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호 역사에 길을 묻다: 공의회의 사회사 10]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1517)

▲ ⓒ복음과상황

1. 가톨릭 교회, 다시 제국을 꿈꾸다 
제5차 라테란 공의회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에 열린 마지막 공의회입니다. 당대 가톨릭 교회가 부닥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개최되었지만, 공의회 종료 후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공의회는 결과적으로 그 시대가 요구하는 정서를 가톨릭 교회가 읽어내지 못했음을 말해줍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열린 게 1213년이었으니 꼬박 300년 만에 다시 로마의 라테란 궁전에서 공의회가 열린 것입니다. 제4차 공의회는 유럽 세속 군주들과의 대립 속에서 교황의 절대적인 힘의 우위를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후 공의회는 교황의 본거지인 로마가 아닌 리용, 비엔나, 콘스탄츠, 바젤, 페라라, 피렌체 등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교황과 프랑스 왕 및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대표되는 세속 군주들 사이의 갈등의 단면이 공의회 개최지 역사에서도 드러납니다.

자, 이제 돌고 돌아 다시 로마에서 이탈리아인 교황이 소집한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 대한 논의에서, 정치적인 차원으로 이해하자면 종교개혁의 긴 여정은 유럽의 세속 권력과 가톨릭 교황권의 관계 재설정이 이루어지는 콘스탄츠 공의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 바 있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 이후 종교개혁까지 모든 교황들이 이탈리아 출신들로 채워졌다는 것은 상징적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전 유럽에 걸쳐 행사되던 교황의 영향력이 이탈리아 반도 내로 축소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교황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이탈리아 내의 군주로서 실질적인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려 하겠지요. 교황은 고대 로마시대의 황제를 꿈꾸게 됩니다. 그 방편으로 고대 로마의 문예를 복원하고 발전시키는 르네상스를 적극 후원하는 한편, 세력 확장을 위해 전쟁이라는 무력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선출된 교황 마르티네스 5세부터 루터의 종교개혁기 교황 레오 10세까지의 시기를 ‘르네상스 교황기’라고 부릅니다. 교황의 영향력이 이탈리아 내로 축소되었다는 것은 실질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대다수 교황들이 남부 유럽의 귀족이나 재력가 가문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추구하는 지향점은 종교적 영향력 쇄신이 아니었습니다.

르네상스 교황기를 대표하는 교황 중 한 명인 알렉산데르 6세(1431-1503)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본명은 로드리고 보르자로 이탈로-에스파냐 가문으로 불리는 보르자 가문 출신입니다. 그의 아들 (엄밀하게는 사생아) 중 하나가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의 모델로 알려진 체사레 보르자입니다. 체사레 보르자는 아버지의 후광으로 18세에 추기경이 되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알렉산데르 6세는 타락한 교회 권력에 맞서 싸운 피렌체의 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를 화형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메디치 가문에서도 세 명의 교황이 나옵니다. 레오 10세는 피렌체 공국의 실질적 통치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입니다. 레오 10세의 조카는 나중에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됩니다. 교황 레오 11세는 어머니가 레오 10세의 조카였습니다. 중세 말의 교황청은 라틴 유럽에서 종교적 구심점 역할을 하지 못하고, 그들이 속한 가문의 이익을 수호하는 가문의 경영자이자 세속 군주 역할에 머물렀습니다. 아니, 세속 군주로서 아주 충실하게 교황령을 지키고 확대해 나가는 데 힘을 썼습니다.

2. 공의회 소집 배경

피사 공의회(1511)
교회 대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모였다가 실패한 공의회가 피사 공의회(1409)입니다. 여러 이유로 가톨릭의 공의회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여기 인정받지 못한 또 하나의 피사 공의회가 있습니다. 프랑스 왕 루이 12세와 신성로마제국 막시밀리안 1세의 요구로 제5차 라테란 공의회 개최 1년 전인 1511년에 피사에서 다시 공의회가 열립니다. 율리우스 2세는 1503년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공의회를 개최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전쟁으로 차일피일 미뤄졌습니다.

이 공의회는 사실상 프랑스 왕과 교황 사이의 대립을 보여주는 또 다른 국면입니다. 프랑스 왕은 피사 공의회를 통해 교황을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공의회주의의 회복을 바라는 프랑스 추기경들이 세속 군주들의 지원을 받아 주도한 이 공의회는 군주들이 지지를 철회하자 흐지부지되고 맙니다. 율리우스 2세는 이 피사 공의회를 이끌었던 4명의 추기경들을 폐위하고 파문합니다. 그리고 이 공의회를 두고 ‘사창가’라는 의미를 지닌 ‘콘실리아블룸’(conciliabulum)이라며 비난합니다. 그후 교황은 제5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하여 1512년에 첫 회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랜 기간 로마를 떠나 여기저기 전전하며 열리던 공의회가 다시 로마에서 열리게 된 것은 교황의 정치적 권위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독안내

이 기사는 유료회원만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 온라인구독 회원은 로그인을 해주시고 인증 절차를 거치면 유료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월 1만 원 이상), 온라인구독(1년 5만 원) 회원이 아니시면 이번 기회에 〈복음과상황〉을 후원, 구독 해보세요.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