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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빈소에서 성경을 읽다
[335호 커버스토리]
[335호] 2018년 09월 20일 (목) 15:38:55 전성은 goscon@goscon.co.kr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요한복음을 읽다

1976년 5월 22일.
내 인생에서 가장 깜깜했던 날.
예고도 없이 돌아가신 건강하던 아버지의 장례식 날.
나는 고등학교 교장실에 차려진 빈소에서 요한복음을 읽고 있었다.

   
▲ 아버지의 장례식 날, 빈소에서 요한복음을 읽고 있었다. (사진: 복음과상황 자료사진)

아버지 전영창 교장은 거창고등학교의 기둥이었다. 그해 4월 말 담석증으로 대구 동산병원에 입원하셨다. 수술 날짜도 잡혔다. 그런데 수술 전날 아버지는 의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병원을 나오셨다. 5월 20일 화란의 세계기독교교회후원회(ICCO)의 모리스 박사가 학교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ICCO는 제3세계에서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기관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 기구다.

전영창의 주선으로 부산 복음병원의 간호학교 기숙사를 지어주었고, 대구 사회사업대학교의 장애인 학생들을 위한 직업훈련 교육을 도와주기도 했다. 또 거제도에 있는 시블리 박사(정형외과 의학박사)가 운영하는 거제건강원을 지어주었다. 그 ICCO에서 1974년 거창고등학교의 직업보도관(지금의 남학생 기숙사) 건립과 직업훈련 교육을 할 수 있는 기계와 기구들을 지원해주었다. 그 ICCO의 아시아 담당 책임자인 모리스 박사가 거제도를 들러서 거창에 오게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모리스 박사가 다녀간 후에 수술을 하고 싶어 했다. 학교 책임자로서 그간의 경과도 이야기하고 다른 문제들도 상의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모리스 박사는 전영창을 신임하여 한국에서 ICCO가 도와주면 좋을 기관들을 추천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모리스 박사의 방문 뒤로 수술을 미루었던 것이다.

그런데 5월 16일부터 열이 나기 시작해 다음 날에는 40도가 넘었다. 택시로 동산병원에 모시고 갔다. 우선 응급조치를 하여 20일에 수술을 받기로 하고, 나는 거창으로 돌아왔다. 모리스 박사에게 그간의 경과를 설명할 자료들은 내가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류는 준비되어 있었으나 아버지가 불안해하시어 학교에 돌아와 마지막 점검을 하고 19일 밤늦게 동산병원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수술할 아버지 곁에서 밤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병실에 없었다. 응급실로 옮겼다고 했다. 응급실에 들어가 보니 아버지는 의식이 없고 어머니가 침대 곁에 꿇어앉아 아버지 손을 붙들고 “여보 하나님만 믿어!”를 연발하고 있었다. 담당 의사가 나를 보고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밖으로 나온 의사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가망이 없습니다.”

하늘이 무너졌다. 나는 응급실이 있는 층 복도 끝으로 갔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15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아니 10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아니 5년만 더.” 그래도 하나님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좋습니다. 3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당시 학교에는 빚이 많았다. 1973년에 고등학교 본관과 강당을 지을 원래 계획은 2층 건물이었는데 한 층을 더 지어 3층 건물을 지었다. 1975년에 보도관 한 동을 지었는데 그때도 원래 계획보다 초과하여 지었다. 그보다 5년 전, 교실 두 칸을 지었는데 그때의 건축비도 한 푼 못 갚고 이자만 물고 있었다. 지금 화폐가치로 계산하면 100억 원이 넘는 빚이 있었다. 그 빚 내역은 아버지와 나, 그리고 서무과장만 알고 있었다. 학교의 다른 식구들은 빚이 있다는 것만 알지 누구누구에게 얼마, 이자는 얼마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가 조만간 미국이나 화란에 가서 모금을 해서 차차 갚아 나갈 예정이었다. 당시 학교의 큰살림은 내가 맡고 있는 형편이었다. 서무과장이 학교의 빚을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빚은 내 빚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에겐 재산이라곤 땅 한 평, 집 한 채도 없었다. 아버지가 1960년 당시 거창고등학교-초등학교가 쓰고 있는 건물이 있는 자리-에 건물을 지을 때,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논 밭과 산까지 다 팔았기 때문이다.

