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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실패, 메시아의 시작
[353호 제국과 하나님 나라]
[353호] 2020년 03월 19일 (목) 11:33:16 한수현 goscon@goscon.co.kr

 

법을 버리지 않은 바울 
지난 글에서 바울은 결국 법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이후 발터 벤야민의 법과 폭력에 대한 연구에서 재발견되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법, 유대교, 법체계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가? 이것은 바울의 메시아 이해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이다. 

바울이 율법을 버렸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를 율법폐기론자,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의 창시자로 여겼다. 바울을 율법폐기론자로 생각하는 이가 자칭 바울의 제자 중에 있었는데, 법의 불능을 끝까지 밀어붙인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마르시온. 최초로 신약성서라는 책을 구상한 사람이다. 마르시온은 누가복음을 중심으로 다른 복음서들을 기워 붙이고 거기에 바울의 서신들을 묶어 나름의 경전을 만들었다. 최초로 다른 여러 초기 기독교 자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료들을 스스로 선별한 것이다. 신약성서의 탄생에 그가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의 영향으로 너도나도 신약성서의 목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결국 신약성서 목록을 확정한 세력이 초기 기독교의 정통이 되었다. 현재 기독교의 신약성서 목록은 아타나시우스가 적은 목록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마르시온은 바울 서신이야말로 기독교를 세울 유일무이한 문서임을 확고히 하기 원했다. 그 첫 번째 과업으로 마르시온은 유대 전통으로부터 이탈하고자 했고, 이것이 바울의 진정한 의도라고 생각했다. 마르시온이 보기에 바울은 당시 베드로와 요한이 이끄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들이 역사적 예수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시온은 달랐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분노의 신이자 심판의 신이므로 사랑이신 예수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르시온을 따르는 자들이 당시 기독교 인구의 3분의 2에 달했다는 말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마르시온의 교세는 정통 기독교라 불릴 만큼 대단했다. 그만큼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르시온의 생각대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율법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지 못한 것일까? 속으로는 율법을 폐기해야 한다고 여기면서 겉으로는 아닌 체한 것일까? 그래서 로마서에 율법으로는 정의와 구원이 불가능하지만, 율법도 선한 것이고 좋은 점이 있다고 애써 주장한 것일까? 이 난제는 바울 학자들 사이에서도 풀기 어려운 유명한 주제에 속한다. 오죽하면 헤이키 라이제넨(Heikki Risnen) 같은 학자는 바울이 율법에 대해 전혀 일관되지 않은 서술을 반복한다고 두 손을 들어버릴 정도다. 그러나 필자는 로마서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핵심이 이 난제 속에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로마서의 집필 목적에서부터 이를 찬찬히 풀어보자. 
 

바울의 전략, 로마서 
로마에 보낼 편지를 쓸 당시, 바울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오랜 노력으로 소아시아 주요 도시들에 적게나마 여러 메시아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고, 그들은 바울이 전한 메시아 예수의 정신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여러 난제들이 쌓여 있었다. 로마제국과의 정치적 관계는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로마에 의해 죽은 메시아 예수를 구주로 모시는 사람들의 삶은 제국과 계속 충돌했다. 바울만이 아니라 바울이 세운 교회들에 빈번히 순교의 위기가 닥쳐왔다. 게다가 예루살렘 교회와의 관계도 악화되어갔다. 

유대 전통에 대한 바울의 공격은 종종 율법도 규율도 없는 무질서한 공동체를 만들려 한다는 오해를 받았다. 많은 사람이 바울의 공동체는 전통과 할례를 반대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바울 공동체의 복음과 실천보다는 커지는 영향력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늘어갔다. 이대로라면 바울과 바울의 공동체는 서서히 고립될 것이다. 고립된 공동체는 고립 자체를 거룩으로 착각하고 비판 의식을 상실한다. 많은 고립된 공동체가 자신들을 신격화하고 타인들을 정죄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특히 이단 종파로 몰리는 경우 더욱 그러하다.) 필자는 로마서가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바울의 두 가지 전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바울은 로마 교회의 지지와 후원을 받고자 했다. 당시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선교지로 스페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스페인 선교는 당시 소아시아와 이탈리아에 머물러 있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는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다. 또한 새로운 지역에 심길 공동체는 다가올 시대에 메시아 전통을 유지할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당분간 돌아오지 못할, 또는 어떤 우환이 닥칠지 모르는 선교 여행을 훌쩍 떠나는 것은 바울에겐 망설여질 법한 일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의 후원을 통해 스페인 선교 여행을 다녀오리라 마음먹는다. 이때까지 이어져 온 예루살렘 교회와의 질긴 인연을 뒤로 하고, 제국의 수도에 세워진 교회들과 교류를 통해 미래를 준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로써 소아시아에 세워진 바울의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로마의 교회들과 관계를 맺으며 더욱 성장할 수 있으리라. 스페인 선교 여행 및 로마 교회와의 동반자적 관계에 대한 이러한 비전으로 바울의 시야는 한층 넓어졌을 터이다. 

