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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343호 역사에 길을 묻다 : 공의회의 사회사 06] 제1, 2차 리용 공의회
[343호] 2019년 05월 28일 (화) 10:51:31 최종원 goscon@goscon.co.kr

 

1. 중세와 근대의 맥락을 연결한 공의회들

19세기와 20세기에 각각 한 차례 열린 제1,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제외하고 가장 마지막으로 소집된 공의회는 종교개혁에 대한 대응책으로 열린 트렌트 공의회(1545)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공의회들이 서유럽 중세 가톨릭 형성과 연관된 것이기에, 유럽이라는 맥락에서 공의회의 역사는 트렌트 공의회에서 일단락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습니다. 이쯤해서 공의회 역사를 유럽사와 연결 지어 흐름을 잡는 것이 전체 구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필요할 듯합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최초로 가톨릭이 개최한 독자적인 공의회는 유럽이라는 라틴 문명권에서 독자적인 그리스도교 문화를 형성해가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이 흐름에는 동로마제국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권력을 형성하고자 했던 가톨릭 교황청과 서유럽 군주들의 의지가 반영되었습니다. 동로마제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대립한 결과 동·서방 교회의 분열(1054)을 낳기도 했습니다. 서방 가톨릭 교회는 그 힘을 한껏 밀어붙여 유럽에서 정치적으로는 봉건체제의 최상위에 자리하였습니다. 더불어 동방신학과 구별되게 라틴어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라틴 신학과 의식(儀式)들을 형성했습니다. 이 구도에서 상당 기간 서유럽 역사의 주인공은 가톨릭 교회였고 교황이 서유럽 형성과 발전기의 실질적인 주도권을 행사했습니다. 교황의 요청으로 유럽의 세속 군주들 대부분이 참여한 십자군 원정이 두 세기 이상 이어졌고, 가톨릭 교회가 주도하여 칠성사(七聖事)라는 종교 체제를 완성하였습니다. 그 변곡점에 자리하고 있던 것이 지금껏 살펴왔던 서유럽 중세의 공의회들이었습니다. 

지난 호에서는 서유럽사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볼 수 있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삶과 죽음의 지배를 완성한 가톨릭 교회를 살펴보았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잉글랜드 왕과의 세력 갈등에서 우위를 차지한 교황이 유럽지배체제의 정점에 선 순간이기도 했으며, 종교적으로는 화체설과 칠성사의 완성, 연옥 교리 등을 통해 이 땅에서의 삶과 죽음 너머까지의 세계에 가톨릭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선포하였습니다. 

이 요점을 다시 한 번 정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어떤 체제나 문화가 정점에 이르렀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정점에 섰다는 것은 완성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쇠퇴기를 앞두고 있다는 평가이기도 합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제 서유럽의 정치와 종교는 교황지배체제와 가톨릭 교리의 완성으로 안정화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지만, 더 이상의 혁신은 일어날 수 없는 도전과 그에 대한 대응만이 남은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다소 당혹스러운 제목을, 삶과 죽음을 완성한 공의회의 후속 공의회를 다루는 데 붙였습니다. 

