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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이비 종교의 사회사
[354호 커버스토리]
[354호] 2020년 04월 17일 (금) 17:11:29 강성호 goscon@goscon.co.kr

 

한국교회사의 이단 출현
‘이단’은 기성 종교나 주류교단의 교리에 반하는 종교 집단을 가리킨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이단은 1910년 최중진 목사가 세운 자유교회였다. 그는 미국 선교사들의 지나친 간섭에 반발하다 독립교회를 세웠다. 신학적 차원에서 처음 등장한 이단은 1918년 김장호 목사가 창설한 조선기독교회이다. 평소 홍해의 기적을 바다의 썰물현상이라고 해석하는 등 진보적인 설교를 해오다가 징계를 받으면서 아예 독자적인 교회를 만들었다. 최중진 목사는 조선인의 주체성을 주장하다가 이단이 되었고, 김장호 목사는 성서를 자유주의 신학에 기반하여 해석하다가 이단이 되었다. 

보통 기독교 이단이라고 하면 방언을 하거나 아픈 이를 치유하는 신비주의적 모습을 연상하는데,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1930년대이다. 192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신비주의 열풍 속에서 ‘신령파’라 불리는 집단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바로 함경도 원산을 무대로 활동한 ‘원산파’와 평안도 일대에 나타난 ‘새주파’이다. 

원산파와 새주파의 큰 특징은 입신(入神)이었다. 1932년 2월 원산파의 유명화는 입신 상태에서 예수가 자기에게 친림(親臨)했다고 주장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는 이를 강신극 사건이라고 한다. 새주파의 김성도는 스스로를 재림 예수라고 밝혔다. 이들의 출현은 기독교가 토착화되는 과정 속에서 샤머니즘을 수용한 결과였다.

