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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세계의 고통 앞에서 천상의 신비를 논하다
[351호 역사에 길을 묻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351호] 2020년 01월 21일 (화) 16:01:12 최종원 goscon@goscon.co.kr

 

1. 들어가며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응하고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모였던 트렌트 공의회(1545-1563)가 끝난 지 300년 만에 가톨릭 교회는 다시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서구 근대세계의 출현 후 열린 첫 공의회인 제1차 바티칸 공의회입니다. 그리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고 채 100년이 되기 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립니다. 

로마 바티칸 궁전에서 개최된 이 두 공의회는 변화하는 근대세계의 도전에 가톨릭 교회가 전혀 다른 대응 방식을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공의회를 서로 대비해가며 고찰한다면, 교회가 사회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의미 있게 성찰할 수 있습니다. 넓게 말해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1789년 시작되어 1848년의 ‘2월 혁명’으로 긴 여정의 막을 내린)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근대 체제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반응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양차대전으로 세기적 혼란에 처한 세계에 가톨릭 교회가 응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 가톨릭 지배 체제가 무너지고 근대 국민국가가 발전하면서, 종교는 각 국민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적극 활용되었습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로 ‘30년 전쟁’(1618-1648)이 끝난 후, 유럽의 정치 지형도가 완성되었습니다. 이 정치 지형도는 각 국가가 신봉하는 종교로 색깔이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가톨릭을 신봉하는 지역이 다수를 차지하긴 했으나 가톨릭은 이전의 가톨릭이 아니었습니다. 근대 국민국가들의 세력 다툼 속에 교황령을 보유하고 있던 교황은 정치적인 차원에서만 보자면 군소국가의 수장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급변한 유럽의 정치 지형도에서 교황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프랑스 혁명을 낳았던 계몽주의 세계관의 거센 도전은 근대세계 속 종교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했습니다. ‘가톨릭의 장녀’라고 불리는 프랑스는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로마 이상으로 가톨릭 교회의 상징 역할을 해 왔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제1계급인 가톨릭 성직자들에 대한 시민사회의 도전이었습니다. 교황은 예수회를 통해 혁명의 위기를 마주한 프랑스 구체제(앙시앙 레짐‧ancien régime)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습니다. 

혁명은 일어났고 교회는 무너졌습니다. 유럽의 대표적 대형 교회 건축물 중의 하나였던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은 불타고 그 잔해는 도시 재건에 활용되었습니다.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1808)은 나폴레옹 황제가 직접 아내 조세핀에게 황후의 관을 씌우는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최초 스케치에는 나폴레옹이 오른손으로 관을 들어 자신이 직접 쓰고 그 뒤에 교황 피우스 7세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앉아 있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중세에는 교황이 대관식을 하지 않으면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세워지지 못했는데, 실제로 교황과 불화하여 대관식을 하지 못해 독일 왕으로만 불린 통치자들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에 그려진 교황의 모습을 보자면, 이제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변화로 가톨릭 교회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한 듯합니다. 
 

2. 근대세계의 위기에 직면한 가톨릭 교회
근대세계 속에서 가톨릭 교회가 맞닥뜨린 시험은 두 가지 층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유럽의 정치 제도로서 가톨릭 교회가 처한 위기이며, 다른 하나는 근대세계 속에서 종교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입니다. 

1) 가톨릭 교회, 땅을 잃어버리다 
16세기 종교개혁도 그러했지만, 교황제가 처한 위기는 단순히 교회의 도덕적 윤리적 결함에서 기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변화하는 유럽의 정치 지형에서 정치 제도로서 권력 유지에 실패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교황의 정치적 영향력이 줄어들자, 이는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 축소로 이어졌습니다. 프랑스 혁명 전후 교황청이 겪은 변화는 중세 말의 위기와는 근원적으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교황 피우스 6세(1775-1799 재위)는 혁명 정부에 반대하다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혀 죽을 때까지 프랑스 남부 발랑스에서 감금 생활을 했습니다.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 참여를 위해 프랑스에 갔던 후임 교황 피우스 7세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이합니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교황령을 프랑스에 합병해 버렸고 이에 항의한 교황 역시 나폴레옹 군에 납치, 감금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주재한 교황 피우스 9세. (이미지: 위키미디어 코먼스)