신학적·종교적인 함의와는 별개로 16세기 종교개혁은,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되었던 유럽의 분열과 국민국가의 분화를 촉진하여 이른바 근대를 열어젖힌 핵심 사건의 하나입니다. 이 관점에서 유럽사를 읽어가고자 한다면 가톨릭 교회와 중세 유럽 세속 국가들 사이의 세력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개혁이 근대를 열었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와 국가 간의 세력 관계가 재편되면서 세속 국가가 종교를 수단으로 삼고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루터, 츠빙글리, 칼뱅, 헨리 8세와 같은 인물들에 초점을 두고 종교개혁을 해석하고 바라보는 것이 가져올 수 있는 난점인 셈입니다. ‘백마 타고 온 초인’에 기대어 역사를 해석하는 방식은 때로 우리 마음을 뜨겁게 달궈줄 수 있을지 모르나, 시대의 아들로서 그 시대의 한계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던 개인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리지 못하게 됩니다. 루터와 칼뱅으로 표상되는 종교개혁자들에 대해 현대인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종교개혁자들이 처했던 역사 속에서 평가하기보다는 저마다 자신이 지닌 신학적, 교리적, 정치적 입장에 따라 확연하게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강력한 지지자들을 규합할 수 있는 뜨겁고 강렬한 영웅 중심의 역사 해석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영웅으로 추앙되는 인물 역시 그 시대의 구조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루터나 칼뱅이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한 모든 행위가 역사의 흠결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기억되어야 할 이유는 시대가 가지고 있는 견고한 구조를 읽고 그 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오늘 한국교회가 마주한 암울한 현실에 대한 해답은 단순히 과거의 경험에 길을 묻는 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구조와 구도를 정밀하게 읽어내고 그 구조 너머를 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제1차, 제2차 리용 공의회를 다루어야 할 글에서 다소 맥락에 무관한 설명을 덧붙이는 것은 정점에 도달했던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에서 유럽이 분열된 후 열린 트렌트 공의회(1545)까지의 사이를 읽는 것이 미처 인식하지 못한 새로운 통찰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가톨릭 공의회 역사는 제도 교회의 구조와 구도가 형성되고, 도전을 받고, 대체되어가는 흐름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이것이 그저 교리적 읽기를 넘어 사회적 맥락에서 읽는 접근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가톨릭 지배체제를 ‘완성’하여 대(大)공의회로 불리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와 종교개혁 후 새로운 트렌트 종교를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트렌트 공의회 사이의 300여 년의 여백을 꼼꼼하게 읽고 채워갈 때 종교개혁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제, 공의회를 살피는 여정은 새로운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이 길은 노골적으로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읽기 방식이 필요합니다. 자칫 불순해 보일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읽기는 종교개혁을 읽는 데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2. 제1차 리용 공의회(1245)
왜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 리용’인가
이 연재를 시작하며, 중세 유럽사에서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해를 꼽으라면 1215년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그만큼 제4차 라테란 공의회와 그 결정 사항, 공의회를 소집하고 시대를 이끌었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남긴 빛과 그림자의 흔적이 깊기 때문입니다.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중세라는 맥락에서 ‘완성’이란 교리적으로 존재할 뿐, 정치적으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1215년 유럽사의 대사건인 ‘대공의회’가 열린 후 30년만에 제1차 리용 공의회가 열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몇 가지를 시사해줍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이래 교회 권력이 큰 도전에 부딪쳤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교황청 궁전인 라테란에서 열렸던 이전의 공의회들과 달리 이번에는 그 장소가 낯선 곳입니다. 프랑스 리용에서 열린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후 개최된 장소를 보면 리용에서 두 차례, 오늘날 오스트리아에 속한 비엔나와 독일 남부의 콘스탄츠, 스위스 바젤, 이탈리아의 페라라, 피렌체입니다. 

이는 교황 지배체제가 정치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제1차 리용 공의회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열린 공의회라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교황은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 프랑스 리용에서 공의회를 소집했을까요? 여기서 당시 유럽의 지정학적 구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교황은 인노켄티우스 4세였고, 유럽은 각각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프랑스 왕이 세력을 양분하고 있었습니다. 인노켄티우스 4세는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1194-1250)와의 세력 갈등을 겪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시기 유럽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위에 더해 그는 실제로 시칠리아, 독일, 이탈리아의 왕으로 통치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십자군 원정을 통해 무혈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예루살렘의 왕이 되기까지 한, 중세 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를 지닌 군주였습니다. 6개 국어에 능했다고 알려진 이 문제적 인물은 역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로 거주하던 시칠리아에서 이탈리아 문학과 문예 활동을 지원하여 문예부흥에 크게 기여했으며, 고문에 의한 재판을 미신적이라는 이유로 불법화한 최초의 군주이기도 합니다. 그와 동시대의 한 연대기 작가는 그의 탁월한 능력과 세력 확장뿐 아니라 문화와 학문에 대한 지대한 공헌 등을 들어 세계의 경이(stupor mundi)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또 그는 최초의 유럽인, 최초의 근대적 군주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이 거침없는 세력 확장은 교회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프리드리히는 교황령을 점거하는 등 교황의 권력 행사를 견제했고, 교황은 프리드리히 황제에 대한 파문으로 맞대응했습니다. 교회와 대립하는 황제를 교황청에서는 신심이 없는 세속인이라고 비판했지요. 이 갈등 와중에 교황과 황제는 평화조약(1230)을 체결하고 파문을 철회하는 등 화해의 조치를 취했지만, 양측의 긴장은 길고도 오래 갔습니다. 
 
