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호 천정근의 세상읽기] 옥한흠, 오정현,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 그리고 재야의 고수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J 전도사의 토요일 밤 요한복음 강의 시간에 맞춰가는 서울 길은 언제나 막혔다. 나는 대개 집(용인시 양지면)에서 1시간 전에 출발했는데 서울 요금소를 지나면 늘 거북이걸음이었다. 모임 장소인 수서경찰서 뒤편 D교회에 도착하면 강의는 벌써 발단을 지나 전개 부분으로 건너뛰고 있었다. 
   
J 전도사는 3년 전 불쑥 내게 전화를 걸어와 ‘호형호제’를 청했다. 인터넷상에서 내가 쓴 글을 읽었다며 이런 글을 쓰는 목사가 있다는 사실에 반가웠다고 했다. 나는 이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없어 경계심을 품고 대충 넘기려 했는데, 대뜸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거였다. “형님, 일전 어느 신대원 채플 중 대표기도를 맡은 신학생이 ‘민중(民衆)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으로 기도를 마쳐 논란됐던 일 기억하시죠? 설왕설래 난리 끝에 징계까진 가지 않고 훈계로 끝냈다는 데, 형님은 이 기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가뜩이나 경계 중인 인물이 매우 민감한 질문을 던지는 게 난처했지만, 상대가 돌직구를 던지는 데야 굳이 피하고 싶지 않았다.

“민중이라는 명칭이 운동권 용어로 통용되는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그것도 신학교의 신학생이 채플에서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한 게 소동이 된 것은 당연하리라 생각된다. 그가 어떤 의미로 그렇게 말했는지 내게는 정확한 정보가 없다. 그러나 추측건대 그 학생이 사용한 민중이라는 명칭은 운동권 개념이라기보다는 통상 안정적인 사회적 삶으로부터 소외된 자들, 국가의 권력과 구조로부터 희생되는 자들, 또 그런 고통을 당하면서 하소연할 데가 없는 이집트의 히브리인들 같은 자들, 그들의 기원을 통칭한 게 아닐까 한다. 이 땅에 살면서, 또 살기 위해서,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꿈꾸고 기원한다는 의미라면 우리 기독교인들 역시 그가 말한 민중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고, 우리가 갖가지 수사(修辭)를 붙여가며 꾸며대는 영혼 담긴 고백 없는 ‘예수님의 이름’보다 신선하다고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민중이라는 명칭이 내 개인적으론 무척이나 고전적이고 진부하게 느껴지지만.”

“역시 형님이십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날로 우리는 서로를 아끼는 지음(知音)의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J는 당시 독일에서 13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대구의 한 교회에서 청년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의 전공은 성서학이고 ‘요한계시록’으로 논문을 썼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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