교황이 세속 군주로 통치하고 있던 교황령은 이탈리아 민족 통일과도 밀접하게 연결된 문제였습니다. 이탈리아는 중세 이래 통일 국가를 유지하지 못하고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었습니다. 1848년부터 시작된 이탈리아 통일전쟁으로 교황령마저 1870년 이탈리아에 의해 무력 점령당하고,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1870년 교황령 상실 이후 교황청과 이탈리아 사이는 불편한 갈등 관계가 지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29년 이탈리아 통치자 베니토 무솔리니와 교황 피우스 11세 사이에 맺은 ‘라테란 조약’을 통해 현재의 바티칸 시국이 독립국가로 인정되었습니다. 이로써 교황청은 과거에 보유했던 교황령을 완전하게 포기하고 0.44㎢의 땅에 인구 800명 남짓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편, 교황령을 상실했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교황과 가톨릭 교회가 진정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점검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존재 의미는 땅을 차지하고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 땅의 경계를 넘어서는 가치를 추구할 때 나온다는 사실 말입니다. 뒤집어 보자면 교황령을 보유하는 것 자체가 교황에게는 정치적 도덕적 딜레마를 끊임없이 유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가톨릭 교회는 이 땅의 논리, 정치의 논리를 넘어선 가치를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것입니다. 

2) 대중의 고통 앞에서 종교의 존재 의미
땅을 둘러싼 정치적인 문제 외에 가톨릭 교회가 근대세계에서 마주한 문제는 훨씬 복잡했습니다. 아마 그 출발은 신비와 초월을 다루는 종교가 근대의 계몽주의와 이성적 사고로부터 받은 도전 때문일 것입니다. 그 충격이 엄청난 것이긴 했지만, 그저 종교가 이성과 합리를 넘어서는 가치를 지향했기 때문에 교회의 존립에 위기가 닥친 것은 아닙니다. 

변하는 시대, 달라진 대중의 기대와 요구 속에서 교회가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느냐가 교회가 안은 또 다른 고민의 핵심이었을 것입니다. 이 글이 가톨릭 교회 공의회를 다루므로 가톨릭의 대응만을 살펴보겠지만, 실상 이는 당대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함께 떠안은 고민이었습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1869년에 개최되었지만 교황청은 이미 1850년대부터 교황이 신조를 선포하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시대를 맞는 가톨릭의 지향점을 드러냈습니다. 이에 따라 공의회는 교황청이 주도하는 변화를 추인하는 방식으로 열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대의 종교가 풀어 갈 핵심 고민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유사한 시기 유럽이 경험한 상징적인 변화에서 출발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인류사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 같은, 아니 그 이상의 상징성을 가진 해가 있습니다. 바로 1848년입니다. 그 해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출간되었고, 전 유럽을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뜨린 ‘2월 혁명’(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며 국왕 루이 필리프의 왕정에 반대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노동자 중심의 혁명으로 나폴레옹 1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에 오르는 제2공화정이 시작됨-편집자)이 일어났습니다. 또 다른 논쟁적인 해는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한 1859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교계의 거센 반발과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음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다윈의 저술은 자연주의와 이성주의에 기반을 둔 당대 과학 발전이 낳은 결과물이었습니다.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으로 무한한 진보를 약속한 근대세계의 출현 앞에서 과연 종교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한편으로, 인류가 진보를 향한 걸음을 내디딘 근대세계에서 수혜자는 대중이 아니었습니다. 마르크스는 1844년 출간한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오늘도 여전히 뼈아프게 들리는 지적을 합니다. 

