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호 심에스더의 독서일기]

▲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 기획 / 코난북스 펴냄 / 2019년
▲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 기획 / 코난북스 펴냄 / 2019년

 

저는 구술 형식의 글이 좋으면서 싫어요. 말하는 이의 고유한 언어와 뉘앙스가 그 사람을 생생하고 선명하게 보여줘서 그래요. 나랑 가까이 있는 거 같은 존재감이랄지. 이 책 《나, 조선소 노동자》도 구술집이에요. 거제 삼성조선소 크레인 사고를 겪고 살아남은 9명의 노동자 이야기가 각각 실려 있어요. 처음 책 제목만 보고는 배 만드는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다루는 에세이인 줄 알았죠. 부끄럽지만 2017년 5월 1일에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어요. 누군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일 거예요.

당시 뉴스나 SNS로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거제 조선소 크레인 참사’ 등의 헤드라인을 본 기억이 책을 읽는 중간에 언뜻언뜻 떠올랐어요.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니, 이게 이런 일이었어?’였지요. 크레인 사고, 대참사, 대기업, 비정규직, 하청업체 등의 단어가 주는 충격과 메시지는 분명했지만 뭔가 막연하고 동떨어지게 느껴졌거든요. 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마구 뒤섞여 거대한 덩어리로 다가오는데 나는 스케일에 압도된 채로 ‘아아…’ 탄식만 내뱉다 이 사건을 덩어리째 굴려버린 거 같아요. 그러니 이런 일인지 몰랐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네요.

그래서일까요?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정제된 글로 쓰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9명의 글쓴이가 그랬듯 역시 저도 최대한 날것 그대로 반응하고 싶어졌거든요. 이분들이 다 하청을 받거나 하청에 재하청을 받아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더라고요. 사고 날은 5월 1일이었고요. 노동절인데 회사는 빨리 배 만들어야 되니까 일하라 하고, 일자리가 불안정한 비정규직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일하러 나온 거죠. 눈치 보여서 일 하러 나온 사람들도 있고요. 그날 조선소에 나온 사람들이 1,623명이라는 자료를 봤어요. 그중 90%가 비정규직이었고요. 글쓰기에 참여한 아홉 명의 노동자들은 사고 후 겪고 있는 다양한 정신적 생존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해요. 한 사람씩 자기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사고 당시의 증언뿐 아니라 그들 삶 전반에 걸친 이야기가 나와요. 어떤 꿈이 있었고, 어떤 삶을 살다가 조선소에 오게 되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일했는지, 일상에서 혹은 직장에서 무엇이 행복했고 괴로운 건 무엇이었는지를 꽤 많이 알게 돼요.

김석진(가명)님은 군대 가기 전 목돈을 만들고 싶어서 대학 1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거제도로 내려왔어요. 열심히 일하다 돈 좀 더 벌어 보려고 같은 팀으로 일하는 이모님들을 설득해서 삼성으로 옮겼다가 이 사고를 당했고, 하던 일이 모두 중단돼 일자리를 잃었어요. 사고 직후부터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심하게 앓게 되었는데 이모들에게 회사를 옮기자고 했다가 이모들까지 사고를 겪고 일자리를 잃게 했다는 죄책감에 엄청 괴로워해요. 사고 후 모든 게 변해버린 일상을 버텨내면서 김석진 님은 원래 자기가 좋아했던 것들을, 자기 삶에 아름다웠던 시간들을 이야기해요.

“제가 좋아하는 거요? 책 읽는 거랑… 아, 여행이요… 조선소에서 돈 모아서 유럽 여행도 갔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피렌체에요. 두오모 성당이 되게 유명하거든요… 성당 위에 올라가서 노을 질 때까지 기다렸어요. 하늘도 주황색, 지붕들도 주황색, 정말 아름다웠어요.”

또 이정은(가명)님은 서울에서 하던 의류 사업이 폭삭 망하는 바람에 거제에 왔어요. 그리고 조선소에 용접공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나이가 46세예요. 힘들어도 일 자체를 좋아하시고 정말 열심히 했는데.

“처음 용접 배울 때는 아침에 출근하면 전날 내가 작업한 곳부터 갔어. 가서 잘 됐나 잘 못했나 보고 다른 사람 거를 봐. 내가 모르니까 그걸 보면서 ‘아, 내가 좀 못했구나. 근데 뭐 때문에 이렇게 됐을까?’ 궁리를 하는 거야.”
“나도 빨리 이 일을 할걸… 근데 그것도 이제 끝났지 뭐. 조선소에서 받아주질 않잖아? 일하고 싶어도 일 할 수가 없잖아?”

제가 아까 이게 ‘이런 일인 줄 몰랐다’라고 했잖아요. 정말 그래요. 방금 이야기한 두 분도 그렇고 다른 일곱 분들도 그렇고 이분들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막연히 산업재해를 당한 피해자, 사고 후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고통을 호소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 제대로 된 보상이 필요한 사람들로만 뭉뚱그려 생각했거든요. 이분들에게는 고유한 과거들이 다 있지요. 그리고 그게 지금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요. 현재 일어난 일들도 과거에 영향을 미치겠죠. 또 같은 사고를 겪은 사람들이라도 하나의 피해자 집단을 넘어 자기만의 역사가 있는 존재들이니까, 사고에 대한 반응도 다를 거예요. 상태도, 앞으로 바라는 것도, 회복하고 싶은 것도, 버리고 싶은 것도 다 다른 거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다 다르고요. 그러다 보니 이 삼성 크레인 사고도 내가 막연히 알던 하나의 큰 사건이 아니라 고유한 아홉 사람이 겪은 각각 다른 아홉 건의 일로 느껴지는 거예요.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나서는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요? 딱 떨어지는 결론은 없어요. 저는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고통에 대해서요. 사람들이 자기가 겪은 일을 말할 때 내게 익숙하지 않거나 좋아하는 방식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일단 들려주는 그대로 들어야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알고 있다고 생각한 어떤 일에 대해서 ‘아니 이게 이런 일이었어?’ 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이든 충격이든 생겼을 때 그걸 잘 받아들이고 사건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럼 이 일이 한 사건덩어리가 아니라 아홉 편, 아니 1,623편의 생생하고 고유한 이야기로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말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닐까요?


 


심에스더
성을 사랑하고 성 이야기를 즐겨하는 프리랜서 성과 성평등 강사이자 의외로 책 팟캐스트 〈복팟〉 진행자. SNS 중독자. 최근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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