1차 리용 공의회의 ‘정치적’ 목적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의 뒤를 이어 1243년 인노켄티우스 4세 교황이 선출됩니다. 그는 제국 귀족으로 프리드리히 2세와 멀지 않은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곧 교황과 제국의 갈등이 유발됩니다. 1243년 여름 추기경 라니에리 카푸치가 부추긴 이탈리아 중부도시 비테르보의 반란으로 교황과 제국 황제가 대립하게 됩니다. 라니에리 추기경은 프리드리히 2세 황제를 이단이자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며 비난했고, 이에 황제는 교황령을 점령하고 교황을 압박했습니다. 양자 사이에 체결한 평화조약은 깨졌고, 위협을 느낀 교황은 로마를 떠나 프랑스 리용으로 건너가 1245년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리용을 선택한 것은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프랑스 왕의 관할로 옮긴 것으로 정치적으로 교황청과 프랑스는 협력하는 모양새가 되었지요. 60년 후 교회의 아비뇽 유수(1309-1377)라고 알려진 프랑스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기게 된 긴 역사의 출발은 여기서부터입니다. 그때부터 한동안 추기경단이 프랑스인으로 채워지고, 프랑스인 교황들이 선출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제1차 리용 공의회는 이른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세속 군주에 대항할 힘을 모을 목적으로 소집된 지극히 정치적인 목적의 공의회입니다. 개회사에서 교황은 ‘다섯 가지의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합니다. 그 다섯 가지에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나쁜 행동들, 성지를 점령한 사라센인들의 오만, 동·서방 교회의 분열, 헝가리 내 타타르 인의 잔혹함과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교회 탄압이 들어 있습니다. 비록 순서로는 마지막이지만, 다섯 번째 문제인 황제의 교회 핍박에 대한 대응이 가장 핵심이었다는 점은 명확합니다. 이어지는 회기에서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는 프리드리히 2세를 이단이자 적그리스도라고 공격했습니다. 나아가 바벨론 술탄의 친구이자 사라센인의 친구라고 비난하며 황제를 교회로부터 파문하고 황제직을 박탈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황제 폐위 문서에는 150명 이상의 주교들이 서명합니다. 교황은 교황청 직속의 탁발수도회인 도미니크회와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로 하여금 이 결정 사항을 지역 교회에 전파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황제 폐위와 파문은 그를 강제할 무력이 없었기 때문에 상징적인 선포 이상은 되지 못했습니다. 

역사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 프리드리히 2세와 매우 유사한 기시감을 주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종교개혁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1500-1558)입니다. 그는 카스티야와 아라공의 왕, 독일 왕, 이탈리아 왕, 에스파냐 왕 등의 지위를 갖고 전 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를 통치한 인물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기도할 때는 에스파냐어로, 여성과 대화할 때는 프랑스어로, 말을 몰 때는 독일어를 썼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언어 능력을 지녔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지만 세력 확장을 위해 교황에 대한 물리적인 압박을 주저하지 않아, 교황청을 점령하고 라테란 궁을 마구간으로 사용하기도 했던 무소불위의 권력자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1522년 마젤란의 세계 일주를 지원하여 유럽 대륙을 넘어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을 확대한 군주였습니다. 그 결과 카를 5세는 최초의 세계인(cosmopolitan) 군주라고 불립니다. 

교권과 속권의 대립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종교개혁기까지 이 대립 구도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 핵심 인물들은 교황뿐 아니라 프리드리히 2세와 카를 5세 같은 세속군주들이었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시각에서 점증하는 군주의 영향력은 세속화의 반영이지만 일반 역사의 흐름에서는 근대 체제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진보였습니다. 
 
3. 제2차 리용 공의회(1274)
두 가지 목적, 성지 회복과 교회 일치
제1차 리용 공의회와 더불어 제2차 리용 공의회를 묶어서 살펴보는 이유는 30년 터울이라는 시기적 근접성과 리용이라는 공간적 유사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1차 리용 공의회의 핵심 과제였던 종교권력과 세속권력 사이의 갈등이 또 다른 차원에서 진화했기 때문입니다. 1274년 3월,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1210-1276)가 소집한 제2차 리용 공의회는 유럽 전역으로부터 주교와 수도원장뿐 아니라 각 국 대표단이 참석했고, 비잔틴 제국에서까지 참가단을 보낸 대규모 공의회였습니다. 특징적인 것은 유럽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성장한 대학(universitas)의 대표들이 참가한 점입니다. 중세의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 공의회에 초청을 받아 참석하러 가는 도중에 사망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대학의 대표자들이 참석했다는 것은 장차 의미심장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 그레고리우스 10세가 소집한 제2차 리용 공의회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고, 장차 의미심장한 결과를 가져온다. (사진: Currently in the Museum of Health, Lisbon, Portugal. Rick Morais)

