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최종편집 : 2018.12.3 월 14:38
기사검색
   
> 뉴스 > 커버스토리
       
‘한 책의 사람’ 되기를 갈망하며
[335호 커버스토리]
[335호] 2018년 09월 20일 (목) 15:29:27 정상윤 goscon@goscon.co.kr

모든 신자의 소원이 무엇일까? “하나님을 알고 싶다. 이론이 아닌 실제로 알고 싶다. 생생하고 친밀하게 알고 싶다” 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우리의 소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참 기쁘다. 하나님은 자신을 알려 주기 위해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세상 어느 종교를 살펴보아도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신이 없다. 게다가 그 말을 기록까지 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주셨다. 그토록 크고 높고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이렇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내 손에 닿게 담아 주신 것이 한없이 감사해서, 이 책이 너무나 보배로워서 가끔씩 쓰다듬어 보곤 한다.   

성경을 매일 읽는 습관이 생긴 초등시절
처음 혼자서 성경을 읽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다. 주일학교에서 1년 1독을 목표로 평일에 3장, 주일에 5장씩 성경을 읽게 했다. 그러나 어떻게 읽으라고 가르쳐주지는 않았기에 무작정 분량을 채우기만 했다. 매일 밤 잠자리에 누워서 억지로, 긴 장이 포함된 날은 한숨을 쉬면서, 주일에는 더더욱 한숨을 쉬면서, 잠에 겨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성경에는 왜 그리 어려운 단어들이 많고 이해하기 힘든 구절들이 많은지! 이 시기에는 마음에 와 닿는 구절들을 중심으로 훑어보듯 읽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다고 유익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성경을 매일 읽는 습관’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성경을 읽기 위해 시간을 내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은 마음이 있든 없든 이 의무를 지킨 덕분이었다.

성경을 처음 읽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바로 시간을 내는 일이다. 대학교 때 묵상을 위해 ‘7분’의 시간을 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7분은 너무 짧다! 그냥 읽기만 한다면 모르겠지만, 읽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마 4:4)을 듣고 싶다면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적어도 30분은 떼놓는 것이 좋다.

통일찬송가 212장은 원래 네 절 모두 “너 거룩해지기 위해 시간을 내라”라는 말로 시작한다. 흔히 하나의 습관이 몸에 배기까지 100일이 걸린다고들 한다. 이 시간이 풍성해지길 바라기 전에 기계적으로라도 시간을 내는 습관부터 만들겠다고 생각하면 첫 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3 때 믿고 경험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한 아이가 얼마 안 되는 떡과 물고기를 드렸을 때 주님이 축사하시고 5천 명을 먹이신 것처럼, 내가 적은 시간을 드리면 주님이 축복하시고 남은 시간을 몇 배로 쓰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고등부에 올라간 후 담당 전도사님이 매일 읽을 성경 범위와 설명이 실린 인쇄물을 일주일치씩 나누어 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매일성경〉이었다(당시에는 청소년을 위한 큐티 교재가 따로 나오지 않았다). 일단 분량이 짧아서 좋았다! 설명이 있는 것은 더더욱 좋았다. 그러나 묵상은 아직 배우지 못한 탓에, 본문을 읽고 설명을 읽은 후 짧게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다.  

