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호 역사에 길을 묻다: 공의회의 사회사 08] 콘스탄츠 공의회(1414)

1. 교회 대분열(1378-1417)
1309-1377년에 이르는 약 70년간의 프랑스 아비뇽 교황청 시절(아비뇽 유수기)은 유럽사에서 중대한 변곡점을 맞이한 시기였습니다. 이 기간에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긴 클레멘트 5세부터 아비뇽을 떠나 로마로 돌아간 그레고리우스 11세까지 총 7명의 교황이 거쳐갔습니다. 교황청이 프랑스 왕의 영향하에 있었던 만큼 이들 모두는 프랑스인이었습니다.

자연히 국가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교황청은 중앙집권화되어 가는 국가체제를 따르게 됩니다. 이에 교황청은 점차 독자적인 재원 마련 체계를 만들어갑니다. 대표적인 예가 교회 재산의 십일조를 교황청에 내는 것과, 주교가 된 성직자의 첫 해 소득을 초입세(annates)라는 명목으로 교황에게 바치게 하는 것 등입니다. 이러한 체계 형성이 시사하는 바는 의미심장합니다. 우선은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최상위 계서(階序)를 형성하고 있던 로마가톨릭 교황청이 그 위상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불과 120-130년 전만 해도 유럽 봉건제의 최상위 지배자로 개별 국가로부터 세금을 받아 영위하던 교황청의 수입원 감소입니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국가 내 성직자들에게 여러 명목으로 과세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히 주교를 비롯한 고위 성직자 선출에 뇌물이 오가는 현상을 낳습니다.

교황에게도 순종해야 하지만 관료로서 국가에도 충성해야 하는 이중적 지위를 지닌 성직자들에게 이는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성직자가 친국가 성향을 띠느냐, 친로마 성향을 보이느냐에 따라 국가와 교회 사이의 균형추가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4세기 말의 잉글랜드 종교개혁가 위클리프(1320?-1384)는 “왜 잉글랜드 사람들이 낸 돈이 로마로 흘러들어가야 하는가?” 하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했지요.

지난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도 따지고 보면 가톨릭 교회가 세속국가의 영향력 아래로 종속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유럽에서 서서히 근대적 형태의 국가 체계가 형성되어가는 흐름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 교회 대분열(The Great Schism, East-West Schism)의 시기와 상당 기간 중첩되는 백년전쟁(1337-1453) 동안에야 비로소 잉글랜드인과 프랑스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구별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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