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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이웃'들: 혐오 저항으로 읽기
[351호 커버스토리]
[351호] 2020년 01월 21일 (화) 15:10:36 김혜령 goscon@goscon.co.kr

 

예수 복음의 윤리적 핵심은 ‘하나님사랑’에서 비롯되는 ‘이웃사랑’이다. 아무리 하나님 나라와 구원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웃사랑이 빠져있는 믿음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믿음에 불과하다(고전 13:2). 비록 우리의 믿음이 늘 연약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매 순간 제대로 살아내기 어렵더라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가장 선명하게 살아있는 계율이자 복음이다. 이 땅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복음이 그렇게도 폭발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도 선교사들과 첫 성도들이 보여준 놀라운 이웃사랑 덕분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첫 기독교인들은 반상의 제도와 남존여비의 사회문화적 경계를 깨고 양반이든 노비이든, 남자든 여자든 차별 없이 복음을 전하였다. 빈민이나 고아에게는 음식을 나누어주고 병을 고쳐주며 근대식 교육을 베푸는 사역을 통해, 이 땅에서 차별받고 고통받는 자 모두 그리스도인의 귀한 이웃으로 초대되어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기독교는 130여 년의 시간 속에서 ‘이웃사랑의 종교’라는 존귀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일반교양 수업에서 ‘기독교의 본질은 이웃사랑에 있습니다’라고 가르치는 것을 기피하게 되었다. 학생들 얼굴에서 번지는 비웃음이나 의아한 표정을 무시하면서까지 기독교의 본질을 선포할 용기가 없어서다. 이러한 경험이 나에게만 유별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리라. 연구 책임자로 참여한 〈한국사회의 사회적 차별과 혐오에 대한 시민의식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의 주요 3개 종교(불교, 기독교, 가톨릭) 중 기독교인의 자기 종교 호감도가 가장 낮게 조사되었다.(5점 만점, 불교 4.52점 / 기독교 4.27점 / 가톨릭 4.58점) 타종교인이 보는 종교별 호감도 역시 기독교가 이슬람교를 제외하고 가장 낮았다.(5점 만점, 불교 3.16점 / 기독교 2.26점 / 가톨릭 3.22점 / 이슬람교 1.94점) 이 수치를 일차적으로만 접근한다면, 기독교 비호감의 원인을 이웃사랑을 잘 실천하지 못하는 한국교회 위선적 현실에서 찾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웃사랑 정신의 초심으로 돌아가 ‘더 많은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고 봉사하며 복음을 전하자’라는 목회·선교적 처방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본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비호감의 대상이 된 것은 예수 복음의 핵심인 이웃사랑을 저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명확히 말하건대, 한국 기독교인들과 목회자들 대부분이 예수가 보여주신 이웃사랑이 어떠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까지 이르러야 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알기는 아는데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위선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잘 몰라서 혹은 부분만 알아서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게 문제다. 더 큰 문제는 예수의 이웃사랑에 대한 무지가 오늘날 한국교회를 휩쓸고 있는 ‘혐오’라는 사악한 영의 숙주가 되어, 세상에 더불어 살고 있는 어떤 이들의 존재 근간과 삶의 권리 자체를 부정하거나 침해하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은 이웃을 정말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누군가에게 그 사랑은 혐오적인 말과 감정으로 휘둘리면서 돌이키기 힘든 매우 위중한 상처를 내고 있다.

우리의 사랑이 누군가에게 혐오로 돌려지지 않기 위해, 지금부터는 예수님이 만난 이웃들의 다양한 존재론적 층위들을 살펴보며 이웃사랑 명령의 핵심에 접근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 22:39)는 예수님의 말씀을 교회에서 배울 때 당신은 누구를 떠올렸습니까?” 

