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호 레드레터 크리스천] 한 길 가는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자 로날드 사이더

미국 복음주의권의 대표적 진보주의자(로 일컬어지는) 로날드 사이더(Ronald James Sider) 목사.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좌파/우파 어디에도 규정되기를 거부하며 스스로를 ‘성경에 충실한 헌신된 복음주의자’일 뿐이라고 소개해왔다. 1973년 그가 작성한 복음주의적 사회참여를 위한 <시카고 선언>이 1974년 로잔대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 후 최근까지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이더는 신학교 교수, ‘사회 참여를 위한 복음주의 운동’(Evangelicals for Social Action, 이하 ESA) 대표로 활동하면서 30권이 넘는 저서를 집필하는 한편, 각종 강연과 투고, 센터 운영 등을 통해 교회의 통전적 복음(Holistic Evangelicals), 즉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균형(combining evangelism and social action)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기여하며 꾸준히 활동해왔다. 

로날드 사이더의 책은 국내에도 많이 소개되어 오랜 기간 꾸준히 읽혀왔다. 특히 그의 대표작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IVP, 2009, 5판)은 1977년 처음 출간된 이래로 보완과 수정을 거쳐 다섯 번의 개정판을 냈으며, 올해는 여섯 번째 개정판이 나온다고 하니 그의 관심과 방향이 얼마나 초지일관하면서도 시대의 변화를 읽는 노력으로 지속되어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2년 전(2013)에 ESA와 이스턴 대학 팔머 신학교에서 은퇴를 선언한 후 현재까지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다.) 

   
▲ 사진 제공: 로날드 사이더

근황

2년 전  ESA 대표와 팔머 신학교 교수직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이후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ESA 대표직은 2013년에 완전히 내려놓았습니다. 이스턴 대학교 산하 팔머 신학교에서는 하프타임으로 전환하여 전인적 사역과 공공정책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ESA 은퇴 시기에 대해 언급하자면, ‘언제 젊은 사람들에게 이 사역을 넘겨주어야 하나’ 계속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ESA의 스태프들이 40주년 행사를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40주년 행사일이 나의 은퇴일이 되리라는 즉각적인 깨달음이 왔습니다.

사실 성경은 은퇴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마땅히 사역의 속도를 점점 줄이고 마침내 손에서 내려놓아야겠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하나님 나라의 과업을 이어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저도 파트타임 교수로, 또 글쓰기와 강연으로 사역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2015년에 새롭게 출간될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의 여섯 번째 개정판 작업과, 저보다 50년 정도 어린 친구들과 함께 세대 간의 문제를 다룬 《모든 세대를 위한 믿음》(A Faith For All Generations)의 집필 작업을 마쳤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예수는 왜 제자들이 살상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지를 다룬 책을 쓸 계획입니다.
 

가난한 시대의 부유한 그리스도인, 그 이후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에서 그리스도인이 영혼 구원뿐 아니라 개인, 교회 공동체, 사회 정치라는 세 차원에서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본주의에 안주하고 있는 서구 그리스도인을 비판했습니다. 이 책이 출간된 지 40년이 다 되어가지만 책의 내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도전적으로 다가옵니다. 복음전도와 사회참여가 함께 균형을 이뤄가야 한다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오랫동안 강조하고 견지해왔는데, 지금도 그 입장에는 변함이 없는지 궁금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전도와 사회적 행동 모두에 참여해야 한다는 내 입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굳건합니다. 우리의 유일하고 완전한 모델은 예수입니다. 그는 사역에 임할 때 사람들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는 동시에, 치유를 행하며 말씀과 행위(word and deed) 모두를 사용했습니다.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실제적 필요를 채워주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곧 잠재적인 전도와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온 세상을 잃어버리는 것이 한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최근에 작업한 세대 간의 대화를 다룬 책에서 저는 젊은 그리스도인 친구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이 사회 정의와 피조세계에 관심을 두는 만큼, 믿지 않는 이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데려오는 일에 관심을 쏟고 있는지 말입니다.

