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호 한 인문주의자의 시선]

   
▲ 한 사람의 '영웅'에 기대어 종교개혁 전후사를 해석하고 우늘에 적용하려는 것은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

다시 출발점에 서며
유럽인들에게 종교개혁 500주년은 기념할 만한 ‘과거’의 사건입니다. 그들에게 루터에 대한 관심은 해가 지나면 다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다릅니다. 현재 누구나 다 인정하는 기독교의 위기라는 상황이 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사람들에게 종교개혁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16세기 유럽이라는 지형도에서 펼쳐진 유럽사의 사건을 비텐베르크의 한 사람의 행위로 환원하는 것은 종교개혁 발생뿐 아니라 그 이후 전개된 종교 지형의 특성을 왜곡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혹은 일어날 수밖에 없던 콘텍스트를 읽지 못하면 종교개혁이 성취한 것에 대해서도 잘못된 이해를 낳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며 이런저런 아쉬움도 있지만, 교회 개혁에 대한 관심이 이벤트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조급함이 더 큽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지만, 해가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루터는 관심 밖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은 기념 축제이기보다는 치열한 마라톤을 앞둔 긴장이 감도는 전야제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부끄럽지만 교계, 미디어, 출판계의 루터 마케팅에 휩쓸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나 할까요? 명성교회 세습 사건과 대형 신학교의 부끄러운 모습 등은 긴장의 끈을 다시 조여주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출발해야 할까요? 이제는 루터를 떠나보내고 다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종교개혁이라는 사건의 현재적 의미를 더 분명하게 알려면 종교개혁 당시 유럽의 서사 구조를 살펴야 합니다. 종교개혁이 주는 함의는 제2, 제3의 불행한 루터를 만들지 말고 교회가 스스로 개혁해 나갈 토대를 마련하자는 역설입니다. 그렇지 않고 영웅 한 사람에 기대어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루터를 기억하는 참된 방식이 아닙니다. 루터 너머의 것을 읽지 못한다면 여전히 면벌부 팔던 시절의 가톨릭을 소환해 오늘 우리 실상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를 찾는 시대착오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근대, 교회와 국가의 관계 재설정
16세기 종교개혁을 가져온 가장 큰 핵심은 국민국가(nation-state)의 등장과 민족의식의 성장입니다. 이것이 루터나 칼뱅, 츠빙글리의 종교개혁뿐 아니라, 뜬금없이 벌어진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을 설명해줍니다. 모국어로 성경이 번역되고 모국어 신앙서적들이 늘어나면서 하나의 가톨릭이 다양한 성격으로 분화됩니다.

‘백년전쟁’으로 알려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이 프랑스와 잉글랜드라는 민족의식을 자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잉글랜드 왕조는 1066년 프랑스에서 건너간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세운 왕조입니다. 초기 잉글랜드 왕들은 프랑스에 영토를 소유하고 그곳에 살았습니다. 잉글랜드에 실제로 살다 죽은 최초의 왕은 대헌장으로 유명한 존 왕(1166-1216)입니다. 왕실이나 귀족은 프랑스어를 사용했습니다. 15세기까지 잉글랜드의 왕실 문서나 재판 문서는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백년전쟁을 치르면서 민족의식이 생겨났다고 알려집니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로마 교황청은 프랑스 왕의 압력으로 프랑스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기게 됩니다.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는 이를 두고 ‘교회의 바벨론 유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1378년 이후 로마와 프랑스 아비뇽에서 교황이 각각 세워집니다. 급기야는 동시에 3인의 교황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1412년 이 해결을 위해 콘스탄츠 공의회가 열립니다. 이 공의회는 보헤미아의 개혁가 얀 후스를 화형시키고, 잉글랜드 개혁가 존 위클리프의 유해를 부관참시한 것으로 잘 알려진 공의회입니다. 하지만, 이 공의회에서 주목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공의회에서 대립하는 교황들을 폐위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보통 교황은 추기경단이 콘클라베라고 불리는 방식을 통해 선출합니다. 그런데 이때는 달랐습니다. 추기경단이 당연히 이탈리아와 프랑스 양 국가의 성직자들로 대부분 구성되어 있었기에 유럽 전체의 의사를 왜곡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추기경단 대신 국민단(nation)이라고 불리는 각 국가의 대표가 교황 선출에 참여합니다.