중요한 점은 원산파와 새주파가 기독교 이단의 효시라는 사실이다. 이들의 후예인 김백문이 해방 후 통일교의 문선명과 전도관의 박태선에게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김백문의 저서를 보면 통일교에 끼친 영향을 단번에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예를 들어, 죄의 원인을 성적 타락으로 본다거나 역사를 구약-신약-성약으로 나누는 관점 말이다. 이는 신령파에 의해 싹이 트고 김백문에 의해 체계화되었다가 문선명과 박태선의 단계에서 세련된 형태로 다듬어진 결과였다. 거기다 새주파 세력은 해방 후 통일교에 합류했다. 신천지의 이만희가 전도관에 입교했던 사실은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단이 곧 사이비 종교라고 할 순 없다. 이단은 기성 종교나 주류교단의 내적 기준으로 판단된 집단이다. 이와 달리, 사이비 종교는 외형적으로 종교의 모습을 한 채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집단을 가리킨다. 정통교리를 자처하는 이들에게는 이단이 사이비 종교나 마찬가지겠지만, 사이비 종교는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해악을 끼치거나 범죄에 연루될 때 적용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단이 사이비 종교일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사이비 종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단이 반(反)정통적이라면, 사이비 종교는 반(反)사회적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성서조선>과 김교신으로 대표되는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는 주류교단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지만 아무도 사이비 종교라고 하지 않는다. 거기다 사회적인 해악을 끼치는 건 이단만이 아니다. 스스로를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주류교단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오십보백보에 불과하니까.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백백교 사건 
먼저, 한국사에서 ‘사이비 종교’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맥락을 살펴보자. 이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사회 일각에서 발생한 특정 종교 현상이 사회적 물의를 빚을 때, 왜 그러한 종교 현상 내지 종교 집단을 사이비 종교나 유사 종교, 아니면 신흥종교 등의 개념으로 범주화하는가? 둘째, 여기에는 어떠한 사회적·문화적 함의가 있는가? ‘사이비 종교’라는 범주의 역사적 변천을 안다면, 우리는 사이비 종교 현상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조선후기는 민중의 열망이 종교적인 형태로 표출된 시기였다. 《정감록》 같은 책들이 등장해 왕조 교체를 예언했고, 미륵이나 후천개벽 등으로 표현되는 묵시종말적 세계관이 유행했다. 이는 민(民)들의 반란으로 나타났다. 17-18세기의 민란이 중앙정치에서 배제된 엘리트들과 다양한 정치적·종교적 배경을 지닌 저항세력의 결탁으로 이루어졌다면, 19세기 민란은 무당, 승려, 술사 등이 주도세력이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도 조선후기에 유행한 민중종교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신흥종교의 탄생이 사회적 모순과 결부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중요한 점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문명과 비문명, 제도 종교와 미신이 갈라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비문명적이고 미신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사교(邪敎)나 사이비 종교로 범주화했다. 이러한 경향은 일제의 종교정책에서 유독 눈에 띈다. 일제는 종교를 신도, 불교, 기독교에 국한하고 나머지 종교를 ‘유사 종교’라는 틀로 묶었다. 이는 식민지배정책의 일환으로, 민족 종교를 유사 종교로 폄하함으로써 민족 종교가 민족적 일체감을 형성하는 정서적 기제로 작동하지 못하게 했다. 이로 인해 천도교, 증산교, 대종교, 보천교 등 다양한 민족 종교들이 모두 ‘유사 종교’로 취급되었다. 일제는 유사 종교 개념을 바탕으로 한국의 민족 종교들을 규제하고 탄압했다. 한마디로 민족 종교들은 ‘사이비 종교’로 분류되어 사회질서를 무너트리는 잠재적 범죄 집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1937년에 발생한 백백교 사건은 사이비 종교가 반사회적인 존재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한 교도의 고발로 알려졌다. 사실을 파헤쳐보니 백백교는 약 300여 명의 교도를 살해 및 암매장한 걸로 알려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처음에는 46명으로 알려졌지만, 수사가 거듭되면서 그 수가 한없이 늘어났다. 백백교가 ‘사교’(邪敎) ‘마교’(魔敎) ‘요교’(妖敎)의 대명사가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백백교는 전정예(全廷藝, 1867-1919)라는 동학교도가 1912년에 창시한 백도교(白道敎)에 뿌리를 둔 동학 계열의 신흥종교였다. 백백교는 천부(天父)인 전정예를 따르고 아들 구세주인 전용해에게 모든 것을 봉헌하고 의탁하면 미래에 닥칠 심판을 피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교단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비리를 아는 신자들을 거침없이 살해하였다. 폭력으로 조직을 유지한 셈이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신흥종교들의 행태는 기성 종교의 문제점들이 극단화된 형태로 불거져 나왔다는 사실이다. 목사를 신처럼 떠받드는 경향, 헌금을 무지막지하게 거두는 행태, 황당한 부활 신앙과 치병 의례들, 그리고 종교 지도자의 비행…. 이러한 문제들은 기성 종교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다만, 신흥종교에서는 세련되지 못한 형태로 극단화되어 나타났을 뿐이다. 

   
 

한국전쟁 시기 번성한 이단들   
그렇다면 사람들이 이단 내지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될 때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는 증대된다고 한다. 문제는 기성 종교가 이들의 욕구를 충족할 능력이 없을 때 이단과 사이비 종교가 생겨나는 데 있다. 1930년대는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모두가 어려운 시절을 보내던 시대였다. 거기다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의 발발로 사회적 분위기가 흉흉한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 역사를 조금만 공부해도 알 수 있듯이, 이때 한국 기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품지 못했다. 교권(敎勸)을 둘러싼 지역갈등이 최고조에 달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시기(1950-1953)도 마찬가지였다. 1930년대에 시작된 교회 분열은 한국전쟁 때 표면화되었다. 장로교에 한정해서 이야기해보자면, 1951년에는 고신교단이 분열되었고, 1953년에는 기장교단이 떨어져 나왔다. 한국전쟁 시기에 두 차례의 교회 분열이 이루어진 셈이다. 물론, 구호물자 등이 교회를 통해 제공되고 있었으므로 최선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호물자를 둘러싼 비리와 갈등에도 한국 기독교가 연루된 경우가 많았다. 

통일교의 문선명과 전도관의 박태선은 이 틈을 비집고 등장했다. 통일교와 전도관은 전쟁의 상처가 깊어서 좌절하고 있는 이들의 틈에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구원과 안위’를 약속했다. 이들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유토피아를 제공하며 많은 추종자들을 모았다. 전도관의 경우 통일교보다 더욱 가시적인 유토피아를 제시했다. 바로 신앙촌이다.  

