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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신앙은 인간 실존에 맞닿는 깊은 사상을 발전시킨다
[350호 레드레터 크리스천] 세계적인 기독지성 월터스토프 교수와 나눈 대화
[350호] 2019년 12월 30일 (월) 11:19:30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goscon@goscon.co.kr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예일대 명예석좌교수가 내가 다니는 학교의 종교철학회에 발표자 중 한 사람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학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유학생들은 누구나 경험하겠지만, 해외에서 공부하는 장점 중 하나는 내가 한국에서 번역으로 접한 신학자들을 실제로 만날 기회를 누린다는 것이다. 나는 20여 년 전에 그가 아들을 잃고 나서 쓴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Lament for a Son)를 읽었고, 《행동하는 예술》(Art in Action)을 절반쯤 읽다가 내려놓은 경험이 있다. 그후로 정의에 대한 그의 책들이 번역 출간되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읽지는 않았다. 

번역가로 살던 시절에는 하루의 번역 일과가 끝나면 다른 책은 잘 잡히지 않았다. <복음과상황>의 요청에 따라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거의 일주일이 넘게 답변이 없었다. 인터뷰는 안 되겠구나, 학회에서 발표나 듣자 하고 포기할 무렵에 답변이 왔다. 기쁘게 인터뷰에 응하겠으니 학회에 오거든 자기를 만나러 오라는 것이었다. 

서둘러 그의 최근 저서를 구해놓고 다른 일정 때문에 미처 읽지 못하다가 학회 전날 책을 집어들었다. 이번 학회의 주제는 ‘정의와 사랑’이었고, 맞춤하게 내가 집어든 책은 미국 베이커출판사(Baker Academics)가 2013년에 출간한 《Journey Toward Justice》(한국어판은 2017년에 복있는사람이 펴낸 《월터스토프 하나님의 정의》)였다. 일반 독자들을 위해 전문적인 철학적 논의는 배제하고 가능한 쉽게 개인의 경험을 곁들여 쓴 책이다. 그렇다고 또 마냥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런데 맙소사, 몇 십 페이지도 채 읽지 않았는데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게 아닌가. 그렇게 시작한 눈물은 멈추질 않았고 그 상태로 나는 새벽 한 시까지 그 책을 읽었다. 아마도 나는 인간에 대한 진지한 존중을 바탕으로 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그의 방식에 깊이 매료되었던 것 같다. 

새벽에 일어나 부랴부랴 질문지를 준비해서 학회장으로 달려갔다. 시간은 만나서 잡자고 했으니 그게 언제일지 몰라 녹음기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섰다. (학회는 이틀에 걸쳐서 열리는 일정이었다.) 인터뷰 시간은 당일 점심시간으로 잡혔다. 올해 84세인 그는 백발이었고,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날 학회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그는 진지하게 모든 발표자의 논의에 귀 기울이고, 토론에 참여하고, 마지막에 자신의 논문까지 지친 기색없이 발표했다. 

   
▲ ⓒ양혜원

작년 한국 방문 때 ‘노란 리본’을 달았던 이유
질문은 자연스럽게 작년에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광화문 광장을 찾아간 이야기로 시작이 되었다. (당시 〈한겨레〉 기사를 출력해 갔는데, 그에게 보여주니 자신이 화난 것처럼 찍혔다며 사진 평을 했다.) 당시 새문안교회의 초청으로 강연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는데, 마침 그때가 세월호 사고 직후였고, 저녁에 동료들과 호텔을 나서다가 평화 시위 행렬을 본 그는 잠시 그들과 함께 걸었다고 했다. 그때 노란 리본의 의미를 설명으로 듣고 달겠냐는 질문을 받은 그는 ‘당연히’ 달겠다고 대답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한국 방문 시 ‘정치적 중립을 위해 노란 리본을 달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을 아느냐고 했더니 그는 매우 의아해 하며 몰랐다고 했다. 