종교적 고난은 실재하는 고난의 표현인 동시에 그 실재하는 고난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종교는 압제 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며, 냉혹한 세계의 심장이며, 영혼 없는 처지에 놓인 자들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사람들에게서 환각적인 행복을 약속하는 종교를 폐지하는 것은 실제 행복을 위한 요구사항이다.

이 문맥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그 방식은 다양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문장은 근대 세계 속 대중들의 상황과 당대 종교가 처한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 대중들이 그 혜택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심한 빈부격차가 생겨났습니다. 장 발장이나 올리버 트위스트의 역경에 투영된 것은 산업혁명기 근대의 뒷모습이었습니다. 기존의 체제를 허무는 혁명이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모순이 켜켜이 쌓여가던 시대였던 것입니다. 

이 시기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했을까요? 그리고 교회는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마르크스가 보기에, 종교는 압제받는 피조물의 한숨을 받아주고 심장 없는 냉혹한 세계의 따뜻한 심장이 되어주며 존재의미를 상실한 채 영혼 없이 떠도는 이들의 영혼이 되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저 현실의 고통을 벗어날 감각적이고 환각적인 행복만을 약속하는 아편, 즉 진통제 역할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당대 대중들의 삶의 자리로 들어가 그들이 겪는 고난을 함께 겪고, 그 고난에 저항하는 자리에 함께 연대하는 저항 종교로서 종교적 고난을 실천하는 모습을 지향하지 못한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현실의 위기 앞에서 취한 대응 방식은 종교가 가진 신비 뒤로 숨는 것이었습니다. 

3) 가톨릭 교회, 신비 뒤로 숨다
더 이상 잃어버릴 땅이 없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자유롭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가톨릭 교회에 대한 도덕적인 기대가 커질 수 있었고, 교회의 역할이 중요하게 대두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가 땅에서 상실한 존재감을 회복하기 위해 취한 정책은 ‘초월과 신비’라는 종교적 정체성 강화였습니다. 

   
▲ 로마 스페인 광장에 세워진 '마리아 무염시태' 기념비. (사진: CC BY 2.0 Flickr/trialsanderrors)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교황 피우스 9세가 행한 일들은 이러한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1854년 12월 그는 그리스도를 잉태한 공로를 고려하여 성모 마리아가 특별한 은총으로 원죄 없이 태어났다는 ‘마리아 무염시태설(無染始胎說)’을 신앙 신조로 선포합니다. 물론 마리아가 무흠하게 잉태되었다는 신조를 교황 피우스 9세가 새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는 종교 교리의 신뢰성에 대한 도전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교회의 신비를 강조함으로써 대응하고자 했는데, 이 교리를 반포하기 전에 대다수 주교들은 교리 자체에는 찬성하면서도 반포 시기가 부적절하다는 우려를 표명합니다. 그러나 결국 교황은 이 교리를 성대하게 선포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현실의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의 한 출발점일 뿐이었습니다. 

1864년 교황은 ‘실라부스’(Syllabus Errorum)라는 목록을 작성하여, 내용상 오류나 이단적 사상 80가지를 지정합니다. 목록에는 범신론, 자연주의, 이성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이 망라되어 있었습니다. 시대의 변화 앞에서 교회는 반동적인 태도를 명확히 한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는 이 목록이 선포될 경우 가져올 후폭풍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교황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걸음은 ‘교황 무류설’을 교리로 채택하는 것이었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황을 중심으로 교회의 질서가 이어진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바였습니다. 그러나 교황좌에서 교황이 성서나 전통에 부합하게 선포한 교리와 도덕에 관한 결정은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신조는 내부 논리와는 별개로 당대 유럽사에서 상실된 권위를 회복하려는 현실적인 필요와 깊이 결부된 것이었습니다. 

교황 무류설에 대한 가톨릭 내부의 반발은 더욱 거셌습니다. 이 역시 시기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논란을 낳을 여지가 크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의회가 소집되었을 때에도 이 안건을 다루지 말아야 한다는 청원이 올라갔습니다. 근대성에 맞선 교회의 대응 방식, 또는 근대 대중들의 요구를 향한 교회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일련의 조치들은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한 가톨릭의 상황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피우스 9세가 집념을 갖고 개최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결과적으로 이 우려를 만천하에 공표한 셈이 되었습니다. 

