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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브아 거민의 성폭행 사건 속 환대와 차별
[336호 올곧게 읽는 성경] 사사기 19:16-26
[336호] 2018년 10월 29일 (월) 15:20:18 박유미 goscon@goscon.co.kr
   
네덜란드 화가 헤르브란트 반 덴 데크하우트(Gerbrand Van den Eeckhout)가 그린 <레위인의 첩과 기브아 거민)

16 저녁 때에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요 그 곳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이더라 17 노인이 눈을 들어 성읍 넓은 거리에 나그네가 있는 것을 본지라 노인이 묻되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 18 그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 그 곳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19 우리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여물이 있고 나와 당신의 여종과 당신의 종인 우리들과 함께 한 청년에게 먹을 양식과 포도주가 있어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나이다 하는지라 20 그 노인이 이르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 하고 21 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
22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23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24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26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 (사 19:16-26, 개역개정)

그동안 억눌렸던 여성들의 목소리가 한국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성폭력은 물론 일상에서 벌어지던 남녀차별에 대한 비판도 쏟아진다. 또한 제주도에 예멘 난민이 들어온 것을 계기로 난민들, 특히 무슬림 난민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가 화두다. 두 문제 모두 환대와 연결되어 있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누군가를 환대한다는 것은 그를 이 공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 그를 향한 적대를 거두어들이고 그에게 접근을 허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였다.(《사람, 장소, 환대》, 207쪽) 이 글에서는 사사기 19:16-26을 통해 환대와 차별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누가 레위인 일행을 환대하는가?
흔히 사사기 19장은 동성애 반대를 반대하는 본문 혹은 당시 이스라엘의 타락을 보여주는 증거 정도로 단순하게 해석되어 왔다. 하지만 이 본문은 당시 이스라엘의 다양한 사회적 차별과 상당한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본문의 이야기는 레위인이 자신과 싸우고(우리말에는 "행음하고" 남편을 떠났다고 번역했지만,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나'는 "싫어하다" "화내다"라는 뜻도 있다. 문맥상 이 의미가 더 어울린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책 《내러티브로 읽는 사사기》, 333쪽 참고) 친정집에 간 첩을 다시 데려오는 길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레위인과 첩은 장인의 지나친 환대로 인해 길을 떠나기에 적절한 아침때를 훌쩍 넘겨 늦은 오후에야 에브라임에 있는 집으로 출발한다. 베들레헴과 에브라임은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아침에 출발하면 오후에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늦은 오후에 출발한 탓에 일행이 여부스 근처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일행은 이방인의 성읍인 여부스를 지나쳐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 성읍까지 이르렀고, 날은 그사이 완전히 저물었다.

이때 레위인 일행은 하룻밤 머물기 위해서 기브아로 들어간다. 그런데 동족이라고 찾아간 기브아에서 그들을 초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성문에서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일행은 사람들을 기다리기 위해 성문 가까이 있는 광장으로 가서 그곳에 앉아 있었다. 본문에 나오는 “성읍 넓은 거리”는 성문 근처에 있는 넓은 광장을 의미하며, 회의를 하거나 사람들이 모여서 공적 혹은 사적인 결정을 하는 행사 장소다. 즉,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 중 레위인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관습에서 볼 때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여행객이 자신의 성읍으로 오면 그를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 재워주는 것은 성읍 사람들이 행해야 할 당연한 의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방인도 아닌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여행자가 성읍에 들어와서 자신을 영접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을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브아가 사회적 윤리와 미덕이 붕괴된 각박하고 몰인정한 성읍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내러티브로 읽는 사사기》 339-400쪽)

이때 한 노인이 등장하여 레위인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말을 걸며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초청한다. 사사기의 화자는 이 노인이 기브아에 거류하는 에브라임 사람이라고 소개하는데(16절) 이것은 노인도 베냐민 지파 사람이 아닌 외부인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수많은 기브아 사람 중에 레위인 일행에게 최초로 관심을 갖고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환대를 한 것은 기브아 원주민이 이니라 레위인과 같은 기브아의 외부인이었다. 노인은 레위인 일행을 집으로 데리고 가 씻을 물과 음식을 제공하는 등 손님에게 행하는 일반적인 환대의 관습을 실천하며 레위인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준다. 이런 외부인끼리의 환대는 기브아 거민의 매정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악한 도시, 기브아 거민들의 위협
이렇게 노인의 환대로 무사히 밤을 지내게 될 줄 알았는데, 한밤중에 기브아 성읍의 불량배들이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드리며 손님을 끌어내라고 위협을 가한다(22절). 레위인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지 않음으로 소극적으로 적대하던 기브아 사람들이 이제는 그들을 끌어내 성폭행하겠다고 위협한다. 여기서 ‘끌어낸다’는 말은 자신의 사회 즉, 기브아 성읍 안에 레위인과 같은 외부인을 위한 자리를 주지 않겠다는 적극적 적대 행위이다. 그리고 다수가 떼로 몰려와 처음 보는 동성과 성관계를 하겠다고 요구하는 것은 동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을 하겠다는 것으로 이것은 동성 간 합의와 사랑을 전제한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이다.

