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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우물에서 스스로 길어 마셔야 한다
[335호 커버스토리]
[335호] 2018년 09월 20일 (목) 15:32:47 송인수 goscon@goscon.co.kr
   
▲ 오늘날 한국교회의 핵심 문제에 일반 신도들의 목회자 의존성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면서 말씀의 우물에서 스스로 물을 길어 마셔야 합니다. (사진: www.pexels.com)

얼마 전 《만남》(IVP)이라는 설교집을 냈습니다. 뜻밖의 일이라 여길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도 아니고 신학교를 가 본 적 없는 평신도 시민운동가니까요. 여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평상시 저는 부모로서 두 아이를 키울 때 한 가지 염려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내 품을 떠난 후에 과연 신앙을 고백하며 살 수 있을까? 성인이 되어서 믿음의 터전을 가꾸며 살 수 있을까? 돈을 최고의 가치로 떠받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영혼의 순수함을 지킬 수 있을까?’ 이 문제로 새벽에 기도하다가 눈물을 쏟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고민을 안고 살다가 2008년, 뜻하지 않은 이유로 23년간 머물던 고향 같은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새로 섬기게 된 교회는 교인 수가 적었는데 특히 중고등부는 제 큰아들과 친구 목사의 두 딸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성경 공부 교재 대신 말씀을 직접 읽고 함께 공부해 나가는 방식으로요.

질문을 안고 성경 앞에 나아가기
이 시간을 위해 저는 토요일 밤마다 성경을 펼쳤습니다. 본문이 요한복음이었는데, 참 곤혹스러웠습니다. 성경 속 여러 인물이 예수를 만나서 몇 마디 나누고서는 직업을 버리고 곧바로 그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이 그랬고 야고보와 요한이 그랬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한 사람의 마음 바꾸는 일을 못하실 리는 없지요. 그러나 이 만남들 가운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찾아보기로 했지요.

아쉽게도 주석에서는 큰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주석이 저의 성경 해석을 도와주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제가 가진 의문에 대해서 피상적으로만 이야기하거나 침묵했기에 제 질문은 여전히 제 몫으로 남았습니다. 한편으로는 말씀 앞에서 질문이 생겼을 때 남의 주석을 의지하는 것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답을 물어보는 것 같아서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수학 문제를 직접 풀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답안지부터 들춰보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하면 이해가 되실는지요.

그래서 저는 성경을 보다가 질문이 생기면 이렇게 해결하곤 했습니다. ‘내가 예수 앞에 선 니고데모와 베드로와 나다나엘이 되어 보자. 본문을 최대한 자세하게 관찰하면서 둘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의 맥락을 이해하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다른 성경을 참고해서 추가 단서를 찾아보자. 이해할 만한 단서가 없다면, 해석이 멈춘 그곳에서 내가 예수를 만나면서 경험한 신앙 원리를 바탕으로 간격을 좁혀 보자. 혹시 주석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이 과정을 모두 끝내고 참고하자.’ 이렇게 말입니다.

토요일 저녁, 이 과정을 거쳐 꽤 자주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답은커녕 더 큰 궁금증을 안은 채 준비를 마쳐야 할 때도 많았지요. 그렇더라도 달리 도리가 없었습니다. 일요일에 아이들과 만날 시간이 되면 저는 제가 공부한 것 혹은 해결하지 못한 고민을 가지고 아이들 앞에 섰습니다.

열네다섯 살 또래 아이들은 심드렁했습니다. “아, 그 이야기요? 저도 알아요.” 이렇게 반응하는 아이들에게 저는 말씀을 읽게 하고 요약하게 했습니다. 아이들의 지식 위에 무엇을 얹으려 하기보다는, 제가 말씀을 보면서 얻은 의문의 보따리를 풀어내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질문 앞에서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답으로 아는 성경 지식이 있을지 몰라도, 그 지식이 어떤 질문과 연결된 내용인지 모르니 아이들이 아는 답이나 지식이 어떤 소용이 있을까요? 저와 아이들의 대화는 이런 식입니다.

