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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 나를 혐오한 그들을 고발한다
[332호 올곧게 읽는 성경]
[332호] 2018년 06월 26일 (화) 15:35:09 박지은 goscon@goscon.co.kr
   
▲ 서울시민청에 마련된 강남역 살인 사건 추모 공간 (사진: 위키미디어 코먼스)

미투운동이 최근 우리 사회에서 지속되고 있다. 말할 수 없었던/말하기 두려웠던 성추행, 성폭력의 경험이 ‘나도 있었다’며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낸 사건은 2년 전인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이었다. 사건 사흘 후인 5월 20일, 여성 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가 서울의 신촌 유플렉스 앞에서 진행되었다. 인간이기에 앞서 ‘여자이기에’ 경험해야 했던 다양한 형태의 폭력의 이야기들. 그러나 사소한 이야기로 취급되어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 말할 공간조차 부재했던 이들의 이야기는 이날 ‘내가’ 주체가 되어 ‘나는’의 형식으로 말해지고 들려지고 기록되어 《거리에 선 페미니즘: 여성혐오를 멈추기 위한 8시간, 28,800초의 기록》**으로 출판되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낯선 여성들의 ‘나’의 이야기는 대부분 여성들에게는 아마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여성혐오와 여성 폭력은 역사 속에서, 우리 사회에서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일간베스트’(일베)의 여성 비하적인 표현과 발언을 비롯하여 ‘김치녀’ ‘된장녀’ 등 ‘◯◯녀’로 여성들을 범주화시켜 차별하고 공격하면서 여성혐오는 우리 사회 속에 서서히 스며들어 왔다.1

여성혐오(misogyny)를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의 타자화와 여성의 자기비하로 설명한다. 여성의 타자화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음으로 여성을 객체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남성은 남성이 아닌 대상을 분리시켜 차별화하여 자신들의 경계를 명확히 함으로 정체성과 성적 주체성을 형성한다. 이러한 차별화, 범주화의 과정에서 “남성이 되지 못한 남자와 여자를 배제”한다.2 그러나 여자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남성들에게도 어머니는 멸시할 수 없는 존재라는 모순에 빠지면서, 여성혐오는 여성 숭배의 양상과 함께 나타난다. 여성혐오와 여성숭배의 양면성은 여성의 성(sexuality)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평가함으로 상쇄된다. 여성은 성녀와 악녀, 어머니/아내와 성적으로 부도덕한 여성 등 두 집단으로 분리되면서 악녀의 범주에 속한 여성들은 타자화되고 혐오의 대상이 된다.3

여성의 이분법화를 통한 여성혐오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2018년 오늘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여성의 모습이 부도덕한 여성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해방 이후 1950년대 사회 재건이 시급한 상황에서 “입술을 빨갛게 칠한 여자”나 “껌을 씹고 다니는 여자”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여성의 기준으로 등장하기도 한다.4 흥미로운 것은 2000년대 이후 급격하게 형성된 ‘◯◯녀’ 담론은 거의 모든 여성들을 나쁜 여자로 범주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김치녀’ ‘된장녀’는 경제적으로 과소비하는 여성을 비난하며 등장한 용어이다. 하지만 ‘김치녀’나 ‘된장녀’는 “여성을 견제하는 담론”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 용어가 여성의 경제력 상승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 사회에서 “주변부 노동자”로 존재했던 여성들이 90년대 이후 남성과 동등하게 노동시장에서 활약한다. 그리고 경제적인 독립으로 “소비 능력”을 갖춘 일부 여성들의 소비 형태는 김치녀나 된장녀 담론으로 비난받기 시작한다. 문제는 왜 여성의 소비나 소비 욕망만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일부 여성의 소비 형태가 또한 마치 여성 전체의 모습인 듯 투사되면서, 경제적으로 고통받는 일부 여성들의 삶은 사회에서 잊히거나 누락된다.5 이렇듯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진 나쁜/악한 여자의 이미지는 실제로 악한 여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여성을 참조해 사회적 필요에 따라 재구성/재생산되는 것이다.”6 그리고 사회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를 여성들이 내재화할 때, 치즈코가 논의한 여성혐오의 또 다른 모습인 여성의 자기비하가 나타난다. 여성은 이래야만 한다는 남성들의 기준, 사회적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 때 여성의 자기멸시와 자기혐오가 심화되는 것이다.  

