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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는 어떤 조건도, 제한도 없다
[351호 커버스토리]
[351호] 2020년 01월 21일 (화) 15:30:39 김근주 goscon@goscon.co.kr

 

위기와 정의
요즘은 누구를 만나도 앞날을 우울하게 이야기한다. 미래가 아주 기대된다는 희망찬 사람은 거의 보기 어렵다. 그럼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미 힘든데 앞으로도 더 어려울 것 같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러고 보면 구약 예언자들은 언제나 위기 시에 출현했다. 호세아, 아모스, 이사야, 미가는 주전 8세기 앗수르의 침략 시기에 등장했고, 스바냐,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예언자는 바벨론의 정복과 맞물려 등장했다. 이후 등장한 학개, 스가랴, 말라기 예언자 역시 강대국 페르시아가 온 세상을 장악했던 시기에 활동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언제나 위기와 결부된다. 그것도 나라 자체가 망했거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과 결부된다. 

매우 위급한 풍전등화의 현실에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말은 너무나도 당연히 ‘하나님께로 돌아오라’이되, 그 구체적 내용은 제사나 경배가 아니라 놀랍게도 ‘정의와 공의’였다. 이런 시기에는 일단 예배를 강화하고 종교적 형식을 강화하며 오직 하나님 은혜를 구하고 자비를 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지 않은가,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에 처한 이들을 위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놀랍게도 예언자들은 가난한 자를 돌아보지 않고 정의를 팽개친 채 수행했던 제사를 격렬하게 고발하고 규탄했다. 그들에게 멸망 직전의 나라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의를 회복하는 것이었다(가령, 사 1:10-17; 렘 4:1-4, 22:1-4; 겔 22:1-31; 호 6:4-6; 암 5:4-27; 슥 7:8-14).

그렇다면 구약 성경은 위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되, 그것은 함께 살아가는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는 것임을 명확히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예배의 회복’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회복이다. 사실, 진정한 예배의 회복은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며, 그 공동체는 왕과 귀족만이 아니라 가난한 백성과 거류민이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이다. 그런 점에서 ‘예배의 회복’이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말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뜻은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다. 

   
 

배제와 사랑을 같이 말하는 교회
오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개신교 목사인 필자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을 비롯한 대다수 한국 개신교 교단은 매우 단호한 동성애 반대 입장을 취한다. 이들은 동성애를 옹호하거나 동성애에 관대한 생각을 가진 이들을 목회자 후보생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명문화하기도 하고, 심지어 찾아내 축출하겠다고 한다. 동성애를 행하는 사람은 세례와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나아가 지방자치 단체에서 추진하는 인권 조례를 근거도 없이 그저 동성애 허용 조항이라며 벌떼같이 달려들어 민원을 넣더니 2015년 이래 스무 곳 넘는 지자체 인권 조례안을 무산시켰다. 인권 조례안에는 ‘성적 지향’ 같은 표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집단 민원을 넣어 일체의 ‘인권 조례’를 무산시켰다는 점은, 개신교계의 이런 행동이 명백히 ‘반인권적’임을 잘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동성애자를 미워하거나 혐오하지 않고 오히려 진실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을 한다고 말한다.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을 깨닫게 하고 고치게 하려는 것이 자신들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전형적인 표현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이다.

필자는 게이 그리스도인들을 여럿 만난 적이 있다. 필자가 만난 형제들은 필자와 똑같이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분들이었다. 음욕이 불일 듯해서 무엇이든 도를 넘어 해보려는 이들이 아니라(이런 짓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성애자들이다), 그냥 사랑하는 사람(물론 동성이다)과 함께 맛있는 것 먹고 영화도 보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만나면서 필자는 로마서 1장을 오늘날 동성애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려움을 확인하였다. 