이들이 레위인을 성폭행하려고 한 이유는 자신의 영역에 함부로 들어온 외부인에 대해 가장 잔혹한 처벌을 가하기 위해서이다. 예나 지금이나 성폭행은 남녀를 불문하고 가장 큰 치욕을 주지만, 특히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이 남성에게 성폭행하는 것은 성폭행당하는 대상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를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그런 위치로 전락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행동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허락 없이 레위인 일행을 받아들인 노인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레위인을 응징할 것이라며 노인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기브아 사람들의 눈에 외부인은 자신들보다 서열이 낮은 존재로, 자신들이 살도록 허용했을지라도 자신들의 명령과 규칙에 따라야 하는 종속적인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브아 사람들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는 노인의 충고와 만류가 들리지 않는다. 이들에게 노인은 충고를 할 권한과 자격이 없는 이등 시민이다. 기브아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정당한 권리를 가진 일등 시민이다. 거류민인 노인은 이등 시민이다. 여행객인 레위인은 폭력을 가해서 쫓아내야 할 외부인이다. 여기서 기브아 거민들의 죄가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은 모두 하나님 안에서 상호 존중하고 돌보아야 할 형제라는 사실을 잊었고, 또한 고아와 과부와 객 등 사회적 약자들을 특별한 관심으로 환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잊고 나와 내 공동체가 아니면 모두 외부인으로 규정하고 공격하고 적대하며 자신의 공동체에서 몰아내려고 하였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또 다른 중요한 성품인 정의와 공의도 잃어버렸다.

이런 기브아 사람들의 모습은 현재 한국교회가 난민이나 외국인 노동자나 이주 여성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교회는 이들에게 자신의 공간을 나누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며 안전하게 우리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무시한다. 안 보이는 존재인 양 무시한다. 심지어 그들을 적대하며 우리 사회에서 몰아내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구약 성경은 이런 행동을 여지없이 비판한다.

이를테면, 창세기 18장의 소돔과 고모라 멸망 사건에서도 소돔 사람들이 자신의 성읍에 들어온 외부인을 끌어내 욕보이고 쫓아내려고 했는데, 이런 행동이 여호와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악한 도시라는 징표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기브아 사람들이 레위인을 끌어내려고 한 행동은 기브아가 멸망 받아 마땅할 만큼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여기서 볼 수 있듯, 난민과 외국인 등 외부인에 대한 적대와 혐오와 폭력은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잃어버린 행동이다.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노인의 말에서 우리는 또 다른 차별과 배제를 발견한다. 그는 레위인을 보호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신의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성폭행하도록 끌어내겠다고 말한다. 24절에서 보면 노인은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을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에서 놀라운 것은 “망령된 일” 즉, 성폭행을 행하면 안 되는 유일한 대상은 남성 레위인이다. 여기서 노인의 환대와 보호 대상은 오직 남성 레위인이며 여성들은 상황에 따라 보호할 수도 보호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경계선에 있는 존재이다. 즉,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안전한 그의 공간에서 끌어내어 환대를 거절하고 밖으로 내쫓을 수 있는 존재이다. 여기서 노인의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시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노인의 관점에서 보면 궁극적으로 남성 레위인만 환대를 받아야 할 사람이며 여성들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무리가 이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남성 레위인을 요구하자 노인의 말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단서를 얻은 레위인은 자신의 첩을 자신의 손으로 붙잡아 밖으로 끌어낸다. 자신을 환대한 노인의 딸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너무 염치가 없다고 생각했던지,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폭력과 죽음이 도사리는 밖으로 자신의 첩을 희생양으로 끌어낸 것이다. 아마 첩은 나가지 않겠다고 울며불며 발버둥 치며 힘껏 저항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남편이 그녀를 힘으로 제압해 강제로 내보냈다.

본문에서 ‘붙잡다’로 번역된 동사 ‘하자크’는 ‘강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단순히 ‘잡은 것’이 아니라, 강하게 꽉 잡아 강제적으로 그녀를 밖으로 끌어냈다는 것을 표현한다. 이렇게 남편은 첩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신이 살기 위해 자신이 보호해야 할 자신의 아내를 무뢰배에게 성폭행하라고 내준 것이다. 레위인은 첩을 안전한 아버지의 집에서 데리고 나와 폭력배의 손에 넘겼다.