층위 1. 고아와 과부 – 당연히 사랑받아야 할 이웃
만약 당신이 성서가 지목하는 고아와 과부처럼 먹고살기가 막막한 ‘가난한 이웃들’[층위 1]을 떠올렸다면, 당신은 ‘유대 율법을 따르는 자’일 수는 있어도 ‘예수의 이웃사랑 명령’을 따르는 자라고 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생계를 담당할 방법이 없어 가난해진 주변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은 이미 율법(신 24:19-21)에도 기록된 명령이다. 이러한 돌봄의 원칙은 유대교뿐 아니라, 불교, 이슬람교를 비롯하여 민간 토속신앙에서도 매우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다시 말해, 고아나 과부가 상징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이웃사랑 명령을 굳이 받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대다수 인간 사회에서 발견되는 ‘돌봄 도덕’의 디폴트(기본값)이다. 그래서일까? 실제로 4복음서를 통틀어도 고아를 특별하게 배려하는 예수의 말이나 행동을 찾을 수 없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한 일은 있어도, 그 과부를 배려하라는 명령을 제자들에게 따로 하는 장면도 찾을 수 없다. 이는 예수가 고아나 과부에게 매정해서가 아니다. 청중인 유대인들에게 공동체 내부의 고아와 과부의 어려움을 돌보는 일은 특별히 예수가 명령을 더하지 않아도 이미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단언컨대, 오늘날 한국교회가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해도, 고아나 과부와 같이 우리 사회의 많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가장 큰 관심과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집단이 교회이고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국가가 가난한 국민들을 돌볼 수 없었던 시절 국가를 대신하여 그 일을 도맡아 온 무수히 많은 구호단체들의 시작과 운영에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깊이 참여해왔다. 그렇게 한국 기독교는 여러 비판적 한계점들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관심을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상대적으로 가장 많이 실천해왔다고 자부할 정도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우리의 이웃사랑이 위기에 직면한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이웃사랑을 다 이루었다고 자부할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하고 가장 잘 해왔지만, 타종교인들도, 심지어 세속인들도 그 정도의 도덕을 지향한다. 

바로 여기서 예수 이웃사랑의 확장선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고아와 과부처럼 공동체 내부의 관습적 도덕에서 ‘이미 마땅히 돌봄을 받아야 하는 자’[층위 1]로 인정받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데에 머물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지 않았을 것이며, 빌라도에게 넘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 자신을 십자가 죽음에 처하게 했을 만큼 위험했던 것은 그의 이웃사랑이 유대사회가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설정해놓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이웃의 경계선 너머, 그 밖으로 쫓겨난 자들, 그리고 원래부터 그 밖에 있었던 자들에게 궁극적으로 향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사회에서 부정하다고 여겨졌던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를 즐겼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동일한 임재를 선포하였다. 유대인이 보기에 혐오(저주)받아 마땅한 죄인들에게 예수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녀이자, 사람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이웃으로 선언하는 파격(破格)을 보였다.      
기존의 종교와 도덕으로는 도저히 사랑받을 만한 위격(位格)을 갖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혐오받아 마땅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이 회복되었음을 선포하기, 바로 그것이야말로 예수 이웃사랑 명령의 핵심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특정 집단들에 대한 혐오의 생산자이자 확산자로 지목되는 원인들 중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의 관습적 도덕 수준에서도 이미 ‘마땅히 돌봄을 받을 자격을 얻은 연약하고 선량한 자들’에게 이웃사랑을 집중적으로 쏟아붓는 다수의 선량한 기독교인들의 심리 이면에는, 그러한 자격에서 어긋나 있는 또 다른 사람들(예를 들어, 난민이나 성소수자, 이슬람교도 등)은 (자의적이고 왜곡된 성경의 구절 해석을 내세워) 그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 그리고 혐오가 마땅하며 합당한 대우라고 여기는 ‘폭력적’ 심리가 은밀하게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러한 이중성이야말로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사랑이 결국 사실은 ‘조건적’이며 ‘관례적’인 사랑, 그래서 선택적이고 차별적인 사랑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치명적인 비판에 직면하게 한다. 전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면, 결국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 바로 거기에서 예수는 관습적 도덕의 견고한 경계 너머 주류 집단의 오래된 ‘정당한’(정당한 것으로 가장한) 미움, 즉 ‘혐오’로 인해 고통받아 온 자들을 우리의 새로운 이웃이자 함께 삶을 나눌 사람으로 초대할 것을 명령한다.