3. 시대정신에 무감각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869년 12월 8일 개최된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설에 관한 안건은 보류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의회 개최 직후 일련의 지지자들이 이 안건을 다룰 것을 요청하는 서명운동을 벌여 결국 교황 무류설을 검토하는 별도의 위원회가 설치됩니다. 이듬해 10월 급작스럽게 정회될 때까지 공의회에서 실제 논의하고 결정한 사안은 교황 무류설에 관한 것이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140회에 걸친 지루한 논쟁 속에 중간 표결에서 451명이 찬성했고, 88명이 반대했으며, 62명이 조건부로 찬성했습니다. 최종 결과는 찬성 533표, 반대 2표로 압도적인 찬성으로 확정되어, 1870년 7월 <그리스도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Pastor aesternus)이라는 이름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이 논의 과정에서 줄곧 제기된 반대 의견 역시 이 교리의 반포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황 무류설은 이미 피우스 9세가 공의회 개최 이전부터 집착하던 교리였습니다. 교황 무류설의 교리화에 집착한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으나, 도전받는 교회 권위의 위기에 맞서 이 땅의 논리와 이성을 넘어서는 ‘신적 기관으로서의 가톨릭 교회’를 선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로마의 주교가 ‘교좌로부터(ex cathedra) 말한다면’, 즉, 로마의 주교가 자신이 지닌 최고의 사도적 권한으로 전체 교회를 다스리고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전체 교회를 위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가르침을 최종 결정한다면, 이 결정은 성 베드로 위에 확약된 신적 조력으로 말미암아 무류성을 가진다(infallibilitate). 이는 구세주 스스로께서 자신이 세우신 교회가 신앙과 도덕을 가르침에 있어서 어떠한 그르침이 있음을 관망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 주교의 이런 결정들은 교회의 아무런 동의를 필요치 않는 ‘그 자체로서’(ex sese) 불변한다(irreformabiles esse).

이 논의에는 아쉽게도 시대 속에서 교회의 존재 목적과 지향점이 무엇인지에 관한 고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황 무류설 교리에 반대할 경우 파문할 것이라는 위협만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협은 실제가 되었습니다. 최종 표결 이전에 공의회장을 떠나 실제로 반대표를 던지지는 않았지만 독일 가톨릭 교회는 교황 무류설 교리 선포에 전반적으로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공의회 이후에도 이 결정을 폐기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고, 그 결과 독일의 여러 대학교 신학부 교수들이 무류설 교리에 복종하지 않아 교회 분열을 야기했다는 이유로 파문되었습니다. 

이 교리 선포 이후인 1870년 10월 10일, 공의회가 갑자기 중단되었습니다. 보불전쟁(1870-1871)이 터져 공의회에 참가하던 대표단들이 귀국해야 했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가 로마 교황령을 점령해서 공의회가 지속되기는 어려웠습니다. 아이러니였지요. 하늘이 내려주는 오류 없는 권세를 교황이 가졌음을 선포했지만, 정작 땅을 내어주어야 했습니다. 

당대의 시대적 맥락에서 교황 무류설이 교회가 고민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숙제인지는 여전히 물음표를 남깁니다. 마리아 무염시태설이 나올 때에도, 교황 무류설에 대한 논의가 나올 때에도 신중하게 제기되는 질문들이 있었지요. 바로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가톨릭 교회는 그 시기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황이 마리아 무염시태설을 선포하고, 각종 사조에 대한 오류 목록을 작성하고, 교황좌의 결정은 오류가 없다는 신학을 만드는 시기, 유럽은 혁명과 진화론 같은 혁신적인 변화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었습니다. 보불전쟁이 끝난 1871년부터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는 정치·사회·경제·문화의 번성기를 보냅니다. 유럽에서 ‘아름다운 시절’로 회고되는 이 시기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로서는 유럽 제국주의의 확장으로 큰 고통을 경험하는 저주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4. 결론: 고민도, 응답도 못한 공의회  
거칠게 말하자면,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시대가 원하는 고민과 응답을 하지 못한 공의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두 개의 인용문을 짧게 옮겨보겠습니다. 

