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최종편집 : 2020.2.1 토 19:48
기사검색
   
> 뉴스 > 교회 | 제국과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는 법 너머에 있다
[351호 제국과 하나님 나라] 로마서 다시 읽기 1
[351호] 2020년 01월 21일 (화) 16:12:50 한수현 goscon@goscon.co.kr

 

타우베스의 ‘로마서 강의’ 
1987년 3월 유대교 철학자인 야콥 타우베스(Jacob Taubes)가 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1956년부터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종교사와 종교철학을 가르쳤고, 1966년부터는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부 교수로 강의와 연구를 해왔다. 당시 타우베스는 한나 아렌트, 폴 틸리히, 칼 슈미트 등의 석학들과 교류하며 어깨를 나란히 한 철학자였다. 

그는 1987년 1월에 있을 하이델베르크 대학 특별강연에 초청되었는데, 미리 약속한 강연의 제목은 “단두대 위에서의 시간, ‘언젠가와 지금’이라는 묵시록적 시간 경험”이었다. 그러나 1987년에 들어설 때 이미 암 투병으로 거동이 힘든 상태였다(6). 그럼에도 원래 계획되었던 강의 대신 4주 동안 ‘로마서’ 강의를 하겠다고 말했다. 세계 신약성서학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마르틴 디벨리우스(Martin Dibelius), 권터 보른캄(Gunter Bornkamm), 게르트 타이센(Gerd Theisen) 등 대대로 신약을 가르쳤던, 복음서와 바울신학의 전통과 전통을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학자들이 포진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한 유대 철학자가 로마서를 강의하겠다고 한 것이다. 

   
▲ 야콥 타우베스. (사진: Babette Babich 트위터)

타우베스는 첫째 날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했다. “신학부가 아주 정당하고 합당하게 취급하고 있는 바울과 제가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려는 바울은 직접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고.(15) 비록 타우베스는 바울에 대한 매우 개인적인 견해를 말할 것이라고 겸손하게 시작했지만, 마지막 강연에서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에 반해서 이른바 주석들, 이 작품(프로이트) 이후에 나온 주석들은 전부 다 별 볼 일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에 대한 해석 작업을 말이죠!”

타우베스는 자신의 강의를 새로운 바울 이해의 서론이라고 밝혔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불과 몇 주 후 숨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1987년에 있었던 이 강의는 바울 연구의 새로운 기폭제로 작용했다. 이후 당대 지식인이라 불리는 철학자들에 의해 이른바 “바울과 철학”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단편적으로 소개했지만 조르지오 아감벤,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등이 이 대열의 선두에 섰고, 여러 영미 신학자들과 성서학자들도 이들의 연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철학과 신학 전반에 바울 연구의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이 연구는 타우베스가 말한 바와 같이 이전 서구의 주석학적 전통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 칼 슈미트, 발터 벤야민,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리드리히 니체, 마르틴 루터, 칼 바르트, 쇠렌 키에르케고르 등 역사의 격동기에 새로운 사상과 통찰로 다음 시대를 연 이들의 연구에 잇닿은 것이었다.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는데, 타우베스에 의하면 그들 모두 바울을 자기 담론의 핵심 또는 가장 힘겨운 적수라 여겼다. 모두 이전의 전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울을 재발견했고, 거기에 자신의 옷을 입혔다는 것이다. 바로 이들의 연구와 바울을 다시 읽는 운동이 20세기 말부터 등장한 새로운 바울 이해이다. 

로마제국에 대한 바울의 선전포고 
《바울의 정치신학》(The Political Theology of Paul)은 타우베스의 강연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로마서를 바울의 맥락에서 다시 읽어 보자는 것이 책의 논지이다. 바울이 세계 제국을 바라보며 그 수도 공동체에게 쓴 편지인 로마서가 황제로서 신격화되던 “카이사르에 대한 정치적 선전포고”라고 타우베스는 주장한다. 바울은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선교를 떠날 예정이었는데(롬 15:18), 세계 끝까지 메시아(그리스도)의 오심을 전하여 로마제국이 아닌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에클레시아를 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이 연재글의 큰 주제가 로마제국인 점도, 멀든 가깝든 타우베스의 강연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제국의 화폐와 법, 종교에 대항했던 바울의 숨결이 1987년 1월 타우베스의 강연으로 다시금 트였다. 