층위 2. 병자와 장애인   
예수의 이웃사랑 명령을 따르는 일은 (첨부한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층위 1]의 굳건한 경계를 허물고, 기존의 종교와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혐오받으며 배제받아온 사람들[층위 2] - [층위 4]에게 예수의 이웃사랑을 어떻게 개방하느냐에 달려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일반적으로 ‘사회적 약자’라는 말로 쉽게 통칭해왔던 예수의 다양한 이웃들을 또다시 세분하면서,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발견되는 타자 혐오의 메커니즘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층위 2]로는 나병환자, 혈우병 걸린 자, 피부병자, 맹인, 앉은뱅이, 귀신들린 자 등 질병이나 장애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을 묶을 수 있다. 4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이웃들 중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집단이자, 예수로부터 가장 직접적으로 은혜를 입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층위 2]에 속하는 다양한 병자들과 장애인들을 왜 굳이 [층위 1]과 구분했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병이나 장애는 고아나 과부의 가난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잘잘못을 탓할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이들 모두 충분히 이웃사랑 도덕에서 이미 배려와 돌봄을 당연히 받아야 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과학과 인권이 발달한 현대인들의 사고구조에서 [층위 1]과 [층위 2]의 구별이 크게 의미 없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당시 유대사회에서 병자나 장애인의 존재론적 층위가 [층위 1]과는 매우 다르게 구분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지점을 이해하는 것은 현대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지금의 혐오 정서를 발산하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수가 한 맹인을 마주쳤을 때 제자들이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요 9:2)라고 물었다. 과학혁명 이전의 유대사회에서 질병이나 장애가 신 앞에 저지른 죄의 결과로 이해되고 있었으며, 접촉이 제한되는 부정한 존재로 취급되었는지를 확인해주는 결정적인 장면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떻게 부정함이나 접촉금지의 관습이 한 사회의 혐오와 연관되어 있느냐는 점이다. 《혐오와 수치심》(민음사)의 저자 마사 너스바움의 설명을 일부 차용하자면, 부정함이나 접촉 금지의 관습은 위생과 의료, 과학이 전무하던 시절 공동체의 안전과 구성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위험인자로 추정되는 질병과 장애의 접촉 자체를 우선적으로 피하도록 하는 강력한 감정을 공유함으로써 위험의 전염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기능을 하였다. 다시 말해, ‘역겨움’이나 ‘더러움’과 같은 혐오적 감정을 한 집단이 공유하며 위험요소를 집단으로부터 원천적으로 축출하거나 배제하는 방식으로 집단의 안전을 지켜내는 것이다. 여기서 종교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정결함과 부정함에 대한 종교적이고 도덕적 구분의 틀을 제공함으로써 위험인자에 대한 접촉의 통제가 더 강력하고도 수월하게 이루어지게 하는 기능을 효과적으로 제공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층위 2]에 속하는 이들에 대한 예수의 치유 행위는 개인에게 임한 단건(單件)으로서의 기적이 아니며, 예수의 그리스도 됨을 나타내는 영적 표징만도 아니다. 그것은 차별과 혐오에 기반한 사회구조 안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비참한 현실을 드러내는 일이자, 이들을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회복시키는 사회적 해방이며 인간 해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층위 2]의 사람들이 고루한 인식론적 편견과 비합리적 사고로 인해 고통받는 현대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와 다르지 않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사회집단의 질서와 다수 구성원들의 안정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공리주의적 도덕으로 인해 배제와 미움의 대상이 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상징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날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더럽다’ ‘역겹다’ 혹은 ‘위험하다’ 느끼며 이웃으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성소수자’나 ‘난민’ 역시 [층위 2]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합리적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이제 우리는 성소수자나 이슬람 난민이 우리 사회의 질서와 구성원의 건강 혹은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소위 ‘기독 전문가 집단’이 얼마나 많은 비과학적인 사실과 왜곡된 데이터에 근거하여 현대 기독교인들의 인식을 AD 1세기의 유대 정결의식 수준으로 후퇴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제대로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어떠한 사람이라도 사랑으로 품는 기독교의 고귀한 윤리가 ‘사회 주류 집단’의 질서와 안위를 지키기 위해 소수자들의 천부인권(하나님이 주신 권리)을 박탈하는 천박한 공리주의적 도덕으로 변질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반성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층위 3. 간음한 여인 
