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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의 공간이 된 교회
[332호 커버스토리]
[332호] 2018년 06월 26일 (화) 14:55:26 권대원 goscon@goscon.co.kr

언뜻 ‘교회’라는 공간과 ‘갑질’이라는 개념은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인다. ‘교회’라는 곳이 어디인가?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던가? 그런 예수를 본받아 따르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응당 ‘희생’ ‘양보’ ‘겸손’ ‘사랑’이 어울리지, 힘 있는 자, 권력 있는 자가 자기보다 힘없는 자에게 다양한 종류의 폭력을 행사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갑질’을 한다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 속 교회는 그렇지 않다. 내가 겪었던 교회 내 갑질 문화나 일화도 적지 않았지만,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자신이 겪었던 교회 내 갑질의 피해 사례를 댓글로 적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불과 몇 시간 만에 댓글이 80여 개, 메신저로도 십여 개의 메시지가 쇄도했다. 그 사례 중에는 어이없고 황당한 일들도 많았다. 몇 가지 사례만 소개한다.

•너무나 숨 가쁜 프로그램으로 힘들어하는 교인들과 목사들을 위해 용기를 내어 힘들다고 직언을 한 부목사에게 “힘들면 그만두세요”라며 바로 해고한 담임목사.

•최저임금이 120여만 원이던 시절, 주 6일 근무에 110만 원 급여로 영어도서관 사서직을 제의하면서 십일조는 원천징수라고 말하던 목사.

•교회에서 30분 거리 업체에 주보 인쇄를 맡겼는데, 인쇄가 다 끝난 토요일 밤 11시에 주보 수정하라고 담임목사가 연락했다. 수정하지 않으면 결제를 안 해줬다.

•교회 홈페이지 제작을 한 업체에 담당 교역자가 제작 과정을 자신에게 보고 안 했다고 제작 비용을 지불하길 거부했던 교회 장로. 끝내 잔금을 치르지 않았다.

• 목사가 시키는 대로 순종하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청년들이나 교인들을 대상으로 누가 들어도 그 사람인 줄 알 수 있게 상처 주고 망신 주는 표적 설교.


피해 사례는 다양하지만, 갑질의 유형들은 비슷하다. 교회에서 가장 권력과 직위가 높은 담임목회자, 또는 장로, 직분자들에 의해 고통당하고 어이없는 피해를 당한 부목사, 성도들의 이야기였다. 이런 사례들을 접하면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역시 교회도 갑질 만연한 사회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 아니 어쩌면 사회보다 더 몰상식하고 노골적인 갑질의 폭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회에서는 직위가 높거나 권력이 있는 자들의 갑질이지만, 교회에서는 거기에다 ‘하나님이 세우신’이라는 권위가 한 겹 더 포장되어 더욱 노골적이고 공격적으로 갑질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교회 내 갑질은 ‘신의 권위’로 포장하기에 더욱더 ‘성경’이 말한 ‘신의 뜻’과 기독교 정신을 거스르는 반기독교적 행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이 세우신’으로 표현되는 ‘신의 권위’는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 서열 원칙
재미있게도 복음서에는 제자들 사이에 서로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2천 년 전에도 예수를 따른다는 제자들조차 ‘가장 큰 권력’ ‘가장 높은 서열’에 대한 욕망과 분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 ‘서열의 원칙’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신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앉으신 다음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막 9:33-35, 이하 새번역)

예수의 가르침은 당시 사람들의 통념과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많았지만, ‘누가 높냐?’고 다투던 제자들의 다툼에서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 원칙은 세상의 원칙과 ‘정반대’의 원리였다. 세상은 큰 권력,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섬김을 받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지만, 예수께서 말한 하나님 나라 서열의 원칙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하셨다. 이런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교회에서 어떻게 높은 지위, 큰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이 당연한 문화가 되었을까? 이를 가능하게 하는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누가 ‘하나님의 종’인가?
교회 내 갑질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이유 중 가장 흔한 것이 교회 내 직분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다. 흔히 목사를 비롯해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종’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교회의 문화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막강한 권력과 명예가 부여된다.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에서 이들 ‘하나님의 종’들의 뜻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들은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고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을 교회에서 행사한다. 역설적이게도 교회에서 아무런 지위를 갖지 않고 있는 평범한 성도들은 보통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린다. 아마도 교회 내 목회자나 중직자들이 그런 성도들보다 더 낮은 위치에서 섬기라는 뜻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고 중직자나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문화가 생긴 것 같다. 그런 표현 자체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잘 녹아 들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예수의 철학이 잘 구현되고 있을까? ‘하나님의 종’들의 갑질과 권력 행사로 인한 피해자가 속출하는 현실을 볼 때 그렇다고 말하긴 힘들다.