이 공의회의 소집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성지 회복이며, 다른 하나는 분열된 동·서 교회의 통일과 일치였습니다. 이 의제들은 당시 가톨릭 교회와 동로마제국이 처한 긴박한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프랑스 왕으로 대표되는 유럽 내부의 세속권력 속에서 교권을 지켜내야 하는 압박이 있었습니다. 또한 신성로마제국은 그 지경을 동로마제국으로까지 확대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비잔틴 제국에 이중의 압박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동으로부터 이슬람 세력의 도전에다 서쪽으로부터의 공격이 더해진 것입니다. 

교황 입장에서도 세속군주들의 과도한 세력 확장을 적절히 통제하고 견제할 수 있는 길은 십자군을 모집하여 전선을 외부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성지 회복이라는 명분은 여전히 매력 있고 유효한 선택지였습니다. 또한 필리오케 및 성화상 논쟁으로 분열된 비잔틴 교회와 일치를 회복한다면 다시 가톨릭은 그 입지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가톨릭과 동방교회의 이 같은 필요는 맞아 떨어졌습니다. 제2차 리용 공의회를 통해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와의 분열 원인이 되었던 니케아신경에 ‘필리오케’라는 문구를 삽입하는 것을 수용합니다. 그리고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합니다. 동·서 교회 분열이 정치적인 것이었다면, 동·서 교회 일치를 위한 이 결정 역시 정치적인 수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일치에 도달했지만 실제 동방교회 지역에서는 이 결정에 반발하여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공의회에서는 동방교회의 전통에서는 찾을 수 없는 연옥교리를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2차 리용 공의회가 남긴 유산
이 공의회 이후에도 동·서방 교회의 일치에 대한 시도는 있었지만, 연옥이나 면벌부 교리와 같이 서방 라틴교회가 독자적으로 제정한 교리를 동방교회가 받아들이지 못하여 결렬되었습니다. 이 공의회에서 교황은 대규모의 십자군을 계획하였지만 실제로 유럽의 군주들은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레고리우스 10세 교황이 사망하자 십자군 추진 동력은 상실되었습니다.  

소집 명분과 의제, 결정 사항과 무관하게 이 공의회가 남긴 의외의 유산은 각 국가의 대표단이 참석한 첫 번째 공의회라는 점입니다. 공의회에서 교회의 고위 성직자나 수도원장들과 더불어 세속국가의 군주나 대표자들이 참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공의회에서는 조금은 다른 형태의 대표단이 참석했습니다. 유럽 대학으로부터 온 대표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중세 유럽의 대학은 애초부터 국제적인 성격을 띤 교육기관으로 발전했습니다. 예컨대,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의 경우는 법학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법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은 전 유럽에서 볼로냐로 모여들었습니다. 신학의 중심지로 알려진 파리 대학의 경우, 신학도들은 그 국적을 불문하고 파리로 집결했습니다. 

대학에 모인 학자들과 학생들은 자신들의 권익과 이해를 위해 출신지별로 모여 이익집단을 구성했습니다. 출신지에 따른 집단이라는 의미의 네이션(nation)이라고 불린 이들은 국민단 혹은 동향단이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근대적 형태의 국가의식이 생성되는 중세 말로 갈수록 공의회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영향은 커져갑니다. 앞서 언급한 아비뇽유수 이후 교황청이 두 군데, 혹은 세 군데 동시에 난립한 교회대분열(1378-1415) 시대에 접어듭니다. 이 대분열을 매듭짓고 새 교황을 선출한 세력은 추기경단이 아니라 각 나라의 대표들인 국민단이었습니다. 
 