성경을 안다는 자만과 냉소… 그러다 경험한 말씀의 능력
본격적으로 큐티를 배운 것은 대학생 때였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다는 개념도 그때 처음 알았다. 성경과 내가 비로소 인격적으로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성경을 알아가는 기쁨이 컸다. 큐티 외에도 따로 통독을 했다. 마치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한 자리에서 20여 장을 읽기도 했다. 큐티와 통독 외에 성경공부도 따로 하고 책도 많이 읽었다. 그렇게 6년 정도 시간을 보낸 후, 역설적이게도 성경에 흥미를 잃었다. 어느 본문을 보아도 다 아는 것 같았고 기대감이 들지 않았다(그 건방지고 무지했던 자만심이 나중에 얼마나 죄스럽고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때부터 일종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다른 교파의 신학 서적이나 가톨릭 서적들을 뒤적거렸다. 지식은 늘었는데 기쁨이 사라졌다. 다니던 교회에도 많은 문제가 발생하면서 점점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사람이 되어 갔다. 에스겔 34장을 진심으로 믿고 교회를 위해 기도했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감히 성경이 틀렸다고 생각지는 못했으나 ‘성경의 약속들은 웬만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무의식적 불신앙이 마음 깊이 굳은살을 만들었다. 분노하지 않기 위해 설교 시간에 귀를 닫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영혼의 갈증이 심했지만 무엇을 어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시간이 흘러갔다. 기대도 없고 기쁨도 없고 삶의 변화 또한 당연히 없었지만, 성경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습관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큐티 책을 이것저것 바꾸어 보기도 하고, 경건서적을 성경 대신 묵상하기도 하면서 어떻게든 식은 마음을 되살려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사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출판사에 취직했다. 열 권짜리 강해설교집을 편집했는데, 그 말씀들이 내 속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냉소를 녹이기 시작했다. 책 한 권을 만들려면 적어도 원고를 네다섯 번은 읽게 된다. 총 130편의 설교를 그만큼씩 정독한 것이다. 그러면서 교회와 예배와 말씀에 대한 기대와 갈망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힘이 있는지! 한 방울씩 떨어진 말씀이 강고한 마음을 녹이고 살려 냈다. 

   
▲ 네덜란드의 화가 헤릿 도우(Gerrit Dou)의 <성경 읽는 여인>(1630-1635년경, 출처: 위키미디어코먼스)

목사인 남편이 분립 개척을 시작한 무렵부터는(16년 전이다) ‘맥체인 성경 읽기 달력’에 따라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 목사가 19세기에 만든 이 달력은 하루에 네 군데의 성경을 읽도록 짜여 있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창세기, 에스라, 마태복음, 사도행전으로 시작하여 역사서와 선지서와 복음서를 마무리하는 역대기, 말라기, 요한복음 및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선포하는 요한계시록으로 마무리된다. 네 군데를 다 읽으면 1년에 구약성경 한 번, 시편과 신약성경은 두 번 읽을 수 있다. 처음 몇 년은 네 군데를 다 읽기가 힘들어서 많이 건너뛰었는데, 3-4년 지나니 익숙해져 거르지 않고 읽게 되었다.

지금 나의 성경 읽기 시간은 어떨까? 좋다. 참 좋다! 사모로서 많은 교인들의 어려운 사정과 문제들을 어찌 다 감당하느냐고 사람들이 묻곤 하는데, 이 시간 때문에 감당한다. 내 힘과 지혜의 분량에는 넘치는 일들이 대부분이라 그 무게에 몸과 마음이 짓눌릴 때가 많지만, 그때마다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면 되지’라고 생각하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빌 4:13) 모든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고 담대히 믿는다. 그래서 더더욱 이 시간을 건너뛸 수가 없다. 하루만 건너뛰어도 영혼의 생기와 힘이 소진되며 상황에 압도되는 것을 느낀다. 정말이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을 날마다 먹어야 산다.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닌, ‘듣는’ 것이자 ‘먹는’ 것
그렇다. 사실상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요 먹는 것이다. 맥체인 달력에 따라 성경 읽기가 자리를 잡고 매 시간 놀라운 깨달음들로 노트를 빼곡히 채웠는데도 내 영혼의 상태가 이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곰곰 생각하며 내가 성경 읽는 방식을 돌아보았다. 그때 깨달은 사실이 ‘아, 나는 나한테 익숙한 방식대로 다른 책을 읽듯이 성경도 읽으며 연구했구나. 내 즐거움은 공부하고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이었구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성경을 듣고 먹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경외함과 사모함’임을 알게 되었다.

경외함은 지금 내가 누구 앞에 나아가려 하는지 인식하는 데서 나오는 마음이다. 내가 지금 누구의 얼굴을 뵙고 누구의 말씀을 들으려 하는지 상기해야 한다. 나는 이 경외함으로 나아가는 데 찬송이 아주 유익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도 하나님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에 대한 찬송을 부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내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할 일이 찬송이니 지금부터 찬송을 즐겨 하려 한다.