기독교 이단의 특징 중 하나는 폐쇄적인 공동체 운동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사회적 혼란과 산업화로 고향을 떠난 이들은 뿌리가 뽑힌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고향의 상실은 꽤 큰 박탈감을 안겨준다. 이 과정에서 존재의 파편화가 진행된다. 기독교 이단이 폐쇄적인 공동체 운동을 벌이는 건 존재의 파편화 속에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서다. 흥미로운 점은 대표적인 기독교 이단의 창시자들이 월남인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통일교의 문선명은 평북 정주군, 전도관의 박태선은 평북 덕천군, 동방교의 노광공은 평북 평원군, 여호와 새일교단의 이유성은 황해도 신계군 출신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마 누구보다 고향을 상실한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감각적으로 깨달았을 가능성이 높다. 기독교 이단은 마을 공동체를 온몸에 새긴 이들의 마음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고 볼 수 있다. 

전쟁 직후 방언과 안찰이 유행한 풍조도 눈여겨봐야 한다. 사람들은 방언과 신유의 은사를 받기 위해 기도원에 모여들었다. 기도받는 사람의 몸을 어루만지며 치유 행위를 하는 안찰기도는 제법 큰 인기를 끌었다. 이때 수많은 스타 부흥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변계단 권사와 김상희 장로와 같은 이들은 병 고침 은사로 주가를 올렸다. 전도관의 박태선도 안찰기도로 이름을 날렸다. 

방언은 나운몽의 용문산 기도원이 유명했는데, 기도원의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입신, 방언, 예언 등에 몰두하면서 교계에 물의를 일으켰다. 물론 방언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건 오순절파 교회였다. 중요한 점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방언, 예언, 입신, 신유 등과 같은 신비체험이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끌었다는 사실이다.  

이후 수많은 스타 부흥사들이 명멸했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를 재림예수라고 하거나 신비체험을 약속하는 이들의 등장이 이어졌다. 전도관에서 파생된 기독교 이단은 대략 20여 개 정도로 파악되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크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건 동방교였다. 1960-1970년대에 동방교는 성폭력, 폭력, 살인 등에 연루되어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32명의 변사체가 발견되어 큰 충격을 준 오대양 사건(1987)이 발생하기 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동방교는 사이비 종교를 대표했다. 

한국 기독교 이단의 지형도 : 수입형, 자생형
한국전쟁을 전후로 등장한 기독교계열 이단은 크게 ‘수입형’과 ‘자생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수입형은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과 같이 외국에서 전래된 이단을 일컫는다. 여호와의 증인은 1910년대에 전래된 바 있지만 ‘등대사 사건’으로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아 거의 공중 분해되었다가 1953년에 정식 지부로 재건되었다. 몰몬교는 한국전쟁 때 몰몬교를 믿는 미군들이 극소수 한국인들과 함께 집회를 가지면서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자생형은 박태선의 전도관과 문선명의 통일교 등으로 대표되듯이 강력한 종말론과 신비주의로 나타난 이단을 가리킨다. 통일교는 1954년에 독자적인 교단으로 출범하였고, 전도관은 1955년에 하나의 조직으로 등장했다. 

흥미로운 점은 수입형과 자생형 사이에 사이비 종교로 규정되는 맥락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이다. 수입형의 경우 집총과 수혈을 거부하여 언론에 사이비 종교로 보도되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여호와의 증인이다. 언론 보도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여호와의 증인은 1950년대 말부터 집총 거부의 종교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으로 넘어오면서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 수혈을 거부하여 목숨을 잃는 일들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한국 평화운동의 효시로 재평가 받는 중이다. 

반대로 자생형 이단은 각종 비리와 스캔들로 인해 사이비 종교로 규정되었다. 그런데 자생형 이단은 다시 1950-1960년대에 등장한 1세대와 1980년대에 나타난 2세대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1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군사정권 시절 강력한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성장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통일교는 반공주의를 매개로 박정희 정권과 적극적인 협력관계를 맺어왔는데, 국제승공연합이라는 반공조직을 만들 정도였다. 이유성의 새일교단은 ‘멸공’을 교리적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새일교단의 감화를 받은 김화복 목사는 한국기독교멸공협의회에 관여했었다. 