“아주 이상하네요. 내가 듣기로 노란 리본은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들과 ‘연대’한다는 뜻인 걸로 알았는데…. 나도 아들을 잃은 경험이 있고 해서 그들의 슬픔에 동참하는 의미로 달았던 것이지요. 한국의 정치적 상황은 잘 모르겠고 나는 단지 뭐라 해야 하나, ‘태만’(negligence)이라고 하기엔 너무 약하고 영어로 ‘맬피즌스’(malfeasance, 특히 공무원들의 불법행위를 뜻함)라고 해야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 건데, 정치적 상황이야 어떻든 나는 희생자 가족과 연대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공감 어린 말에 진정성이 묻어났다. 고통 앞에서 인간은 아파하면서 많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불가해한 상황에 대해 자기가 믿는 신앙 안에서 답을 찾는다면 가장 큰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탄할 일까지도 다 하나님 뜻 안에 있는 일이라는 성급한 해석은 위로를 주기보다 가슴을 더 깊이 후빌 수밖에 없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신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선한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인간이 자기 수명을 다하며 잘 살기를 바라십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일어나지만, 그것이 곧바로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그분의 나라가 언젠가는 임할 것이라는 사실과 그것을 믿는 믿음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아직 그 나라가 임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악의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만약 교회가 믿음만 있으면 다 극복할 수 있다며 슬퍼하지 말라고 하거나, 모든 게 다 하나님 뜻이라고 한다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힘들어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시편을 보세요. 다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습니까.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는 말도 없고, 모든 게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도 안 합니다. 시편의 영성이 바로 우리가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 영성입니다.” 
 

성경은 ‘정의’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을 들여다보면서도 성경을 보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숱하게 접한다. 월터스토프 교수는 《월터스토프 하나님의 정의》(복있는사람)에서 신약과 구약의 정의 사상을 훑으면서 특히 신약에 정의의 사상이 없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그렇다면 왜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놓칠까? 

그는 성경을 보는 옳은 방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더 나은 방법은 확실히 있다고 했다. 같은 책에서 그는 자신이 정의에 새롭게 눈뜨게 된 계기를 이야기하면서, 그 전에도 성경의 정의 사상을 알고 있었지만 그 계기 이후 성경의 관련 구절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고 한다. 

“성경을 해석하는 더 나은 방법은 때로 경험에 의해 촉발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슬픔을 경험하고 성경을 다시 보면 거기서 하나님 자신의 슬픔을 봅니다. 때로는 그냥 혼자서 집중해서 성실하게 읽다보면 그 길이 열리기도 하고요. 완벽한 방법은 없습니다. 그냥 여기저기 한 구절씩 읽지 말고 성경 전체를 보는 게 중요합니다. 장도 절도 무시하고 통째로 읽어야 합니다. 몇 구절씩 따로 읽으면 십중팔구 자기 식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통째로 읽으면 원래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읽을 확률이 높습니다.” 

또한 자기 문화권 밖의 사람들의 성경 해석을 읽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저의 경우 남아프리카공화국 해방신학자들의 성경 해석이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한 번도 성경을 그렇게 볼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그렇게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그게 설득력이 있더군요.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속한 교회 전통의 경계도 조금 더 확장이 되고요.” 

그의 책을 읽으면서 번역가로서 예민하게 다가오는 표현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 하나가 “Christian religious talk”였다. 곧바로 유진 피터슨이 ‘God Language’와  ‘god talk’을 구분한 것이 연상되었는데, 나는 이것을 각각 “하나님 언어”와 “종교적 언어”로 번역을 했더랬다. 하나님을 로고스로 해석한 성경의 사상에 따라서 피터슨은 인간의 언어가 하나님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렇지 못한 언어를 ‘종교적 언어’라고 했다. 즉 하나님의 실체는 없고 인간의 종교성만 반영된 언어가 바로 종교적 언어이다. 