레위기처럼 로마서에서도 우상 숭배와 동성 성행위가 나란히 다루어진다. 이 두 행위의 공통점은 “마음의 정욕”(1:24, 개역개정), “부끄러운 욕심”(1:26), “상실한 마음”(1:28)에서 보듯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은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물론 동성애자들에게 동성을 향한 욕망이 있지만 그것은 이성애자들이 지닌 이성을 향한 욕망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냥 자신의 정체성이 그러한 사람들이다. 여자와 관계하는 것이 오히려 고통이고 하나도 즐겁지도 끌리지도 않는 이들, 그래서 여자와의 관계가 도리어 “역리”가 되기도 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 다수가 이성애자이며 이성애 문화가 사회 전반을 채우고 있다는 점에서, 이분들은 명백히 ‘성 소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네 교회는 우리 곁에 이러한 성 소수자들이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주일 설교에서 거침없이 성 소수자들을 모욕하는 발언을 한다. 성 소수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않은 채, 우리는 오직 성경을 내세우며 이들을 모욕하고 규정하고 혐오 발언을 일삼고 급기야 배제를 시도한다. 이를 생각하면, 성 소수자 담론에 접근하는 첫 걸음은 그들을 만나는 일이다. 그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는 것이 우리 신앙의 방식이다. 전체를 싸잡아 ‘동성애자는 이렇다’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만나고 사정을 듣는 것이 먼저이다. 그것이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에 집중하는 우리 신앙의 바른 태도이다. 사람을 고려하지 않은 채, 글자로 쓰여 있는 말을 가지고 비정상이네 율법을 어겼네 할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나고 그 사정을 듣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방식이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 작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이 존재하는데도,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말을 공공연히 내뱉고 그것이 정치인들의 입에서도 서슴없이 나올 때, 성 소수자들은 자신들의 성적 지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음지로 숨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렇게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음지로 갈수록 그들의 삶은 더욱 고통스럽고 때로 왜곡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이성애자 기독교인들이 원하는 현실인가? 이것이 교단 총회가 원하는 결과인가? 근본적으로, 과연 이것이 복음, 인간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가? 

기존 제도와 부당함을 박차고 나온 것이 종교개혁이건만, 그 500주년 되던 해에 한국교회는 동성애자를 교회에서 추방하고 여성 안수를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요가와 마술 같은 것을 금지하고 이슬람을 반대한다고 공표했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교회는 교회만의 견고한 성을 쌓아 그 성안에 자기들끼리만 있으려 했다. 이성애자로 태어난 자신들은 평생 가도 동성애는 안 할 것을 알고 있으니, 성경의 문자에 기대어 동성애자 때문에 교회가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이성애자의 교회를 만든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유를 제쳐둔 채, 동성애에 옹호적이라는 이유로 공직자를 반대하고 그를 위해 세력을 규합해서 힘을 행사한다. 명백히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와 사랑의 길과는 반대로 간다.

죄의 문제
당연히 죄는 그저 묵과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이 동성애를 금지하기에 죄라는 견해는 지극히 편협하다. 가령 레위기 18장과 20장에 따르면 두 자매를 동시에 아내로 삼는 것은 죄이지만, 창세기 본문은 자매와 결혼한 야곱을 정죄하지 않는다.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면 두 사람을 모두 죽이라고 레위기는 규정하지만(20:10), 다윗과 밧세바는 죽임당하지 않았다. 이처럼 죄에 대한 판정은 시대마다 달라진다. 이런 경우 본문이 속해 있는 시대의 문화적 배경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심지어 바울은 남자는 머리가 짧은 것이 “본성”(nature)이라고까지 했지만(고전 11:14), 오늘 우리에게 이런 일은 본성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본성”에 대한 이해조차도 시대와 문화의 틀 내에 속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구약과 신약이 규정하는 죄의 본질에 대해, 그 시대의 문화 속에서 왜 이러한 행동이 죄였는지 묻는 것이 필수적이다. ‘감독과 집사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딤전 3:2, 12)라는 본문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교회의 중요 직분자는 남자여야 한다는 어리석은 주장으로 이어진다.(놀랍게도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이 아직도 존재한다!) 

바울이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다’면서 여자는 예언이나 기도할 때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한다(고전 11:2-16)고 강력하게 촉구하는데도 ‘해석’의 과정을 통해 오늘날에는 이를 따르지 않는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3-34)는 구절은 아무런 ‘해석’ 없이 문자 그대로 따르는 것을 당연시하는 교단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성경에 대한 이런 태도는 명백한 ‘아전인수’이다. 이들은 하나님 말씀을 강력하게 내세우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이해와 필요를 최우선에 둔 자들이다. 수천 년 전의 시대와 문화, 사고를 배경으로 한 성경 본문은 반드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럴 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 시대에 드러나고 증거된다.