“얘들아,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하고 말씀하시니까 갑자기 나다나엘이 무릎을 꿇으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답하잖아? 도대체 무화가 나무 아래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이기에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그렇게 크게 칭찬하신 걸까?”

“무화과나무 아래 있으면 좋은 사람인가 보죠 뭐.”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을 예수님이 이야기했다고 해서 그가 놀라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이유는 뭐지?”

여기에서 아이들은 말문이 막힙니다. 그러면 저는 그때부터 제가 거친 과정을 아이들도 밟도록 합니다. 그제야 아이들은 새로운 눈으로 성경을 봅니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대화가 짧고 맥락이 생략되어 있어 답답할 지경이지요. 그때 저는 질문하고 아이들이 답을 하면 그 답을 해석해주면서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더 깊이 생각하거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이어 갑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입니다.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던 중에 제가 혼자 끙끙댔던 질문의 답이 홀연히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풀지 못한 문제라고 설명하는데 갑자기 해석이 되기도 하고 아이들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혹은 아이들이 던진 한마디에 꼬였던 실타래가 풀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도 많이 변했습니다. 그 시절 큰아이는 맹렬한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는데, 아빠가 진행하는 성경공부 시간을 좋아할 리 없었겠지요. 그러나 달랑 3명이 모인 성경공부 시간이니 어디 숨을 구석도 없었습니다. 아이에게는 다행히도, 그 모임이 정답을 외우거나 찾는 시간이 아니고 본문을 읽으면서 질문하고 함께 해석하면서 자유롭게 답을 상상하는 과정이니 큰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는 이 시간을 통해 성경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졌고 성경을 우습게 볼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풀어낸 말씀을 저는 교인 전체와 함께하는 예배 시간에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설교할 때는 울지 않은 적이 별로 없습니다. 성경 인물들이 예수를 만나는 과정에서 나눈 대화 중 이해되지 않는 것을 풀어내는데 이상하게도 그 시간에 제 영혼의 묵은 과제들이 풀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를 생각해 보건대, 성경 인물들이 저와 다른 남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제 자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로 저는 나다나엘의 이름으로 예수 앞에 섰다가 니고데모의 이름으로 또 마르다의 이름으로 그분의 말씀 앞에 섰던 것입니다.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려고 힘썼고 이해되지 않을 때는 제 경험을 대입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그분 앞에 제 자신을 서게 했습니다. 그렇게 10년 동안 정리한 말씀의 일부를 책으로 엮게 되었습니다.

말씀 앞에 나아갈 때 대답을 못 얻은 경우는 없다
이미 밝힌 대로 저는 신학을 따로 공부하지 않았고, 목회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을 대하고 제 개인의 문제를 성경 속에서 발견하며 대답을 찾는 과정은 신자들 모두에게 허락된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안고 예수께 나가서 구하며, 끈질기게 요청할 때 대답을 얻지 못한 경우는 없습니다.

1985년 대학원생 시절은 가난으로 무척 힘겨웠었습니다. 200원이 없어서 학교 구내식당에서 라면을 사먹기 위해 동료들 기숙사 방을 노크하던 시절이었지요. 이런 가난으로는 도무지 더 이상 공부할 수 없다고 절망할 때, 주께서 아침 말씀 묵상을 통해서 야곱의 생애를 보여주시며 저를 격려하시더니, 그날 밤 뜻밖의 기적으로 공부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도우시던 때를 기억합니다. 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1992년 초 어느 날, 한 구원파 선생님의 도전으로 제 신앙의 근본이 흔들리면서 “그리스도가 나를 아신다”고 말할 말씀의 근거를 찾지 못해 허둥댔습니다. 그러다가 필사적으로 말씀 앞에 나와서 매달릴 때, 디모데전서 1장 15-16절을 통해서 제 마음에 자유를 주시며 구원과 관련된 의심을 털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끝없이 참아 주심의 한 사례를 먼저 나에게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

1995년 ‘기독교사운동’이 시작되었을 때였습니다. 제 개인 역량에 비해 과제가 비대칭적으로 커서 숨이 턱턱 막히는 경험을 자주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새벽기도가 싫어서 결코 목사는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새벽기도회를 더 이상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 함께 이어온 말씀 묵상. 13년간 이어온 좋은교사운동의 책임은 그 힘으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매일의 새벽이 은혜로 넘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허탕을 치고 돌아가던 시간이 많은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굳건히 견뎌온 세월이었기에, 주와의 만남이 필요한 결정적 시점에는 늘 그분을 만났습니다. 주 앞에서 허탕 친 빈손의 세월은 만남을 위한 터전이었던 셈입니다.

