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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교회 분열의 서막인가, 확장인가
[339호 역사에 길을 묻다: 공의회의 사회사 02]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869-870, 879-880)
[339호] 2019년 01월 30일 (수) 11:49:01 최종원 goscon@goscon.co.kr

■ 연재 순서
1. 왜 지금 ‘공의회’인가? : 사회사 관점으로 교회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2. 동서교회 분열의 서막인가, 확장인가 :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 제1, 2차 라테란 공의회
4. 제3차 라테란 공의회
5. 제4차 라테란 공의회
6. 제 1차 리용 공의회, 제 2차 리용 공의회
7. 비엔나 공의회 
8. 콘스탄츠 공의회
9. 바젤, 페라라, 피렌체 공의회
10. 제5차 라테란 공의회
11. 트렌트 공의회
12.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 라틴교회, 벗어남을 꿈꾸다
초대교회 사상의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이 중심이 된 동방교회 지역이었습니다. 서방신학을 일컫는 라틴신학은 일정 부분 동방교회 신학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서방교회의 신학적 해방은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라틴어로 된 신학이 발전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성 히에로니무스의 불가타(Vulgata)역 성서 번역이 그 중심 역할을 했음은 자명합니다.

자연스럽게 철학적 사고 위에서 발전한 동방교회와는 달리, 법과 제도 중심으로 신앙을 발전시킨 서방교회는 특이한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한 가지 이유는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이루어진 언어의 변환 때문입니다. 헬라어는 당시 공용어였습니다. 반면 라틴어는 이탈리아 반도 중부 라티움 지역에서 쓰이던 지역 언어였습니다. 실제로 3세기 중엽까지 도시 국가인 로마 내에서도 헬라어로 예배가 드려질 정도로 헬라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라틴교회라고 지칭하는 서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가 발전하면서 신학언어로서 라틴어가 서서히 등장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성서번역선교회들이 성서를 번역할 때 부딪치는 어려움 중 하나는 소수민족 언어의 어휘가 부족하여 성서의 어휘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와 유사한 경험이 라틴어 성서 번역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휘 선택은 곧바로 그에 따른 새로운 신학을 생성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방에서 ‘성사’(聖事)를 의미하는 단어인 미스테리온(mystērion)의 번역입니다. 라틴어에는 이와 정확히 호응하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대체 단어로 선택된 용어가 새크라멘툼(scaramentum)입니다. 단어에서 유추되듯이 미스테리온은 ‘신비’(mystery)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새크라멘툼은 풀면 해결될 수 있는 ‘비밀’(secret)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특히, 로마 군대에서 새크라멘툼은 한 개인이 민간인의 신분을 벗고 군인으로서 서약하는 서약식을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기독교적으로 적용하자면,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속의 삶을 벗어버리고, 이제 그리스도를 따르는 군사로 서약을 하는 서약식이 성사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동방교회에서는 성사란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 깊이 체험하는 통로로 규정되겠지요. 반면, 서방에서는 성사가 우리의 신분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언어의 전환이 가져온 신학적, 교리적 이해의 차이입니다. 성사를, 신의 신비를 향해 가는 여정을 출발하는 의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사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이해는 서유럽 지역으로 이주한 이민족들의 집단 개종 시 베푸는 세례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476년 서로마는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에 의해 멸망합니다. 서유럽으로 이주한 이민족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전통을 지키면서 효과적으로 로마의 제도를 받아들여 정착합니다. 이 두 전통을 연결하는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이 로마 가톨릭교회입니다. 실제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서로마의 행정직제를 수용, 계승합니다. 로마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흰색 옷을 입고, 가톨릭교회의 왕자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추기경들이 자주색 옷을 입는 것은 로마 황제의 의상이자, 제국 제후들의 의상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동방교회의 뿌리와는 다른 언어, 민족, 문화적 토양에서 서방의 라틴교회는 독자적인 세력화를 꿈꿉니다. 로마 주교인 교황은 동로마를 포함하여 제국 전체에서 종교적 으뜸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임과 동시에, 동로마의 황제와 비견될 수 있는 세속 군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자 했습니다.

2. 동·서방교회 분열, 오래된 미래? 
이 과정에서 로마는 끊임없이 정당화를 위한 시도를 했습니다. 정당화의 틀을 정교하게 만들어 간 것이지요. 몇 가지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서로마 제국 영토에 대한 교황의 지배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등장한 문서입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이라고 알려진 문서이지요.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학자들은 이 문서가 8-9세기 무렵에 로마 교황청 문서국에서 위조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5세기 이탈리아의 문헌학자인 로렌조 발라, 독일의 성직자 쿠사의 니콜라스 등이 이 문서가 조악하게 위조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에는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이유와 천도 이후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가 문둥병을 앓고 있었는데 교황 실베스테르 1세로부터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 감사의 표시로 로마와 서방의 제국을 교황과 그 후계자들에게 넘기고 본인은 새로운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여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황제는 스스로 교황의 말고삐를 끄는 마부로서의 예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 실베스테르 1세가 콘스탄티누스에게 '위증 문서'를 기증하고 있는 것을 묘사한 프레스코화, 13세기경. 작자 미상.