나는 월터스토프 교수가 어떠한 배경에서 이러한 표현을 썼을지 궁금했다. 그가 이 표현을 사용한 맥락은 영어 성경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대목이었는데, 영어로 ‘righteousness’(의)로 번역된 헬라어가 사실은 ‘justice’(정의)로 해석해야 더 타당하다는 주장을 풀어가는 부분이었다. 그는 righteousness라는 말이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의미로만 사용되는 ‘종교적 언어’라고 했다. 하나님의 의는 보통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해서 해석하는데, 로마서도 그렇고 성경을 잘 읽어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정함(fairness, impartiality) 혹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것이지 하나님의 심판이나 징계의 의미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잠시 숨을 고르며 가만히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듯,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의 정의 사상은 잘 언급되지 않는데, 신약성경을 하나님이 이방인과 여자와 종도 다 ‘공정하게’ 대하신다는 관점으로 본다면 이해가 크게 달라질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눈에 띈 표현은 다른 영어원서들과 달리 그가 남성대명사 ‘he’보다 여성대명사 ‘she’를 훨씬 더 많이 쓴다는 것이었다. 성이 있는 언어는 어느 언어나 남성대명사를 대표 대명사로 사용한다. 이것은 인류는 남자와 여자로 이뤄져 있지만 남자가 기준이고 보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는 여성대명사를 대표 대명사로 쓰는 것 같았다. 여성학도이자 종교학도로서 호기심이 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인터뷰 자리에서 그에게 의도적으로 그렇게 쓴 건지, 만일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인지 물으니 대답이 간명했다. 그는 웃으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썼다며, 아내가 바사 칼리지(Vassar College)에서 수학한 후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고 했다. 아내를 비롯한 친구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순전히 혼자 힘으로 그런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했을 것이라면서. 미국 철학계의 대표 지성 중 한 사람이 이런 실천을 하다니, 내가 눈물을 흘리며 그의 책을 읽은 데에는 이런 이면의 이야기들도 알게 모르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즉 내가 훨씬 더 몰입해서 그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he’가 등장해야 할 곳에 ‘she’가 등장함으로써 나를 더 깊이 그 논의 안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월터스토프가 말하는 ‘정의란 무엇인가?’
조금 더 본격적으로 정의와 평등에 대해 그와 나눈 대화에 들어가기 앞서 먼저 그의 정의 사상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게 좋겠다. 그에 따르면, 정의는 인간이 인간으로서/인간답게 대우받을 기본 권리(rights)에서 출발하며, 그러한 ‘나’의 권리는 나를 그렇게 대할 ‘너’의 의무를 수반하고 따라서 상호적(interpersonal)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권리는 소유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대우받느냐의 문제이며, 따라서 인간이 인간으로서/인간답게 대우받지 못하는 것이 곧 불의다. 여기에서 촉발된 나의 질문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인간이 인간답게 대우받지 못하는 불의에 편차가 있는가? 예를 들어, 염산 테러를 당한 무슬림 여성들을 돕는 활동가이자 교수가 여성들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이 와중에 여성의 안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수업중에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미국 친구 하나가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는데,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염산 테러를 당할 위험이 없는 나라의 여성들에게 안수 문제는 여성이 불의를 당하는 매우 심각한 경로 중 하나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불의에 주관적인 측면이 있는가? 즉 인간이 인간답게 ‘대우’받지 못하는 것이 불의라면, 당사자가 자신의 존엄성이 침해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불의가 아닐 수도 있는가? 예를 들어, 나는 교회 안의 많은 여성들이 불의를 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여성들 자신은 이를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것이 불의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으며, 그러한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적절한 윤리적 태도는 무엇인가? 

셋째는, 그에 따르면 존중받을 권리는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이고 정의는 그것을 알아보고 실현되게 하는 것인데, 우리는 대개 누군가에게 권리를 ‘허용’하면 자기 것을 빼앗긴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차지하던 직업을 여성들이 참여할 ‘권리’를 허용하면, 남성들은 자신의 것을 빼앗긴다 생각하여 적대적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자기 것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고 설득할 수 있는가? 
 

 ‘불의’에 대한 세 가지 답변
첫 질문에 대해 그는 당연히 편차가 있다고 했다. 따라서 추상적이고 보편적으로 모든 여성이 여성 안수 문제에 신경 써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게 아니라 현지의 상황에 따라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한다고 했다. 

   
▲ 유튜브 영상 화면 갈무리.

“불의는 보통 그 사회와 문화에 깊이 뿌리박힌 문제들이며 지역과 나라마다 서로 다른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여성 할례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아랍 국가와 같은 곳에서는 여성 안수 이런 건 전혀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문화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민감해야 하며, 불의가 이 땅에서는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는지를 살펴서 그 가운데서 더 심각한 문제부터 먼저 다루어야 합니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다만 무슨 문제가 더 심각한 건지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쉽지 않고, 각자의 결정을 존중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현실의 경험일 것이다. 둘째 질문에 대해서는 억압의 상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했다. 