원래 교회 내 직분이란 성경의 원리에도 드러나듯 ‘더 잘 섬기라’는 의미에서 섬김을 대표하는 직분으로 시작한 것이다. 목회자는 양 떼들을 섬길 의무와 책임이 있고, 장로나 안수집사 등 중직자들은 여러 교인들을 대표해서 그들의 고충과 어려움을 들어 주고 섬기라고 세우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 명예로운 것이고 ‘그 직분에 상응하는’ 수고와 희생을 기꺼이 치르는 사람들을 교회 구성원들이 존경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직분’은 일반 사회와 다를 바 없이 상하관계와 수직적 위계로 고착되었다. 게다가 여기에 ‘신적 권위’까지 덧입혀지기 때문에 권력은 맹신화되기까지 한다. 교회에서 높은 지위, 막강한 권력을 갖는 직분에 있는 목회자나 장로 등 직분자는 자신의 결정이나 생각에 ‘하나님의 뜻’을 덧입혀 신적 권위로 포장한다. 그래서 그런 이들의 의견과 결정을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불순종과 불신앙의 행위로 낙인찍힌다. 이런 문화 구조에서 교회 성도들도 직분자들의 결정이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다른 생각을 말하기 어려운 압박에 놓인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이의를 제기하는 몇몇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들로부터 표적이 되어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된다.

내가 대학청년부 간사로 사역하던 시절, 어느 젊은 목사가 청년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상위 질서의 허물을 입에 담거나 비난하는 것은 성숙한 성도가 할 일이 아닙니다.” 아마 그 목사가 말한 ‘상위 질서’란 당시 성범죄 의혹을 받고 구설에 올랐던 ‘담임목사’를 의미한다고 추측한다. 교회에서 ‘상위 질서’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분의 말대로 교회에 진짜 ‘상위 질서’가 있다면 그 상위 질서는 누구일까? 예수의 말씀대로라면 진짜 교회 내 상위 질서는 섬김의 대상과 목양의 대상이 되는 양 떼들, 곧 성도들이 상위 질서가 아닐까? 양떼들을 제대로 섬기라고 교회의 직분이 주어졌는데, 그들은 스스로 교회의 ‘상위 질서’라 자처하며 교회 내 갑질과 권력 행사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가장 낮아져 섬기라고 주어진 교회 내 직분이 세상보다 더한 수직적 권력의 정점으로 왜곡된 이 현상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목표와 효율을 중시하는 집단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목표와 효율을 중시하는 문화는 어떻게 약자를 배제하는가?
대형화된 교회가 나타나고, 교회조차 ‘부흥’이라는 명분으로 커다란 성장과 성공을 추구하는 문화가 보편화되었다. 교회가 ‘부흥’과 ‘성장’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추구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효율을 중시하게 되자 교회의 리더십과 직분은 더욱 막강한 권한과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부흥’을 추구하는 것은 더욱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원하기 위해 당연히 교회가 추구해야 할 거룩한 명분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그것이 명분상 아무리 옳게 보이는 목표라 할지라도 목표와 효율을 중시하는 것이 교회의 문화가 되어버린다면 그에 따르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어느 조직이든 목표와 효율을 중시할수록 구성원 다수의 의견과 민주적인 소통보다는 빠르고 정확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소수의 리더에게 권한을 대폭 위임한다. 게다가 그 목표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분까지 가지게 된다면 더더욱 그 리더의 권력과 권한은 막강해지며 조직의 구성원들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짓을 하는 신앙 없는 자, 더 나아가 사탄, 마귀로 비난받지 않기 위해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집단의 방향과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 또는 그 집단이 요구하는 ‘효율’에 따라갈 수 없는 약자들의 목소리와 의견은 철저히 무시되고 배제당한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교회가 그토록 부흥을 갈망하고 ‘부흥’이라는 목표에 몰입할수록 ‘교회’는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거나 변질되기 쉽다는 것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 ‘교회론’을 따지면 많은 개념이 나올 수 있겠지만, 결국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에서 교회의 존재 목적을 찾는다면 ‘내 양을 먹이라’가 아닐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 (요 21:15)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예수께서 말한 ‘내 어린 양 떼’, 즉 성도들을 먹이고 돌보는 것이다. 성도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그 숫자를 늘리는 것에만 교회가 모든 신경을 몰입하다 보면 ‘중요한 양 떼’와 ‘중요하지 않은 양 떼’로 자연스레 구분하게 된다. 교회의 성장과 부흥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양 떼, 집단의 목표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따라올 수 없는 연약한 양 떼들은 자연스럽게 배제된다.

그러나 예수는 집단 전체의 ‘거룩한 목표’를 위해 약자가 배제되고 낙오되는 것이 당연시되는 지금의 교회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이상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그 양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 18:12-14)

거대하고 거룩한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기꺼이 집단의 효율을 최대한 끌어내고 속도를 높이기 원하는 사역자나 교인들에게 이 구절은 이해하기 힘든 말씀으로 보일 것이다. 예수는 어쩌면 교회의 존재 목적이 그 집단의 가장 작은 자와 약자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니까 말이다.