그리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른다. 때로는 진짜 하늘을 쳐다보며 부르기도 한다. 나는 하나님의 모든 이름 중에 이 이름을 가장 사랑한다. 그래서 다른 많은 이름도 부르지만 이 이름을 가장 자주 부른다. 은혜의 보좌에 앉아 계신 아버지 앞에 엎드려 말씀을 들려주시길 간구하며, 잘 알아듣게 해달라고 성령께 기도한다. 성경 읽기가 어렵게 느껴지고 자신이 제대로 읽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어려움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는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고, 그러니 혼자 깨달아 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성령께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하기만 하면 된다고 격려하곤 한다. 내가 매일 그분의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권할 수 있다.

A. W. 토저는 성령을 일컬어 “우리가 잊어버린 분”이라고 했다(《인간을 추구하시는 하나님》, 복있는사람 역간). 성령과 관련하여 잘못된 가르침과 행태들이 워낙 많다 보니 아예 성령을 외면하고 그저 내 안에 내주하시겠거니 믿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다. 아, 이것은 우리의 엄청난 특권을 내 버리는 잘못이다! 성령은 바로 우리 시대를 위해, 우리 각 사람을 실제로 도와주시기 위해 보냄 받으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친히 감동하여 기록하신 성경을 읽고 깨닫는 일에서는 더더욱 도와주신다!

이렇게 기도한 후에는 천천히 성경을 읽어 나간다. 깨우쳐 주시는 바가 있으면 잠시 멈추어 생각하고, 기억할 내용은 나중에 되새길 수 있도록 적어 둔다. 죄를 지적해 주시면  회개하고, 내가 아는 형제자매들의 사정이나 목회자들이나 교회나 나라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주시는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한다. 단순히 사안의 중대성이나 문제의 심각성이나 나의 안타까운 마음이나 정의감에서 나오는 기도는 힘이 없다는 것, 응답하실 때까지 낙심하지 않고 강청할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기도는 “믿는 고로”(시 116:10) 아뢰는 것이다. 내 범위를 뛰어넘는 일들, 내 마음으로 도저히 짊어질 수 없는 애통한 일들, 뭐라고 기도할지조차 알 수 없는 일들에 맞닥뜨릴 때, 무엇보다 먼저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이 일에 대해 말씀해 주시길 간구하고 기다린다. 그 말씀을 듣고 믿을 때, 비로소 내 마음속에서 기도의 말들이 솟아난다.  

필요한 것은 오직 ‘경외함’과 ‘사모함’뿐
젊었을 때는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 ‘지금 내 상황에 해당되는 말씀’을 들길 바랐고 ‘오늘의 적용’을 찾으려 애썼다. 그래서 레위기의 제사 이야기나 민수기의 명부 같은 본문이 나오면 빨리 그 부분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이제는 굳이 ‘오늘’에 제한하지 않고 무슨 말씀이든 기대하는 마음으로 듣고 마음속에 간직해 둔다. 그러면 성령께서 필요할 때 그 말씀을 꺼내서 일깨워주시고 적용해주신다.

오늘 들은 말씀이 내일 필요할 수도 있고 1년 후에 필요할 수도 있다. 오늘 들은 말씀에 순종할 상황이 내일 생길 수도 있고 1년 후에 생길 수도 있다. 그러니 다만 오늘의 양식을 먹고, 에스겔처럼 배와 창자에 채우며, 마음에 잘 간직해두면 된다. 내가 먹은 말씀을 잘 간직하기 위해 사용하는 한 가지 방법은 묵상을 마치기 전 하루 동안 기억할 구절 하나를 포스트잇에 적어 눈길이 자주 닿는 곳에 붙여 놓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오늘 묵상을 시작하기 전에 작년 같은 날짜에 기록한 내용을 다시 읽고 되새기는 것인데, 무엇이든 잘 잊는 내게는 상당히 도움이 된다. 