“억압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왜 지금 상황이 아무 문제가 없는지를 설명하는 내러티브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믿게 만듭니다. 그들이 정말로 열등하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결국 그 이야기를 내면화하면, 그래 그건 좀 불공평한 것 같지만 그래도 괜찮아 하고 반응하게 되는 거지요. 그 이야기를 믿기 때문에, 조금 기분이 나빠도 ‘기분 나쁠 이유가 없잖아’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19세기 미국의 노예 주인들은, ‘우리 노예들은 행복해’라고 했지만, 그들은 대체로 행복하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살면서 한 번쯤 행복했을 수는 있겠지요. 억압하는 자의 이야기를 내면화하면, 이게 하나님의 질서다, 다 괜찮다, 하게 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고요. 그래서 때로는 그 사회나 문화의 문제를 지적하는 데 외부인의 시선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억압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현재의 상황이 왜 좋은지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흑인 노예의 후손들이 일도 배우고 영어도 배우면서 문명화되니 좋은 거라는 이야기를 제시했고, 일부 흑인들은 그 이야기를 내면화했지요. 특히 아주 나쁜 대우를 받지 않은 흑인들이 더 쉽게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정기적으로 채찍질을 당한 흑인은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또한 세계적으로 어디에나 ‘남녀의 위계는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성들뿐 아니라 많은 여성들도 이 이야기를 받아들였지요. 하지만 당신이나 나처럼 그러한 사고가 잘못되었음을 자각한 사람들은 그러한 자각(awakening)이 계속 일어나게 도와야 합니다. 〔보통 ‘영적 대각성’을 일컬을 때 Great Awakening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가 여기에서 awakening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 신선했다.〕”
 

 ‘불의를 바로잡는 일’에 화내는 이들은 있기 마련
하지만 잘못을 지적하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대다수 사람들이 그 문제를 보지 못할 때, 내가 무슨 권한으로 그런 판단을 하며 지적을 한단 말인가. 특히 ‘네가 날 간섭하지 않으면 나도 널 간섭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자리 잡은 미국 사회에서 그것은 쉽지 않은 결정일 것 같았다. 한국 사회의 경우 너무 간섭해서 탈이라 하겠지만, 그 반작용으로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이 나왔으니 우리도 점점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아니겠는가. 좋은 지적질과 나쁜 지적질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우선은 자신 스스로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을 해야겠지요. 다른 사람들과 대화도 하고요. 그래서 마침내 ‘이건 옳지 않아’라고 확신하게 되었다면, 소리 내어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화를 낼 것이고, 특히 상위층에 있는 사람일수록 변화를 원하지 않겠지요. 화를 내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이것은 실상 셋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그는, 불의를 고쳐나가는 일은 누군가를 화나게 만들게 돼 있다고 했다. 

“국제 구호나 개발 문제는 아무도 화나게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의를 실천하는 일은, 거의 항상 누군가에게 ‘이전에 하던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 때문에 화나게 만드는 거지요.” 

그렇다면 그들에게 돌아가는 유익은 무엇일까? 

“상대의 존엄성을 존중하게 된 것이 유익입니다. 모두가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다른 어떤 보상이 아니라 이러한 깨달음이 유익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인간성의 회복과 연관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정의: ‘기회의 평등’인가, ‘결과의 평등’인가?
흔히 정의에 대해 말할 때 평등(equality)이라는 말을 주로 쓰는데, 그는 책에서 권리(rights)의 이론으로 정의에 대해 말했다. 나 또한 평등의 언어를 많이 사용했는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으므로 평등하다는 근거에서였다. 페미니즘은 특히 평등의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기회의 평등을 이야기한다면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결과의 평등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평등과 권리는 어떻게 다를까? 

“모두가 평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는 말은 함의가 크지요. 다만 ‘어떤 평등’을 말하는가는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게 결과의 평등을 말하는 거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저는 기회의 평등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조차도 성취하는 게 매우 어렵지요. 똑똑하고 말 잘하는 사람들이 기회를 다 얻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렇기에 기회의 평등이 목표가 되어야지 결과의 평등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모두가 평등하게 존엄하다는 게 바로 그런 거지요. 가난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제가 주장하는 것은 문제는 수입의 평등이 아니라 모두가 공정하게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도 생계유지를 위해 일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래서 부의 평등을 이루어야 하느냐,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나친 부의 불평등은 온갖 불의를 야기한다는 것을 보고 있지만 말이지요.” 

