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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목양의 역설, ‘선한 갑질’ 권력
[332호 커버스토리]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종교적 위계와 권력 문제
[332호] 2018년 06월 26일 (화) 14:47:15 김성민 goscon@goscon.co.kr

종교는 위계적 권력을 내재화하는 동시에 그것을 자율적으로 정당화하는 구조입니다. 종교 집단에 참여하게 되면 신도들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정한 종교 의례와 습속을 내적으로 체화하도록 강제되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갑질’ 사례를 분석하기보다 종교 공동체가 구조적으로 내적 위계를 전제로 형성된 사회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종교 권력의 성격에 대해 푸코의 ‘사목권력’(목자권력)이라는 말이 이런 측면을 많은 부분 설명해줍니다. 물론 푸코의 분석은 인구 관리를 통한 근대국가의 ‘통치성’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권력에 대한 그의 계보학적 분석에서 기독교 관련 부분은 기독교의 종교 권력 성격을 이해하는 데도 적절한 통찰을 던져줍니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신학을 ‘경영적 정치학’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푸코의 권력 계보학을 신학에 적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논의를 중심으로 종교 권력이 근본적으로 ‘선한 갑질’을 구조적으로 정당화하는 패러다임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목자’의 기술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 권력의 위계는 근본적으로 목양적 형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권력은 외압적인 폭력에 의해 강제되기보다 내재적이고 자율적인 형식으로 공동체 내에서 체화됩니다. 목회 또는 목양의 범위와 무관하게 목회자의 갑질은 신도들의 정신세계에까지 직간접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합니다. 교회에서 담임목사는 제도적인 차원뿐 아니라 교회 관습적인 측면에서도 그 절대적인 특권적 지위를 누립니다. 특이한 점은 이런 지위가 신도들의 ‘자발적’ 위임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유능하고 목회철학이 뚜렷한’ 목회자를 헤드헌팅하고 있으며 그렇게 찾은 지도자에게 그만큼 과도할 정도의 권한을 위임합니다. 물론 요즘은 목회자의 권한보다 그것을 위임하는 신도의 실세 그룹 권한이 현실적으로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어찌되었든 이 두 권력은 ‘목양’이라는 목적 아래서 공조합니다.

목자권력의 역설적 성격을 잘 지적한 이가 푸코입니다. 사실 푸코의 연구는 가톨릭과 같은 사제 시스템을 갖춘 기독교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개신교의 목자권력도 이런 분석의 예외 대상은 아닙니다. 푸코는 통치성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통치 개념은 그리스 전통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의 전후 맥락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스적 전통에서 통치자는 대체로 ‘항해사’ 이미지로 나타나는 데 반해, 기독교의 전후 맥락의 전통을 살펴보면 ‘목자’(목동)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신 자신이 인간의 목자이며 왕은 신을 대신하는 대리 목자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전통에서는 왕의 권력이 신을 대신해서 백성들을 돌보는 대리 통치 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관리하고 통치하는 대표적인 권력이 목자권력입니다.

푸코가 진술하는 목자권력의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목자권력은 ‘유동적인(이동하는) 양무리’에게 행사되는 권력입니다. 목자는 양들과 함께, 양들의 선두에서 함께 이동할 방향을 결정하고 이끕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이는 목자권력이 양들을 위해 앞서 모범을 보이는 ‘선행(善行)하는 권력’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선행’은 앞서 나가면서 양들을 위해 선(좋음)을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양들을 잘 먹이고 보호하기 위해 목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양들을 위해 선행을 하는 행위로서 그의 통치는 정당화됩니다. 목자는 오직 양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수고와 고통을 무릅씁니다. 이런 헌신은 ‘선한 목자’라는 형상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하면서 양들의 안정과 번영을 추구한다는 자기희생적 권력인 셈입니다.

