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호 세상 읽기]

테러방지법과 필리버스터
2016년 2월 23일 정의화 국회의장(새누리당)은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했다. 당초 그는 “국회법상 직권상정은 천재지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때 할 수 있다. 현 경제상황이 비상사태라는 데 동의할 수 없다”며 직권상정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 밝혔다. (그는 직권상정을 하느니 ‘차라리 성을 갈겠다’고도 말했다.) 누군가 13척의 배로 133척 왜군과 맞섰던 명량해전의 이순신 장군에 비유하며 그를 추켜세운 글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순신이 아니라 원균도 못되었다. 불과 보름이 못돼 ‘지금은 국가 비상사태’라며 태도를 바꿨다. (보름 사이 그에게 어떤 ‘비상사태’가 벌어졌는지는 신만이 아신다.)

이 법안의 핵심 쟁점은 테러 의심자에 대한 국정원 요원들의 사찰활동 합법화다. 국정원이 누군가를 테러 가담자 혹은 의심자로 분류하면 비밀리에 금융계좌·통화·문자·위치 등의 조회 및 추적이 가능해진다. 필연 무차별적으로 확대될 것이다. 악용될 경우 그야말로 ‘테러’가 될 법이다.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씨 간첩조작 사건처럼.) 특히 이 법을 운용할 실무부처 국정원의 지난 10년의 행적을 돌아볼 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야당은 직권상정과 날치기 통과에 맞서 무제한 토론(Filibuster, 합법적 의사진행방해)으로 맞섰다. 192시간, 장장 9일간 밤과 낮을 이은 마라톤 토론이었다. 연일 최장시간 발언 기록이 경신됐고, 외신들이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국회를 찾아 법안 반대와 필리버스터 유지를 격려했다. 발언자들 중에는 국정원으로부터 사찰과 고문 피해를 당한 직접 당사자들도 있었다. 생생한 간증이랄까? 그것은 가히 민주주의의 인권과 기본권에 대한 현대사 강의 같았다. 물론 여당의원들의 불참과 방해, 공중파 방송의 외면과 불공정 보도, 종편의 깎아내리기, 의회에 대한 청와대의 고압적 태도(대통령은 책상을 내리쳤다) 등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조차 의원들의 현대사 강의가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임을 확인시켜주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지난 2일 여당의 단독 표결로 테러방지법은 끝내 통과됐다.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태산이 떠나갈 듯이 요동하게 하더니 뛰어나온 것은 쥐 한 마리뿐이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유난할 필요 없다. 결국, 똑같다. 분위기에 들떠 경거망동하면 자기만 손해다’라는 교훈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실컷 같이 춤추자 설득해놓고 막 용기를 내 플로어로 나가려니 음악 끄고 ‘이제 됐다. 이만 실례!’ 돌아서 버리는 카사노바처럼. 그에게 모욕당한 순진한 아가씨처럼. 민망해진 것은 이번에도 국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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