이제 [층위 3]에 속하는 간음한 여인(요 8:2-11)을 살펴보자. 한 여인이 간음을 이유로 유대인들 손에 끌려와 예수 앞에 던져졌다. 간음은 이스라엘의 십계명이 금하는 중죄 중의 하나이며, 동시에 결혼관계에 기초한 가족제도를 가진 모든 문명권에서 도덕적으로 큰 허물로 여겨지는 죄이다. 시대에 따라, 혹은 사회에 따라 간음은 심지어 법적인 처벌을 받았다. 그래서 [층위 2]나 [층위 4]와 달리 예수는 이 여인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간음한 여인의 죄가 왜 정말 문제인지를 제대로 해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의 간음죄는 (간음한 남자도 없이) 홀로 끌려온 여인을 미끼삼아 예수를 고발할 조건을 찾으려는 유대인들의 불순한 의도와, 그 의도에 말리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당당한 기세를 단숨에 제압하는 예수의 전략적 대응, 그리고 무엇이라 쓰셨는지 여전히 비밀에 덮인 땅에 적은 말, 마지막으로 죄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정죄하지 않겠다는 예수의 마지막 말 등을 모두 고려하여 해석해야 하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여성이 자신의 삶과 사랑, 성의 주체가 되기 매우 어려운 가부장적 사회 상황 속에 여성이 음행에 빠지는 원인의 상당수가 개인의 음욕이라기보다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성매매이거나 심지어 강제적 성폭력의 결과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여성신학적 주장까지 수용한다면, 요한복음 8장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간음한 여인 사건을 혐오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예수의 가르침이 조금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법과 관습에서 볼 때 마땅히 당장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부정한 죄인을 예수 앞에 끌고 와서는 당신도 우리와 같이 이 여인을 향해 혐오의 돌을 던지든지, 아니면 죄인 편을 들어 스스로 율법을 위반하는 현행범으로 끌려가라는 양자택일의 궁지로 예수를 몰아넣었다. 그러나 예수는 잔인한 혐오의 돌팔매질을 당장 중단시키는 신비의 카리스마를 보이면서도, 동시에 율법이 정한 죄를 부인하지 않는 제3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를 두고 예수가 간음할 수밖에 없는 일반 여성들의 취약한 상황에 대해 너무 무지한 것이 아닌가라고 비판을 가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의가 되었건, 타의가 되었건 간에, 음행으로 삶을 유지하는 방식은 그것이 사회도덕을 문란하게 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기 존재를 파괴하기 때문에 창조주 앞에서 큰 죄가 된다. 나는 예수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여인의 간음을 죄라고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정죄하지 않겠다는 ‘용서의 방식’으로 여인을 온전히 회복된 새 삶으로 초대한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이웃으로서 간음한 여인의 존재론적 층위를 세심하게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현재 한국 교회에서 가장 빠르게 번지고 있는 성소수자 혐오와 관련하여 주의해야 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일부 기독교인들의 혐오와 거리를 두는 기독교인들 중에는 성소수자를 간음한 여인과 같은 [층위 3]에 속하는 자로 성급히 구분하며, 그들의 성행위가 간음과 같이 하나님 앞에 심각한 죄이지만 동시에 용서받을 수 있는 죄이며, 그래서 전환적 삶(동성애적 행위를 그만 두기)으로 강권하여 초대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는 이들이 있다. 성소수자들에게 전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 교회 내의 자리를 조건적으로 허용한다는 면에서 분명히 진일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신 혐오 비판 담론에서 볼 때, 이러한 태도 역시 혐오의 테두리를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혐오란 대상에 대한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불허나 불인정뿐만 아니라, 조건적이고 관용적인 존재 인정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예수의 이웃 중 [층위 4]까지 온전히 이해해야 예수의 이웃사랑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며 혐오 폭력을 제대로 피할 수 있다.  

