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최종편집 : 2018.11.8 목 20:42
기사검색
   
> 뉴스 > 커버스토리
       
하나님의 ‘위드유’ 교회의 ‘위드유’
[336호 커버스토리]
[336호] 2018년 10월 25일 (목) 17:27:40 백소영 goscon@goscon.co.kr

문화적 기억, 여자가 ‘성적 도구’이던 시절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폭력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최근에서야 대두된 여자들의 저항과 공적 목소리가 ‘새로운’ 것이지. 헐리우드발 미투(MeToo)운동이 한국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유행’처럼 번진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더 이상 ‘가부장적 전제’로 작동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징후이다. 돌이켜 보면, 도대체 언제 여성이 온전한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나? 학자들이 말하는 가부장제의 기원이 동서양 할 것 없이 기원전 3천 년쯤부터라 하는데, 그럼 그 이전에 성(性)은 평등했을까?

한때 가모장제가 존재했던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가부장제 이전의 사회는 ‘모계제’(matrilineal)였을 뿐, 여자들이 수장으로 사회구성원들 위에 군림한 역사는 없었다. 전(前)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물려줄 가산도 변변치 않고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신분도 확립되기 전이니 제도적인 성 통제는 드물었을 것이고, 아빠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엄마는 분명히 알겠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가계는 엄마 라인을 타고 정리되었을 뿐이다. 물론 그 시절 여자는 적어도 집안 재산으로 여겨지거나 성적 도구로만 응시되는 ‘만행’은 저질러지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굳이 우리가 회귀하여야 할 아름답고 이상적인 사회였다고 확신하기에는,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 결국 우리가 기억하는 사회는 5천 년 동안의 가부장제 사회이고 그 사회에서 남자들은 여자를 출산의 도구, 욕정을 푸는 대상 정도로 여겨 왔다. 아주 오랜 동안 이것이 문화적 ‘당연’(taken-for-granted)이었다.

남자가 욕정의 동물이고 여자가 그 대상물이라고 여겨지는 가부장 사회에서 만약 ‘적법한’ 성관계 이외의 상황이 발생했다면, 전적으로 여자 책임이었다. 여자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주체’였던 적이 없었는데도, 자기 의지로 여자의 몸을 범한 남자보다 그걸 방어하지 못한 여자가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존재로 응시되다니, 어이없기는 하다. 우리나라 경우도 정숙하지 못한 여자에 대한 일반적 경멸의 의미를 담은 “화냥년”의 유래는, 남자들 사이의 권력 싸움에서 패배한 쪽의 여자들이란 이유로 중국에 끌려갔다가 제 힘으로 돌아온 사람들(“환향녀”)을 경멸하여 부르던 용어였다.

그녀들을 볼 때마다 자기들의 패배와 수치심이 더 드러났기 때문일까? 잘못한 일 하나 없이 최선을 다해 생존 귀환한 여인들은 남자들의 잘못을 ‘대신’ 다 짊어져야 했다. 하긴, 돌 맞아 죽을 짓을 한 현행범이라고 예수 앞에 끌려왔던 여자도 홀로 그 비난을 다 받았지. ‘상간녀’라는 말은 자고로 그 상대가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현장에서 잡았다면서 어찌 여자만 끌고 왔단 말인가. 그날 예수 앞에 그녀를 잡아온 사람들이나 구경꾼들 모두 이 ‘불합리함’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문화적 전제는 작동 방식이 그치고 난 뒤에도 그 관성이 오랜 법이어서, 가부장제가 끝난 오늘날까지도 성폭력이 발생하면 대부분 미처 방어하지 못한, 혹은 유혹의 대상으로 행동한 여자의 잘못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짙다. 너의 치마가 짧았겠지, 네가 웃음을 흘리며 여지를 주었겠지, 그도 아니면 ‘너무 늦은 밤에 혼자 돌아다님으로써 범죄 동기를 부여했겠지. 그러니 부모도 교사도 아들 단속보다는 딸 단속을 하는 방향으로 성범죄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끝난 가부장제, 양성평등의 시대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다. 일단 성인 남자들이 권력을 독점하던 가부장제가 끝났다. 신분제가 견고하던 시절에 주인의 횡포에 맞서는 노비의 말로가 자명한 일이듯이, 가부장제가 견고하던 시절에 성폭력을 당한 여자가 남자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했다. 허나 ‘법’이 통치한다는 근대 시민사회, 게다가 양성평등적인 인권 인식이나 제도가 확립된 이 시절에는 비로소 공적 목소리를 내 볼 만한 상황이 되었다. 여전히 쉬운 일은 아니나, 이제는 조용히 끌려가 죽임 당하거나 본보기로 공개적인 조리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이다. 증거와 증인, 혹은 정황증거만 있어도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법에 의해 성폭력은 처벌받고 제지당한다.