게다가 로마 교회는 바울의 신학을 예루살렘보다는 좀 더 넓게 이해해줄 가능성이 있었다. 바울은 알지 못했지만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가 전한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교회 공동체를 확립한다. 바울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그 자리는 예수의 제자들과 직계 사도들의 자리였다. 복음서 전통과는 달리 바울의 편지 전승은 로마 교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초기 기독교에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복음서는 오로지 예수의 행적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바울 서신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바울에겐 로마 교회에 자신의 복음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그들의 지지를 끌어낼 필요가 있었다. 이 일이 가능해진다면 바울의 공동체는 고립된 전통에서 이후 초대 교회의 한 축을 담당한 사상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이었다. 즉, 바울은 로마 교회에 자신의 복음에 대한 내용을 전심을 다해 전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을 설득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바울의 다음 전략이 나온다. 

그의 두 번째 전략은 이미 이전 글에서 말했듯이 율법의 차원을 법체계 전체를 아우르는 논리로 확장하는 일이다. 바울은 메시아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 복음이 로마제국의 법과 폭력을 극복하고 유대의 율법을 넘어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법체계를 송두리째 부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 율법이 선한 것처럼 법과 양심의 목적 또한 선할 수 있으며, 선한 목표를 완성하는 것은 법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라고 말한다. 

로마의 형벌인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는 제국의 폭력으로 정의를 세우는 것이 불가능함을 증명했다. 유대의 관점으로 볼 때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 다윗의 왕국을 세울 메시아가 아니다. 결국 유대의 방법도 제국의 방법도 한계에 달했다. 메시아 예수는 둘을 짓밟고 새로운 법이나 제국을 세우지 않는다. 그렇다면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사람들이 지키도록 하는 게 아니라면, 예수가 정의를 세우는 구체적 방법은 무엇인가? 이제 바울이 말하는 예수의 ‘새로운 정의 세우기’ 프로젝트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신의 폭력 vs. 신화적 폭력 
신의 폭력은 모든 측면에서 신화적 폭력의 반대를 나타낸다. 신화적 폭력이 법을 정립하고 경계들을 설정한다면, 신의 폭력은 법을 파괴하고 경계들을 무너뜨린다. 전자가 죄를 짓게 만드는 동시에 속죄한다면, 후자는 면죄(무효화)한다. 전자가 위협하고 피 흘리게 만든다면, 후자는 내려치고 피 흘리지 않고 목숨을 앗아간다. (《법의 힘》, 문학과지성사, 164쪽)

   
 

지난 글에서 율법의 폭력, 법 정립의 폭력을 신화적 폭력이라고 했다. 벤야민은 이에 대립하는 신의 폭력 또는 신적 폭력을 제시한다. 수수께끼 같은 벤야민의 표현을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바울이 말하는 (율)법과 메시아 예수를 생각하면 해석의 가능성이 열린다. (율)법은 죄를 지정하고 그 대가를 치르게 함으로써 속죄해준다. 이러한 활동에 나타나는 법의 폭력은 죄인을 분류·차별하고 법의 심판을 내림으로써 질서를 유지한다. 그러나 바울의 메시아 예수는 부활을 통해 (율)법의 경계와 성립 자체를 파괴함으로써 면죄하고 법의 효력을 해체한다. 