그 결과 오랜만에 이탈리아인 교황 마르티누스 5세가 선출됩니다. 이 공의회는 교황이 유럽 세계의 최상위 지배권을 상실했다는 확정판결이었습니다. 이후부터 교황은 스스로를 유럽 세계의 통치자가 아닌 이탈리아반도의 군주로서의 세속적 지위를 강화하고자 노력합니다. 그 후 율리아누스 2세처럼 전쟁에 참여한 뒤 로마 황제의 개선식을 한 교황이 있었는가 하면, 가톨릭교회와 맞지 않아 보이는 세속 예술의 르네상스를 적극 지원하는 교황들이 등장합니다.

이탈리아반도의 통치자라는 것은 어디에서 증명될까요? 마르티누스 5세 이후 종교개혁기 전후로 스페인과 네덜란드 출신 교황 2명을 제외하고는 무려 455년간 이탈리아 사람만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78년에 와서야 폴란드 출신의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출된 후 연거푸 독일과 아르헨티나 태생의 교황이 탄생했습니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의 변화의 상징과 같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보는 가톨릭은 가톨릭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전혀 다른 종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100년 전에 이미 가톨릭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던 역할이 끝나고 개별 국가가 종교문제를 주도하는 시기로 접어들었습니다. 루터를 기준으로 시대가 변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종교의 관점에서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로 분열되었다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보면 해석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분화되지 않은 가톨릭은 여전히 교황이 중세와 같은 세력을 유지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종교개혁의 핵심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이 아닙니다. 핵심은 근대사회가 열리면서 생긴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 재정립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새로운 근대 세계 속에서 국가 세력과의 관계에 동일한 고민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 구도를 넘어섭니다. 이 구도에서 보자면 루터가 가톨릭 교황과 결별한 것은 상징적 사건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의 개혁, 가톨릭을 다시 보자
종교개혁으로 유럽의 지형도에서 교황 중심제는 막을 내렸습니다. 보름스 회의에 루터를 소환했던 신성로마제국 카를로스 5세는 독실한 가톨릭교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대적했던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보복하기 위해 1527년 로마 라테란 교황 궁전에 침입하여 궁전을 마구간으로 사용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황의 위상은 군림하는 군주가 아니라 입헌군주제의 군주쯤으로 전락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화는, 개신교는 개혁을 했고 가톨릭은 반동적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가톨릭과 개신교는 개혁의 경쟁자였습니다. 가톨릭은 내부 개혁을 했습니다. 중세부터 위기의 시기마다 위로부터의 개혁(reformation in capite and in membris)에 성공했습니다. 예수회가 등장하고 트렌트 공의회(1545-1563)가 개최되면서 가톨릭은 효율적으로 체제 유지에 성공합니다. 개신교에서 자극받은 ‘반동-종교개혁’이라고 부르건 ‘가톨릭 종교개혁’이라고 부르건 분명한 것은 세계사에서 가톨릭이 또 다른 전환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지역은 안에서 잃은 것을 밖에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잉카 문명을 파괴한 정복자 피사로 같은 자도 가톨릭을 전파했지만, 영화 <미션>에 그려진 것처럼 남미 대륙에서 포르투갈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스페인 예수회 선교사의 모습도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1648년, 독일의 신·구교 사이에 ‘30년 전쟁’이라는 종교전쟁이 끝나고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놀랍게도 유럽에서 개신교 지역보다 가톨릭 지역이 더 많았습니다. 종교개혁이 지고의 선이라면, 1648년의 종교 지형도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근대 세계의 가톨릭 스페인, 가톨릭 프랑스의 발전을 뭉뚱그려 무시하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요?