   
▲ 《바울의 정치신학》 독일어판

타우베스가 본격적으로 새로운 바울 해석의 횃불을 켜든 주제는, 로마서 하면 누구나 강조하곤 하는 ‘율법과 복음’이다(60-61). 성서학자들은 로마서의 율법에 대한 논의를 갈라디아서와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하던 복음은, 율법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들에게 전하던 그것과 차이가 있음을 보았다(2019년 8월호 107쪽 참조). 바울의 ‘이신칭의’ 강조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강조하던 정결법(할례와 음식규례가 이방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바울의 논의)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결국 바울과 예루살렘 사도들은 서로 자유롭게 할례와 음식규례를 이해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갈 2:6-10). 

그러나 타우베스는 로마서에서 바울의 율법 논의는 갈라디아서와는 상당히 다른 차원에서 진행되었다고 말한다. 로마서는 로마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맥락이 다르다는 것이다. 다음 구절들을 자세히 비교해보자.

사람들이 시켜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사람이 맡겨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임명하심으로써 사도가 된 나 바울이, 나와 함께 있는 모든 믿음의 식구와 더불어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갈 1:1-5, 이하 모두 새번역)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따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그의 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 성령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신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신 분이십니다. 그는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를 통하여 은혜를 입어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민족이 믿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 들어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롬 1:1-6)

타우베스는 갈라디아서 처음부터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공격적으로 옹호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미 서론에서 바울은 자신의 대화 상대가 예루살렘의 사도들 또는 자신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메시아 에클레시아(교회, 공동체)임을 밝힌다. 또한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예수가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기 몸을 바치셨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후 할례와 음식법을 논의할 때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갈 3:13)라는 구절을 통해 율법의 저주를 끊은 ‘나무(십자가)에 달린 예수’, 즉 예수의 희생이 다시 언급된다. 그러나 로마서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그토록 강조한 사도성과 대속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었다고 강조한다. 황제를 신의 아들로 믿는 로마 공동체에 보내는 편지 서론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었다고 말한다(40-41). 이것이 예언자를 통해 성경에 미리 약속되었다는 내용 또한 갈라디아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도성과 대속이 갈라디아서를 관통하는 반면, 로마서에서는 유대의 전통과 로마의 권력에 관한 바울의 논의를 살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가 로마서의 율법을 논의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칠까? 타우베스는 갈라디아서가 율법 전통에 관한 예루살렘 공동체의 해석을 담고 있다면, 로마서는 당시 율법에 대한 유대인의 정치적 해석을 바울이 비판한 글이라고 말한다. 로마서에 나타난 율법은 당시 로마제국과 유대교의 협상안이었다는 것이다(60). 타우베스의 논의를 필자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60-62). 당시 유대교는 로마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종교를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집단이었다. 유대교는 로마 권력의 갖가지 부조리와 불의를 눈감아 주는 대신 생존을 약속받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유대교를 율법의 종교로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는 황제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로마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전통인 율법을 지킬 뿐이다!”라는 문장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로마의 권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예언 전통과 하나님의 정의보다, 하나의 문화적 생활 양태로서 율법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를 더욱 강조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율법을 뜻하는 헬라어 ‘노모스’라는 단어는 당시에 유대인에게는 율법을, 철학자들에겐 자연법을, 로마인들에겐 로마법을 뜻했다. 어떤 법칙이나 철학의 규칙을 뜻할 수도 있었다. 이렇듯 이 시기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뛰어넘는 법의 신격화가 팽배한 시대였다고 타우베스는 주장한다. 