한편 목자의 권력은 단연 “개별화(또는 개인화)하는 권력”입니다. 목자는 한 마리의 양조차도 목자가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차원에서 양들을 돌봅니다. 이는 양무리를 전체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서 다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권력은 전체적이면서 동시에 개별적으로 적용됩니다. 여기서 ‘목자의 역설’이 발생합니다. 전체와 개별적인 것 사이에 상충되는 현상이 발생했을 때 목자는 양무리를 희생시켜서라도 개별자(잃어버린 한 마리 양)를 구원하려고 합니다. 이때 개별자를 구원함으로써 전체를 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상징적인 논리로 작동합니다. 이 논리는 전체를 위해 개인을, 개인을 위해 전체의 희생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는 점에서 매우 위협적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무리 전체를 구원으로 인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양이 있을 경우 그를 배제하고 희생시킬 권한을 갖습니다. 현대의 교회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이런 갈등의 심층에 목자권력의 역설이 자리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목자의 배분 또는 ‘분류의 원칙’도 합리화합니다. 각각의 양들이 가진 행위나 품성들을 분류하고 최종적으로 개별자들이 공동체 내에서 어떤 캐릭터인지를 규정하는 작업이 자연스러워집니다. 무리 전체를 위해 충성스러운 양들은 ‘좋은 양’으로 분류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양들은 ‘나쁜 양’으로 분류될 것입니다. 이 분류는 목자와 양의 일체감(또는 공동체성)의 강도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푸코는 이를 ‘철저하고 즉각적인 전이의 원칙’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양이 행한 특수하고 고유한 행위는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목자 자신에게도 일어나고 있다고 간주한다는 것이지요. 양의 공덕과 과오가 모두 즉각적이고 철저하게 목자에게 전이됩니다. 목자는 양과의 일체감 때문에 양의 공과를 본능적으로 인지하는데, 너무 가까워서 위험해 보입니다. 목자의 분류법은 많은 경우 목자의 방향과 지침에 반하는 특정 개별자를 배제하는 기제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희생의 원칙’도 목자의 권력에 적용됩니다. 이 희생의 원칙은 다른 원칙보다 더 역설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악의 위험에 이미 노출되어 있는 영혼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목자는 그 양의 내밀한 양심의 고백과 범죄의 심리에 직면합니다(이는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로, 개신교에서는 상담의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목자는 타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죄의 유혹과 죽음에 자신을 노출시켜야 하며 심지어 그 희생물이 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타인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과정을 몸소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양들을 위한 자기희생이라는 강력한 ‘상징적 흡입력’을 통해 신도들의 품행과 양심(영혼)을 지도하는 권력의 우위를 차지합니다. 이는 “모두 너희들을 위하는 것”이라는 감동의 조건을 명분삼아 강력한 ‘갑질’이 암묵적으로 실행되는 구조입니다.

설교와 기도의 관습적 지배
설교는 기독교에서 목회자들의 암묵적 갑질이 많이 자행되는 현장입니다. 설교는 선포와 설득의 형식을 모두 갖춘 언어적 의례에 속합니다. 설교가 의례인 이유는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한 사람에 의해 일정한 대상에게 반복적으로 특정한 메시지가 전달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설교 행위 자체가 갑질의 기능을 갖고 있지만 무엇보다 설교라는 조건 자체가 ‘선한 갑질’의 전형적인 사례이기도 합니다.

보통의 교회에서 설교는 목사(또는 설교의 권한을 가진 자)의 고유한 권한이기 때문에 차별적인 권력의 영역입니다. ‘설교권’을 누구나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은 종교적 의례의 수행에서 설교의 비중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배의 행위에서 설교 시간은 매우 수동적이면서 동시에 일방적인 시간입니다. 물론 설교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자유가 있지만 적어도 예배의 자리에서 설교의 전례를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이는 단순히 듣기 싫은 것을 듣고 있어야 하는 언어적 폭력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전례로서의 설교가 행해지는 패러다임은 신의 해방적 메시지가 선포되어야 할 예배 시간이 역설적으로 목회자의 갑질이 행해지는 ‘절대’ 조건을 허용하는 시간으로 치환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설교에 비해 기도는 상대적으로 신도 개인의 참여성이 강한 ‘을’(乙)의 행위입니다. 종교적인 대상에게 기도하는 행위 자체가 기도를 통해 갑질의 권력을 내재화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기도는 외형적인 압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그 권위를 수용하는 형식일 수 있습니다. 보통 ‘희망’에 대한 믿음을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체화하려는 노력 가운데 이런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희망하는 바를 현실 가능한 기대 심리로 치환하는 작업이 기도라면, 기도 행위는 그 심리 효과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관습적 행위입니다.