물론, 일정 정도 불가피하게 내부 단속을 위해 외부의 적을 상정하는 전략은 불가피합니다. 루터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개신교 국가에서는 교황에 대한 반감을 표출했습니다. 칼뱅 같은 경우는 제네바 성경의 난외주(marginal note)를 강한 반가톨릭적인 내용으로 채웠습니다. 내부적인 신학적 체계를 다지기 위한 목적도 있는 반면, 스위스 산악 지대의 가톨릭 칸톤(canton, 스위스의 지역을 나눈 주)을 대상으로 한 프로파간다이기도 합니다. 잉글랜드 내에서도 종교개혁 이후 명쾌하게 개신교 노선을 걷지 않는 국왕들 때문에 개신교도들은 강력하게 반교황주의의 색깔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잉글랜드 같은 경우는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해상 주도권을 놓고 다투고 있던 터라 ‘가톨릭 스페인’은 외부의 적과 싸우기 위해 국민의식을 하나로 묶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승리를 잉글랜드 개신교의 프로파간다의 승리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지금도 한국 개신교에서는 교단 총회 때마다 여전히 가톨릭을 보고 이단이나 이교로 지정하니 마니 다툽니다. 가톨릭은 긍정적 의미이건 부정적 의미이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탈바꿈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면벌부 판매하던 시절의 가톨릭을 적으로 상정하고 적대감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타락의 상징이고, 구원이 없는 종교로 전락되어야 했습니다. 루터의 가톨릭에 대한 대응이 진리여야 했고, 칼뱅은 모두 옳아야 했습니다. 여전히 대다수 한국교회가 지속하고 있는 프로파간다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가 종교개혁 구도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역사적 정당성이 미약한 진영 논리인가 알 수 있습니다. 루터를 통해 확대하고 강화해 가는 이러한 식의 관념은 개신교의 건전성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한국 개신교의 존재 의미는 적대적 공생관계 같은 느낌이 듭니다. 가톨릭, 자유주의 신학, 친북좌파, 페미니즘, 이슬람, 동성애 등등 시기마다 새로운 적들을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그 정당성의 근거가 종교개혁의 가치를 지켜낸다는 것입니다. 진지한 고민 없이 가상의 적을 만들어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국가교회, 정치의 신성화
국민국가의 형성으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재정립되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종교개혁자들은 종교의 가르침이 국가의 지도 이념이 되는 교회국가를 꿈꾸었습니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모범으로 제시했던 것이고, 잉글랜드의 청교도가 국왕을 죽이면서 성취하고자 했던 목표입니다. 하지만 근대 세계는 국가가 종교를 결정하는 국가교회로 탈바꿈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지역 모두는 국민국가라는 절대 상수 앞에서, 국가에 부속하는 종속 변수로 자리 잡아 갔습니다.

중세 천 년이 종교지배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종교개혁 이후 2세기는 그 시계추가 국왕이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것으로 크게 회전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종교지배를 정당화해주는 이데올로기들이 생겨났습니다. 파시즘을 연구한 이탈리아 역사학자 에밀리오 젠틸레는 전통적 종교의 권위가 붕괴한 근대에 세속 군주가 종교적 권위로 떠오르게 되는 정치의 신성화가 일어났다고 보았습니다. 정치의 신성화는 결국 프랑스 혁명 이전에 유럽의 절대왕정을 낳았고, 그 후에는 근대 말의 파시즘으로 변형되었습니다.

‘왕의 안수’(royal touch)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주로 행해진 것으로 왕의 생일에 거리의 병자들에게 기름을 붓고 손을 대면 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프랑스 왕도 국교회 영국 왕도 같은 것을 행했습니다. 근대 절대왕정의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심지어 이 관행은 프랑스 혁명 전후에도 발견됩니다. 이는 국왕의 지위가 성직자의 지위로 격상되었음을, 아니 성직자를 대체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절대왕정 시대에 국왕은 신 외에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중세의 칠성사(七聖事, 가톨릭의 일곱 가지 성사)에도 성직자 서임식은 들어가 있지만 왕의 대관식은 없었습니다. 상징적인 변화입니다. 국가 권력의 극적인 장면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입니다. 제목과 달리 황제의 대관 장면은 나오지 않고 나폴레옹이 왕관을 들어 아내 조세핀에게 씌워주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본래 나폴레옹이 스스로 왕관을 들어 쓰고 그 뒤에 교황이 조신하게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스케치되어 있었습니다. 

   
   
▲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일부, 본래 스케치에는 스스로 왕관을 쓰고 그 뒤에 교황이 조신하게 손을 내리고 앉아 있다.