물론 아직까지도 전근대적(pre-modern) 관성이 조직 안에서 작동하고,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자들은 주로 그런 가부장제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니, 목소리를 내는 일에 용기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예로 말하자면 얀 후스와 마르틴 루터의 차이라고나 할까? 100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같은 소리를 했던 인물들인데, 전자는 화형을 당했고 후자는 종교개혁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결국 승세를 잡는 것은 내용의 옳음보다는 시대의 무르익음을 반영하는 여론인 듯하다. 그러니 어찌 보면 미투운동은 시대를 만나 힘을 얻은 셈이다. 100년 전이었으면 어림없었을 일일 테니까. 아니, 한 세대 전에만 해도 그랬다. 살면서 성추행 한 번 안 당해본 여자가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이 아저씨가 왜 이래요!” 목소리를 크게 내어 저항하는 것조차 힘들었던 것은 그 뒤에 벌어질 일들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동조와 지지보다는 위아래로 힐끗거리며 그런 취급을 당해 마땅한 ‘근거’를 찾는 시선이 더 많을 것을 알기에.

가부장제가 근현대(modern) 사회의 도래와 함께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학자들은 근현대 사회의 가부장제를 ‘온건한’ 혹은 ‘부드러운’ 가부장제라고 부른다. 여전히 가부장제적이나 전근대 사회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여성 통제는 그쳤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랑’의 이름으로 여전히 남성 주도적인 여성 응시와 행동은 존재해왔다. 데이트 폭력이나 데이트 강간이 범죄행위인 줄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가부장제의 종말은 근현대 사회의 작동 방식이 시작되면서 이미 예상되었어야 했다.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며 모든 개인이 자유와 권리를 공평히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순간, 그 “만인”에 여자도 포함되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이니까 말이다. ‘자연’스러웠다는 말은 아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여권운동을 위해 싸운 선배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이 근거로 내세운 ‘만인의 평등’은 시민계급 남자들이 만든 법이다. 자승자박인가? 남자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질 일이다. 더구나 근현대 사회의 후기 상태인 오늘날에는 내가 “탈성적(脫性的) 전문가 개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로 가득 찬 시대이다. 이제 남자인가 여자인가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사회에서 필요한 전문성을 가진 개인이라면 원칙상 직업 선택이나 생활 영역에서 여자라고 제한받는 시대는 끝났기 때문이다. 하여 미투운동은 이전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전주곡이다.

교회가 여전히 ‘전근대적’인 이유
그런데 문제는 교회이다. 세상은 시절에 따라 비록 늦더라도 천천히 변화된 환경에 맞추어 여자에 대한 응시와 태도를 바꾸어가고 있는데, 교회는 여전히 뒷걸음질이니 말이다. 근본 원인은 전근대적 여성 응시를 ‘신적 질서’라고 고착화해놓은 까닭이다. “너는 나의 라헬”이라니! 하나님의 계시와 시대적 배경의 차이조차 구별 못하는 문자적 성경 읽기와 적용은 남녀가 책임적 주체로서 평등하게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경건한 신자들을 ‘사회 부적응자’로 만들어버렸다. 공적 영역에서 ‘멀쩡하게’ N분의 1 몫을 담당하는 여자들이 교회나 가정에만 들어오면 급작스레 ‘순종’이라는 덕목과 함께 자기 판단을 멈춘 채 의존적 존재가 되어버린다. ‘순종’이라는 종교적 언어는 인간의 유한성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세여야 하지, 같은 인간 사이에서 사용될 덕목이 아니다. 더구나 성적 자기결정권을 갖는 성인 남녀 사이에서야 오죽할까. 그럼에도 권력형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요즘 시절에, 교회에서 이런 저항과 관계 개선이 어려워지는 까닭은 목회자와 신자 사이, 그리고 남녀 사이의 전근대성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성서를 전적으로 전근대적 산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최근 여러 글을 통해 ‘경(經)줄 찾기’를 소개한 바 있지만, 시대 문화를 초월하고 모두에게 보편적인 하나님의 계시는 후기 근대가 아니라 그 어느 시절이라도 신자라면 꼭 붙들어야 하는 진리의 말씀이다. 그러나 시대 문화적 한계를 반영하는 메시지를 아직도 붙잡고 있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한때 미국의 경건한 신자들이 성서 속 노예제 본문을 근거로 들어 흑인노예제도를 정당화했던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이를 ‘신적 질서’라고 우길 오늘날의 신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가장 오래된, 그러나 버려야 할 낡은 씨줄이 남녀의 위계를 정당화하는 본문이다. 그것이 존재론적 위계이든 기능적 위계이든 가부장제적 응시와 행동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 통치 질서가 아니다. 물론, 이를 넘어서게 하는 진리의 ‘경줄’은 성서 안에 있다.