매일 구체적인 적용 거리를 찾지는 않지만 내가 말씀을 잘 먹고 있는지 점검해 보는 시금석은 있다. 디모데전서 1:5이 그것이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내가 말씀의 교훈을 잘 받고 있다면 하나님을 더 알고 사랑하게 되며, 주변 사람들에게 더 큰 관심과 관용이 생길 것이다. 더 참고 더 기다릴 것이며 더 기도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설사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게 되었다 해도 내 묵상은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먹는 것이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그렇다. 내가 먹는 말씀이 내 영혼을 형성한다. 말씀을 잘 먹으면 몸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전에는 나쁜 습관을 끊거나 선한 일을 하기 위해 무수히 결심했고, 무수히 깨뜨렸다. 지금은 결심하기보다 나아가길 힘쓴다. 존 버니언의 조언에 따라 내 상태가 좋든 나쁘든, 나쁜 죄를 지었든 아니든 한결같이 나아가려 한다.
 
“때맞추어 내리는 비처럼, 뿌리에서 올라오는 수액처럼, 등잔의 기름처럼 날마다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가 한결같이 믿고 사랑하고 기도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것은 한결같이 은혜를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Bunyan, <The Throne of Grace>)   

이 책은 정말 살아 있는 것이 분명하다. 40년 넘게 반복해서 읽었는데도 읽을 때마다 미지의 영역이 더 확장되는 느낌이다. 해마다 그 전해에 기록한 노트를 읽으며 ‘나는 작년에 대체 뭘 읽은 거지? 왜 이렇게 피상적으로 읽었지?’라고 묻게 된다. 내가 깨달은 사실 한 가지는 성경 각 구절마다 무한한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어떤 익숙한 구절도 다 아노라 감히 말하지 않는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만큼씩 알려주시는 진리를 두렵고 떨림으로, 감사함으로 받을 뿐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성경 읽기에 대해 부끄럽지만 길게 이야기한 것은 나처럼 평범한 어떤 사람, 영혼의 갈증이 있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격려와 도움이 되길 바라서이다. 내가 여기에서 말한 것은 성경을 읽는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하다. 통독을 하든 큐티 교재를 활용하든 맥체인 달력을 사용하든, 찬송을 먼저 하든 나중 하든, 읽는 사이사이 기도하든 다 읽고 한꺼번에 기도하든 상관이 없다. ‘적어도 30분’이라는 것도 시간을 충분히 가질수록 영혼의 유익이 크다는 내 경험 때문에 권한 것이지 30분 이하는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제시한 기준이 아니다. 오직 필요한 것은 경외하고 사모하는 마음뿐이다. 말씀하시는 분을 경외하며 그분의 말씀 듣길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든 한결같은 은혜를 공급받을 것이며, 성령께서 그에게 맞는 길로 인도해주실 것이다. 

존 웨슬리는 “한 책의 사람”이라고 불렸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칭호인가! “나를 한 책의 사람이 되게 하라. 이제 나는 인간의 분주한 길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나는 홀로 앉아 있다. 오직 하나님만 여기 계시다.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 나는 그분의 책을 열어 그 책을 읽는다”(《탁월한 영적 지도자 존 웨슬리》, 기독신문사 역간).

나도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해주시길, 이 글을 읽는 그 한 사람과 함께 말씀의 광대한 바닷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시길 간구한다.

오, 마리아처럼 영원히
주님 발 아래 앉아 있는 것,
그것이 내 행복한 선택일세.
내 유일한 관심, 즐거움과 지복,
내 기쁨, 지상의 천국은
신랑의 음성을 듣는 것!
-찰스 웨슬리

 

정상윤
번역가이자 목회자 사모. 연세대 불문학과와 서울대 영문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옮긴 책으로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부흥》 《사도행전 강해설교》 《창세기에 나타난 복음》 《빌립보서 강해》 《영적 침체》 《요한복음 3장 강해》, A. W. 토저의 《하나님을 추구하라》 《인간을 추구하시는 하나님》 등이 있다.

     관련기사
· 삶의 갈피가 잡히고 빛이 번쩍하던 순간
정상윤의 다른기사 보기  
ⓒ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복음과상황 기사제보 광고문의 제휴안내 오시는길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 506-10 산성빌딩 104호 우)120-836 | 전화 : 02-744-3010 | 팩스 : 02-744-3013
발행인 : 김병년 | 이사장 : 박종운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병년
Copyright 2008 복음과상황.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con@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