기도 행위는 단지 개인적인 기대만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희망을 체화(또는 자기화)하는 형식이기도 합니다. 반복적인 바람을 일정한 의례의 형태로 치환하는 과정이 기도입니다. 따라서 반복적인 기도의 행위는 기도자 즉 기도 행위 주체에게 일정한 체질화를 요구하는 차원에서 의례적인 것입니다. 이 의례 과정에서 강한 관성적인 힘은 몸과 정신의 몰입을 유도합니다. 기도는 관성으로부터의 해방의 몸짓일 수도 있기 때문에 수용과 해방 사이의 긴장이 발생하지만 이내 집단적 습속화에 예속되고 맙니다. 기도 행위는 그만큼 기도자가 희망하고 추구하는 바람과 열정마저 습속화에 편승시키고 보수(유지와 보존을 추구)되도록 만듭니다. 

기도의 대표적인 내용 중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생각해볼까요. 이는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주의 기도에서도 중요한 부분에 해당합니다. 푸코는 ‘통치성’을 설명하기 위해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를 언급합니다. 그는 ‘통치하다’라는 말은 원래 “유지시키다, 영양을 공급하다, 식량을 제공하다”라는 의미도 포함한다고 지적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제공할 수 있는 자는 일정한 권력을 소유한 자입니다.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족에서는 부족장의 이름으로, 국가에서는 주권권력의 이름으로, 세계에서는 신의 이름으로 그 지위와 이름이 달라질 뿐입니다. 일정한 영양을 공급받기 위해서는 그 공급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가 있기 마련이고 통치는 그런 형식을 차용한다는 지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기독교의 기도 원리란 나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니 일정한 에너지를 공급해줄 외부의 힘을 자기 안으로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행위입니다. 기도야말로 자발적으로 ‘통치’를 내재화하는 과정인 셈입니다. 집단적인 기도의 주제와 형식은 종교 집단이나 목회자에 따라 일정한 가이드라인에 의해 정해집니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의 기도는 이미 희망의 성격을 판단하는 ‘바람과 기대’의 양식을 형성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갑질’ 현상입니다.

신학의 통치술
목회자의 신학적 지배 기술이란 다른 말로 ‘섭리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푸코가 말한 ‘목자의 역설’은 신학 자체에서는 ‘섭리의 신학’이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학은 사실 섭리의 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늘(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섭리의 원리들이 보이지 않는 암묵적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진행된다는 믿음은 자칫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권력 작동에는 눈을 감습니다. 이 지점에서 ‘선한 갑질’은 신학적인 옷을 입는 것입니다.

철학자 아감벤은 《왕국과 영광》에서 오이코노미아(섭리적 경영)와 통치성의 계보학을 추적합니다. 그는 앞에서 소개한 푸코의 통치성 즉 통치의 경영적 주체화에 대한 논의를 기본적으로 참조하면서 그 분석 방법을 신학에 적용합니다. 그는 신학을 일종의 ‘경영적 정치’의 문제로 보려고 합니다. 삼위일체 신학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존재론적인 신이 역사적인 신이 될 수 있는 연결 고리를 어떻게 설명하느냐가 신학의 중요한 중심 주제입니다. 신이 성육신했다는 논리를 설명하는 과정에 초월적인 것과 내재적인 것 사이의 간극을 연결하려고 하는 ‘비밀스러운’ 힘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간극을 해소하려는 비밀인 “오이코노미아의 신비”가 보이지 않는 기독교의 강력한 신학적 권력입니다.