배은망덕한 베드로에게
나는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고 있지 않았다.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빚은 내 차지였다.

담당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었던 때부터 내겐 빚 생각뿐이었다. 나는 빚 걱정에 눌리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느낄 여유가 전혀 없었다. 내 가슴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아버지를 데려간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를 데려간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이해하려야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 아버지와 학교만큼은 사랑한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나였다.

“그래요. 나는 당신이 사랑할 놈이 못 됩니다. 그러나 학교는 사랑하셨지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를 거창으로 보내셨지요.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전영창과 함께하셨지요. 아무리 내가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지만 나에게 그 많은 빚을 떠넘기다니.”

무슨 생각에서인지 20일부터 읽기 시작한 요한복음. 늦게 소식을 듣고 찾아온 문상객들을 받아가며 읽고 있으려니 벌써 사흘째인데도 20장(요한복음은 모두 21장)까지밖에 못 왔다. 장례식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고 나오라고 재촉들이었다. 그런데 왠지 나는 요한복음을 끝까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났다고 재촉하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마지막 21장 15절을 읽기 시작했다. 19절을 읽는 나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목이 메이었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아! 베드로에게 인류 구원의 바통을 넘기고 가셨구나. 그 못 믿을 놈, 베드로에게. 그렇게 자지 말고 같이 기도 좀 하자는데 자기만 하던 놈. 그렇게 경고해 주었는데도 자기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놈. 아니, 부활한 자기를 두 번이나 만나고도 옛 고기잡이 직업으로 돌아간 놈. 저만 돌아갔나. 다른 제자들까지 끌고 다시 옛 직업으로 돌아가다니. 그런 배은망덕한 놈에게 인류 구원의 사명을 넘기고 가시다니!!”

자기를 아가페/사랑하느냐고 묻는 선생님에게 필로밖에 못한다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인류 구원의 사명을 넘겨주고 가신 예수님/하나님. 3년 전 물고기 잡아 살던 그를 불러 “사람 낚는 어부”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고, 3년 동안 같이 먹고 자며 함께 생활했던 베드로, 직접 가르치고 이적과 기사를 보여주며 길렀던 베드로, 변화산 위에서 인간으로는 볼 수 없는 광경까지 보여주어 예수가 누구인지 알게 해주었던 애제자 베드로, 그 사랑에 감격하여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는 죽어도 예수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쳤던 베드로. 그 베드로는 어디로 갔는지….

부활한 예수를 두 번이나 보고도 사람 낚는 어부의 길을 버리고, 저만 버렸나? 다른 제자들까지 데리고 옛 고기잡이로 돌아간 베드로를 또 찾아와, “내 양을 먹여다오, 내 양을 먹여다오, 제발 내 양을 먹여 주지 않으련?” 애원하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에게 이렇다 저렇다 대답 한마디 없는 베드로. 그 멍청하고 바보 같고 의리 없고 무기력해 빠진 베드로에게 또다시 처음 그를 불렀던 때와 똑같이 “나를 따라라!” 부탁하시고 떠난 예수님.

“알겠습니다.”
“20년 전, 열정 하나밖에 없던 혈기 왕성한 전영창에게 거창고등학교를 맡겼던 당신. 이제는…”


요한복음을 접고 장례식장으로 나갔다.
고등학교 운동장에는 학생들과 졸업생들과 조문객들이 가득 차 있었다. 고등학교 운동장 너머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거창 읍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성경 ‘읽기’가 아닌 성경 ‘듣기’
아들도 달랑 전영창 하나, 손자도 나 하나뿐인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욕심이 많았다.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에 나를 앉혀 놓고 한글을 가르쳤다. 교재는 성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옛 한글로 한글을 배웠다. 그렇게 다섯 살 때 한글 교재로 읽기 시작한 성경이 나의 성경 읽기의 시작이었다. 그런 나와 누님에게 어머니는 매일 성경을 3장씩 읽게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신구약 성경을 1독 했다.