벤야민은 구약성서 한 장면을 신의 폭력에 대한 예시로 든다. 민수기 16장에는 레위 자손인 고라를 필두로 다단과 아비람, 그리고 온이 250명의 대표자들을 이끌고 하나님이 세운 모세를 독재자로 비판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결국 모세와 아론, 그리고 고라는 각자 향로를 들고 누가 하나님이 택하신 자인지 선택받기로 한다. 이때 분노한 여호와가 온 회중을 없애버리려 하자(21절) 모세와 아론이 간청했고, 여호와는 모든 회중 대신 고라와 그를 따르던 모든 자들을 땅의 입을 벌려 삼켜버렸다. 결국, 이들은 법의 폭력이 아니라 신의 폭력으로 사라졌으며 그를 통해 이스라엘은 면죄받았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때부터 이스라엘을 율법 공동체가 아닌 신이 거하는 공동체로 보아야 한다. 신이 법을 넘어 면죄했다면 여호와가 정한 지도자 모세를 통해 신과 함께하는 공동체가 된 것이다. 이 과정은 법에 의한 절차가 아니라 신의 방법으로 법 바깥에서 이루어졌다. 민수기의 예에서 벤야민은 메시아 예수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을 염두에 둔다면, 신화적 폭력(율법) 외부에서 일어난 신적 폭력(예수의 죽음)은 율법이 주는 속죄가 아니라 세상의 죄에 대한 면죄로서 율법의 효력을 파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법이 실패할 때 법을 넘어선 정의가 이뤄진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율)법을 파괴하고 정지시키지만 새로운 법을 세우지는 않는다. 이것이 신의 폭력을 특징짓는다. 법을 세우는 폭력이 아니라 법 바깥에서 살아가는 삶을 창조한다. 바울은 이를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며 구약과 신약을 화해시킨다. 이스라엘 이야기, 유대의 실패가 바로 메시아 예수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이다. 율법이 있기에 죄를 알았고 스스로의 한계를 알았다. 이제 그 율법의 완성이 메시아 예수에게서 온다는 것을 깨달을 때, 율법은 적이 아니라 완성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 만약 바울이 구약과 신약을 지금과 같이 하나로 녹여낼 수 있는 복음을 말하지 않았다면 제국의 지배하에서 예수에게 매인 자로 살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의 긴장,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의 책임감이 제국 한가운데에 메시아 공동체를 세우게 했고 복음의 내용을 더욱 확장시켰다. 

당시 지식 사회를 이끌던 플라톤적 사유는 현실을 이데아의 그림자로 이해했다. 이는 이상적 국가를 세우기 원했던 플라톤의 정치철학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제국의 폭력과 시스템이 다스리는 시대에 플라톤의 사유는 너무도 쉽게 내세적 신앙으로 변모했다. 소위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현실 세계와 육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이데아라는 피안을 찾아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금욕을 추구했다. 그들에게 물질 세계는 신의 속성이 들어올 수 없는 악의 세계였다. 그러나 바울에게 예수는 그 악한 물질을 입고 세상에 온 신이다. 구약이 신약으로 이루어지듯, 인간계의 죄는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에 의해 신의 세계로 변화될 것이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롬 8:19-22, 이하 새번역)

흔히 천국을 말할 때, 이 땅의 시간이 끝나고 현실 역사의 외부로부터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또한 계시록에서는 문자적인 묘사로 신의 도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오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계시록은 용이나 뿔 달린 짐승들이 가득 등장하는 은유적 서술임을 잊지 말자.) 순수하게 외부로부터 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은, 달리 말해 이 세상에는 아무런 미래도, 희망도 없음을 뜻한다. 바울에게 하나님 나라는 역사 바깥에서 오는 무엇이 아니다. 그랬다면 메시아 예수가 친히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법으로 대표되는 이 세계를 메시아는 포기하지 않는다. 법 밖에서 법을 구원하고 완성함으로써 법의 목적을 이루는 것, 그것이 메시아의 사명이다. 이 어려운 논의를 바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으로 설명한다.(롬 9-11장) 

바울은 유대의 실패가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율)법과 메시아의 관계를 유대인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활용한다. 즉, 법의 실패가 메시아의 시작이 되었다는 이해의 적용이다. 법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라 메시아가 도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유대인의 실패가 이방인과 모든 세계를 향한 구원의 시작임을 뜻한다. 나의 구원이 다른 이의 실패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인과의 연결 고리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끊을 수 없는 인연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가리킨다. 결국 유대인을 포함한 만물의 구원이 모세 공동체에서 이방 공동체로 옮겨진 것이다. 