‘좋은교사운동’을 시작하던 2000년 8월 15일, 1,300명 교사들 앞에서 그 마음을 움직이는 승부를 걸어야 할 그 엄중한 때, 주님은 새벽에 ‘오병이어’ 말씀으로 제게 찾아오셔서 “이들이 3일을 굶었다. 길에서 기진하리니 먹을 것을 주라” 하시며 그들에게 전할 말을 제 입에 주셨습니다. 교원평가를 찬성하는 선언을 하여 교원단체로서는 사망선고를 받은 것과 진배없었던 2005년, MBC 〈100분 토론〉에 찬성 패널로 나오라는 요청에 수락했습니다. 그러나 홀로 그 자리에 서는 것으로 인한 두려움과 그 자리를 대신할 이가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토론회 전날에 거실에서 아내를 보자마자 저는 끝내 털썩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묵상한 에베소서 2장 말씀으로 인해 저는 큰 위로를 얻어 그 자리에 담대히 서게 되었고, 토론회에서 우리가 제안한 내용으로 상대편과 합의에 이르는 진풍경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엡 2:14, 새번역)

무엇보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교사들과 국민 사이에 막힌 담을 교원평가를 통해 허무신다는 뜻으로 다가왔고 감사했습니다. 좋은교사운동이 교원단체로서는 찬성하기 어려운 교원평가제도를 통해 교사들과 학부모와 국민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고 교직 사회에 대한 신뢰를 회복케 하는 일을 하는구나, 하는 확신이 들어 마음이 든든해졌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좋은교사운동을 위해 정든 학교를 그만두고 교직을 떠나는 것을 고민하던 때에, 무엇이 옳은지 분별이 안 되는 혼돈의 나날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려 한 후 돌려받은 창세기 말씀은 제가 무엇을 붙들어야 할지를 밝혀주는 빛이었습니다. 그래서 퇴직의 마음을 내려놓았고, 그런 내려놓음 때문에 또한 퇴직할 수 있었습니다. 2007년 12월, 좋은교사운동 대표 임기를 끝내고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의 시간이 깊을 때, 아침마다 묵상하던 사도행전의 말씀은 때마침, 입시 경쟁과 사교육 문제에 제 인생을 던지는 것이 주의 큰 뜻 속에 있음을 짐작케 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입시 경쟁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한 명도 없는 세상, 사교육비로 부모들이 가슴 치는 일이 없는 세상을 아이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준다는 참으로 황당한 목표를 붙들고 지난 10년을 달려왔습니다. 풍파가 없는 날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처음엔 우리 주장에 무관심하다가, 이제는 우리가 말하면 몇 백 몇 천 배로 비난의 화살을 쏘아 제 가슴을 찌르는 나날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무서워하며 도망가지 않고 의연하게 버텨 왔습니다. 아이들을 입시 경쟁의 고통에서 건지는 일이라면 이보다 더한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용기는 새 옷 한 벌 입어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제 소심한 기질에 비추어 보면 참으로 이례적인 일입니다. 매일 말씀 앞에 나가서 얻는 약속과 위로가 없었다면 진작 지쳤을 것입니다. 그 약속과 위로가 있는 한 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네까짓 게 무슨 일을 한다고 나서느냐?”라는 제 안과 바깥의 조롱이 있더라도, 저의 한계에 주눅 들지 않고 일어설 것입니다.

