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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교회 특수성 아닌 ‘강간 문화’입니다
[336호 커버스토리]
[336호] 2018년 10월 25일 (목) 17:37:51 이은혜 goscon@goscon.co.kr

“문재인 강간 대통령 각하. 저는 살면서 ‘강간 문화’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일강 문화, 황하 문화, 갠지스강 문화, 메소포타미아 문화를 잇는 다섯 번째 문화가 강간 문화인가요? 문재인 강간 대통령 전하께서는 페미니스트니까 우리나라를 강간 왕국으로 생각하시고 있겠네요.”

이 우스꽝스러운 글은 청와대 국민청원 페이지에 올라온 글이다. ‘저는 강간 문화에서 사는 남자입니다’는 글의 청원인은 ‘강간 문화’라는 게 대체 한국 어디에 있는 문화냐고 물었다. 만약 한국에 강간 문화가 있다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문재인 대통령은 국호를 ‘강간 제국’으로 바꾸라는 내용으로 청원했다.

다행히(?) 청원 기간이 끝날 때까지 이 글에 동의한 사람은 한 명. 청원은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고 끝났다. 청원인이 발끈한 지점은 ‘강간’이라는 단어였을 것이다. ‘강간 문화.’ 단어 자체가 주는 어감은 굉장히 세다. 강간 문화라는 말이 지닌 사회적 맥락을 잘 모른다면 ‘세상 어느 나라에서 강간을 문화로 즐긴단 말인가’ 하는 오해를 할 수도 있다.

   
▲ <뉴스타파M> 갈무리

여성을 억압의 또 다른 도구, 강간 문화
강간 문화(rape culture)라는 용어는 1970년대 미국의 페미니스트 진영에서 시작된 것으로, 성폭력 중 최악인 강간마저도 피해자의 잘못인 것처럼 여기는 문화를 가리킨다. 여성을 향한 성폭력이 빈번히 발생해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서 원인을 찾는 경향이 뚜렷한 문화. 강간 문화는 각종 미디어와 대중문화에서 이런 현상을 용인하고 전파해 삶 깊숙이 뿌리내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강간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지 아닌지 측정할 수 있는 여러 척도가 있다.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몇 가지를 추렸다.

• 피해자의 옷차림, 정신 건강 상태 등에서 성폭력 원인 찾기
• 가볍게 건넨 성희롱이나 성적 농담이 별 것 아닌 것처럼 치부하기
• ‘남성다움’은 성적으로 정복적이고 공격적인 것처럼 표현하기
• ‘여성스러움’은 성적으로 수동적인 것처럼 표현하기
• 강간을 ‘나쁜 섹스’라 부르기
•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앞날 걱정하기
• 피해자만 입을 다물면 모두가 괜찮을 것이라 말하기
• 피해자가 공동체 분열의 주범인 것처럼 말하기

어떤 사람은 위에 나열한 조건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는 한 곳이 머릿속에 떠오를 수도 있다. 바로 교회. 이미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접한 다양한 교회 성폭력 사례에서, 피해자가 위에 나열한 것과 같은 일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다. 교회는 강간 문화 유무를 가늠하는 척도의 대다수가 해당하는 곳이다.

교회에서 ‘강간’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도 불경한데 그게 무슨 문화씩이나 되느냐고 역정을 낼 사람도 있겠다. 이미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강간 문화는 성폭력이 마치 피해자의 잘못인 것처럼 여기고, 남성의 기준에서 가벼운 성희롱이나 성적 농담쯤은 문제시되지 않는 모든 환경을 가리키는 말이다.

교회에 강간 문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올해 초부터 본격적인 ‘미투운동’이 시작됐지만, 교회에는 이미 그전부터 용기를 낸 피해자들의 고발이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목회자가 성폭력 가해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런데도 교회 성폭력이 근절되지 않고 지속하거나 최근 들어 더 많은 피해자가 피해를 호소하는 이유는 뭘까.

그 뒤에는 한국교회에 만연한 강간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부디 성직을 수행하는 목사, 사회적 지위와 교회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장로를 ‘잠재적 강간범’을 만든다고 불쾌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강간’이라는 행위가 아닌 교회 구성원 사이에 만연한 ‘강간 문화’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 (글에서 언급한 각종 사례는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특정할 수 없도록 일부 정보를 수정했다.)