여성혐오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한 성서
여성의 타자화와 이분화를 통한 여성혐오의 역사에서 성서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여성혐오적인 성서 본문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또한 초대 교부들 이래로 여성혐오적인 성서 해석은 여성의 타자화와 여성소외, 여성의 자기혐오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여성의 시각으로 읽힌 성서 본문들이 여성혐오와 폭력의 역사를 고발하며 사회 변화를 모색하여 왔음을 물론 간과할 수 없다.7 그러나 성서를 근거로 여전히 여성폭력과 혐오는 정당화되며, 여성의 자기비하는 계속된다. 특히 악녀의 원형으로 간주된 하와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자기멸시와 비하를 초래하였다. 하와는 또한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여성폭력과 혐오의 이론적인 토대로 사용되었다. 다음은 《거리에 선 페미니즘》에 기록된 한 여성의 목소리이다.

저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닙니다. 저는 여자입니다. 저는 어느 회사의 직원이지만, 직원이 아닙니다. 저는 여직원입니다. … 항상 제게는 성별이 따라붙었고 무엇인가 모자란 존재였습니다. … 인간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갈비뼈를 꺼내 만든 하찮은 존재인 여자가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만으로 여자를 죽였습니다. 그에게 여자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 자신을 위해 뼛조각으로 만들어진 2등 시민인 주제에, 감히 자신과 동등한 취급을 받는 것이 화가 났겠죠.
-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저는 여직원입니다.’ 중에서
8

창세기의 하와는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친숙한 인물이지만, 하와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와는 남성을 파멸시키고 위협하는 위험한 여성으로 대부분 인식되었다. 남자의 갈비뼈로 창조된 존재이기에 하와는 제2의 인간, 인간 아닌 여자, 남자보다 못한 존재로 규정되어 왔다. 뱀의 유혹을 받아 신이 금지한 열매를 먼저 따서 먹고, 남자에게 건네준 유혹자 하와는 인류에게 죽음과 고통을 안겨준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하와는 그녀의 후손인 모든 여성들을 악의 근원인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는 데 공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와에게 덧씌워진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고대 교부들의 여성혐오적인 성서 해석에서 유래하여, 이후 기독교 역사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다. 만약 하와가 거리에 섰다면 하와는 어떠한 경험을 이야기했을까? 하와는 자신에게 덧입혀진 혐오적인 이미지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부 남성 지도자들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명백히 하지 않을까? 하와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나, 하와를 유혹자로 강조하며 모든 여성을 부정적으로 본 것은 테르툴리아누스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여자를 “악마로 통하는 문이며… 신에 가까운 모습으로 창조된 남자를 파멸시킨” 자들이라고 해석함으로,9 나, 하와의 후손인 여자를 태생적으로 악하고 혐오적인 존재로 간주하였다. 이후 나, 하와의 후손인 여성이 인간인지 아닌지 논의까지 진행되었다. 581년 프랑스 마콩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여성은 이성적인 존재로 분류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짐승으로 분류되어야 하는가. 또한 여성은 영혼을 지니고 있는가, 그리고 정말 인류의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회의 현안은,10 인간이 아닌 존재로서의 여성들의 열악한 위치를 예증해준다.  

나, 하와에 대한 고대 교부들의 해석은 중세 성직자와 수도사들에게, 그리고 중세 예술이나 문학 속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렌의 주교이자 라틴 시인인 마르보드는 그의 저서 《열 권의 책》의 제3부에 ‘악녀에 대해서’라는 표제에서 여자는 모두 창녀”라고 주장하면서 여성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기도 한다.11 악마와 소통한 유혹자 나, 하와와 나의 권유로 열매를 먹게 된 피해자 아담을 강조하는 작품도 등장하는데, 바로 마시치오 디 산 지오바니니(Masaccio di San Giovanni)의 ‘에덴동산에서의 추방’(1426-1427)이다. 지오바니니는 “아담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손으로 가려주어 아담을 세상 사람들과 관객들의 질타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도”를 작품에 반영함으로 아담에게 “죄의 면죄권”을 준다. 반면, 나, 하와의 얼굴은 “통한, 부끄러움, 후회, 고통”의 복합적인 감정들이 그대로 표현된 채 추방된다. 그림을 보는 독자들은 나, 하와의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감정을 포착하며, 나, 하와의 죄는 더 극대화되고 고통의 원인 제공자로서 비난을 받는다.12 결국 고대로부터 지속된 나 하와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모든 여성에 대한 혐오감으로 발전, 증폭되었고, 악마와 여성의 관련성에 대한 믿음은 마녀사냥에서 여성학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마녀사냥의 지침서 역할을 했던 《마녀의 망치》는 여성은 “육욕을 채우기 위해 악령과도 동침한다”고 결론 지음으로 여성과 악마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제시하였다.13