법이 지배하는 로마제국  
그리스 철학의 기반을 닦은 철학자들과 초기 로마 정치에 기초를 놓은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주제가 바로 법이었다. 어떻게 하면 정의를 세울 수 있는 공동체 또는 국가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언제나 법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타우베스 사후 36년이 지난 2013년 시카고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과 성서학 교수인 테드 제닝스(Theodore Jennings)는 (타우베스가 언급한 학자들과 그의 횃불을 들고 바울을 논한 철학자들의 논의들을 종합한) 로마서 해석, 《무법적 정의》(Outlaw Justice)란 책을 출판했다. 서문에서 제닝스는 타우베스의 로마서에 관한 문제의식이 다른 일반 성서학보다 원래의 로마서 맥락에 근접해 있다고 주장한다. 대다수 로마서 독해가 정치적 문제로부터 멀어져 개인과 신의 관계에 기울어져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를 로마서가 정치적 텍스트가 아니라 종교적 텍스트로 읽혀 온 결과라고 말한다(11). 제닝스는 여기서 정치적인 것이란 인간의 삶을 개인들로 파편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회 또는 공동체가 되어가는 방법을 뜻한다고 지적한다. 제닝스는 이 책에 “바울의 메시아 정치”(The Messianic Politics of Paul)라는 부제를 붙였는데, 이는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가는 공동체와 인간 사회의 삶이 로마서의 핵심이란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바울이 살고 있던 세계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사상으로 이루어진 정치적 이상과 로마제국이 재편하는 보편적 질서로 움직이던 시대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국가 안의 개인들을 엮는(bond) 것이자 인간 사회의 질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플라톤은 이러한 정의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여러 법과 조직을 논하며 법을 기초로 한 정의로운 사회를 말했다(10). 당시 그리스의 도시국가가 생각하던 이상 사회는 현자가 법을 세우고 그 위에 도시를 세우는 것이었다. 당시 필론(Philo)과 같은 유대 지식인들이 모세가 신으로부터 법을 부여받아 이스라엘을 세웠다고 말하면서 그를 유대 사회의 현자로 놓은 것은 유대 사회가 이러한 이상적 모델에 부합함을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제닝스는 이러한 배경들이 사라지고 로마서가 개인의 죄와 의의 문제로 해석되면서 로마서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인 “정의”(justice)와 “불의”(injustice)가 개인의 도덕적 차원을 의미하는 “의로움”(righteousness)과 “불의함”(un-righteousness) 또는 “사악함”(wickedness)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11). 

하나님 나라는 법 너머에 있다 
법이 공동체와 국가를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권력의 중심이 되는 것, 이는 매우 정치적이기도 하지만 신학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바로 법이 신을 대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 지식인들은 법 중심의 공동체를 만들고 이 법의 기본 정신이 로마의 법 또는 그리스 철학 정신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노모스, 즉 법을 앞세우면 히브리 성서(구약성서)에 담긴 제국을 향한 예언자들의 비판과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의 외침이 삶의 문화에 가려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러한 율법 비판을 통해 로마제국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타협안’을 거부하고 그 ‘법’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이 메시아(그리스도, 기름부음 받은 자, 황제)라고 부르짖었다고 타우베스는 말한다(63). 당시 시대를 꿰뚫고 있던 법이라는 보편적 질서와 가치를 완전히 뒤집는, 이전의 가치에서 벗어나는 시도를 바울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혁명(革命)이라고 하면 권력 기관을 무너뜨리고 그 권력을 취하는 행동을 뜻하지만 여기서 바울이 일으킨 것은 문자 그대로의 혁명, 즉 명(命)을 완전히 새롭게 하는 것, 시대정신을 완전히 새롭게 바꿔버리는 것이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그의 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롬 1:2-3)에서 바울은 율법에 기대어 로마제국과 동거하려는 유대세계의 모습을 고발한다. “성령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신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신 분”(롬 1:4)에서는 법과 폭력에 기대어 신의 아들로 등극한 로마 황제를 끌어내리고 그 법의 폭력에 죽은 예수를 신의 아들로 선포한다! 법과 정의를 함께 외치는 세상에서 그 법이 정의에 반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정치에 대한 새로운 또는 매우 급진적인 사유를 제안한 것이다(12).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롬 3:20-21)