교인 약 500명 규모의 중형 교회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는 50대 중반 담임목사, 피해자는 미혼인 40대 후반 전도사다. 전도사는 가해자와 심방을 다닐 때마다 담임목사가 차 안에서 성폭력을 가했다고 했다. ‘강간’은 없었지만 강제로 입을 맞추거나 원치 않는 성 접촉을 이어 가는 등 명백한 성폭력이었다. 두어 달 동안 같은 일이 반복되자 전도사는 이 같은 사실을 당회에 알렸다.

이후에 교회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할까. 가해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거나 전도사도 좋아서 합의로 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가해자가 정말 양심 있는 사람이라 잘못을 전부 시인하고 전도사와 교회에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잠잠히 교회를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가해자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관계로 이번 글에서는 논외로 하겠다) 전도사의 문제 제기를 극구 부인하는 가해자는 피해자에 대해 가짜 소문을 퍼트린다. 자기를 보는 눈빛이 이상했다거나, 심방을 같이 가자고 먼저 제안했다거나, 평소 자기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거나 하는 식이다.

전도사가 담임목사의 성폭력을 당회에만 알린 경우에라도 며칠 만에 교회의 중직들은 모두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대다수 교인은 물론 그동안 전도사를 따르던 이들마저 전도사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급기야 이들의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나온다.

“전도사가 원래 행실이 좋지 않았어.”
“저번에도 전도사가 담임목사님 방에 먼저 들어가는 걸 본 것 같아.”
“저 나이까지 혼자 있는 거 보면 뭔가 문제 있는 거 아닐까.”
“전도사 때문에 우리 사모님이랑 애들은 이제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나.”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별것도 아닌 일로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난리야.”

앞서 잠깐 언급한 강간 문화 유무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에 해당하지 않는 게 있을까. 개중에는 피해자 편에 서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목회자 중심주의가 팽배한 한국교회에서 교인 대다수가 위와 같은 태도를 보이거나 침묵한다. 그러는 사이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가해자의 설교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한 피해자는 교회를 떠나게 된다. 이렇게 성폭력 범죄의 책임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서 찾는 것이 강간 문화다.

‘부적절한 관계’라는 말 뒤에 숨은 성폭력
교회에 똬리를 튼 강간 문화는 교회의 ‘특수성’으로 가장되어 있기에 더 알아차리기 어려운 면도 있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 부족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누군가 잘못이 있더라도 ‘용서’해줘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하다. 눈에 띄게 사람을 위협하는 범죄가 아니라면 성범죄를 저지른 목회자도 빠르게 ‘용서’해줄 수 있는 곳이 교회다. 오죽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예장 통합)에서는 지난 103회 총회에서 성범죄로 면직된 목사가 복귀하려면 최소 7년이 지나야 한다는 문구를 교단 헌법에까지 넣기로 결의했을까.

미투운동 이후 한국 사회에서 성범죄를 판단하는 기준은 점차 강화되고 있다. 성희롱·성추행 등은 물론 불법 촬영물에 대한 인식도 날로 변하고 있다. 급변하는 한국 사회, 그러나 교회에서는 목회자 성범죄를 여전히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일” “목사님의 나쁜 손버릇” “목사님의 약한 부분”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뉴스앤조이〉가 목회자 성폭력을 취재·보도할 때마다 일부 독자들은 아직도 더 드러낼 교회 성폭력이 남았느냐고 묻는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현장에서 발생하는 목회자의 성 문제는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제보가 들어온 것 중에 공개적으로 다루지 못한 것도 꽤 많다. 대부분 사회에서 ‘부적절한 관계’라 부르는 경우다.

예를 들면, 목사를 사랑했다고 믿는 교인의 경우는 무언가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제대로 파악 못한 경우도 많다. 목사는 신적 권위를 이용해 자기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교인에게 접근했지만, 신앙심이 투철한 교인은 목회자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에게 접근했다고 믿는다.

