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호 세상읽기]

   
▲ '누구의 무슨 말을 해주려는 것인가?' (사진: 노컷V 유튜브 갈무리)

엄마부대
지난 1월 4일 엄마부대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한일 위안부 협상 결과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팻말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제 아베의 사과를 받았으니 남은 여생 마음 편히 지내십시요. 엄마부대.’

문구를 읽는 순간 누군가의 표현처럼 ‘혼이 비정상’이 된 것 같은 비현실감을 느꼈다. 세상에 바로 그 일본 남성들에게 유린당한 상처를 안고 일생을 살아오신 할머니들에게 같은 여성으로서 이렇게 무지막지 무례할 수가 있을까? 국가를 위해서라 했다. 단체 대표인 중년여성은 더 놀라운 발언들도 쏟아냈다. 그녀는 엄마부대가 그동안 벌여온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반대집회에 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세월호 유가족이 악랄하다’고 말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들의 단순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할지도 모를 주장이 아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와 방식이다.

여기쯤서 확인해두고 싶은 노파심이 생긴다. 궁금하다. 즉 내 이런 판단은 누구에게나 지극히 당연한 윤리적 상식이 아닐까? 직관에 속하는 보편 반응으로 좌우, 보수·진보의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이런 합의조차 공감이 불가능하다면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까? 그런데 말을 꺼내면서도 왠지 불안해진다.

프랑스에도 극우주의자가 있고 독일에도 신(新)나치가 있다. 내가 살았던 러시아에도 외국인에게 무차별 테러를 일삼는 극렬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독일, 러시아 사회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 일말의 의구심이나 불안한 노파심이 들지는 않는다. 곧 사회의 병적인 부분으로 한 팔 접어두는 것이지 근간을 위협하는 요소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왜 우리나라에서 부쩍 목소리를 높여가는, 정치적 갈등 현장에 어김없이 출몰하고 뉴스의 한 대목을 이루는 이 사람들에게서, 그들을 대하는 집권자들의 태도에서 불안한 의혹을 감지하는 걸까?   

‘엄마부대(봉사단)’란 생소한 단체를 처음 대했을 때 지난 시절 그리고 지금도 억척스러움으로 가계를 꾸려나가는 어머니들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전투적이라 할 수도 있을 그녀들의 헌신과 열심을 ‘부대’란 명칭에 담은 것이려니 했다. 그러나 점차 그 의미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그들의 봉사(?)가 이름을 증명했다. 이를테면 사회적 체면 때문에라도 차마 말 못할 누군가의 말을 그녀들이 대신해주는 듯. 이발난초(已發難初). 괴악으로 논의를 차단하고 막장으로 논리의 입을 막는 것. 삼가고 거리낌 없는 집단적 태도가 ‘부대’의 자의식이다.

‘이제 아베의 사과를 받았으니 남은 여생 마음 편히 지내십시요.’ 그런데 이 말은 누구의 말일까? 어쩜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누군가 하고픈 말일 수 있겠다. 그리고 엄마부대가 그런 말의 도구라면 적어도 내게는 성공이다. 뉴스를 통해 그녀들 말하는 방식과 내용을 보게 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몰랐으면 좋았을 부정에 닿은 것처럼, 다시 보고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열왕기하 3장에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연합군이 모압과 벌인 전투를 기록한다. 모압왕은 전세가 극렬해 어려워지자 결사대 칠백과 에돔 철퇴를 시도한다. 그러나 작전은 실패한다. 왕은 다급한 나머지 이스라엘 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자를 성 위에서 번제로 불사른다. 기록에는 이 장면을 본 이스라엘에게 ‘크게 (하나님의) 격노함이 임하여’ 이스라엘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썼다. 문제는 왜 하나님의 격노가 모압을 향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했느냐는 점이다. 엄마부대를 대할 때 내 안에 이는 격노는 나를 향한다. 그것은 자신들을 엄마라 부르는 부대의 이질적 비현실성에서 발생한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징후처럼 느낀다. 이런 엄마들이 국가 의제 전면에 나라를 선도해 나가는 것처럼 등극했다는 점. 그리고 그네들 목소리가 사회적 병리로서가 아니라 장려되고 확산 중인 세력으로 인식 소비되고 있다는 점. 물론 그런 인식과 소비의 매개는 언론이다. 언론 자의에 따라 국민들이 알고 싶고 알아야 할 사안조차 단 한줄 보도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보도해야 할 뉴스는 얼마나 많고 시간과 지면은 얼마나 부족한가. 그런데도 엄마부대 소동은 자주 야당대표 발언보다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무엇이 저 엄마들―실제로 누군가의 엄마일 것이다―을 부대로 뭉치게 했을까? 이 내력 모르게 체득된 생의 분노를 엉뚱한 약자들 앞에서 표출할 사명을 부여받은 엄마 병사들은 정녕 누구일까? ‘봉사단’이라지만 봉사를 위해 모인 단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난 시대 억척스러웠던 살림꾼 엄마들의 변태(變態)쯤 되는 건가? 어느 인터뷰에 자신들은 ‘강남(江南)에 살고 각기 대단하신 분들’이라는데, 어쩌면 이들과는 상관없는 강남과 대단함이 이들과는 상관없이 이들을 절망적 역기능으로 변태시켰는지 모르겠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인간들이 변태 중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엄마의 변태는 모든 종류의 변태의 마지막이거나 완성이 아닐까?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라 노래했던 기형도 시인의 예감이 확인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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