죄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파괴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피조 세계 사이. 이와 같은 관계를 깨뜨리고 짓밟고 파괴하는 것이 죄이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 성추행하거나 희롱하는 말을 하는 것은 명백히 상대를 파괴하는 행위이고 관계를 파괴하는 죄악이다. 그렇다면 남자와 남자가 서로 사랑하여 함께하고자 할 때 이 두 사람은 무슨 관계를 파괴하는가? 특히 이 두 사람이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이 두 사람은 무엇을 파괴하고 짓밟은 것인가? 서로 사랑하는 두 여성이 함께 있고자 선택할 때, 이 두 사람은 무슨 관계를 파괴한 것인가?

죄는 관계의 파괴이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의 파괴는 기본적으로 힘과 권세를 가진 이가 그렇지 못한 이를 짓밟는 형태로 드러난다. 이렇게 양쪽에 힘이 기울어진 것을 두고 오늘날에는 ‘권력 관계’라고 표현한다. 권력 관계야말로 죄의 온상이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우리야를 죽였고, 소돔 사람은 그들을 찾아온 나그네를 짓밟으려고 하며, 애굽의 바로는 나그네 아브라함의 아내를 빼앗아간다. 이를 생각할 때, 죄는 관계의 파괴이되,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약자에 대한 유린’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율법과 예언자의 글에는 가난한 자를 거듭 언급한다. 그렇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약자에 대한 유린이다. 힘을 지닌 남자가 여자를 성폭행하거나 구타하는 것, 여성에게 모욕적인 말을 내뱉는 것, 사회 안에 가득한 성차별 구조, 다수의 한국인들이 난민과 같은 소수의 사람들을 모욕하고 반대하는 것, 이 모든 것이야말로 약자에 대한 유린이며 성경이 규탄하는 죄악이다. 우리가 싸울 것은 관계의 파괴, 힘을 이용하여 약자를 짓밟는 죄악과의 싸움이지,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 소수자 같은 그저 그러한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싸움이 아니다. 동성애가 문제 되는 지점이 있다면,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성적인 만족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것은 이성애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 그게 맞다.

낯선 존재, 새로운 결정
사도행전 15장은 처음으로 열린 공의회를 보여준다. 모세의 법은 할례를 명령하기에 이방인들 역시 모세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예루살렘에 모인 이들은 “많은 변론”을 거쳐 할례로 대표되는 외적인 표지를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그들이 지닌 유일한 성경이던 구약에 상당히 많은 규례와 요구들이 존재함에도, 첫 교회는 놀랍게도 그 많은 규정들을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것은 점차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되었을 것이다. 구약을 펼치면 어디든 이에 해당하는 명령을 볼 수 있는데, 첫 교회는 그 모든 명령과 규정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라는 ‘낯선 존재’였다. 거의 유대인들로만 이루어진 공동체에서는 이 같은 문제가 논의되지 않았지만,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롭고 낯선 존재가 점차 생겨나자, 이들은 그들이 지닌 구약 성경, 유일한 하나님 말씀을 새롭게 해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성경 해석은 성경 묵상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낯선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은 기독교의 긴긴 역사에서도 확인된다. 바울은 노예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여성의 정치 참여 같은 주제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미국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흑인 그리스도인이라는 낯설고 새로운 존재는 ‘노예들은 상전에게 주께 하듯 순종하라’는 말씀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게 만들었다. 노예제도를 바라보는 성경적 입장이 무엇인지 논의를 촉발한 것은 성경 자체가 아니라 흑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인식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주관해서는 안 된다는 바울의 주장은 고대와 중세에까지는 그리 문제 되지 않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여성의 참정권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주장 앞에서 새롭게 해석되어야 했다. 구약과 신약에 가득한 ‘성차별적인 구절’은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이며 동등하다는 근대 이후에 이르러 새롭게 해석되어야 했다. 이 역시 성경이 새로운 해석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여성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성경 본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초래한 것이다.