기독교 신학(특히 교부신학)은 오이코노미아를 가사 경영적 책임 정도로 사용되는 말을 신비화하여 어떤 우주적 또는 세계적 비밀이 숨어 있는 ‘신비한 하나님의 계획’처럼 만들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섭리적 비밀을 담고 있는 신학 체계로서 ‘오이코노미아 신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삼위일체 신학이 역사적으로 정초될 때 오이코노미아를 신비화하면서 기독교의 신비한 교리인 삼위일체 교리도 오이코노미아라는 구원 계획의 차원에서 설명됩니다. 이는 ‘특수한’ 기독교의 교리를 섭리 신학에 의해 신비화하면서 동시에 우주론적이고 ‘보편적인’ 주제를 환기시키는 ‘정치적’ 효과를 발휘하는 장치로 사용됩니다. 말하자면 신은 가정을 돌보듯이 인간의 역사와 우주 세계 전체를 다스리는 ‘아버지’의 이미지를 강화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학은 이미 내재적으로 섭리의 신학이며 이는 은폐된 통치의 자율적(또는 주체적) 정당화라는 ‘경영적(오이코노미아적) 정치학’인 것입니다.

여기서 오이코노미아 주제를 끌어오는 이유는 바로 신학의 언어적 오이코노미아(경영)를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종교든 마찬가지이지만 교리의 생성과정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어(또는 사회적 언어)는 교묘하게 종교적인 언어로 대체되었다가 역설적이게도 다시 일상 언어를 지배하게 됩니다. ‘가사 경영’의 의미로 사용되었던 오이코노미아라는 말은 신학에서 특수한 구원의 계획과 그 비밀을 뜻하는 용어로 대체됩니다. 이는 언어를 공동체가 일정한 형식으로 내재화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듯이 신은 인간 세계와 우주 전체를 돌보며, 대리통치자는 이러한 신의 섭리에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합니다. 섭리적 관점은 신도의 일상 언어체계와 정신에 재배치됩니다. 이러한 ‘언어의 신학화’ 내지 ‘언어의 종교적 재가공’은 단지 한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일정한 공동체의 역사를 통해 전수되거나 전승됩니다. 이 과정에서 종교의 언어가 특수화하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권력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학 언어는 신학의 ‘갑질’을 교묘하게 은폐한 채 신도의 일상에서 내재화되는 폭력입니다. 이것이 보편 세계의 지배에 대한 기독교의 ‘갑질’(정복) 야망도 아버지의 섭리적 절대주권이라는 이름으로 추구되는 이유입니다.