그렇다면 권리가 기본이고 평등은 좀 더 한정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뜻인데, 한편으로는 위계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모두가 똑같지 않으면 뭔가 석연치 않아하는 한국 문화에서 평등과 권리를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앞으로 좀 더 고민할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역할’에 대하여
여기서 나는 한 단계 더 나아가, 남자와 여자가 영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서로 역할이 다르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물었다. 이는 일면 평등을 인정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남자와 여자를 위계적인 성역할에 묶어두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월터스토프 교수는 웃으면서 “여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물어보시지요” 하고 말했다. 이 질문은 지금도 내게 화두로 남아 있다. 여자들에게 물어보라… 이건 여자들이 풀어야 할 문제란 뜻인가, 아니면 여자들의 생각이 중요하다는 뜻인가, 그도 아니면 여자들 자신이 그러한 관점을 지지하고 있다는 뜻인가. 나는 페미니스트들이야 당연히 이것을 문제로 보지만, 대부분의 크리스천 여성들은 이것을 성경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했다. 

“바울이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종과 상전,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말하지요. 하지만 신약성경의 놀라운 점은 이 역할을 인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전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가정훈을 자세히 보면 바울이 우선은 기존 사회의 실제적 역할을 이야기하고 나서 그 위계를 뒤집습니다.” 

그는 베드로전서의 “뭇 사람을 공경하며”(2:17, 그는 이 구절을 “Honor everyone.”이라는 ESV 번역을 사용했다)를 예로 들면서, 위계상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을 ‘honor’하는 게 당위인 사회에서 이 말이 얼마나 급진적(radical)인지 제대로 듣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한 사회에서 베드로는 윗사람을 honor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모두를 honor하라고 했고, 그것이 신약성경의 기본 원칙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위계적인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는 이 사상의 급진성이 잘 와닿지 않는다. 아마도 “공경”이라는 번역 때문이 아닐까.(이 구절이 새번역에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며”로 번역돼 있다.-편집자) 유교의 영향을 받은 한국 문화에서 “공경”은 윗사람에게 하는 것이지, “뭇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읽기는 “뭇 사람을 공경하며”라 읽되 무의식적으로는 “윗 사람을 공경하며”로 해석하는 게 아닐까. 이에 대한 반발 때문인지 요즘은 서로가 서로를 공경하지 않는 사회로 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다름에 기반한 상호보완적 성역할은 성경적 근거가 없고 순전히 사회적인 구성물이라고 했다. 성경에 근거해서 어느 영역에서든 여성을 배제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하는 그 앞에서 나는, 그럼에도 성경에 근거해서 여성을 배제하는 교회/교단이 있다는 이야기를 몇 차례 한 것 같다. 아마도 개인적인 경험이 투사되어서였을 것이다. 사실 이 논쟁은 끝이 없는 것인데, 대화 전반을 통해 그로부터 받은 인상은 성경의 정의 사상에 대한 그의 확신이 깊은 강 같이 저 밑에 흐르고 있어서 흔들림도, 요란함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 점은 그의 강연에서도 잘 나타났다. 그는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나중 온 일꾼에게 자비를 행한 것으로 오히려 불의하다는 말을 들은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얘기했다. 그리고 자비가 오히려 불의가 될 수 있는 몇 가지 맥락을 살펴본 후, 하나님의 자비 혹은 사랑은 정의를 침해함으로써 정의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충족시키고 그 이상을 함으로써 초월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흥미롭게도 이후 토론 시간에 청중이 주로 질문을 던지고 논의한 문제는, 그래도 포도원 주인이 불의하게 자신들을 대했다고 생각하는 일꾼들의 입장이 타당할 수 있는 정황적 근거에 초점이 맞춰졌다. 포도원 주인이 자비함으로써 실제로 불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것인데, 그 논쟁하는 모습 자체가 마치 덤덤하게 정의를 실천하는 포도원 주인과 그 처사가 부당함을 항의하는 일꾼들 같았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주관적인 인상일 뿐, 사실 이러한 공방은 그가 책에서도 논의하듯 정의 이론에서 현재 지배적인 두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다. 월터스토프는 정의를 권리의 관점에서 보면서 권리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inherent)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정의는 질서에서 나온다고 보는 사람들은 권리를 소유로 해석한다. (그래서 권리 주장이 이기심을 낳는다고 보는 것이다.) 토론을 보니 아무래도 정의를 질서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월터스토프와 기독교 전통의 관점 차
어느덧 인터뷰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다시 〈한겨레〉에 나온 기사 이야기로 돌아와 아들의 죽음과 관련한 질문을 던졌다. 아들의 죽음에 대해 보인 그의 반응은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가 그러한 상황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반응과도 상치되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미국 문화와 미국 기독교 문화 모두에 대항하는(counter) 반응을 한 셈이었다. 

