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호 다르거나 혹은 같거나] 지적장애인 청년 성연식 이야기

▲ 성연식 씨 ⓒ최용석

#01
연식이가 처음 배운 말은 엄마가 아니라, ‘아빠’였다. 아이 연식이가 걷기 전에 엄마가 집을 나갔기 때문이다. 아이는 아홉 살이 되어서야 ‘아빠’라고 부를 수 있었고, 다섯 살 때 걷기 시작했다. 성연식 씨는 지적장애인이다.

연식 씨 아버지는 택시 운전을 하신다. 김 목사 전화를 받고, 일하시는 중에 짬을 내어 카페에 들르셨다. 청년이 된 아들 연식이가 김 목사에게 카톡으로 욕을 했기 때문이다. 연식 씨는 화가 나면, 김 목사에게 욕을 하며 화를 푼다. 자조모임에서 친구들과 갈등이 있을 때, 김 목사가 편들어주지 않으면, 다음 날 다이너마이트나 뱀, 망치, 총 등의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 화났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요즈음, 연식 씨는 아주 적극적으로 쌍욕을 적어 김 목사에게 카톡을 보내는 중이다. 그러고는 김 목사에게 오는 전화를 ‘수신 차단’했다. 욕으로 선빵을 날리고, 수신 차단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무력화한다. 할 거 다 한다. 아주 열 받는다.

오해 마시라, 연식 씨 아버지를 뵙자고 한 건, 연식 씨 대신 아버님에게 사과를 받자는 게 아니다. 김 목사에게 화난 연식 씨가 발달장애인 자조모임에 안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연식 씨 엄마는 중국 조선족 출신이라고 했다. 연식이를 임신했을 때, 엄마는 강제 낙태를 시도했다. 연식이가 태중에 있을 때, 보건소에서 장애가 있을 거라고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아빠는 중절 수술을 하지 않고 연식이를 낳았다. 어머니는 출산 직후에도 연식이를 돌보지 않고 외출이 잦았다. 갓난아이를 때려서 억지로 재워놓고 외출하기도 해서, 아버지는 연식이를 조수석에 앉혀놓고 택시 운전을 하셨다고 한다. 결혼 후 4년이 지났을 때, 한국 국적을 취득한 어머니는 장애가 있는 아들을 두고 집을 나갔다. 아홉 살에 아빠를 불렀던 연식 씨는 이제 엄마라는 단어를 알지만, 아직 엄마를 불러보진 못했다.

다행히 평택에 있는 장애아동위탁시설에 연식이를 맡길 수 있었고, 거기에서 비교적 편안하게 지내며 여러 가지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집에서 있을 때보다 훨씬 안정돼 보였다고 했다. 연식이가 열두 살 되던 해, 연식이 할아버지에겐 뇌출혈이, 할머니에겐 치매가 왔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자를 너무 보고 싶어 하셔서 집으로 데려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때문에 연식이를 데려왔지만, 연식 씨 아버지는 노인 환자들과 장애인을 도저히 돌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연식이를 집 가까이에 있는 중증장애인 시설에 맡겼다. 주중에는 시설에 연식이를 맡길 수 있었고, 주말에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실책이었다.

김포 월곶에 소재한 중증장애인시설에서 연식이는 적응하지 못하고 저항하다가 의자에 손목이 묶이기도 했다. 메르스가 유행이던 때에 시설이 폐쇄되어 집으로 돌아왔는데, 손목에서 줄에 묶여 생긴 흉터를 발견했다. 그때 어린 연식이에게 적절한 돌봄이 제공되지 않는 줄 눈치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하셨다. 거동마저 어려운 부모님과 연식이를 함께 돌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연식이가 탈출을 했고 시설에서는 다시 받아주지 않았다.

무척 힘들었다고 또 미안했었다는 얘기를 하시며, 아버님은 웃으셨다. 그래도 지금이 낫다고 하신다. 지금은 연식 씨가 말을 할 줄 알고, 혼자서 마트에도 가고, 버스를 탈 줄도 알고, 심지어 김 목사에게 욕하면서 화도 낼 줄 아는 게 너무 신기하신 거다. 아들에게 욕먹는 김 목사한테는 미안하지만, 욕으로나마 먼저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아들이 대견하신 거다.

아홉 살 때 처음 “아빠”를 불렀던 연식 씨의 느린 행보를, 태어났을 때부터 청년이 되기까지 지켜본 아버지다. 유창하게 욕을 구사하는 아들이 기특하다. 연식 씨가 김 목사에게 카톡으로 욕을 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셨다. 김 목사 전화기에 찍힌 카톡을 보고 깜짝 놀라시는데, 미안해서 깜짝 놀라시는 게 아니라 아들에게 이런 능력과 적극성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시고는 깜짝 놀라셨다. “연식이가 목사님에게 이런 나쁜 말을 했네요” 하시면서 미안해하시는데, 얼굴 가득 환하게 웃으시며 아들 연식이를 향한 기특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셨다. 미안해하시는데, 이빨을 보이시며 웃으시는 아버지와 기쁨을 함께하며, 김 목사도 큰소리로 웃었다. 목사에게 쌍욕을 하는 지적장애인 아들을 기특해하시는 아버지의 기쁨에 전염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아홉 살에 처음 “아빠”를 부른 아들을 이만큼 키워내셨다. 돌이켜보면 아이 연식이에게 못할 결정도 하셔서, 후회도 많다. 장애아동 시설에서 잘 지내는 아이 연식이를 빼올 때, 그리고 중증장애인 시설에서 묶여 지내는 줄 알면서도 다시 시설에 맡겨야 했던 이야기를 하실 땐 혼나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시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시며 말씀하셨다.

연식이 아버님은 손가락 세 개로 운전을 하신다. 왼손 엄지와 검지,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날마다 택시 운전을 하신다. 결혼하시기 전에 공장에서 일하시다가 프레스에 눌렸다고 한다. 손가락이 세 개인 장애인 아버지가, 발달장애인 연식 씨를 지금만큼 키워내셨다. 아홉 살에 처음 아빠를 불렀던 연식 씨가, 목사에게 현란한 욕을 구사하는 스물다섯 살 청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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