정확한 작성자는 알려지지 않은 이 의문의 문서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신앙고백이 나오고, 이후에는 황제가 구체적으로 도시 국가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와 서유럽을 교황에게 기증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선 황제의 신앙 고백 중에 특징적인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 문서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삼위일체를 옹호하는 신앙고백을 했다는 내용은 논리적으로 부합하는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삼위일체 교리를 둘러싼 교회 내부의 분열을 종식하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고 삼위일체를 반대한 아리우스파를 단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정치적인 관점에서 교회 일치를 꿈꾸었던 콘스탄티누스는 그후 아리우스파를 복권시켰고, 죽기 전에 아리우스파 지도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게서 세례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니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완전히 부합한다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 문서가 800년대 중엽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리기 전의 어느 시점에 위조된 문서라고 한다면, 왜 이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을 명문화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것은 이 문서가 8-9세기 서유럽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서유럽 라틴교회에서는 삼위일체나 아리우스파 문제가 여전히 지속되는 이슈였기 때문입니다. 아리우스파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예수를 피조물 중 으뜸으로 보던 기독교의 한 분파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초의 교회 공의회가 325년에 열렸습니다. 그후로 이어진 여섯 차례를 합쳐 도합 7회의 공의회에서 결정한 사항들이 주로 성자를 성부, 성령과 더불어 삼위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성자의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초기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모두 예수의 신성을 둘러싼 논쟁으로 여러 번 분열을 경험했습니다.

3. 서방교회의 위협, 아리우스파

   
▲ 고트족에게 복음을 설명하는 울필라스. 그는 아리우스파가 게르만족 선교를 위해 파송한 선교사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리우스파를 단죄하고 니케아 신조를 통해 삼위일체를 인정한 니케아 공의회 후에도 여전히 아리우스파는 세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이 구도를 복잡하게 만든 것은, 본래 동방교회 지역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던 아리우스파의 세력이 동방교회 지역을 넘어 서방으로까지 확장된 일입니다. 선교 역사에서 독일인의 사도로 흔히 알려진 울필라스(Ulfilas, 310-383)는 바로 이 아리우스파가 게르만족 선교를 위해 파송한 선교사였습니다.

이러한 아리우스파의 확장 움직임은 로마 주교인 교황이 관할하는 서유럽 라틴교회에는 지속적인 위협 요소였습니다. 교황은 서유럽 내에서 아리우스파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아리우스파가 장악한 서고트와는 달리, 프랑크 왕국의 초대국왕 클로비스 1세(Clovis Ⅰ)는 496년 삼위일체를 신봉하는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서유럽에 가톨릭 신앙의 근거지가 든든하게 마련되었습니다. 그 공로로 프랑스는 오늘까지도 ‘교회의 장녀’라는 명칭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후로도 여전히 아리우스파는 에스파냐를 위시한 남부 유럽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습니다.

아리우스파가 주장하는 핵심은 성자 예수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리우스파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수록된 삼위일체의 고백도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의 차이를 보인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나오는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하시고”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즉, 모든 만물의 근원이자 원천으로서 오직 성부만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는 아리우스파에게는 성자가 성부와 같지 않다고 주장할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아리우스파가 여전히 건재하던 에스파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방책으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라는 표현을 만들게 됩니다. 즉 “와 성자”(filioque, 필리오케)라는 표현을 덧붙입니다. 589년에 열린 제3차 톨레도 시노드에서 이 ‘필리오케’라는 단어를 삽입하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그 후 라틴어 신경을 고백하는 지역에서는 이 고백이 사용되었습니다. 8세기 무렵에서야 아리우스파였던 롬바르드족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니, 이렇듯 아리우스파 문제는 라틴교회에 지속적인 도전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아리우스파와 크게 관련이 없었던 동방교회 입장에서는 ‘필리오케’의 삽입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동·서방교회가 합의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서방교회가 일방적으로 파기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교리적인 이슈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동방신학을 중심으로 한 전통을 서방교회가 벗어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성격도 지니고 있습니다.