그러던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우연히 아버지의 서가에서 한글로 된 네 복음서 주석을 보게 되었다. 찰스 뭔가 하는 분이 쓴 주석이었는데, 호기심에 마태복음 주석을 뒤적거려 보다가 10장의 풍랑을 잔잔케 한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이 자연까지 지배하신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어렴풋이나마 성경의 이야기는 단순한 어떤 사건의 보도가 아니라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해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책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녹음기 틀 듯 불러주는 말을 저자들이 로봇처럼 받아썼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런 생각의 싹이 그때 들게 되어 살아오면서 어려운 고비마다 성경을 읽는 것으로 고민을 대신하려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그것이 습관이 되어 아버지의 뜻하지 않은 죽음 앞에서 요한복음을 읽기 시작한 것이었다. 별생각 없이. 그 별생각 없음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별생각 없이 즉 나의 생각이 없이, 내 생각 대신 하나님이 생각하시어 요한복음을 주워들게 하신 것이다. 그런 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한다. 우연이 아니다.

내가 성경을 읽으면 안 된다. 성경이 나를 읽어야 한다. 성경 읽기는 내가 먼저 성경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게 해야 한다. 그런 뜻에서 ‘성경 읽기’보다 ‘성경 듣기’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이를 시편 저자는 ‘묵상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묵상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듣는 것이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듣는 것이 묵상이다. 눈 감고 무엇을 생각하는 묵상은 나를 제대로 인도하지 못한다. 눈을 뜨고 하든 감고 하든, 조용한 시간에 하든, 바빠서 뛰어가면서 하든 듣는 것이 묵상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에서 듣는 것이 성경 읽기이다.

나는 내 주위에서 성경을 열심히 읽는 사람들을 본다. 더러는 나보다 더 열심히 읽는 사람도 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 중에는 도저히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사람들을 본다. 새벽기도회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닌다. 성경을 달달 외우다시피 읽는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남 보기에는 기독교인 같아 보여도 욕심으로 가득 찬 삶이다. 말끝마다 “하나님이 축복해서”인데 그들이 받았다는 축복은 맨 날 “돈”이다. “건강”이다. “일이 잘 되었다”이다. 나는 지금은 목사가 된, 50년 전 한 신학교 졸업생이 당시에 뇌물을 주고 여권을 내놓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여권이 나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당시 나는 ‘돈이 내줬지 하나님이 내주긴?’ 하고 싶었다.

성경은 들어야 한다. 성경이 나에게 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 성경은 나에게 말하고 싶어 한다. 나에게 말하려고 있다. 물론 나의 말을 들어주기도 한다. 내 말을 경청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와의 대화 일부이다. 나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줄까, 어떻게 말해야 이놈이 알아들을까, 언제 말해야 이놈이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까? 이런 고민을 하는 과정이다. 훌륭한 상담자가 피상담자의 말을 경청하듯이, 성경이 우리의 말을 경청해주는 것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이다.

열린 성경 공부를 해야
성경이 나에게 하는 말을 듣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가 속한 교단 교회와 다른 교단과 교회의 책을 구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주 다른 교회나 교단의 성직자들이나 기독교인들을 초청해서 강의나 설교를 듣는 것 아닌가? 그런데 어떤 교단은 다른 교단의 성직자들 설교나 강의를 절대로 듣지 못하게 한다.

40여 년 전 신학교 교수로 있는 가까운 친구를 만난 일이 있다. 부산에 출장 갔을 때였다. 친구는 내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왔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이 본회퍼 목사의 책인 것을 보더니, 그 친구 대뜸 하는 말,

“야 너는 참 좋겠다.”     
 
“왜?” 

“그런 책도 마음대로 읽고.”

“왜? 너도 읽으면 되지.”