   
▲ 이미지: 위키미디어 코먼스

나, 하와와 마리아
흥미로운 것은 12세기 이후부터는 나, 하와는 성녀 마리아와 대조되면서 “여자에 대한 이원론적 표상이 완성으로 치닫는” 양상이 드러난다.14 나, 하와와 마리아의 대조는 앞서 지적했듯이 여성혐오와 여성숭배의 이원화를 통한 여성의 성(sexuality)의 이중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처녀이면서 어머니가 되었던 마리아 숭배 사상에서 마리아의 어머니 역할보다는 ‘처녀성’에 주목하면서, 마리아는 완벽한 여성을 대표하는 원형이 되었다. 처녀들은 원죄의 “벌에서 벗어난 자유”를 가진 존재이자 “남성에 대한 복종의 벌에서 벗어난 자유”를 만끽하는 존재로 이해되었고, “영혼 구원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15 나, 하와와 마리아의 이원화가 여성의 성(sexuality)뿐만 아니라 여성의 몸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여성의 몸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지옥으로 이끄는 “저주받은” 몸과 인류에게 “구원을 안겨줄” 몸으로 구별된다. 여성의 몸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은 고대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아담까지도 타락하게 만든 유혹자 나, 하와의 아름다움은 죄성을 감추려는 “기만적인 육체”이기에 “표면적인 아름다움이 육체의 참모습, 요컨대 무거운 죄나 추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되었다.16 이러한 이유로 여성이 화장하는 것이 비판되거나 금지되었으며, 외모에 치중해서는 안 된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하였다. 다시 테르툴리아누스를 살펴보자. 테르툴리아누스는 여성의 외모 치장에 대한 반대 이유를 나, 하와와 관련시킨다.

… 자신의 외모는 소홀히 해야 할 것이니라. 그 이유는 너희 모두는 각자 애통해 하며 회개하는 이브를 가슴 안에 담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회개의 옷은 이브가 지은 죄를 속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니라. 악마에게 문을 열어 준 것도 바로 너이며 네가 그 나무의 봉인을 부쉈으며 네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계율을 무시했으며 악마가 가까이할 수 없었던 자를 유혹한 것도 바로 너이니라. 그렇게 하여 너는 하나님과 똑같은 형상인 남자를 땅바닥으로 가볍게 내동댕이친 것이니라.17

고대 교부들로부터 전해진 여성의 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여성의 몸이 독을 만든다는 생각으로까지 발전한다. 여성의 생리 현상은 여성의 몸에서 만들어지는 독의 유출이며 모든 것을 오염시킬 수 있기에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여성의 완경 또한 여성이 더 이상 품은 독을 내보낼 수 없기에 나이든 여성은 더 위험한 자들로 취급되었다. 독을 품은 여성의 몸은 마녀의 몸과 연결되면서 숨을 쉬고 사람을 쳐다보는 시선 속에서도 독을 발사할 수 있다고 인식되었다. 결국 불결한 여성의 몸은 악마와의 관계를 통해서 공동체에 해악을 가져오는 몸으로 인식되었다.18 남성들에 의해 부도덕하고 불결하며 음란한 몸으로 규정된 여성의 몸에 대한 인식을 받아들인 여성들은 금욕과 고행을 통해 자신의 성(sexuality)을 통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중세 후기로 갈수록 성의 억압과 몸에 대한 부정에서 벗어나 내적인 변화를 통해 육체를 통제하는 양상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곧 수유나 임신 등, 여성의 몸의 자연스러운 현상을 구원과 연관시키면서 여성의 몸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7, 18세기에 여성의 몸이 남성과 비교되면서 여성에 대한 열등함과 멸시, 혐오는 다시금 등장하게 되었다.19   

나, 하와를 원형으로 삼아 여성들의 몸을 통제하고, 여성의 성(sexuality)을 혐오적인 것으로 인식한 것은 실제적인 여성들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 아님은 이로써 명백하다. 초대 교부들의 여성의 성과 몸에 대한 부정적인 이해는 성서로부터 도출하여 이를 확대해석함으로 남성의 우월성을 강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남성들이 여성의 타자화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형성하듯, 나, 하와 이야기를 통해 모든 여성들을 타자화시키고 대상화함으로 여성들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해온 것이다. 이원론적으로 평가되고 이해된 여성들의 몸과 성은 항상 인간의 범주에서 논의되지 않았다. 여성들은 자신의 몸과 성을 부정함으로 좋은 여자로 평가받기를 원했으며, 이원론을 수용함으로 또 다른 여성들을 음란하고 악한 여성으로 타자화하면서 여성에 의한 여성혐오도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필리스 트리블의 연구 이래로 아담에게 “돕는 자”를 만들어주기 위해 그의 갈비뼈로 나, 하와를 창조했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더 이상 여성의 종속성을 주장하는 이야기로 해석되지 않는다. “돕다”라는 용어는 열등한 위치가 아닌 평등한 관계에서의 상호 도움이며, 갈비뼈도 뼈를 나눈 “연대성”이 강조되면서 여성의 눈으로 나, 하와를 해석하는 다양한 논의들이 전개되어왔다.20