이와 달리 1세대의 영향을 크게 받은 2세대 이단들은 사회적 공신력의 확보에 힘을 썼다. 이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기성 교회들이 공신력 위기에 빠지자 선택한 전략이었다.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한국교회가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비판을 받자 이를 성장 기회로 삼은 것이다. 여기에는 국가의 종교계 개입을 최소화한 민주화의 영향이 있다. 즉, 1987년 이후 국가가 자의적으로 특정 종교를 사이비 종교로 낙인찍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이제 군소교단이나 신흥종교가 권력자의 눈 밖에 나는 일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종교의 범위와 경계가 최대한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21세기를 맞이하면서 기독교 이단의 지형도는 바뀌었다. 냉전 질서 속에서 성장한 1세대 대신 시민사회의 등장과 더불어 세를 키운 2세대가 주도권을 잡은 것이다. 2017년에 결성된 사이비종교피해자연대의 주요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교회, JMS, 신천지 등 기독교 이단 2세대에게 피해를 입은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단의 자양분 : 교회의 병리현상과 신뢰도 상실
2세대 이단들이 공신력을 확보하기 위해 취한 전략은 봉사활동이었다. 구체적인 사례는 인터넷에 조금만 검색해봐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천지는 12지파 자원봉사단을 동원해 매우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을 해왔다. 하나님의 교회도 신천지 못지않게 왕성한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2017년 포항에서 큰 지진이 날 때, 하나님의 교회는 60일 동안 1만 2,500여명 분의 무료급식을 제공하고 성금 1억 원을 전달했다. 종교단체로는 가장 먼저 무료급식 캠프를 차린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지진 피해 현장에서 공을 인정받아 행정안전부장관 표창까지 수상하였다. 물론, 기성 교회도 지진 현장을 방문하여 봉사에 참여했지만 “종교계에 세금을 부과하려고 하니까 포항에서 지진이 발생하였다”는 식의 망언도 내뱉었다. ‘봉사활동으로 표창장을 받은 신흥종교’와 ‘자기 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기성 교회’라는 대립적인 구도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시민들은 어디에 더 호감을 느낄까. 

이는 과거 1세대 이단들이 기성 교회의 눈을 의식하여 기성 교회의 인정을 받기 위한 노력에 집중한 것과 대비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통일교이다. 통일교는 자신들이 동양 종교와 한국 사상을 일부 수용하긴 했어도 기독교 전통에 속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한발 더 나아가 ‘이단’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다. 즉, 예수나 개신교도 처음에는 이단으로 여겨지지 않았느냐는 반문을 던졌다. 개신교가 중세 가톨릭의 타락으로 생겼듯이 통일교는 개신교의 타락과 분열로 출현했다는 논리였다. 한마디로 통일교는 전통 기독교로 인정받기 위한 ‘인정투쟁’을 벌인 셈이다. 이와 달리 2세대들은 기성 교회의 인정을 받기보다 사회적 공신력을 인정받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인정투쟁의 대상이 달라진 것이다.  

이상 정리하자면 기독교 이단은 한국전쟁이라는 옥토 속에서 등장한 후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산시켜 나가고 있다. 특히, 기독교 이단의 2세대들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한국교회의 병리현상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한국교회가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을 때, 그 틈을 기독교 이단 2세대들이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사이비 종교들이 번성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 건 다름 아니라 한국교회였다. 한국교회의 실패는 사이비 종교가 등장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자양분이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한국교회가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 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제2의 신천지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고통당하는 이들 곁엔 사이비 종교
사이비 종교는 외부자의 시선으로 볼 때 어처구니가 없는 것투성이다. 재림예수라고 자처한 교주가 죽었는데도 그 조직이 유지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신문과 방송에서 교주의 비리를 객관적으로 폭로하는데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연유가 궁금할 때가 많다. 수수께끼투성이다. 어쩌면 사이비 종교에 헤어나오지 못한 이들도 자신이 왜 그러고 있는지 모를 가능성이 높다. 

