자신을 그 물질의 소유자로 여기되, 필요로 하는 자가 있거든 쓰게 하라, 이는 자비가 아니라 의무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가난했느냐, 가난하지 않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청빈해야 하느냐, 그렇지 않아도 되느냐 하는 데 있다. <가난>의 의미는 궁전을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땅의 일에 대해 다스릴 권리를 갖느냐 포기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황제께서는, 교황이 그 권리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프란체스코회가 말하는 청빈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황제 편을 들어 교황을 상대로 대리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야. 하나 마르실리오와 나는 이것을 양면전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희망은, 황제가 우리의 믿음을 지지하되, 이것을 정치에 원용했으면 하는 것이다.”
- 《장미의 이름》,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621-622쪽

글 첫 머리에 언급한 바와 같이 종교개혁은 세속과 교회의 관계 재설정입니다. 교회가 향유하던 권력과 부가 세속국가로 이동하는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교회의 설 자리에 대한 급진적인 고민이 요구된 것이지요. 사도적 청빈이란 아드소의 표현처럼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비현실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프란체스코회가 던진 사도적 청빈이라는 화두는 도미니크회의 토마스 아퀴나스 해석처럼, 단순히 세속적 부의 소유 여부가 아니라 이 땅의 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가의 여부에 대한 고민입니다.

에코가 프란체스코회가 황제를 업고 교황과 대리전을 한다고 표현한 것은 교회가 세속권력과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이는 중세말 대두된 세속권력으로 교회 지배를 정당화하는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1275-1342)의 이론에서 핵심인 동시에, 잉글랜드의 개혁가 존 위클리프(1320?-1384)의 세속지배론(civil dominion)에서 제시된 주장이기도 했습니다.

세속권력과 맞서다 교황청이 바빌론 유수와 같은 상황을 경험하게 된 사건은 분명 교회로서는 치욕적인 패배입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사도적 청빈의 주장이 제기되고 확산되어 갔다는 것은 교회에 요구하는 시대정신이 바뀌었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잡혀간 ‘바빌론 강가’에서 다시 회복할 사도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기억하며 울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급진적인 주장으로 보이나, 그 주장 앞에서 고민할 때 진정으로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정치화된 집단과 목회자 일부가 벌이는 일들은, 그저 부끄럽다고,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애써 무시하고 넘어갈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지금껏 한국 사회에서 제도 교회가 누려왔던 권력을 상실함으로 인해 생겨난 모습의 한 극단에 불과한, 그래서 우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이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그 해법은 적당하게가 아니라, 더욱 급진적으로 지향할 바를 고민하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스커빌의 윌리엄의 표현처럼 ‘땅의 일에 대해 다스릴 권리를 갖느냐 포기하느냐’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지요. 종교에 주어진 권력을 포기하고 낮은 자의 자리, 청빈의 자리에 설 때 교회는 살 길이 보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랬던 것처럼,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 연재 순서
1. 왜 지금 ‘공의회’인가? : 사회사 관점으로 교회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2. 동서교회 분열의 서막인가, 확장인가 :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 위로부터 이뤄지는 교회 개혁의 전형 : 제1, 2차 라테란 공의회
4. 권력의 정점을 향하는 교회, 그 빛과 그림자 : 제3차 라테란 공의회
5. 가톨릭 교회, 삶과 죽음의 지배를 완성하다 : 제4차 라테란 공의회
6.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 제 1, 2차 리용 공의회
7. 교회여, 낮은 청빈의 자리에 설 수 있는가? : 비엔나 공의회
8. 콘스탄츠 공의회
9. 바젤, 페라라, 피렌체 공의회
10. 제5차 라테란 공의회
11. 트렌트 공의회
12.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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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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