층위 4. 사마리아인
 우리는 두 이야기를 통해서 사마리아인으로 상징되는 이웃 [층위 4]를 예수가 어떻게 대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예수가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과 직접 만나서 펼쳐지는 이야기(요 4:1-42)이며, 두 번째는 ‘내 이웃이 누구인가’라고 묻는 율법교사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이다. 사마리아인은 [층위 1]에서 [층위 3]까지 등장하였던 유대인들과 혈통적으로 구분된 자로서, 하나의 공동체 밖에 존재하는 외부 타자를 상징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안과 밖, 주체와 타자는 언제나 서로를 경멸하고 혐오하는 것으로 빠지기 쉽다. 수가성의 여인이 물을 청하는 예수에게 의아한 반응을 보인 것도, 예수가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사마리아인을 비유의 착한 역할로 굳이 넣어 말하는 것도 모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서로를 얼마나 오랫동안 경멸하고 혐오하여 왔는지를 성서의 독자로 하여금 쉽게 눈치챌 수 있게 한다. 

이 두 민족 간의 혐오 역사는 포로기와 예루살렘성전 재건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남 유다의 뿌리를 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앗시리아에 끌려간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신하여 북이스라엘 땅을 차지한 이주민들의 혼합족일 뿐이라 폄하하고, 이들이 세운 그리심 성전의 정통성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북이스라엘의 사람들 전부가 앗시리아에 끌려간 것이 아니었다. 쓸모 있는 상류층 지식인들이 주로 포로로 끌려갔기에, 북이스라엘 사람의 약 70%는 여전히 이스라엘 땅에 남아 생존하며 아훼신앙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배층과 나라를 잃은 북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온전히 그들의 신앙과 문화를 고수하기도 쉽지 않았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사마리아인의 시원이 된다. 그러나 바빌론에 끌려갔다 돌아온 남유다 귀환 공동체는 북이스라엘 땅에 남아있던 자들을 배제하는 분리주의 정책으로 그들만의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였고, 그 후손이 바로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이다. 이 두 민족의 갈등은 유대국가의 사마리아 강제 통합 과정과 헤롯의 재통합과정 거치며 강제적인 평화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헤롯의 사후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안뜰에 침입하여 사람의 뼛가루를 성전 전체에 뿌린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빌라도가 사마리아인들을 탄압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양자의 갈등도 다시금 심화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예수가 바로 이 시절에 활동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오래된 두 민족 간의 증오의 역사 속에서도 예수는 사마리아 지역을 방문하기를 피하지 않으며 사마리아인에게도 자신이 바로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는 비밀을 선포하였다. 또한 마땅히 유대인 관점에서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사마리아인을 강도 만난 자를 돕는 착한 이웃의 역할로 비유 속에 배치하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유대 율법교사에게 그가 설정하고 있는 ‘이웃’의 범위가 얼마나 자의적이며, 동시에 협소한지를 충격적으로 드러냈다.

사마리아인을 대하는 예수의 태도를 보며, 우리는 이웃사랑의 궁극의 모습을 본다. 예수는 다른 유대인들과 달리 사마리아인의 민족적 정통성을 비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리심에서 드린 그들의 예배를 부인하거나, 반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배를 전적으로 편들지도 않았다. 심지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서는 위기에 처한 이웃을 정성스럽게 돌보는 이웃사랑을 실천한다면 영생에 이르는 복이 출신 민족과 상관없이 똑같이 내릴 것이라고 암시하기도 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 밖에 존재하기에 마땅히 우리의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타자들의 타자성을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방식으로 예수의 이웃사랑의 궁극이 실현된다는 사실이다. 

혐오가 무엇인지 써달라고 원고 청탁을 받았다. 사실 그러한 글을 이미 썼기도 했고, 많은 학자들의 좋은 책들도 상당히 출판되었기 때문에, 나는 혐오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힘, 즉 이웃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누군가의 삶과 존재 근거를 위협하는 혐오를 휘두르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것이 혐오인지 모른다. 심지어 기독교인들 중에 일부는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에게 혐오의 말과 감정을 살인적으로 쏟아놓으면서도, 그것이 예수 도덕으로의 선도(善導)이자 진정한 사랑이라고 확언한다. 나는 이러한 현실을 보며 한국교회가 예수의 이웃사랑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솔직히 자백한다. 

예수의 이웃사랑은 한마디로 ‘혐오 저항’이다. 잘못된 인식으로 혐오받는 사람, 다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대신 혐오받는 사람,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혐오받는 사람, ‘우리’ 밖에서 존재하는 낯선 자라고 혐오 받는 사람,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며 우리를 위협할 것이라고 혐오받는 사람. 예수는 이 모든 사람들의 이웃이 되었고, 또 그들의 이웃이 되기 위해 혐오에 저항했다. 관습적 도덕이 허락한 소위 ‘선량한’ 약자들을 사랑하는 데에 머무는 소극적 사랑이 아니라, 그러한 약자들에게만 사랑을 관용적으로 베풀도록 하는 관습적 도덕의 비합리성과 폭력성, 그리고 정치성과 전체성을 그 근본부터 문제 삼았다. 성서는 닫힌 문자가 아니다. 이 글에서 구분한 예수 이웃의 네 층위도 결국 매번 새롭게 연결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사회 차별구조가 역사성을 갖고 있기에, 그 구조 속에서 차별받는 대상과 혐오받는 대상 역시 매번 변화하며 주목받는다. 

마지막으로 이점을 강조하며 글을 마치고 싶다. 예수의 이웃사랑에는 자격이 우선하지 않는다. 사랑이 먼저 있고, 사랑이 사람을 사랑받을 만한 사람으로 성장시킨다. 그러나 혐오는 사랑받을 만한 자격을 따지며 발생한다. 그러한 자격놀이에 사람이 상처받고, 사람이 죽어간다. 루덴도 가족의 아이들이 그랬고, 육우당이 그랬다. 사마리아인까지 사랑하는 예수의 사랑을 따라, 더 이상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 그리스도인의 소명이자, 존재 이유여야 한다. 나머지는 다 거짓이다. 

 

김혜령
기독교윤리학자. 프랑스 국립 스트라스부르대학교 개신교 신학박사이며, 현재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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