물론, 한 가지 짐작되는 점이 있다.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은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직감적이고 감각적으로 전한다. 사람에게 고통은 어떻게든 설명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사람은 고통 자체가 힘들다기보다 그 고통의 이유와 의미를 알 수 없을 때 큰 괴로움을 느낀다. 기독교의 신정론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등장한 문화적 장치다. 사람들이 음모론에 빠지는 이유도 유사하다. 음모론이라도 믿어야 무의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음모론만큼 이해할 수 없는 세상사의 ‘의미’를 밝혀주는 건 없다.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은 음모론의 의미와 작동방식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존재들이다. 이들은 불합리한 세계에서 납득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의미’를 선사한다. 이런 점에서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은 적극적인 신정론자라 할 수 있다. 다만 주류교단이나 기성 종교가 신정론을 우주적 차원에서 풀어내고 있다면, 사이비 종교는 신정론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즉, 자신을 재림예수라고 자처하거나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상낙원이라고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기독교의 신정론이 형이상학적이라면, 사이비 종교의 신정론은 형이하학적이다. 그래서 무의미한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더욱 와닿는다. 

더 나아가 사이비 종교는 사람들에게 ‘부정적 특권층의 신정론’을 제시한다. ‘부정적 특권층의 신정론’이란 지금 당장은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곧 다가올 미래에 특권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여기에는 복수의 감성이 서려 있다. 언젠가는 당신들이 모든 것을 잃을 것이며, 내가 겪은 고통과 불행보다 더한 것을 경험할 것이라는 전망과 기대가 있다. 어쩌면 시한부 종말론은 복수의 감성을 극대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개인적·사회적 고통 외면하지 말아야
문화연구자 엄기호 선생이 이야기했듯이 고통은 말로 묘사하고 설명할 수 없다. 고통을 겪는 이의 경험은 다른 이에게 가닿을 수 없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고,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은 말로 보태고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이 절대적인 이유다. 

하지만, 인간은 안팎으로 누군가와 공동으로 거주하는 공통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방언이 등장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소리’로 표현함으로써 공통의 집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방언은 고통을 공감하고 공동체를 만드는 언어이면서도 자신들을 고립시키는 언어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방언은 일종의 ‘텅 빈 기표’ 역할을 한다. 그저 소리를 내지를 뿐, 말을 하되 그 말에 특정한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기독교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가 방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유다.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동물적으로 아는 것이다. 

교회는 모임이 많다. 부서별 소모임이나 구역별 모임은 일종의 수다 공동체다. 수다를 통해 고통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들으며 그 사이에서 공감을 만들어가는 풍경은 신앙생활의 일상이다. 문제는 고통의 당사자들이 겪고 있는 사안을 너무 빨리 교회의 언어로 환원해버린다는 데 있다. 교회의 언어는 고통의 고유함과 개별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고통을 겪는 당사자 개개인의 구체적 사연들이 형식적인 공감으로 너무 빨리 휘발되어 버린다. 교회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경청은 선언적인 교회의 언어로 남아버린다.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예수님께 기도해봐” 등등. 교회의 언어는 고통의 원인을 말끔하게 설명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고통의 문제를 외면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사이비 종교 문제가 터질 때 맹비난에 급급해서는 안 된다. 문제의 핵심을 바라봐야 한다. 비난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신앙의 언어가 고통의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대형 참사가 터질 때마다 목사들의 망언을 접한다. 고통의 문제를 업보론적 신정론으로 해석함으로써 타인의 죽음을 자신의 종교적인 자원으로 삼는 경우를 본다. 이는 한국 기독교가 고통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결과이다. 그러니 고통을 당한 이들을 중보기도의 대상으로만 취급하여 그들의 언어를 완전히 박탈하는 일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고통 가운데 괴로워하는 수많은 ‘욥’들의 곁과 그 곁 사이에서 이야기가 이어지고 만들어질 수 있는 환대가 절실하다. 

 



강성호
고2 때 사학과를 가기로 한 후 지금까지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현재 전남 순천에서 시사(市史)를 편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국 기독교 흑역사》와 《저항하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마을에 깃든 역사도시 순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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