1974년,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그리스도인의 동등한 책무로 선언한 ‘로잔언약’ 이후 저작 활동을 통해 서구의 기독인들과 교회가 실천해야 할 가이드라인을 꾸준히 제시해왔습니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로잔언약의 정신을 삶에서 실행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개인과 교회의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균형을 막는 방해물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많은 교회들이 말씀과 행위를 함께 안고 가는 통전적(총체적/전인적)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1974년 제1회 로잔대회 이후 성경을 따르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복음전도와 더불어 사회참여가 기독교 사역의 중심에 놓일 수 있느냐를 두고 큰 논쟁이 있었습니다만, 이제 그런 논쟁은 대체로 끝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대다수 복음주의권 지도자들이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병행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2010년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열렸던 제3회 로잔대회에서도 더 이상의 논쟁은 없었습니다. 사실상 대회의 전 연사들이 이 두 측면을 다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 'Christ at the Checkpoint' 콘퍼런스에서 강연하는 로날드 사이더(2012). (유튜브 화면 갈무리)

현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단히 많은 복음주의권 회중들이 오늘날 영혼 구원과 사회적 책임에 깊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아프리카, 남미, 그리고 아시아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세계 복음주의권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오순절파 역시 현재 말씀과 행위 둘 다 함께 안고 가고 있습니다. 물론 복음전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지역 교회들도 여전히 많이 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지난 40년은 거대한 변화의 시기였음이 분명합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전인적 사역의 신학을 받아들이면서 일상에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책 《복음전도와 사회운동: 총체적 복음을 위한 선행신학》(CLC)에서 자세히 설명했음에도, 여전히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통전적 선교의 성경적 토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힘을 부여하기 위해 행동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때때로 물질주의라는 이기적인 장애물에 가로막힐 때도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기독교권에서는 당연히 복음전도를 위한 신학적 기반이 부재합니다. 만약 예수가 구원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 아니고 신에게 가는 다른 종교들이 동등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복음이나 전도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러나 결론적으로 복음주의권은 전 세계적으로 복음전도와 사회운동을 병행하는 데 있어 지난 40년간 괄목할 만한 진보를 이루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참여적 복음주의 그룹의 지난 10여 년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선거를 통한 입법 및 정책을 만들어 사회가 제도적으로 변화될 것을 강조해왔습니다. 이에 관해 미국의 사회참여적 복음주의 운동의 지난 10여 년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복음주의자들은 여전히 불의한 구조와 시스템이 사회구성원들에게 미치는 해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성과를 거두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적 회심을 통해 사회가 변화된다고 믿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개인의 변화는 중요하며 개개인이 모여 사회 전반에 선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불의한 구조들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 같은 내용은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을 개정할 때마다 강조하곤 했습니다. 

오랫동안 저는 제게 ‘좌파/우파’의 딱지를 붙이는 것을 거부해왔습니다. 제가 수십 년간 지지해온 공공정책 이슈에 관한 견해는 성경의 가르침에 터잡은 것입니다. 낙태를 쉽게 허용하는 것에 반대하고 남녀 간의 결혼관계만을 지지하는 제 입장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에 속합니다. 반면, 사회 빈곤층을 일으켜 세우는 데 정부의 역할을 매우 중요시하는 입장은 정치적 진보로 여겨지지요. 

미국의 1980년대와 90년대는 복음주의권의 많은 사람들이 소위 종교적 우파(Religious Right)에 속하는 시대였습니다.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의 ‘기독교연합’(Christian Coalition), 제리 팔웰(Jerry Falwell)의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 등〕 그들의 주장은 반쪽짜리이며 심지어 성경적이지도 않다는 것이 저와 ESA의 입장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서 하나님이 관심을  두는 모든 것, 즉 인권과 빈곤을 위한 정의의 문제, 가족과 생태보호, 성적인 온전함과 평화주의 등에 정치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2004년, 미국의 가장 큰 복음주의 단체인 ‘전미복음주의협회’(th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NAE)는 만장일치로 공식적인 공공정책의 골격으로서 <국가적 보건>(For the Health of the Nation)이라고 명명된 문서를 채택했습니다. 이 문서는 신실한 복음주의 시민운동(engagement)은 “성경적으로 균형잡힌 아젠다”를 포함해야 한다고 말하며, 낙태와 결혼에 대하여는 강경한 보수적 목소리를, 경제적 정의나 생태, 그리고 평화문제에 대하여는 격렬한 진보적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NAE는 지난 몇 년 간 미국의 경제적 정의와 이민법 개혁, 그리고 생태윤리와 관련한 공공정책 발의에 주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소저너스’(Sojourners)의 짐 월리스나 도널드 데이튼 등 사회참여적 복음주의 그룹(Social participatory evangelical group) 간의 현재 관계 및 결속력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짐 월리스와는 1972년부터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이견이 있으나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사역에 동의하며 여러 사안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지고 동역하고 있습니다. 