예수께는 의존적이되 사람에게는 자주적일 것 
우리는 모두 인생의 수많은 문제를 안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뜻밖에 찾아온 시련을 해석할 방법을 몰라 허둥대거나, 실수 혹은 연약함 때문에 넘어져 자책의 깊은 터널을 지날 때, 또는 뜻을 따라 살다가 태산과 같은 문제를 만날 때, 우리는 스스로 인생의 빛을 자신에게 비출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성경은 그 어둠을 헤쳐 나오라고 주님이 주신 빛이요 선물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는 각자 성경을 읽고 해석함으로써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설교자의 말씀도 필요합니다. 설교자가 풀어낸 말씀에서 지혜와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설교자의 성경을 대하는 태도에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저분은 성경을 저렇게 해석하고 적용하시는구나. 저런 성찰을 통해 변화를 꾀하고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하시는구나. 나도 저분과 같은 자세로 말씀 앞에 서야겠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설교를 듣는다면 그 말씀은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매일 말씀을 보면서 그 속에서 우리 영혼을 밝히는 빛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안고 사는 수많은 문제는 직접 말씀을 붙들고 씨름해야 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이 과정을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각자가 지닌 삶의 질문을 누군가에게 의존함으로써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의존하려고만 하는 자세 자체가 오히려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의존하는 존재이지만, 인간관계에서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사귐과 협력, 배움이 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접할 때에도 이런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면서 말씀의 우물에서 스스로 물을 길어 마셔야 합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 문제의 핵심에 신자들이 목회자들에게 의존하는 자세가 있다고 봅니다. 말씀을 해석하고 선포하는 권세가 목회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니, 어느덧 목회자는 일반 신자들과는 다른 존재요 구름 위의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주의 종’이니, 신자들은 그의 말이 옳건 그르건 아멘으로 순복해야 한다는 자세, 그런 맹목적 태도야 말로 교회를 썩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목회자와 일반 신자들을 구별 짓는 자세야말로 개신교가 그렇게 배격했던 로마 가톨릭의 문제입니다. 사제가 신도 위에 군림하다 보니 중세 때 교회에 얼마나 문제가 많았습니까? 그것을 극복하고 “사제와 신도의 구별은 없다. 모두가 다 사제다”, 그렇게 선언하고 가톨릭을 뛰쳐나온 것이 개신교입니다. 루터는 사제들만 읽을 수 있는 라틴어 성경 대신 독일어 성경을 출판해서 독일 민중들에게 보급했습니다. 그가 왜 독일어 성경을 만들었겠습니까? 일반 신자에게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읽음은 해석하는 과정을 동반합니다. 그러니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말씀을 해석하고 자기 삶에 적용해 살아갈 자유와 권세가 일반 신자들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살린 말씀을 들고 회중 앞에 서는 것이 설교입니다. 성직자 아닌 신자들이 나서서 설교를 하기 시작하고, 멜란히톤 같은 일반 신자들이 세례를 주기 시작하고,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니, 그 성경을 독점적으로 해석한 종교권력이 발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일반 신자들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자격을 갖춘 목회자 외에는 어느 누구도 강대상에서 설교할 수 없고, 성경을 해석할 권한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런 배타적 권세가 부여되다 보니, 목회자가 스스로의 신분을 신자들과 차별화하고, 스스로를 경계하지 않게 됩니다. 타락을 불러오기 쉽습니다. 물론 넘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목회자가 자신을 돌아보는 피 흘리는 성찰 때문일 뿐 구조 자체로는 위험한 상태입니다. 그 구조를 벗어나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목회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말씀의 우물에서 스스로 물을 길어마시도록 권유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목회자는 누군가 자신에게 의존하려 할 때, “나를 의존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의존하십시오”라고 말하며 주만 의존하는 길, 말씀을 의존하는 길을 몸소 보여야 합니다. 일반 신자와 목회자는 운동 선수와 코치의 관계이지 관객과 운동 선수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렇게 목회자에게 박수만 치는 관객 같은 신자는 스스로 말씀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물론 신자가 말씀을 직접 읽고 해석하며 나눈다고 할 때, 균형을 잃고 치우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주의하고 생각에 오류가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석과 신학자들과 교회의 건전한 가르침에 우리 자신의 마음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말씀의 물을 스스로 길어 마실 때 경계해야 할 일이지, 그 과정이 멈춘 이들에게는 무익한 충고입니다.