그러나 교회 현장에서 만나는 나, 하와는 어떨까? 과연 고대 교부들의 해석을 뛰어넘었을까? 여전히 여성 안수가 거부되거나 여성의 생리적인 현상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망언은 2018년 여성혐오 논란의 현장에서 민망하기만 하다. 교회 현장에서도 지속되는 성추행, 성폭력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나, 하와가 새롭게 교회에서 이야기되기를 희망한다. 만들어진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나 악녀/성녀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나, 하와가 만나지기를 희망한다. 나, 하와의 부정적 이미지로 자신을 혐오하던 여성이 자기혐오를 극복하기를 희망한다. 여성에 대한 일그러진 이미지를 통해 형성된 여성혐오와 폭력이 근절되기를 희망한다.

* 이 글은 필자의 '여성의 타자화와 여성혐오 -하와와 잠언의 여성을 중심으로 중 52-56쪽 글을 '나, 하와'로 수정하여 발췌한 것이다. 전체 글은 여성신학회가 엮은 《혐오와 여성신학》(동연, 2018)에서 확인할 수 있다.

** 한국여성민우회, 《거리에 선 페미니즘》(궁리), 2016, 14-15쪽.

1 윤보라, '김치녀와 벌거벗은 임금님들', 《여성혐오가 어쟀다구?》(현실문학), 2015, 13-14쪽.

2 우에노 치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은행나무), 2012, 13쪽, 49쪽. 여기에서 남성이 되지 못한 남자는 제3의 성 범주에 들어가는 존재를 의미한다. 자세한 것은 38-39쪽.

3 앞의 책, 51-53쪽

4 이임하, '해방 뒤 국가건설과 여성노동' <역사연구> 15호(2015) 42쪽, 재인용: 윤보라, '김치녀와 벌거벗은 임금님들' 15-16쪽

5 윤보라, '김치녀와 벌거벗은 임금님들' 17, 24-26쪽.

6 앞의 책, 16쪽

7 예를 들어, 이경숙, 《구약성서의 여성들》(대한기독교셔회), 1994, 217-234쪽.

8 한국여성민우회, 《거리에 선 페미니즘》, 95쪽.

9 이케가미 순이치 지음, 김성기 옮김, 《마녀와 성녀》(창해), 1992, 113쪽.

10 앞의 책, 116쪽.

11 앞의 책, 116-117쪽

12 이은주, 《그림에서 여성을 읽다》(북랩), 2016, 16-17쪽

13 이케가미 순이치, 《마녀와 성녀》, 111-112, 118쪽

14 앞의 책, 125쪽.

15 앞의 책, 120-123쪽.

16 앞의 책, 129-130쪽

17 수잔네 하이네 지음, 정미현 옮김, 《초기 기독교 세계의 여성들》(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8, 35-36쪽. 또한 "여자의 아름다움은 피부 속까지 미치지 않는다. 만약 남자들이 여자의 피부 속을 본다면 구토를 일으킬 것이다…" 10세기 프랑스 클뤼니 수도원장 오도(Odo)가 수도사들에게 한 말로 알려져 있다. 이케가미 순이치, 《마녀와 성녀》, 130쪽.

18 이케가미 순이치, 《마녀와 성녀》, 130-131쪽

19 앞의 책, 133-141쪽.

20 필리스 트리블, '이브와 아담-창세기 2-3장에 대한 재조명' 이우정 편, 《여성들을 위한 신학》(한국신학연구소), 1995, 153-155쪽.

 

박지은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밴더빌트 대학(Vanderbilt University)에서 구약(히브리)성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강사로, 여성 및 생태문제를 비롯하여 현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응답할 수 있는 구약성서 읽기에 관심이 있다. 종교와 철학, 그리고 신학 분야를 망라하는 다양한 학인들이 모여, 우리 시대 진리 주체의 담론을 생산해 내는 신학-인문학 그룹 ‘대구와 카레’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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