4. 두 번 열린 제8차 공의회
동·서방교회가 처한 콘텍스트의 차이 가운데서 양측 교회는 세력화를 위한 다툼을 벌이게 됩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 위조는 서방 가톨릭교회가 동방교회나 동로마 제국 황제에 맞서 서방의 이민족들과 독자적인 세력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제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씌어준 일 역시 구체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교황은 이제 서유럽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동로마 황제는 자신이 서유럽의 후견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언어와 민족, 문화가 바뀌면서 신학이나 사유의 틀이 전환되는 것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표면적으로는 ‘필리오케’의 경우처럼 신학적 논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사실상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서방교회가 인정하는 7차례의 공의회가 지난 후, 여덟 번째 공의회가 열린 배경입니다. 이 여덟 번째의 공의회는 넓게 보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주도권 다툼이 본격화하는 신호탄이자, 200년 후의 결별을 미리 예고하는 오래된 미래였습니다.

첫 번째 공의회(869~870)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 콘스탄티노플(동방교회) 총대주교인 포티우스(820-891)입니다. 포티우스는 귀족 출신의 평신도였습니다. 858년 그는 6일만에 사제가 되고 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곧이어 동로마 황제 미카엘3세와 대립하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가 강제 폐위되자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 구도 속에서 교황 니콜라스 1세는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의 편에 서서 동로마 황제와 대립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신임 총대주교 포티우스와 로마 교황의 사이가 좋을 리 없었습니다. 로마 교황이 포티우스를 파문하자, 867년 포티우스는 교황 니콜라스 1세를 파문하는 것으로 맞대응하였습니다. 그 파문의 핵심적 사유로 지목한 것이 라틴교회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필리오케’를 삽입한 일이었습니다. 
 

   
▲ Council of Constantinople 869 (Vatican Museums)


포티우스를 둘러싸고 발생한 교회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황제는 교황의 동의를 얻어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공의회의 목표는 자연히 동로마 황제 바실리우스와 로마 교황 간의 관계 개선이었습니다. 869-870년에 열린 이 공의회에서 황제 바실리우스는 교황의 뜻을 수용하여 포티우스를 폐위하고 전임자 이그나티우스를 복권합니다. 5차 회기에서 출석했던 포티우스는 자신을 정치적인 이유로 가야바와 빌라도에게 재판 받는 예수에 비유하며 이 결정을 비판하지요. 그는 로마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우위에 있다는 수위권을 거부합니다. 또한 필리오케를 삽입한 서방교회 결정를 다시 한 번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 공의회에서 로마의 수위권은 재확인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은 동방 지역의 다른 세 총대주교구인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보다 우선적인 위치를 확정 짓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869-870년의 공의회는 본래 의도인 동·서방교회의 일치로는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불가리아가 있습니다. 슬라브족인 불가리아 선교를 둘러싸고 교회의 관할권 문제가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사이에서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최소한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불가리아 선교를 하는 프랑크족 선교사들은 필리오케를 삽입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가르쳤습니다. 이는 동방교회 편에서 볼 때, 교회의 일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이었던 것은, 로마 교황의 지원을 받아 다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복귀한 이그나티우스가 로마 교황의 양해 없이 불가리아에 주교를 선임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표면적으로는 교회 일치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교회의 일치보다 지역적인 세력 확장에 더 관심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877년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가 사망하자, 동로마 황제는 포티우스를 다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에 앉혔습니다.

두 번째 공의회 (879-880)
879년에 또 다른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립니다. 황제는 이 공의회에서 신임 교황 요한 8세(재위:872-882)가 포티우스의 총대주교직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고, 교황은 이를 승인했습니다. 이 공의회에서 나온 중요한 결정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필리오케 삽입을 금지한 것입니다. 필리오케가 빠진 신경이 낭독되었고 이 구절을 삽입한 자들을 파문했습니다. 교황 사절단이 참여한 가운데 교황은 이 공의회의 조치를 수용했습니다. 따라서 10년 전에 열렸던 869-870년 공의회의 논의는 무효가 되었습니다. 교황 요한 8세가 이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포티우스를 총대주교로 복권하는 일에 대해 교황 요한 8세가 동의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공의회 소집 3일 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대표자들이 불가리아 대사들과 만나 불가리아를 동방정교회 소속으로 하는 데 합의합니다. 그 결과 불가리아는 동방정교회인 콘스탄티노플 관할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 포티우스 (사진: 한국정교회)

정리하자면, 포티우스를 둘러싸고 869년과 879년에 두 차례의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869년 공의회가 열린 후 정확히 10년 만에 열린 879년 공의회는 앞선 결정들을 모두 무효화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동방교회의 완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서는 뒤에 열린 공의회(879)를 pseudo octavum, 즉 ‘거짓 8차’ 공의회라고 주장하면서 869년에 개최된 공의회를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로 인정합니다. 물론 동방교회는 그렇지 않겠지요. 동방교회 일부에서는 879년에 열린 공의회를 8차 공의회로 인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879년 공의회가 앞선 869년 공의회의 결정들을 철회한 역할에 불과하기 때문에 굳이 이 공의회에 별도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여 공의회에 포함하지 않습니다.