“우리 교단에서는 그런 책 못 읽게 해. 불트만도 칼 바르트도 못 읽게 해. 읽다가 알려지면 큰일 나.”


지금도 그 교단의 신학자들은 본회퍼나 불트만이나 바르트를 읽지 못하게 할까? 나는 그 교단의 신학자들의 책도 많이 읽었다. 젊었을 때에는 그 교단 신학자들-주로 미국-의 책을 그들보다 내가 더 많이 읽었을 것이다. 아니, 나의 성경 공부와 신학 공부는 그 교단의 미국 신학자들로 시작되었다. 그들의 신학으로 시작해서 차츰차츰 공부의 범위를 넓혀나가 오늘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 교단의 신학-미국의-이 가진 장단점을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내가 ‘미국의’라고 토를 다는 이유는, 아직 그 교단의 한국 신학자들 가운데 그들이 신학을 배워 온, 미국의 자기네 교단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여 그들의 신학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는 신학자들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나보지 못한 신학자들 가운데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교단 교회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아니 이단시하고, 이단시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교단 교회의 기독교들은 자기들 교단의 기독교인들보다 천당 가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교단의 신앙이 성장할까? 아니면 퇴보할까? 신학교가 왜 있을까? 끊임없이 신학이 발전하라고 있는 것 아닌가? 더 이상 자기 교단의 신학이 발전할 필요가 없으면 신학 연구는 왜 할까?

성경이 나에게 말하게 하려면 열심히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 그것도 다른 교단 다른 교회의 신학을 통해. 그럴 때 성경이 나에게 더 폭넓고 더 깊고 더 높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줄 수 있다.

성경 읽기의 완성, 삶으로 읽기
또 하나 제일 중요한 성경 읽기는 ‘삶으로 읽는 읽기’이다. 성경 읽기의 완성은 삶으로 읽는 것이다. 다독 → 정독 → 심독 → 행독.

읽고 살아보면 내가 알던 성경이 삶의 현장에서 겪는 현실을 설명해주지 못하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때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내가 알고 있던 성경이 내게 한 말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내가 알고 있던 성경의 의미를 되짚어 보아야 한다. 그런 때 내가 알고 있던 성경 구절, 내가 들었던 성경 구절이 내게 새로운 말을 건네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성경의 의미가 더 높고 깊고 넓게 다가온다. 하나님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얼마나 큰지! 성경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성경은 만 사람에게 만 가지 말을 하고 있다. 만 가지 경우에 만 가지 말을 하고 있다.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나한테만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와 다른 사람에게도 말을 하고 있다. 내가 처한 상황과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만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도 말하고 있다. 이 시대에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3천, 2천, 1천 년 전의 시대에도 말했고 미래의 시대에도 말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하는 것이다. 과거에도 말했고 지금도 말하고 있고 미래 세대에도 말할 것이기 때문에 신학은 영원히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내 삶으로 읽고, 다음 세대는 다음 세대의 삶으로 읽게 될 것이다. 이것을, 마태는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변하지 않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나는 살아오면서 삶의 고비고비마다 성경이 내게 말해준 이야기를 더 많이 할 수가 있다. 어쩌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지 모른다. 이 땅의 모든 기독 젊은이들이 성경 읽기를 삶으로 삼고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전성은
서울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65년 거창고 교사를 시작으로 2006년 교직에서 물러나기까지 41년간 지방 읍내의 학교에서 ‘지천명(知天命)의 교육’에 일생을 쏟았다. 샛별중학교 교장, 거창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으며, 참여정부 시절에는 대통령 직속 교육혁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한 바 있다. 퇴직 후에도 교육 정책 및 교사 교육에 관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활발히 이어오고 있으며, 국제성서연합회 세계성경번역센터 한국 편집인으로 성경 번역에도 매진해왔다. 지금까지 쓴 책으로는 ‘교육론’ 3부작인 《왜 학교는 불행한가》 《왜 교육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가》 《왜 교육정책은 역사를 불행하게 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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