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호 동교동 삼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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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한병철의 《리추얼의 종말》에 붙은 부제(질문)입니다. 저자는 욕망과 소비를 부추기는 현대사회에서 “자아 숭배, 자아 예배”를 극복하려면 ‘리추얼’(의례·의전·예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한국의 자기계발서에서 말하는 ‘루틴’이라는 단어와 혼용되지만, 리추얼(Ritual)에는 ‘특별한 반복’이라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서두에서 한병철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 페터 한트케의 글을 인용해 리추얼의 속성을 설명합니다.

“미사 덕분에 성직자는 사물과 아름답게 교류하는 법을 배운다. 잔과 성체를 부드럽게 쥐는 법, 용기들을 느긋하게 닦는 법, 그리고 사물들과 아름답게 교류한 결과를 배운다. 그 결과는 가슴에 날개를 달아주는 기쁨이다.”

이어 ‘일용할 양식’은 매력이 없지만, 리추얼의 반복은 “매력 없는 것에서, 눈에 띄지 않는 것에서, 실낱에서 집약성을 발견”해내는 것이라 정의합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공동체성을 띤다고 덧붙이지요. 기독교인인 저는 이 대목에서 ‘예배’를 떠올렸습니다. 사실 이런 ‘리추얼’은 예배학자나 기독교 영성가들이 주장해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예배를 하나님이 당신의 가장 근원적 습관을 다시 만들어 가시는 하향적 만남으로의 초대로 이해할 때 반복은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 형성적 패러다임에서 반복은 거짓이 아니다. 당신은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복 없는 형성은 없기 때문에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덕의 형성을 위해서는 실천이 필요하며, 반복 없는 실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제임스 K. A. 스미스, 《습관이 영성이다》)

이번 커버스토리는 교회나 예배에서 덜 주목받았으나 묵묵히 예배를 형성하고 있는(던)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상을 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찬찬히 살핀 독자가 교회에 가서, 예배를 준비하느라 그동안 애써왔던 이들에게 응원과 위로와 존경의 마음을 건네는 장면을요.

아메리칸인디언에게 7월은 ‘연어가 떼지어 강을 거스르는 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환경 파괴와 온난화 영향으로 연어를 비롯한 생명의 떼죽음 소식이 이어집니다. 순환하던 것들의 죽음 앞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매주 반복하는 예배가 나 자신과 우리 세계의 끔찍한 모순을 넘어서는 힘을 형성했으면 좋겠습니다. 복상도 그 의미심장한 반복에 힘을 더하겠습니다.

이범진 편집장 poemgene@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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