이 같은 패턴은 여러 차례 반복해 나타난다. 또 다른 예로, 사역자 A는 기혼 사실은 물론 자기 신상 정보를 거짓으로 꾸며 데이트앱에서 미혼 여성 B를 만났다. B는 프로필에 개신교인임을 밝히고 신앙관이 비슷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A는 B의 욕구를 미리 파악하고 신앙적으로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인 것처럼 포장했다. A가 기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B가 관계를 거부하자, 결혼 생활은 이미 파탄 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성관계를 시도했다. B는 명확하게 ‘노’라고 말하지 못했다. B는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제보까지 했지만, 속인 게 아니라 사랑해서 그런 것이었다는 A의 말에 마음을 접었다.

위 사례들은 강간 문화와 그릇된 목회자 권위주의에 길들여진 피해자가 정상적인 사고를 못하게 되는 경우다. 가해자를 감싸면서 성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으려는 강간 문화에 익숙한 피해자는, 자신이 당한 성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가부장제와 근본주의 사이에 있는 한국교회
이런 이상한 상황은 한국교회 내에 만연한 잘못된 ‘문화’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국교회는 성범죄를 대하고 다루고 인식하는 모든 방법이 잘못됐다. 그 뿌리에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읽으려는 근본주의가 있다. 이를테면 교회에서 발생하는 성희롱에는 성경 말씀이 조미료처럼 등장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기반으로 “여자라면 이래야지”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오간다. 2000년 전 쓰인 고대 텍스트에서 “남자는 여자의 머리니까 순종하라”는 말을 그대로 따와서 현재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곳이 바로 교회다.

2018년을 사는 대한민국 10-20대 여성의 기준으로 볼 때 교회는 성적 감수성이 ‘후진’ 곳이다. 30살도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담임목사가 호의를 베푼다며 20대 여성 청년의 손을 잡거나, 같이 차를 타자고 요청한다. 20대 중반만 넘어가도 만나는 사람마다 “언제쯤 좋은 소식 듣게 해주겠느냐”라고 묻는 곳, 남자들이 시험에 빠지지 않게 옷차림에 신경 쓰라는 이야기를 듣는 곳에서 여성들은 답답함을 느낀다.

미투운동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여성들이 많아지는 지금, 교회는 어디쯤 서 있을까. 교회 지도층을 장악하고 있는 60대 이상 남성들, 그들의 말에 순종으로 화답하는 대다수 여성 틈에서 젊은 여성들이 있을 자리는 한정될 수밖에 없다.

강간 문화, 교회가 극복할 수 있을까
다시 청와대 청원으로 돌아가 보자. 강간 문화라는 단어에 분노한 청원인은 이렇게 묻는다.

“저는 자랑스러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떳떳하게 자란 대한민국 청년으로 2년 2개월간 해병대에서 죽을 고생하며 군 생활했고 15년 이상 회사에서 일하면서 세금 한번 안 낸 적 없는데 문재인 강간 대통령님께서 지지하시는 미투 분들이 왜 저 같은 남자들을 보고 잠재적 강간범이라 부르고 저 같은 남자들이 사는 나라를 강간 문화라 부르죠?”

사실 이 같은 논리는 교단 총회에서 교회 성폭력 예방교육, 교회 성폭력 관련 헌법 개정, 성폭력대책위원회 신설을 논의할 때마다 교계의 여성 운동가들이 듣는 말이다. 교회에 만연한 잘못된 행태를 뿌리 뽑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건데, 그 자리에 참석한 남성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감정적 불쾌함을 토로하는 데 더욱 관심을 두는 경우가 더 많다.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이 기분 나쁘고, 내가 속한 공동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피력하는 건 좋다. 하지만 많은 목회자와 교인이 “나는,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외치며 곪아 터진 현실을 외면하는 사이 교회는 점점 더 사회와 멀어지고 있다.

부디 한국교회가 어떻게 피해자의 울음에 귀 기울여야 하는지 고민해 보면 좋겠다.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교계 단체·활동가들의 행보를 눈여겨보고 지지를 표명하는 건 어떨까. 다수가 성폭력 피해자를 비난하는 분위기 속에서 내가 속한 교회만이라도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 주고 그들의 아픔에 함께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을 따르는 교회라면 말이다. 

 

이은혜
〈뉴스앤조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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