끌려나간 첩은 밤새도록 성폭행을 당하다 새벽에 풀려나 동틀 때 노인의 집으로 간신히 오지만,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아침까지 엎어져 있다 죽음을 맞이한다(26절). 사사기 화자는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끔찍한 폭력에 시달려야 했는지를 “밤새도록” “새벽 미명에” “동틀 때” 등의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구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윗책, 345쪽) 그녀는 밖에서 밤새도록 폭력을 당하고 버려져 죽임 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집 앞에 왔지만 날이 밝기까지 집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 엎드려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무도 그녀가 돌아오는 것을 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위인의 첩은 철저히 배척당하고 버려졌던 것이다. 트리블은 첩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첩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 가운데 가장 비참한 인물이다. … 그녀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혼자였다. 다른 인물들이나 화자 누구도 그녀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재산, 대상물, 도구, 문학적 장치이다. 이름도 말도 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혹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해주고 통곡해 줄 친구조차 가지지 못했다. 그녀가 그들 사이를 오갈 때, 이스라엘 남성들은 그녀를 완전히 잊었다.(Trible, P., 《Texts of Terror. Literary-Feminist Readings of Biblical Narratives》 80-81쪽

레위인은 끝까지 자신의 첩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그녀를 열두 토막으로 잘라 이스라엘 전 지파에 보내며 전쟁을 소집한다(29절). 그는 끝까지 첩을 편안히 안장하여 애도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당한 모욕에 대해 복수할 수단으로만 여긴 것이다. 여기서 레위인은 폭력을 고발하기 위해 첩에게 더 큰 폭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첩을 철저히 비인간화하고 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두 차원의 차별을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외부인에 대한 차별이고 또 하나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다. 이 이중적 차별로 인해 다음과 같은 계급 구조가 생겨난다.

기브온 거민 남성 > 거류민 남자 노인 > 여행객 레위인 남성 > 거류민 노인의 딸 > 여행객 레위인의 첩

기브온 거민 남성이 힘에서 최상위층을 차지하고 거류민 노인과 레위인 남성이 그 뒤를 잇는다. 그리고 여성은 모든 종류의 남성보다 낮은 서열에 위치하며 여행객이자 여성인 레위인의 첩이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서열에 위치한다. 그리고 서열에서 가장 아래인 레위인의 첩이 희생당한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근본적인 차별은 남녀의 차별로, 이스라엘 사회가 남성 중심적이고 위계 중심적인 가부장 사회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원래 가부장 사회란 가부장인 남편과 아버지가 자신의 딸과 아내를 보호하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은 가부장 사회로 남편과 아버지에게 많은 권한을 주는 동시에 이들이 약자인 아내와 딸들을 보호할 책임도 함께 부여하였다. 그런데 본문에서 드러난 이스라엘의 모습은 아버지와 남편이 약자인 딸과 아내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면과 목숨을 위해서 이들을 희생시키는 비겁한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선 남성이란 존재 자체가 권력이다. 남성을 위해선 여성을 희생시켜도 괜찮다는 생각이 이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에게 드러난다.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한 희생양 혹은 제물로서 제 손으로 아내를 폭도들의 손에 넘겨주는 비겁한 남편과 그녀를 넘겨받아 제물을 잡듯이, 먹잇감을 먹어치우듯이 ‘폭력의 카니발’을 연 폭력적인 남성들만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을 사사기 화자는 자세히 묘사하며 매우 부정적으로 남성을 평가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이다. 사사기 화자는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고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여기서 왕이 없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인간들이 자신의 마음대로 산다는 의미로, 이렇게 사는 모습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이 아니라는 의미다.

여전히 한국교회는 여성을 온전한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고 교회와 남성을 위한 보조적인 존재로 여기며 차별한다. 여성의 말과 활동을 막는 일들이 비일비재다. 아직도 여성의 목사 안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여성 안수가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총대권은 없어 총회에서 여성의 의견이 반영될 기회가 없다. 또한 교회 안팎에서 “여성도 사람이다”라는 구호로 일어나는 페미니즘 운동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보았듯 여성과 남성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여성을 언제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악한 구조다. 하나님 백성이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우리의 차별과 적대가 얼마나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지를 사사기 화자는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 사회 안의 고아와 과부와 객을 선대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박유미
총신대에서 구약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총신대에서 강의했으며 현재는 안양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비블로스성경인문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최근 《내러티브로 읽는 사사기》를 냈으며, 전공인 역사서와 구약의 여성들과 여성과 관련된 본문들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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