종교적 고난은 실재하는 고난의 표현인 동시에 그 실재하는 고난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종교는 압제 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며, 냉혹한 세계의 심장이며, 영혼 없는 처지에 놓인 자들의 영혼이다. 

로마의 주교가 자신이 지닌 최고의 사도적 권한으로 … 전체 교회를 위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가르침을 최종 결정한다면, 이 결정은 성 베드로 위에 확약된 신적 조력으로 말미암아 무류성을 가진다.

위 두 인용문 중에 과연 어느 쪽이 시대적 고민을 반영하는 것일까요?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300여 년 동안 유럽과 전 세계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대처는 이 거대한 변화에 거의 무감각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결정은 마치 가톨릭 교회가 절정을 누리던 중세의 어느 시점에 선포된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교회가 시대 속에서 고난받는 자들과 함께하며, 함께 연대하는 저항 공동체가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는 천상의 신비 뒤로 숨어 세속에 무관심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현세가 아닌 추상의 세계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당시 가톨릭 교회의 행보는 현재의 고통을 잊게 해줄 환각제 역할에 만족하겠다는 모습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당대의 사람들과 함께하며 천상의 신비를 이 땅에서 구현하는 저항의 종교가 되었어야 할 가톨릭 교회는 이 땅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 종교 속에 대중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가톨릭 교회는 시민 종교로 뿌리내리지 못했습니다. 시민 종교가 되지 못했을 때 그들은 전체주의에 가장 충실하게 부역하는 정치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다소 과하게 보이는 비판을 가한 이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 모든 것을 뒤집는 극적인 전환을 이끌어내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교회가 천상에서 내려와 이 땅의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보여줍니다. 

탈근대를 살아가는 오늘날도 과학의 발전에 따라 교리적인 의문과 과학과의 정합성 문제가 수없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의 존재 의미를 규정하는지는 물음표입니다. 여전히 신의 형상을 지닌 피조물이 압제 받고, 영혼 없는 처지에 놓인 자들이 실재하는 냉혹한 현실에서 교회는 그들의 한숨을 받아낼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저항하며 고난받는 저항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천상에 앉아 신비를 얘기하는 것은 종교를 환각제로 전락시키는 일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돌파구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때의 가톨릭 교회를 반면교사로 삼아 이 땅의 고난받는 이들 편에 한 걸음 다가가는 데서 비로소 열리지 않을까 합니다. 

 

■ 연재 순서
1. 왜 지금 ‘공의회’인가? : 사회사 관점으로 교회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2. 동서교회 분열의 서막인가, 확장인가 :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 위로부터 이뤄지는 교회 개혁의 전형 : 제1, 2차 라테란 공의회
4. 권력의 정점을 향하는 교회, 그 빛과 그림자 : 제3차 라테란 공의회
5. 가톨릭 교회, 삶과 죽음의 지배를 완성하다 : 제4차 라테란 공의회
6.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 제 1, 2차 리용 공의회
7. 교회여, 낮은 청빈의 자리에 설 수 있는가? : 비엔나 공의회 
8. 교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 콘스탄츠 공의회
9. 실패로 끝난 교회의 근대 체제 실험 :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
10. 교회가 사람을 못 바꾸면, 사람이 교회를 바꿔야 한다 : 제5차 라테란 공의회
11. ‘새로운 종교’를 만들다 : 트렌트 공의회
12. 근대세계의 고통 앞에서 천상의 신비를 논하다 :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왜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했을까?》 등이 있다. 

 

     관련기사
· 교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실패로 끝난 교회의 근대 체제 실험
· 교회가 사람을 못 바꾸면, 사람이 교회를 바꿔야 한다· '새로운 종교'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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