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호 3인 3책] 욥에 관하여 | 구스따보 구띠에레스 지음 | 김수복ㆍ성찬성 옮김 | 분도출판사 | 2005년 개정

지난달에 홍인식 목사가 쓴 해방신학에 관한 책을 소개하다가 구스따보 구띠에레스의 《해방신학》에 대해 잠깐 언급했다. 두 번이나 읽으려 했다가 포기했다는 얘기였다. 한데 생각해 보니, 오래 전에 그의 책 하나를 읽은 적이 있었다.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것으로 “하느님 이야기와 무죄한 이들의 고통”이라는 부제가 붙은 《욥에 관하여》라는 책이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책을 찾아내 마지막 쪽을 들춰보니 1991년 6월에 읽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 책을 다시 읽는 동안 계속해서 구띠에레스의 성서 해석에 탄복했다. 홍 목사가 해방신학자들의 성서 지식의 깊이를 칭송한 것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 책에서 구띠에레스는 보수적인 신학자들과 다르지 않은 주장을 한다. 우선 그는 욥기를 “사회정의의 문제들과는 아주 동떨어져 보이는 책”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해방신학자가 그런 책을 살피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이렇게 답한다. “그런 질문은 첫 출발부터 해방신학의 성서적 방위(方位)를 모르는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말까지 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이 사실이지만 성경이 우리를 읽고 우리에게 이야기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구띠에레스의 설명 중 흥미로운 부분은 욥과 세 친구들이 하는 말 사이의 대조다. 욥의 세 친구들은 응보신학(應報神學)의 테두리 안에서 맴돈다. 그들은 욥의 고난을 응보신학에 억지로 끼워 맞추느라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한다. 욥의 친구들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욥은 하나님께 따지고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의 사고는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가난하고 억울한 자들의 고통의 문제로까지 확대된다. 결국 그는 대놓고 하느님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정의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욥이 말을 마치자 마침내 하느님이 등장하신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그를 책망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대신 엉뚱하게도 그분은 자신의 창조에 대해 언급하며 욥을 향해 폭포수 같은 질문을 쏟아내신다. 욥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그분 말씀의 요지는 세상에는 정의보다 큰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답변을 해설하면서 구띠에레스는 해방신학자의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말을 한다. “정의로운 세상까지도 하나님께 족쇄를 채울 수 없다.” 욥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은 역사가 아닌 자연에 대한 것이었다. 자연계는 하느님의 자유와 기쁨을 표현하며 원인과 결과라는 협소한 울타리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정의를 포함하는 “유용성은 하느님 활동의 일차적 이유가 아니다. 하느님의 창조적 숨결은 아름다움과 기쁨에서 영감을 받는다.” 그로 인해 욥의 고통이 제기했던 “정의의 문제”는 “하느님의 자유와 신비의 문제”로 바뀐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이유로 욥은 입을 다물고 저항을 포기한다. 욥은 자신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놀라운 일들이 존재함을 깨닫고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만든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경험이었다.

25년여 만에 다시 읽은 《욥에 관하여》는 젊은 시절의 나로서는 볼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보게 해주었다. 무엇보다도 기쁜 것은 나의 편견, 즉 해방신학자들이 성서와 무관한 신학을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수정할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이제는 정말 기대를 품고서 그 책, 구띠에레스의 《해방신학》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김광남
숭실대에서 영문학을, 같은 학교 기독교학대학원에서 성서학을 공부했고, 책을 쓰고 번역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 《아담의 역사성 논쟁》등 다수가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한국 교회, 예레미야에게 길을 묻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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