“슬픔을 빨리 털고 일어서라든가, 슬픔을 극복하는 단계적 방법에 대한 소개와 같은 것은 모두 그 상황을 통제하려는 시도입니다. 그것은 미국의 뿌리 깊은 문화입니다. 더운 방이 싫으면 에어컨을 사고, 추운 방이 싫으면 난로를 사고 하는 식으로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자신의 슬픔을 저버리려 하지 말고 보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 문화에 대한 대항일 뿐 아니라, 오랜 기독교적 전통에 대한 대항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보면,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다가 이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질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결국 《고백록》은 그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지나치게 슬퍼한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기독교 안에서 이렇게 오래된 전통이었다니 새삼스러웠다. 그렇다면 미국인이면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서로 긴장 관계에 있을 때가 있지요.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요. 슬픔을 다루는 경우가 긴장의 예이지요. 물론 이 문제의 경우 미국 문화뿐 아니라 기독교 문화와도 긴장 관계에 있는 셈인데, 어느 그룹에 속한다는 것은 그 안에서 논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합니다. 외부의 공격에 대해서만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도 논쟁을 하는 것이지요.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태도는 틀린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쏟았던 애정과 그 마음은 시간이 필요한 문제이지 단번에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학회의 오후 프로그램이 시작할 때가 되어가자 그는 자주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신앙과 학문 사이의 긴장에 관한 마지막 질문에 자신은 신앙과 학문 사이에서 아무런 갈등이 없다는 게 그의 간략한 답변이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은, 신학과 여타 학문 사이에 꾸준한 대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자신의 신앙 전통 안에 머물면서 전통 안팎으로 논쟁을 해나갈 수 있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역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는 40분 남짓이었는데 정리하다 보니 정작 당시에는 미처 따라가지 못했던 심오한 사상들이 곳곳에 피력되어 있었다. 이미 그의 사상을 접한 독자들에게는 반복되는 내용일지 모르나, 나처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을 위해 조금 더 자세히 정리했다. 나는 참 학문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로 하는 것이라고 믿는데, 월터스토프 교수를 인터뷰하면서 깊은 신앙은 인간 실존에 맞닿는 깊은 사상을 발전시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양혜원
본지 해외편집위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주요 저서]

   
 

월터스토프 하나님의 정의

배덕만 옮김 / 복있는사람 펴냄 / 2017년

분쟁 지역에서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치밀한 논리와 논쟁으로 펼치는, 월터스토프의 정의론. 성경과 교부의 글을 통해 정의에 대한 신학적 토대를 마련한다. 
(원제: Journey toward Justice)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홍병룡 옮김 / IVP 펴냄 / 2007년

‘기독교의 사회참여’에 관한 고전으로 꼽히는 책으로, 현대 세계의 풍요 속 불의와 빈곤의 비극을 증언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촉구한다. 
(원제: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 

박혜경 옮김 / 좋은씨앗 펴냄 / 2014년 / 개정판

아들을 잃은 아버지로서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단순하고도 정직하게 풀어낸 책. 하나님에 대한 원망, 상실의 아픔으로 인한 내적 변화와 묵상을 담았다. 
(원제: Lament for a Son)
 

사랑과 정의 

홍종락 옮김 / IVP 펴냄 / 2017년

‘정의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선언하는, 월터스토프의 독보적 정의론. 사랑과 정의가 서로 충돌한다는 기존 기독교 윤리학 논의의 한계를 넘어, 사랑과 정의가 조화를 이루는 대안적 아가페주의를 제시한다.
(원제: Justice in Love)


행동하는 예술

신국원 옮김 / IVP 펴냄 / 2010년

예술의 사명은 창조세계의 샬롬을 회복하고 변혁을 실천하는 일임을 강조하는, 월터스토프의 기독교 미학 입문서. 예술 역시 그리스도인의 다른 모든 행위와 마찬가지로 창조 세계의 회복과 완성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제: Art in Action)
 

샬롬을 위한 교육 

신영순 외 옮김 / SFC출판부 펴냄 / 2014년

정의를 세우고 평화를 실천하는 샬롬의 교육을 안내하는 책. 기독교 교육은 공적 영역에서 실천하고 섬길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수준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제: Educating for Shalom: Essays on Christian Higher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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