   
▲ 위키미디어코먼스

‘페미니스트’ 예수의 대조 사회
‘교회’가 어떤 공동체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삶과 뜻을 우리도 따라 살겠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여자가 사람으로 응시되지 않던 시절을 살면서도, 당대의 문화적 전제를 초월하여 여자를 하나님의 시선으로 응시하신 분이 예수시다. 하여 여자를 제자 삼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주셨으며 증인으로 파송하셨다. 페미니즘이 “여자도 사람이라는 혁명적 사상”이라면, 예수야말로 페미니스트이시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를 선포하신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본문으로 자주 인용되는 이 구절은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한, 죄 사함의 은총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제 본문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자가 ‘지옥에 떨어지는 자’인지, 그러니까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는 사람인지를 이 본문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언급하신 ‘실족한 오른 눈’과 ‘실족한 오른 손’은 도대체 무슨 행동을 한 눈과 손일까? 맥락이 전하는 바는 분명하다. 여자는 성적 응시의 대상이 아니다. 남자가 대상화하여 바라보고 그녀의 의지에 반하여 만지는 행동을 하는 눈과 손을 가지고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니 너의 눈과 손은 거듭나야 한다. 여자는 사람이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를 바라볼 때는 언제나 그 안에 담기신 하나님의 영을, 그가 살아내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해야 한다. 나는 이 본문을 이렇게 풀이한다.

여자를 바라보는 부분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으니, 그럼 남자는 음욕을 품고 바라보고 만져도 되나요? 설마 이렇게 질문하는 분은 없으리라. 물론 요즘엔 비판적 고발의 차원에서 ‘미러링’으로 이런 시도들이 행해진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여자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남자에게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예수 시절은 물론이고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문화적 전제는 ‘남자만이 주체’였던 가부장제이다. 이 말씀을 듣는 이도 남자요 말하는 이도 남자인 세상, 하여 예수의 이 엄중한 선포는 남자들을 향하여 전달되었지만 그 의미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됨이 마땅하다. 일종의 ‘문화 번역’(cultural translation)이요 ‘맥락화’(contextualization)이다. 세상이 여자들을 비주체로 성적 도구로 응시하더라도, 그건 에덴 이후의 타락한 질서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의 통치 질서는 아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져 있다. 그 다스림은 먼저 스스로 주체로 선 자에게만 가능한 능력이다. 그리고 이 ‘다스림’은 하나님의 다스림 같은 통치이기에 결코 권력 다툼과 힘의 행사가 아니다. 살려내는 다스림이요 보살핌의 능력이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대로 살겠다고 시작한 공동체가 교회 아닌가. 세상이 변하고 어떤 제도를 선택하더라도, 그 세상과는 ‘대조성’을 가지며 ‘하나님 나라’로 살겠다고 약속한 공동체가 ‘거룩한 성도들의 집합’인 교회이다. 그런데 그 대조성을 교묘하게 적용하여 여성들을 비주체적으로 대상화하는 남성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있어 또 가슴을 치게 된다. 최근 한국에서도 번역서로 나와 그 만행이 세상에 알려진 존 요더(John H. Yoder)의 경우는 교회 공동체가 가지는 대조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수십 년 간 여자 제자들과 성도들을 농락했다. 그가 “야수의 송곳니”라고 칭한 것은 성적 욕정을 의미했다. 성도들 간에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가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수행한 것은, “야수의 송곳니”를 뽑은 상태로 진행되는 성도들 간의 친밀한 교제였다. 말만 들어서는 매우 ‘은혜롭게’ 들리나, 그가 친밀한 교제의 실험 대상으로 지목한 사람들이 예외 없이 젊은 여성이었다는 것과, 그 친밀함이 하나같이 성적 접촉이었다는 것은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혼란스럽고 수치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여성들이 “미투”를 선언할 수 없었던 것은, 요더가 가진 ‘신학적 권위’였다. 설마 그의 교회론이 틀릴 수 있을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저명한 신학자인데? 더구나 그는 ‘평화신학자’ 아닌가!