근대 세계에 적응하는 경험이 유럽 교회에는 있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에게 근대는 낯선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17, 18세기 형성된 절대 왕정에서 교회는 국가와의 관계 속에 때로 수동적일 수밖에 없던 적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초점은 무엇일까요? 아마 절대 왕정기의 국가가 교회를 탄압한 사례를 보며, 오늘날 종교인 과세 등도 국가가 교회를 말살하려는 시도라고 주장하고 싶은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세속 사회에 큰 영향력을 지녔던 시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충분히 그럴 법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란처럼 대통령 뒤에 실세 종교 지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를 건강한 근대라고 보지 않습니다. 근대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점은 변화된 근대 국가의 상황 속에서 교회는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문법에 어긋나지 않게 종교적 역할을 하고 살아냈다는 것입니다. 절대왕정은 붕괴되었지만, 교회는 붕괴되지 않고 근대 세계를 관통했습니다. 복음의 가르침에 근거한 사회적 역할을 발굴해 냈고 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노예무역 금지나, 인종차별 금지, 사회 구제 및 선교 등에 앞장선 교회의 모습은 근대의 체제 속에 안착한 종교의 모습입니다.

‘지적 게으름’을 넘어서
우리가 종교지배의 중세를 이상적인 사회라고 보지 않을 바에야 세속 사회 속에 살면서 종교라는 특수성으로 문제를 비껴가는 것은 본질을 벗어나는 태도입니다. 교회 세습에 대해서도 ‘세상이 간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내부자의 논리는 설득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근대 교회, 더 나아가 근대 사회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도 기독교라는 종교가 21세기에도 한국 사회에 게토가 아니라 당당한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통찰을 얻기 위함입니다. 한국 사회도 그렇지만 개신교 역시 근대라는 세계가 던져 준 물질적이고 구조적인 체제는 쉽게 적응했지만, 그 체제가 자리 잡기까지 형성기에 겪었던 고민들은 크게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개신교는 초대교회로부터 하늘에서 떨어진 신령한 집단이라는 허황된 자기 최면에 걸려 있습니다. 물론, 특수하긴 합니다. 과세를 해야 하느냐, 세습을 어떻게 막아야 하느냐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은데,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이 맞느냐 아니냐 역시 논쟁해야 합니다. 이것이 되었건, 저것이 되었건 교회 밖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논의들이 너무도 심각하고 진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이 바닥입니다.

제가 고민하는 구도는 명료합니다. 21세기에 교회가 한국 사회 문법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보자면 우리 개신교회는 아직 한국 사회 속의 일원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한국 사회와 어떻게 건전하고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할 것인가 고민이 시작된 시점에 있습니다. 어쩌면 유럽의 교황 주도 가톨릭체제가 무너진 후 오랜 기간을 거쳐 형성된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우리는 이제 시작한 셈입니다.

대형교회 세습이나 종교인 과세 문제에 대한 기득권 및 주류 목회자들의 인식 수준은 천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적어도 오늘 이 시점에서 한국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이들은 친북좌파도 아니요, 친이슬람도 아니요, 친동성애자들도 아닌 바로 기득권에 쌓여 있는 종교인들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예외를 요구합니다. 교회와 사회는 다르다고 요구합니다. 특별대우를 해주지 않으면 교회 탄압이라고 대응을 합니다. 마치 중세 가톨릭이 무너진 후 종교 우위가 사라진 시점에서 16세기 개신교나 가톨릭 모두 당황하며 겪어야 했던 중세 말의 현상을 오늘 한국교회가 직면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역사를 인류사회에 존재했던 한 제도로서 담백하게 바라보고 공부한다면 훨씬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사회 속에서 교회가 부딪치는 사회적 갈등이 교회를 파괴하는 문제인지, 최소한 교회의 안전성을 담보할 문제인지는 한 걸음 떨어진 시각에서 바라보면 답이 나옵니다. 우리가 전태일 열사나 박종철 열사의 삶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이유는 그들의 삶과 죽음이 영웅적이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목숨과 바꾸어 이루어 내고자 했던 그 너머의 세계를 우리가 어떻게 실현하고 있는지 현재 돌아보고 성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이제 루터를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루터에게만 천착할 때 당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번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톨릭의 회복을 읽어낼 수 없습니다. 근대 사회를 살아냈던 교회의 수고를 간단하게 건너뛰어 무작정 오늘에 대입하게 됩니다. 