‘케리그마’는 말씀 나눔이 회중의 응답으로 완성되는 것
저는 요즘 목회자가 따로 없이 일반 신도 서너 가정이 모이는 소위 평신도 교회를 섬깁니다. 예배 말씀 나눔은 신자들이 돌아가면서 맡습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칠 의도를 가지고 말씀을 보는 대신, 스스로 말씀을 읽고 연구하며 자신의 삶에 적용한 내용과 그 속에서 얻게 된 유익을 나눕니다. 기대 이상의 통찰을 얻을 때도 있고 미완의 나눔으로 끝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눔 이후가 우리에게는 더 중요합니다. 그날의 나눔을 토대로 우리는 말씀의 실체적 진실을 찾기 위해 대화를 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말씀을 준비한 사람보다 더 깊은 통찰이 찾아오거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순전한 태도가 우리에게 쌓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을 ‘케리그마’(Kerygma)이라고 부릅니다. 설교자가 회중에게 하나님의 뜻을 대언해 선포하니 ‘아멘’으로 받으라는 뜻이지요. 존 스토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케리그마로 찾아오신 말씀 앞에 우리는 영혼의 옷깃을 여밉니다. 그러나 제 경험에 비춰 보건대 케리그마는 때로 한 개인이 최선을 다해 준비한 말씀을 토대로 신자들이 과연 그러한지 숙고하고 생각을 나누는 과정에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케리그마는 설교자가 시작한 말씀 나눔이 회중의 응답을 통해 완성되는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제가 다니는 교회는 10년 전, 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성경을 공부했던 그 시절의 활동을 성인들에게로 확대한 모습과 같습니다. 아이들과 부모들은 성경을 숙고하고 자기 문제를 말씀으로 풀어내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함께 공유함으로써 세대 차이를 느끼기보다는 서로 도전을 주고받으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일들이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확산되기를 기대합니다.

오래 전 저는 제 아이들의 신앙을 염려했다고 했습니다만, 세월이 꽤 흐른 지금은 더 이상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둔 부모의 눈에 염려할 것이 왜 보이지 않겠습니까만, 아이들은 분명히 저희 부부와 함께 성장해 왔습니다. 10년의 시간 동안 아이들에게 성경을 보는 눈이 생겼고 예수님이 이 아이들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앞으로의 삶에서 시련을 만나 당황할 때도 있고 미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겠으나, 아이들이 말씀과 함께할 것이기에 저는 아이들이 더욱 굳건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운동에 뛰어든 이들마다 동기가 각각 다르겠지만, 제 경우 오늘 여기까지 저를 이끈 가장 큰 동기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이익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고통받는 이웃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신앙이고 이를 위해 가진 것을 모두 쏟아내는 삶을 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니 믿음의 삶을 살면서 주를 따르니 손해를 보기는커녕 삶이 존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신앙이란 나를 버리는 일임과 동시에 나를 되찾는 일임을 깨닫게 되니 삶은 신비롭습니다. 그 깨달음이 말씀에서 비롯되었고 우리 인생의 남은 길이 험하니, 이 귀한 것을 결코 빼앗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로 “세상의 고통에 응답하는 평신도 중심의 아주 작은 교회”인 산아래교회를 섬긴다. 공립학교 교사로 13년간 일했고 2003년 퇴직하여 좋은교사운동 대표로 5년간 활동했다. 2008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세워 입시경쟁과 사교육 부담 해소에 매진하고 있다. 좋은교사운동으로 교사 운동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아 2012년 도산교육상을 수상했고,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통해 한국 교육의 변화를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의 아쇼카 펠로’에 선정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이들에게 모두 빚진 사람들이다》 《무모한 교사들》 《하고 싶은 일해 굶지 않아》(공저)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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