히브리의 ‘미투’와 하나님의 ‘위드유’
그럼에도 요더에게 성추행과 성폭력을 당했던 여자들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연대’(solidarity)의 힘이었다. ‘위드유’(WithYou) 말이다. “나도요” “저도 당했어요”라고 “미투”를 외치는 성폭력 생존자들 곁에서 “우리가 함께할게요”라며 연대한 개인들과 조직이 있었기에 요더의 성폭력은 제지되었을 뿐 아니라, 치리되고 공동체적 치유의 과정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게 교회의 존재 이유이다. 편드는 이 하나 없이 여기저기를 떠돌며 생계 노동을 하던 히브리인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친히 “내가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 하고 선포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람 취급 못 받는 당신의 피조물 곁에서 힘을 보태신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을 신앙하는 신자라면서, 성폭력 생존자들의 하늘까지 닿는 그 피울음을 잠재우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 교회’? ‘우리 목사님’? 글쎄, 무너지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교회도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도 아니다. 무너진 여리고성 안으로 들어간 이스라엘 사람들을 두고 여호수아는 엄중하게 경고했다. 다시 성벽을 세우고 성문을 만들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리라고.(수 6: 26) 하나님의 사람들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은 그렇게, 처음부터 무너질 건물이 아니라 서로를 세우라고 선택된 ‘카할’(회중)이었다. 사도 바울도 “서로를 건설하는” 원리를 교회의 핵심적 가치라고 말한 바 있다.(살전 5: 11) 서로를 건설하는 방식은 나만 사는 것일 수도 너만 사는 것일 수도 없다. 다수만 사는 공리주의의 원칙일 수도, 힘 있는 자가 사는 전체주의적 원칙일 수도 없다. 한 마리 양을 잃고도 괜찮다고 자위하는 교회라면 ‘그쳐도’ 가하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마저도 기어이 찾아서 우리 공동체의 일원으로 세우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누구 편에 설 것인가? 가해자의 편이냐 피해자(생존자)의 편이냐를 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편에 설 것을, 교회로 살 것을 말하는 것이다. 소유만이 아니라 권위도 나누며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 그것이 교회의 이름일진대, 한 사람의 피울음이 묻히는 곳은 아무리 아름다운 찬송과 귀한 헌금으로 넘쳐나도 결코 교회일 수 없다. 교회는 효율성의 공간도, 이윤극대화의 공간도 아니지 않나. 지금 ‘은혜’가 안 되니까, 혹은 공동체를 위해서, 누군가 용감하게 온 존재로 일어나 외치는 ‘미투’를 막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다. 온 교회가 그러고 있다면 그 교회 역시 하나님의 편이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히브리 사람들의 신”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영토를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 법적 보호망으로부터 멀었던 사람들, 보호받을 울타리가 없었던 사람들, 그래서 사람으로 응시 받지도 대접받지도 못했던 그들의 신이라고 선포하신 하나님이시다. 이집트에 남을 것인가 이집트적 질서를 떠날 것인가, 그 선택으로 시작한 백성이 ‘카할’이고 교회이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위드유’의 하나님과 함께여야 한다.

 

백소영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와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을 공부했다. 이화인문과학원 연구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강남대학교 기독교학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회 및 시민단체에서도 강연하며 기독교 세계관과 윤리의식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 《엄마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교회를 교회되게》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 《드라마 속 윤, 리》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등이 있다.

     관련기사
· “교회 성폭력은 ‘개인의 일탈’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 특수성 아닌 ‘강간 문화’입니다
· 요더의 불행한 호출은 왜 되풀이되는가· 미투운동은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 기브아 거민의 성폭행 사건 속 환대와 차별
백소영의 다른기사 보기  
ⓒ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복음과상황
복음과상황 기사제보 광고문의 제휴안내 오시는길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 506-10 산성빌딩 104호 우)120-836 | 전화 : 02-744-3010 | 팩스 : 02-744-3013
발행인 : 김병년 | 이사장 : 박종운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병년
Copyright 2008 복음과상황.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con@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