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호 역사에 길을 묻다: 공의회의 사회사 07] 비엔나 공의회

   
▲ 폴 라크르와가 그린 '비엔나 공의회'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1. 교황청의 ‘바벨론 유수’
지난 호에서 제1, 2차 리용 공의회를 다루면서, 16세기 종교개혁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구도로만 볼 것이 아니라 교권과 속권의 대립 및 세속권력의 승리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비엔나 공의회(1311) 전후로 이 흐름이 점점 구체화되어갔습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당대에는 큰 반향을 가져오지 않은 사건들이 실제로는 더 명확하게 시대상을 웅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엔나 공의회’가 그렇습니다. 공의회 역사의 관점에서만 보면 소집 목적이나 결정 내용 등이 크게 주목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 공의회는 중세말기의 변화를 이해하는 여러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 줍니다.

비엔나 공의회는 1311년 프랑스 왕 필리프 4세(1268-1314)의 강력한 요청으로,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스 5세(재위 1305-1314)가 비엔나에서 소집했습니다. 여기서 우선 세 가지를 주목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필리프 4세입니다. 다음으로, 프랑스인 교황이라는 점이며, 마지막으로 비엔나에서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기는 프랑스에 의한, 프랑스를 위한, 프랑스의 시대였습니다. 역사는 이 시기의 교회를 ‘아비뇽 유수기’라고 부릅니다. 아비뇽 유수기란 로마에 있어야 할 교황청이 프랑스 왕의 요구로 1309-1377년까지 70년 동안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 있었던 시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최초의 인문주의자라고 알려진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는 유다 왕국의 멸망으로 일어난 바빌론 유수에 빗대어 이 시기를 ‘교회의 바벨론 유수기’라고 불렀습니다.

왜, 무슨 일로, 교황청은 이런 굴욕을 당했을까요? 이 과정의 핵심에 서 있는 인물이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입니다.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재위1294-1303)와의 대립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아마 세계사나 교회사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있다면 들어봤음직한 인물들이지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필리프 4세와의 대립 와중에 ‘우남 상탐’(unam sanctam)이라는 교서를 발행합니다. 이 교서는 중세말 교권과 속권이 대립한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 자금 마련을 목적으로 프랑스 내 성직자들에게 과세를 실시합니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국가가 교황의 동의 없이 성직자에게 과세하는 것은 속권의 교권 침해라며 반발했습니다. 아울러 이를 철회하지 않을 경우 필리프 4세에게 파문이나 성무정지령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대립은 전에 서임권 논쟁에서 살폈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와 잉글랜드의 존 왕 사이에 일어난 충돌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르게 이번에는 세속권력이 승리했습니다. 1296년 필리프 4세는 프랑스의 자금이 교황청으로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고, 교황청의 외교관들을 추방했습니다.

재정 압박이 진행되고 프랑스 성직자들이 프랑스 국왕의 편에 서게 되자 교황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에 교황은 두 가지 유화책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국왕의 성직자 과세권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필리프의 조부 루이 9세-생 루이(Saint Louis)-를 가장 모범적인 그리스도교 군주로 인정하여 1297년 성인으로 시성한 것이었습니다. 성인으로 시성된 유일한 프랑스 왕이 바로 이 성왕 루이였다는 점은 교황이 처한 곤혹스러운 상황을 짐작케 해줍니다.

하지만, 필리프 4세는 프랑스 주교와 귀족들을 장악한 채 지속적으로 교황을 압박합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교황은 1302년 ‘우남 상탐’을 발표합니다. 이 교서는 가톨릭 교회에만 구원이 있으며, 세속권력은 교황권에 복종해야 한다는 ‘교황 수위권’(papal supremacy)을  주장합니다. 흔히 중세의 강력한 가톨릭을 상징하는 것으로 오해되는 이 교서는, 태동하는 국민국가 권력에 맞선 교황의 마지막 몸부림을 상징합니다.

이듬해인 1303년 필리프 4세는 아냐니의 별장에 머물던 교황을 체포하여 교황에게 돌이킬 수 없는 수모를 안깁니다. 결국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절망 속에 죽어갔습니다. 이 이탈리아 출신 교황의 죽음과 그를 계승한 같은 이탈리아 출신의 베네딕투스 11세의 8개월간의 재임 후, 교황청은 프랑스 출신이 장악하게 됩니다. 베네딕투스 11세에 이어 선출된 프랑스인 교황이 바로 비엔나 공의회를 소집한 클레멘스 5세입니다. 그는 비엔나 공의회 소집보다는 교황청을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긴 당사자라는 사실 때문에 역사에서 기억되고 있습니다. 아비뇽 유수 70년 동안 재임한 교황이 모두 프랑스인이었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교황들이 프랑스 국왕을 이롭게 하기 위해 앞장선 것도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 아니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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