이머징처치 같은 포스트모던 그룹(브라이언 맥클라렌 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들의 사역을 사회참여에 대한 포스트모던 세대의 새로운 방식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브라이언 맥클라렌 같은 포스트모던 그리스도인들이 확신하고 찾는 게 무엇인지 와닿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주의권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정확할 때가 많았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체계에 대해 과도하게 교리적(dogmatic) 주장을 들이대는 경우가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 점이 인간성의 한계, 즉 우리의 신학적 주장과 성경해석 역시 언제나 불완전하고 제한적이라는 현실을 간과하게 만들었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리의 실재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진리를 아시며 성경이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겸손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 유튜브 화면 갈무리. (IVP USA)

단지 복음주의자들이 지난날 복음주의 내에서 했던 일부 방식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이머징 사역자들이 말한다면, 다시 말하지만, 저는 그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절박한 가난 속에 살아가는 10억의 사람들이 있는 만큼 예수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10억의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과연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가끔은 의아하게 여겨집니다.

남아 있는 과제

10년 전 한국에 왔을 때 <복음과상황>과의 인터뷰(2005년 9월 15일자 168호)에서 미국 기독교의 내부 지형에 대한 질문에 “보수(Religious Right) 45, 중도(centrist) 45, 진보(progressive) 10”이라고 답하신 바 있습니다. 미국 복음주의권(3천만 명) 내 현황인지, 아니면 전체 기독교인(1억 5천만 명)을 모두 고려한 비율인지요? 이것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하는지요?
복음주의권 내 비율을 언급한 것입니다. 미국 전체 인구 중 가톨릭은 25%, 복음주의권 25%, 그리고 20% 미만이 전통적 주류 개신교(historic Protestant)입니다. 복음주의권 여러 그룹의 분포를 신중하게 조사한 확실한 데이터를 인용하기는 어렵습니만, 45%가 보수, 45%가 중도, 10% 정도가 진보적 그룹이라는 것은 여전히 적절한 비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교적 최근에 쓰신 저서나 글에서, 동성 결혼과 낙태에 관해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특히 미국에서 이 두 가지 이슈야말로 복음주의권 내에서 ‘사회참여와 복음전도의 균형’을 언급하기에 가장 까다로운 주제가 아닌가 합니다.
수년 동안 낙태와 동성애에 대한 제 입장에는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저는 최대한 성경에 기초를 둔 입장을 발전시키려 심혈을 기울여왔으니까요. 이런 태도는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은 경제정의와 평화주의, 그리고 생태 문제에 성경을 끌어들인다며 저를 비판하고, 진보주의자들은 제가 낙태와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깁니다. 그러나 저는 제대로 된 성경 주해와 해석이 나타나 제 생각을 바꾸라고 요구하기 전에는, 지금의 의견을 성경적 해석이라고 믿으려 합니다. 비록 이의와 비판이 있더라도 말이지요. 

오늘날 동성애 문제는 미국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사안입니다. 최근 공공정책과 교회의 실천을 관련지어 쓴 글이 있습니다. 저는 주 정부가 ‘동성혼’을 합법화하는 것이 좋은 정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 법원의 최근 결정에 따라 이 사안은 대체로 합의가 되고 있으며 이제 미국의 많은 주에서 합법화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의 행동과 교회의 가르침에는 어떠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이 여전히 동성애자 학대에 반대하지 않고, 성정체성 문제로 괴로워하며 자신과 싸우고 있는 교회의 젊은이들을 깊이 사랑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통탄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치신 성적 관계란 장기적인 삶의 헌신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나누는 것이라는 저의 믿음은 변함이 없으며, 사회의 흐름과 관계없이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믿음을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변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정체성을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어야 하며, 동성애 성향을 바꿀 수 없는 이들에게(그들이 절제하는 삶을 살기로 약속하고 노력하는 한) 최상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결혼을 하지 않은 이성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는 바입니다.) 

폭력과 비폭력에 대한 당신의 관점이 궁금합니다. (중동 및 북아프리카의 민주화 운동 등) 현재 세계 정세를 보면 더 나은 사회 정의를 위해 무력을 동원하는 운동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 문제에 관한 나의 시작점 역시 예수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면서 그들을 죽일 수 있을까요? 저는 ‘정의의 전쟁’(Just War) 전통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존중합니다만, 예수님의 최종적 말씀은 살의를 품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저는 그분의 명령에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엮은 책으로 《The Early Church on Killing: A Comprehensive Sourcebook on Abortion, Capital Punishment and War》(초대교회의 살상: 낙태, 사형 그리고 전쟁에 관한 자료집)이 있는데, 신약시대 이후부터 콘스탄티누스까지 초대 교회의 모든 저술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이 시기의 교부들은 항상 전쟁, 낙태, 사형의 살인에 대해 토론하면서 그리스도인은 그런 행위를 하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그리스도인의 살상이 허용된다고 말하는 글은 단 한 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저자들은 살상에 관해 다루는 모든 글에서 그리스도인은 살인을 하지 않으며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테러리즘과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는 결정하기 매우 힘든 문제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답변은 이렇습니다. 첫째, 어렵고 위험한 상황일 때조차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것, 둘째, 지난 50년에 걸쳐 불의와 독재에 비폭력으로 맞서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성공을 거둔 많은 운동 사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시민운동은 미국 역사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장기간 잔인하게 필리핀을 통치했던 독재자 마르코스 역시 “민중의 비폭력적인 힘”으로 타도되었습니다. 비폭력 운동이 폴란드와 동독의 무자비한 공산주의 전체 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가장 최근의 학술도서는 지난 100년간의 비폭력 운동이 불의와 압제에 항거하는 폭력운동보다 거의 두 배 정도 성공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의 신간 《Nonviolent Action》(비폭력 행동) 역시 폭력을 사용하지 않은 평화주의적 저항이 지닌 놀라운 이야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한 길’ 가게 하는 원동력