예수께서 말한 교회의 존재 목적은 수만 명의 교인을 끌어모아 수천억 원의 돈을 쏟아부어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큰 교회를 세우는 것과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교회는 예수께서 말한 ‘작은 사람들’, 평안히 있는 아흔아홉 마리 무리에서 낙오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귀하게 여기는 것에서 그 존재 목적을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교회가 거대하고 거룩한 명분으로 큰 목표를 추구하고 빠른 속도의 효율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길 때 ‘약자’와 ‘작은 사람들’은 철저히 배제되고 무시당한다.


교회가 거대하고 거룩한 명분으로 큰 목표를 추구하고 빠른 속도의 효율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길 때 ‘약자’와 ‘작은 사람들’은 철저히 배제되고 무시당한다. 그런 문화 속에서 ‘더욱 낮아져 섬기라’고 직분을 준 직분자와 리더들은 약자에 대한 갑질과 폭력을 당연하게 여기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교회 내 갑질은 어쩌면 이런 교회의 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뿌리내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교회 내 만연한 갑질과 집단의 폭력성에서 교회를 구원할 방법은 무엇일까?

천천히, 다 같이, 약자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는 문화
교회 내 갑질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결국 교회가 ‘약자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는 실제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약자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라고 굉장히 준엄하게 말씀하셨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목에 큰 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눅 17:2)

교회가 그 공동체의 가장 작은 사람들, 약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문화가 생긴다면 교회 내 갑질은 들어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 공동체가 좀 더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다 같이 걸어가려고 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교회도 사람이 모인 곳이고 해야 할 일들과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기에 현실적으로 ‘일의 효율’이라는 가치를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효율’을 위해 누군가가 배제되거나 무시되어야 할 상황은 최대한 피하고 배려하려 하는 ‘약자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야 할 것이다.

인권 감수성이 그렇듯 약자에 대한 감수성 역시 거저 얻어지는 가치가 아니다. 꾸준히 교육하고 소통하고 배려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교회 안에 자리 잡혀야 한다. 그 가운데 ‘직분’에 대한 왜곡된 개념 또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정말로 낮아져 섬기려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을 신중하게 선택해서 직분을 주고, 가능하다면 그 직분을 악용하거나 왜곡될 가능성에 대비해 ‘종신 직분’이 아니라 일정 기간 임기를 맡는 ‘임기제’ 또한 구조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개인들이 알아서 ‘약자 감수성’을 기르고 그런 개인들이 모여서 가장 건전하고 건강한 교회가 운영된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죄 많은 인간이 모인 교회에서 그런 이상적인 접근은 너무 안이할 수 있다. 교회 문화와 가치관을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견제와 감시, 징계가 가능한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약자에 대한 갑질과 폭력이 사전에 예방되고, 또 설사 그런 일들이 발생한다 해도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섬세하고 치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인간의 원죄를 믿는 교회가 어쩌다가 인간이 타락할 가능성에 대한 대비가 이렇게 안이하고 전무한 공간이 되어버렸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많다. ‘약자에 대한 감수성’은 감성적·문화적 측면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제도적 측면에서도 섬세하고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대학을 마치고 이제 막 졸업하는 후배들에게 내가 해줬던 이야기들이 있다. 면접을 보러 갔는데 ‘우리 회사는 하나님의 비전을 이 땅에 실현시키기 위해서… 어쩌고저쩌고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대표가 있다면, 가급적 그 회사는 가지 말 것’을 조언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과 거룩한 비전을 팔아 노동법을 지키지 않을 것이고, 야근을 당연히 여길 것이며, 초과근무와 휴일근무조차 거룩하게 포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이런 이야기를 후배들에게 해주면 후배들은 우스갯소리나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몇 년 후에 내게로 와서 ‘형 말이 맞았어요. 형님 말을 들을걸…’ 하며 후회한 친구가 네댓 명은 있었다.

어쩌다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회사나 교회라는 공간이 ‘몰상식한 갑질’이 당연한 공간이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슬프고 안타깝다. 작은 사람들, 약자들이 존중받고 그들을 가장 먼저 배려하는 문화가 지금의 교회에는 거의 전무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약자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는 것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답시고 온갖 갑질과 폭력을 교회의 이름으로 자행한 한국교회가 거듭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라 생각한다. 교회다움의 본질은 결국 약자와 작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통해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한국교회는 지금껏 강자가 되기 위한, 또는 강자들에게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장소였다면 이제부터는 약자가 가장 편안하고 존중받는 예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권대원
삼일교회 집사이자 디자이너이다. 2012년부터 전병욱 목사 면직운동을 해왔고, 전병욱 목사의 성범죄를 백서형태로 다룬 책 《숨바꼭질》(대장간) 편집위원이었다. 〈ㅍㅍㅅㅅ〉, 〈뉴스앤조이〉 등에 신앙 칼럼을 써왔고 현재는 삼일교회가 예산을 지원하고 올해 7월 개소를 앞둔 기독교반성폭력센터 설립준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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