법의 폭력은 정의와 악, 구원과 심판을 구별한다. 그러나 신적 폭력은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무엇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성도에게 순차적인 사건이 아니라 동시적 사건이 된다. 그렇기에 바울의 눈에는 구별과 하나됨이 함께 존재한다. 이러한 변증법적 동시 순환이 일어나는 때가 바로 메시아적 시간이다. 법의 실패와 법 밖의 정의가 공존한다. 법만을 붙잡고 법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구원의 동시성이 열리지 않는다. 역으로, 실패를 통한 구원의 동시성을 이해하기 위해 법이 필요한 것이었다. 이것이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이 이루어지는 순간일 것이다. 
 

메시아적 정치: 순종 
이런 바울의 사유 체계는 그의 공동체적 윤리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법을 넘어선 자가 믿음이 강한 자이고 아직도 법을 신앙하는 자가 믿음이 약한 자라면, 믿음의 강함은 이미 법의 실패를 전제한다. 믿음이 약한 자가 있기에 강한 자도 존재한다. 바로 율법적 신앙과 자율적 신앙이 공존하는 순간이 법의 실패와 메시아적 구원이 호응하는 시간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이다. 

만약 여기서 율법적 신앙을 잘라내 버린다면 방종과 교만의 공동체가 남을 것이다. 이는 바울이 지적하는 인간의 한계라면 한계일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이 약한 자를 받아들여야 한다. 메시아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자율적 정신과 율법적 행위가 어우러질 때, 메시아 정신과 율법적 내용이 공존할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지혜가 생겨난다.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돕는 것은 바울이 말하는 공동체 교훈의 핵심이다. 이 핵심 윤리는 바울이 주장하는 자율적 신앙(강함)이 율법적 신앙(약함)에 순종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믿음이 약한 자를 위해 양보한다는 것은 내용적으로 모순이지만, 법 밖의 정의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언제나 메시아적 신앙이 율법적 신앙에 순종하는 모순을 통해 법의 모순을 드러내고, 순종의 형태로 법의 정신을 완성하는 수순을 취한다. 이것이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메시아적 정치이다. 

법에 매인 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 법의 폭력 앞에 결코 무릎 꿇지 않고 메시아적 소명을 이루는 것은 일견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화되기 어려운 메시아니즘(신적 폭력)을 말하려는 바울은 법 밖의 정의를 표현하기 위해 메시아 예수의 삶을 담은 역사관, 구원관, 공동체관을 로마서를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가 살았던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살았음을 증언한다. 근대에 와서 로마서의 내용은 바울의 신학, 윤리, 교회론으로 분해되고 말았다. 언제나 공존하기 불가능한 것들이 공존하는 형상을 띄는 것, 율법 폐기와 율법 완성이 공존하고, 강한 자와 약한 자가 공존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메시아적 윤리,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던지는 메시아적 실천은 현실의 법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극복함으로써만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데리다에게는 이것이 정의의 불가능을 체험함으로써 정의 자체로 들어가는 해체의 경험이었고, 벤야민에게는 용감하게 신의 폭력을 이 세계 안으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로마서를 쓰고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옛 동료(바리새인)들에게 붙잡혀 로마로 압송된다. 그리고 거기서 처형당한다. 편지를 받은 로마 교회는 제국의 사형수로 로마에 끌려온 바울을 대면하는 아이러니를 경험한다. 그런 바울을 통해 다시금 복음을 배운 로마 교회는 이후 바울과 예수의 제자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세계 교회가 자라나는 요람이 된다. 바울이 순교자로 로마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로마 교회는 바울을 받아들였을까? 바울은 스페인 선교를 통해 땅끝 선교를 완성하는 사도로 자신을 그렸지만, 그의 신이 그리는 여정은 이와는 매우 달랐다. 만약 바울이 로마 교회의 지지를 끌어오지 못했다면, 순교자로 그들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지지 않았다면, 바울의 편지들은 그 수많은 오해와 기나긴 세월을 뚫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적어도 우리에게 도착한 바울의 편지들은 그가 삶과 죽음으로 끝끝내 우리 손에 쥐여준 기록임을 기억하게 한다. 


 


한수현
감리교신학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Th.M.), 시카고 게렛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공부(M.Div)한 뒤, 시카고신학교에서 바울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된 연구 분야는 바울 서신, 복음서, 유대 묵시문학이며, 박사 논문은 고린도전서 15장의 ‘죽은 자의 부활’과 세월호 참사를 연결 짓는 연구 작업의 결과물이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 강사로 바울 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교회와 사회를 바울 서신과 바울 신학에 비추어 살펴보는 여러 연구들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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