종교개혁 정신을 21세기에 소환해서 모범으로 삼는 것은 편리하고 그럴 듯해 보이나 김어준의 표현을 빌리면 ‘게으른’ 시각입니다. 부지런한 것 같으나 그 너머의 맥락에 무관심한 게으름입니다. 문제는 이런 시도가 통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가수다〉가 불편했던 이유는 사람들이 이미 ‘눈물 흘릴’ 준비를 하고 노래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김어준은 그 코드를 읽었고, 단 두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1등을 맞추었답니다. 우리는 루터에 대해서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역사적 맥락과 무관하게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루터에게서 모든 선한 것이 나왔고, 충분히 은혜롭다고 선포하면 ‘아멘’으로 화답할 사람들은 끝없이 늘어 서 있습니다.

지적 게으름은 배움에 대한 열정이 없거나 독서에 대한 실천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것을 비판적으로 여과하는 능력을 갖추지 않는 것이 게으름입니다. 이제 그 너머의 의미를 캐내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인문학적 접근이란 우리의 시각에서 시작하지 말고 외부의 시각에서, 큰 그림에서 다시 좁혀 들어와 보자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개혁을 위해서 우리가 루터에게 집중하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개혁의 ‘정신’에 집중하는 것도 답이 아닙니다. 사상을 참조할 수는 있으나 21세기 문법에 맞게 만들어가는 것은 오롯이 오늘의 콘텍스트와 씨름하면서 해야 할 일입니다.

21세기의 맥락을 찾아서 
불편할 지점일 수 있으나 짚어보겠습니다.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가 인용한 표현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해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그다음에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
… 교회는 한국으로 와서는 대기업이 되었다.

 위 인용문의 함의는 교회가 본질을 놓쳤다는 한탄입니다. 물론 본질은 철학, 제도, 문화, 기업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가 각각의 콘텍스트에서 각각의 상황에 맞게 자리매김을 했다는 것은 그 시대의 맥락에 부합했다는 것입니다. 대기업이 된 한국교회, 간단히 말 몇 마디로 존재를 없앨 수 없습니다. 그 공이나 과가 어떠하든 한국의 20세기라는 시공간 속에 활발하게 구현되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맥락에서 대형교회가 ‘수행’한 시대의 역할을 간단하게 부인하고 조소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아 보입니다.

여기서 던져야 할 질문은 과연 21세기의 한국교회가 그리스의 철학이 이루었던, 로마의 제도가 성취했던, 유럽의 문화가 꽃피웠던 독자적인 기독교를 20세기 구조의 틀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대형교회의 구조를 인정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단, 그렇지 않다면 21세기에 대기업으로 남은 한국교회에 어떠한 아름다운 세대 교체는 없습니다. 건강한 대형교회도 없습니다. 사라져야 할 부조리이자 퇴행일 따름입니다. 적어도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대다수는 주류 교회가 시대의 문법을 읽지 못하거나 읽고자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도피처로 스스로를 제한된 경전 텍스트에 가두고 붙잡고 씨름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콘텍스트에 대한 고민에 기반하지 않을 경우 루터도, 칼뱅도, 심지어 성경 텍스트도 해답을 줄 수 없습니다.
 
꾸준히 적을 만들면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해 온 얕은 역사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부끄럽다고 계속 아닌 척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좀 방식을 바꿀 때도 되지 않았나요? 그를 위해 이제 긴 마라톤의 출발점에 서야 합니다. 바짝 정신을 다잡고 꼼꼼하게 교회와 사회를 읽어나가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역사적인 면에서 보면 종교개혁은 교회와 국가, 교회와 사회의 새로운 관계 정립입니다. 모든 것을 신앙과 신학의 문제로 환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세속적인 주장도 영적, 신앙적 가치에만 쏠린 교회의 세태를 교정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을 굳이 변명으로 삼습니다. 이는 역사를 공부하는 이의 최소한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