오롯이 한 길을 걸어온 교수님의 사역에 많은 이들이 경의를 표하면서도, 한편으론 여전히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여 우리를 낙담시키기도 합니다. 지난 40년 동안 사상과 사역에서 초지일관해오신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저는 논쟁에 참여하는 모든 사안에 대해 열린 마음을 유지하려 노력해왔습니다. 종종 밝혀왔듯, 제가 성경의 가르침이나 사회·경제·정치에 관한 사실, 이 둘 중 하나라도 잘못 이해했다면 기꺼이 의견을 바꿀 의향이 있습니다. 만약 누구든지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의 초판(1977)부터 여섯 번째 개정판까지 읽고 비교해본 사람이 있다면, 제가 경제 이슈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을 바꾸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이런 생각의 변천사는 수년 전 쓴 <기독교 학자 서평>(The Christian Scholar’s Review)에 자세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계속 나아가도록 만드는가?”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저의 답은 간단합니다. 예수의 부활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했고, 부활함으로써 그것이 사실임을 확증했습니다. 그분의 삶과 죽음, 부활에서 시작된 메시아 왕국은 현재 진행 중이며 그가 다시 오시는 날 완전해질 것입니다.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세상의 모든 불의, 억압, 전쟁, 심지어 죽음조차 존재를 잃을 겁니다. 고통에 신음하는 피조세계는 흠없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샬롬이 마침내 온 세상을 통치할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가 가고 있는 방향이며 그 결국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있다고 확신합니다. 

단기적으로는 악이, 그것도 아주 끔찍한 악이 이 세상에서 번성하겠지요. 정의와 평화와 온전함을 추구하려는 우리의 한정된 노력은 때로는 성공하지만 때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 최후 결정권이 있기 때문에 최악의 때에도, 심지어 사회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을지라도 저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저를 멈추지 않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단순합니다. 우리 모두는 세대를 떠나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질문하면서 예수를 중심으로 삼아 그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성경을 당신의 첫 번째 인도자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심연수
본지 해외편집위원. 

 

[로날드 사이더의 주요 저서]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

이지혜 옮김 / IVP 펴냄 / 2005년

서구와 미국 복음주의 교회가 상대주의, 개인주의, 물질주의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이유를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성경적 기초를 제공한다. 
(원제: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한화룡 옮김 / IVP 펴냄 / 2009년 

성경이 재산과 소유, 경제 정의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지 탐구한 책. 세계 곳곳 10억 명의 이웃들이 굶주리고 있는 가운데, 풍요롭게 살아가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날카로운 경종을 울린다. (원제: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복음주의 정치 스캔들

김성겸 옮김 / 홍성사 펴냄 / 2010년

국가, 정의, 인권, 민주주의, 결혼과 가정 등의 주제를 신학적으로 분석하여 복음주의 정치철학의 중요 요소를 도출한다. 성경과 사회 분석을 통해 기독교인의 정치참여 지침을 제시한다. (원제: The Scandal of Evangelical Politics)

 

복음전도와 사회운동 

이상원·박현국 옮김 / CLC 펴냄 / 2013년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라는 이분법적 패러다임을 깨는 책으로 1993년에 출간됐다. 구원에 대한 편향적 관점을 교정하고, 복음전도와 사회운동의 협력을 제안한다. (원제: Good News and Good Works)

 

교회, 국가, 공적 정의 논쟁 

로날드 사이더 외 4인 공저 / 김희준 옮김 / 새물결플러스 펴냄 / 2017년

교회와 국가의 건강한 관계에 대한 토론을 담은 책. 가톨릭, 고전적 분리주의, 원리적 다원주의, 재세례파, 사회정의 등 다섯 가지 관점을 통해 교회와 국가의 긴장 관계를 살핀다.  (원제: Church, State and Public Justice: Five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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