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호 커버스토리]
<쿼바디스>와 ‘가나안 성도’
구랍을 보내면서 교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의 뒤엔 무엇이 남았을까? 안타까우면 안타까운 대로 어쩔 수 없는 것들은 어쩔 수 없는 대로 하나 둘씩 지워지고, 영화 <쿼바디스>와 ‘가나안 성도’ 논쟁이 오롯이 남았다.
전자는 한국교회의 암울한 현실의 기록물이자 그 속에 살아 있고자 하는 쟁쟁한 복음의 산물이다. 나에게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질문은 ‘어디로’의 지향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지시해주는 유일한 대답 같았다. 나도 패널로 참여했던 시사회 질의 시간에 상당수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의 시선에 대해 지나치지 않으냐는 질문을 했다. 짧은 시간에 피력할 역량이 없어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여기진 않는다. 다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실들을 분명히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그것은 약간은 특별하다 할 수 있는 목회를 하면서 내가 자주 해온 말이기도 했다.
후자는 전자가 보여주는 한국교회라는 병적 현실이 낳고 있는 자연발생적 현상이다. 제시되는 숫자는 제각각이지만, 대략 그동안 교회를 떠난 성도의 숫자가 758만 명이다. 그중 타종교로 개종한 숫자를 뺀 560만 명 중 약 100만 정도의 숫자를 가나안 성도로 추정한다. 나는 가나안 성도를 하나의 말기적(末期的) 현상으로 볼 뿐 또 다른 형태의 신앙이라 여기고 싶진 않다. 현직 목사로서 교회 안 신앙을 강력 지지하는 입장도 아니고, 신앙의 보루로서 보이는 교회의 형태적 유일성에 목숨을 걸고 싶은 맘도 없다. 가나안 성도들의 신앙 이력을 믿을 수 없다거나, 그들을 그때그때 자기 편의적으로 교회를 옮겨 다니는 ‘신앙쇼핑족’으로 판단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들이 오히려 신앙에 대해 남들보다 더 많이 고민한 끝에 교회를 떠났다거나, 독립적으로 굳건한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오히려 가나안 성도라는 명칭이 그들에게는 영적 위태로움에 대한 안일한 변명이 되고, 교회에는 방어적으로 성도들을 다시 눌러 앉히는 핑계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