4. 교회는 마주한 고민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여기서도 다시 확인되지만, 교회사는 교회 내부의 교리 형성·발전의 역사가 아닙니다. 제도 교회와 그 교회가 서 있는 사회나 국가와의 상호관계에 대한 기록입니다. 공의회는 여러 중요한 교리들을 결정했지만, 어떤 면에서 그 텍스트 자체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 텍스트는 항상 텍스트가 자리하는 콘텍스트 안에서 읽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성서 해석이라는 텍스트의 발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유럽이라는 정치, 경제, 지리, 종교적 콘텍스트 안에서 장기적으로 진행되어온 흐름의 결과물입니다. 가톨릭이 제도적 교리적으로 ‘완성’ 단계에 도달한 1215년부터 약 300년간 이루어진 ‘장기 지속’의 결과물입니다. 그 추동 세력은 교황이나 루터 혹은 칼뱅으로 대표되는 종교권력이 아니라 프리드리히 2세와 카를 5세나 국민단으로 대표되는 국가권력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종교개혁의 쟁점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분열이 아닙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포괄한 종교권력과 세속권력 사이에서 그 균형이 세속권력으로 기울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럽사에서는 16세기를 근대국민국가가 자리 잡힌 시기라고 부릅니다. 사회사로 교회를 읽어 나간다는 것은 제도 교회가 일반 역사의 흐름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교황제가 정점에 선 것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듯이, 교황제가 세속권력과 경쟁에서 밀려난 것이 단순히 교회의 쇠퇴라고 규정할 일도 아닙니다. 종교개혁을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종교개혁을 새롭게 읽어갈 수 있는 긴 서사의 출발이 제1, 2차 리용 공의회인 셈입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로 대표되는 제도 교회의 권력 절정기는 뒤이어 발생한 세속권력의 성장 앞에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과도하게 종교적인 의제로 풀어나가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근대적 성격의 군주를 이단, 적그리스도, 사라센의 친구라는 이름 붙이기였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세속적인 권력에 집착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가 고민해야 할 바가 좀 더 명확해집니다. 교회가 처한 고민을 신학적인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문맥에 어긋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신학, 교리나 텍스트 해석의 문제가 쟁점이 아닙니다. 대부분 고민해야 할 것은 교회가 자리한 사회 콘텍스트와의 상호작용에 관한 문제입니다. 현대에 우리 사회가 하고 있는 고민은 여러 단어로 표현됩니다. 기독교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들도 여럿 있겠지요. 차별금지법, 페미니즘, 낙태나 동성애 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고민도 그 중에 속합니다. 

이 사회의 흐름 속에서 교회는 어떤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일반 역사에서 최초의 근대적 군주, 최초의 유럽인이라고 불리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당대 공의회에서 적그리스도, 이단, 이슬람의 친구라는 명목으로 파문을 당했습니다. 물론 교회는 선언적 의미를 넘어선 조치를 취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가장 흔한 유혹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환원하여 적으로 만들어 대응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가 즐겨 하는 방식으로 맥락에 맞지 않는 ‘영적’ 의미 부여를 하는 것도 그런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교권에 대한 집착을 진리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외면하고 세상의 변화의 움직임에 대해 영적인 가치를 내세우며 대응하는 것은 ‘영적’ 자폐입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같은 발언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내부의 집단 논리에 매몰되어 동조하는 이들은 모두 영적 자폐 증상을 보이는 것입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성취한 교황권의 극성기는 교회가 서야 할 바른 자리가 아닙니다. 그 이후 쇠퇴의 여정은 다른 의미에서는 제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그 자리는 가장 낮은 자의 자리여야 합니다.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영광의 날에 대한 기억만 있을 때 변화하는 사회에서 제 자리를 찾아가기 어렵습니다. 교회가 마주한 도전이 과연 타자를 적그리스도, 이단, 무슬림의 동조자라고 규정하여 적을 만들어 가는 식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은 과도한 종교적, ‘영적’ 해석에 몰두하기보다 사회 맥락 안에서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법을 키워가야 합니다. 결국 중세 말 교회가 분열된 종교 내부의 문제를 각 국가의 대표단(nation)이 결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교회의 자정능력 상실을 보여준 반증입니다. 

역사는 다시 묻습니다. 오늘 교회가 마주한 복잡한 고민 앞에서 교회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대응하는 길이 교회가 사는 길일까요? 

■ 연재 순서
1. 왜 지금 ‘공의회’인가? : 사회사 관점으로 교회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2. 동서교회 분열의 서막인가, 확장인가 :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 위로부터 이뤄지는 교회 개혁의 전형 : 제1, 2차 라테란 공의회
4. 권력의 정점을 향하는 교회, 그 빛과 그림자 : 제3차 라테란 공의회
5. 가톨릭 교회, 삶과 죽음의 지배를 완성하다 : 제4차 라테란 공의회
6.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 제 1, 2차 리용 공의회
7. 비엔나 공의회 
8. 콘스탄츠 공의회
9. 바젤, 페라라, 피렌체 공의회
10. 제5차 라테란 공의회
11. 트렌트 공의회
12.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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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 교회, 삶과 죽음의 지배를 완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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