얼핏,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해석이 시대 상황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영원함’ ‘절대불변’ 같은 것이 하나님과 연관된 표현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만일 어떤 것이 절대불변한다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꽉 막힘, 지금과 잘 맞지 않음,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음, 이런 것이지 않을까? 성경이 절대불변의 진리를 말한다면, 이는 성경이 변화된 시대에는 잘 안 맞는 이야기일 것임을 의미한다. 당연히 성경은 절대 불변의 진리를 증언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 진리를 지금부터 수천 년 전의 사회와 문화, 사고방식, 세계관을 사용하여 표현한다.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진리이기에 성경의 내용은 특정한 시대의 문화와 인식, 사고방식을 사용하여 표현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성경이 진리를 전하기 위해 사용한 틀인 고대의 문화, 고대의 과학, 고대의 세계관까지 진리라고 여기면, 그것은 명백히 오류이다. 오늘 우리의 과제는 고대의 문화와 생각으로 표현된 구약과 신약을 읽으며 그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찾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진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 시대의 과학, 이 시대의 문화로 표현할 것인지가 우리의 과제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렇게 구약과 신약의 가르침 속에 담긴 본질적 가치에 대한 모색, 그렇게 찾아낸 가치를 오늘의 용어로 표현하는 과제를 수행할 때, 이러한 해석 작업의 기준은 무엇일까? 이에 관해 성경은 일관된 기준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삶을 이야기하는 레위기 19장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로 거룩한 삶을 단적으로 표현한다(레 19:18). 그리고 바울 역시 구약 율법의 핵심이요 본질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롬 12:8-10; 갈 5:14).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를 한마디로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마 7:12)고 요약하신 것 역시 레위기, 그리고 바울과 통한다.

참으로 놀라운 점은, 이런 요약이 그리 종교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교회에서만 들을 수 있는 매우 기독교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위인이라면 누구라도 할 법한 말이라는 점에서, 예수님과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요약했다는 점은 특별하다. 이와 같은 요약은 우리 신앙이 교회당 안에서만 통하는 우리끼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한 보편타당한 가르침임을 보여준다. 당연히 그 같은 이웃 사랑을 수행하는 힘은 나와 같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은혜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되, 그 사랑을 수행하는 원동력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이다. 그러므로 내적 동력은 매우 종교적이며 특수하게 기독교적이되, 겉으로 나타난 모습은 보편적이며 일상적이다.

   
▲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김근주 지음)

위기의 때에는 배타적인 움직임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나치가 그러했고, 일본 제국주의가 그러했다. 비관적 전망으로 가득한 미래를 이야기하는 오늘의 우리 역시 더욱 배타적이기 쉽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위기의 때야말로 배타적 태도로 종교적 열정에만 힘쓰며 살 때가 아니라, 가난하고 연약한 이웃과 소수자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정의의 때임을 증언한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의 외침을 외면하였고, 결국 풍성한 제사와 함께 성전은 파괴되고 나라는 망하였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예배의 회복을 부르짖으며 반동성애, 반이슬람을 외칠 것인가, 아니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며 함께 살아갈 것인가? 

온갖 성경 구절을 내세우며 실제로는 혐오와 배제를 일삼는 교단은 그들만의 세상에서 그들끼리 서로 세습하고 적당히 눈감아주면서 그 와중에도 ‘오직 성경’을 외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알고 있다. 목사나 총회가 신앙을 지도하고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모두 하나님이 부르신 제사장이며 성경을 해석하고 살아가는 당사자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 곁에 성 소수자가 있음을 기억하고 유념할 것이다. 아직 ‘동성애’ ‘LGBTQ’와 같은 현실에 관해 우리 생각이 복잡하고 정리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는 우리 곁에 있는 성 소수자들을 기억하며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곁에 있는 성 소수자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나누며 함께 살아가기를 계속 배울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에서 ‘이웃’에는 아무 조건이나 제한이 없다. 그저 곁에 있고 함께 살아가니 이웃이다. 한국 개신교 교단마다 이웃의 자격을 규정하지만, 주께서 사랑하라 명하신 이웃에는 단연코 아무런 수식어가 없다. 그렇게 이웃을 끝까지 사랑하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 혐오를 일으키고 배제를 자극하는 세상에서도 끝내 사랑을 솟구치게 만드는 힘은 오직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서서 우리는, 통합인지 합동인지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대형 교단과는 다른 길을, 혐오가 아닌 사랑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사랑이 이긴다. 

 


김근주
학부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신학교에 가게 되었고 결코 상상해본 적 없는 목사가 되었다. 예언자들이 외치는 심판뿐 아니라 회복의 메시지야말로 예수께서 이 땅에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알짬임을 깨닫고, 이를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며 살기를 소망한다. 소망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연구나 준행, 가르침 모두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서울대, 장신대 신대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다니엘처럼》 《복음의 공공성》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시리즈) 《특강 예레미야》 《이사야가 본 환상》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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