위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도 무리가 없다. “법으로는 죄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법 밖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났습니다.” 타우베스와 제닝스가 말하듯이 바울은 로마서에서 노모스란 말을 율법, 법체계 자체, 자연법 등의 의미로 자유롭게 사용한다.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연법, 그리고 로마의 법은 하나님의 정의, 즉 법에 의해 희생당한 자를 부활을 통해 아들 삼으신 정의 앞에는 더 이상 정의로 설 수 없다. 그것은 폭력의 정치요 무정한 권력으로 확정되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선언, 로마서 
이전 글에서 유발 하라리의 저서를 인용하면서, 바울의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의 시대까지 신의 자리에 앉아 보편이란 이름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바로 돈, 제국, 종교라고 말한 바 있다. 바로 이들을 떠받치고 있는 법이란 체제를 바울은 온몸으로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선포하는 메시아와 그가 불러 올 새로운 세계를 논한 것이 로마서이다. 돈을 중심으로 한 경제 체제가 아닌 신의 은혜(선물 또는 그리스도), 약자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 하는 제국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정의가 넘치는 하나님 나라를 논한 것이 로마서라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서는 온갖 죄와 규칙으로 묶어서 인간을 획일화하는 종교가 아니라, 가장 비천한 자리에 떨어짐으로써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된 메시아가 여는 새로운 시대가 바로 지금 시작되었다는 선언이다. 그렇기에 로마서는 정치-신학적 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고 그 맥락으로 읽어야 한다. 조금 과장하자면 1987년 1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죽음을 앞둔 유대인 철학자 야콥 타우베스에 의해 이러한 해석이 시작되었다. 

다음 글에서는 법은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그러면서도 인간은 어째서 법을 벗어날 수 없는지 살펴볼 것이다. 

 

■ 참고한 책
    야콥 타우베스, 조효원 옮김, 《바울의 정치신학》(그린비, 2012)

 


한수현
감리교신학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Th.M.), 시카고 게렛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공부(M.Div)한 뒤, 시카고신학교에서 바울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된 연구 분야는 바울 서신, 복음서, 유대 묵시문학이며, 박사 논문은 고린도전서 15장의 ‘죽은 자의 부활’과 세월호 참사를 연결 짓는 연구 작업의 결과물이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 강사로 바울 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교회와 사회를 바울 서신과 바울 신학에 비추어 살펴보는 여러 연구들을 진행 중이다.

 

     관련기사
· 제국의 변방에서 신의 나라를 꿈꾸다· 신의 나라를 꿈꾼 메시아 공동체
· 귀신의 식탁 vs 예수의 식탁· 제국의 방식과 다른 삶: 예수 그리고 바울
· 제도 너머의 ‘메시아적 시간’을 사는 바울 공동체· 어떻게 제국의 돈에 저항할 것인가?
· 빌립보에 있는 에클레시아에게!· 에클레시아와 바울의 이신칭의
· 제국의 경제 질서에 맞서는 은혜와 나눔의 공동체· 바울의 좌절과 눈물
· 좌절을 넘어 희망으로· '로마서 읽기'를 위한 전제
한수현의 다른기사 보기  
ⓒ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복음과상황 기사제보 광고문의 제휴안내 오시는길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03785) 서울 서대문구 신촌로 3길 15 산성빌딩 104호 | 전화 : 02-744-3010 | 팩스 : 02-744-3013
발행인 : 김병년 | 이사장 : 황병구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병년
Copyright 2008 복음과상황.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con@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