당시에 이 일을 분열이라고 인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역사를 회고적으로 보자면 이 시기는 동·서방의 분열이 명확하게 싹튼 시기였습니다. 앞서 개최된 7차례 공의회가 동·서방교회의 일치를 의도한 반면, 10년 간격을 두고 열린 이 여덟 번째 공의회는 그 자체로 분열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11세기 동·서방교회 분열의 시기에 이 논쟁은 다시 재현되었습니다. 동·서방교회가 서로를 파문하여 궁극적으로 나뉜 1054년의 동서교회 대분열의 핵심 이슈 역시 ‘필리오케’였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은 교리를 넘어선 권력투쟁의 산물이라는 점입니다.  

5.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어떻게 볼 것인가?
따라서 879년의 합의가 교회 분열을 막은 것이었는지, 일시적인 봉합이었는지는 시각차가 있지만, 대체로는 일시적인 봉합일 뿐이었다는 쪽에 가까운 듯합니다. 그러한 미봉책의 결과는 250년 후 공식적인 분열로 나타났습니다. 서방교회가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나간 라틴신학 체계를 동방교회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동방이나 서방이나 교회가 정치화하면서 각각의 이해관계에 맞게 신학을 해석했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더 이상의 공의회가 열리지 않은 동방교회가 전통을 수정하지 않고 지킨 것이기에 더 낫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동방교회는 제국 신학의 테두리 안에 갇혀 버렸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모든 공의회는 동방교회와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라틴교회에서 개최합니다. 물론 15세기에 열린 피렌체–페라라 공의회처럼 동서방교회 분열을 종식하기 위해 개최한 예외도 있긴 합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이후 250년 동안 공의회는 소집되지 않습니다. 1123년 교황이 기거하는 라테란 궁에서 열린 공의회는 최초로 서방교회가 주도한 공의회였습니다. 교황이 소집한 최초의 공의회라는 점에서 서방의 자부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 공의회 소집을 정당화하는 전거로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이 인용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 조작은 동로마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를 의도한 것입니다. 또한 ‘필리오케’는 서방교회의 필요의 산물이었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전환 속에서 독자적인 라틴 교회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의 불가피한 부산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전환 속에 분열은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라틴교회는 동방교회의 유산과 별개의 신학 전통을 만들어 감으로써 새로운 민족과 언어와 문화 위에 독자적인 중세 기독교를 형성할 토대를 놓았습니다. 이를 신학의 발전이라고 보아야 할지, 아니면 타락이라고 보아야 할지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서방신학이 동방신학의 사유를 넘어서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었을 일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때로 도전적으로 보이는 교회의 적응과 변화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톨릭교회 내에 다양한 전통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세 서유럽에서 기독교 ‘문화’가 꽃피웠다고 합니다.

문화의 특징은 다양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치를 담보하는 문화도 있을 수 있겠고, 그와는 배치되는 문화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비판이 나올 수 있는 그 출발의 모형을 우리는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둘러싼 논쟁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공의회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모두가 새로운 문화와 언어에 맞게 진화하고 전환되는 기독교의 가능성과 동시에 위험성을 인식하고 경고한 처음이자 마지막 공의회라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전환은 반드시 단절과 새로움을 만들어 갑니다. 그것이 기성의 주도적 전통과 배치된다 할지라도 말이지요. 여기서 마지막으로 던지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16세기 종교개혁 시대로부터 얼마나 발전해 왔을까요? 한국 사회의 맥락에 부합하는 독자적인 신학과 문화를 생성해 오고 있을까요? 한때 날것 같이 거칠었지만 우리네 우물에서 우리네 신학을 긷던 이들이 그리워지는 건 그 때문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뒤집어 묻고 답을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분열은 불가피했습니다. 분열이기도 했지만 진화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종교개혁 또한 그저 분열이라고 볼 수 없는 새로운 지평의 확대이기도 했지 않습니까? 그 분열로 유럽에 갇혔던 기독교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아시아 대륙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익숙한 것과의 도전적인 결별 없이는 새로운 것이 탄생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서방교회 신학에서 ‘과유불급’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은 당대 정치, 종교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 정화하고 조정해 가는 방식을 터득해 나갔다는 점입니다. 그저 교리의 적확성이나 정밀성이라는 잣대만으로 평가하기에는 라틴교회가 펼쳐 나간 신학적 정치적 상상력은 탁월했습니다. 그 종교적 상상력이 전통이라는 형식으로 뿌리를 내리며 서유럽은 독특한 기독교 문화를 쌓아 갔습니다. 이후부터 교황이 소집한 공의회에서는 긍정적인 의미에서건, 부정적인 의미에서건 당대 교회의 상상력의 결정체들이 생성되었습니다.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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