‘선한 갑질’의 해체와 소수성의 기독교
‘목자의 역설’과 ‘섭리의 신학’은 갑질을 갑질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는 은폐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이루어지는 갑질 사례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인지되지 않는 ‘선한 갑질’의 양상을 파악하고 그것을 뒤집는 일도 중요합니다. 목양권력 구조를 유지한 채 더 나은 기독교를 추구한다면 갑질 구조를 해결하기 위한 임시방편에 그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독교의 갑질 해결은 기득권 기독교 해체로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존의 기독교 신학과 신앙 양태에 대한 더 근본적인 의문이 그 시작점이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의 재구성이나 기독교 제도적 신앙의 무화(無化) 과정에 대한 고민 없이는 ‘선한 갑질’의 해체는 불가능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기독교 공동체의 본질 회복이나 건강성 회복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권력 논의는 결국 그것을 주도하는 그룹의 ‘선한 갑질’로 환원될 것이라고 봅니다. 사회에 대한 기독교의 공적 담론도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권력욕망을 구체화하는 수단이 되기 쉽고, 기독교 공동체성에 대한 강조는 기독교의 게토화를 가속화하는 데 일조함으로써 기득권 세력의 복귀를 도울 것입니다. 정체성 중심의 공동체성을 강화할수록 배타적 폭력은 증대될 것이고 그것은 공동체 내적으로는 더욱 위계적 권력 행사를 당연시하는 결과로 돌아올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상상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내부에 소수성과 ‘경계적 기독교’에 대해 새롭게 고민하는 흐름이 생겨나기를 기대합니다. 기존의 신앙적 품행은 ‘기독교성’을 강화하는 형식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내에서 소수성 담론이 들어설 수 있는 자리가 없습니다. 기독교가 기독교 자체의 갑질 구조를 허물어갈 수 있는 방법은 기독교 내 또는 기독교 자체의 소수적 담론이 허용될 수 있도록 틈을 내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내에서 배제되어 왔던 여러 이질적 담론과 실천을 신도들이 논의하고 수행함으로써 ‘위계적 기독교’의 중심을 ‘오염시키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낯선 타자들의 출현을 구분 짓고 분류하는 힘의 구조 자체를 해체하는 작업은 ‘기독교다워지는 것’을 추구한다고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낯선 담론과 개별적 타자(소수자)들 ‘곁’에 함께 있을 때 가능합니다. 해체는 이질적 ‘곁’ 즉 경계에 대한 사유와 실천을 여는 작업입니다.

‘순수’ 기독교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사유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기독교성’을 무화하고 다양한 타자와 소수자가 들어설 수 있도록 지속적인 기독교 해체 또는 탈구축의 작업을 수행해야 합니다. 목사가 주도권을 쥐고 변화를 이끄는 운동을 경계해야 합니다. 목사 중심의 변혁운동에 호의적이지 말기를 바랍니다. 전통적인 목양권력의 재현을 반복하는 운동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목사 중심의 교회나 교회 개혁운동의 형식으로부터 탈출하는 신도들의 반란을 감행하기를 바랍니다.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 제도적 교회를 위해 ‘몸 바쳐’ 헌신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답지 않은 교회’를 위해 신도들은 ‘탈교회’(또는 포스트-교회)를 감행해야 합니다. 이는 목사 지도력에 저항하는 ‘평신도’라는 대항지도력의 패러다임과는 다릅니다. 획일화되지 않고 다양한 형식과 방법으로 시도되는 탈출 그 자체가 ‘갑질 없는’ 기독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것입니다. 어떤 그룹이든 타자적인 것과 소수적인 것의 자리가 들어설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권력은 ‘선’(좋음)을 가장하여 폭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할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사유하고 ‘세속적으로’ 실험을 감행하는 일이야말로 ‘선한 갑질’을 전복하는 방법론이 될 것입니다.

이제 타자적이고 소수적인 것이 배제되는 목양 패러다임은 낡은 것이라고 선언합시다. 그것이 심지어 기독교의 ‘회복’과 공동체성을 강화하는 담론이라면 더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과 속의 구분 짓기를 넘어 종교 내에서 작동하는 체화된 내적 질서에서 비롯되는 여러 구분 짓기와 분류작업을 멈춰 세워야 합니다. 기독교성의 무화 즉 ‘무위적 공동체’를 실험하지 않고는 ‘선한 갑질’은 반복될 뿐 아니라 어쩌면 기독교 공동체의 내적 원리로 영원히 그 자리를 잡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김성민
‘틈을 내는 사유와 실천’을 위해 ‘짓다 철학학교’를 운영하면서 강의도 하고 있다. 철학의 교육적이고 변혁적인 역할을 고민하면서 짓다 철학학교의 방향과 형식을 구상 중이다. 인문/사회/종교 분야의 도서를 출판하는 도서출판 짓다의 대표이기도 하다. 대학에서 신학을, 대학원에서 신학과 서양고전문학을 공부한 후에, 석사와 박사과정에서 현대철학을 전공했다. ‘바울과 현대철학’ ‘희생과 폭력’ ‘타자와 소수성의 철학’ ‘독서 철학’ 등을 주제로 책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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