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호 새로 쓰는 나눔 윤리학]
나는 이태석 신부도 나처럼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돈이나 출세를 욕망하는 것에 반해, 그는 지위와 명예를 얻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그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러니 특별히 그를 존경해야 할 이유가 없다. 투자에 불과한 나눔을 선으로 포장하는 교육이 너무 싫다.
익명 피드백이기는 했어도, 용감한 학생이었다. 성적 때문에라도 자기 의견을 개진하지 않는 한국 학생들의 특성상, 나눔을 주제로 한 인성교육수업에서 나눔도 결국 ‘자기가 좋아서’ 혹은 ‘자기를 위해서’ 하는 이기적 행위일 뿐이라는 반론을 교수에게 거침없이 피력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종류의 피드백을 가끔 받아온 터라 이번에는 학생들에게 이 피드백을 공유하고 의견을 들어보았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사실은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수업 분위기상 그런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그동안 끊임없이 ‘비판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주문했던 내 말이 효과가 없었다는 증거였다. ‘나눔’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춰야 하는 도덕적 소양이지만, 그것이 학점을 주는 ‘도덕교육’이 되는 순간 교육의 참된 목적이 제대로 전달되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이를 두고 단순히 교육방법론의 문제라고만 할 수는 없다. 이제 솔직해질 때가 되었다. 나눔을 고도로 전략화된 ‘이기적 행위’나 다름없다고 이해하는 방식이 세상을 압도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스크루지나 놀부 이야기 등을 통해 ‘이기적인 마음과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는 베갯잇 도덕 교육의 시대는 끝이 났다. 주식이나 부동산 분야뿐 아니라, 일반적인 기업 활동에서도, 학교나 학원에서도, 심지어 부모의 자녀 교육에서도, 우리는 이제 “자기 욕망에 충실하라. 타자에 대한 호의는 투자일 때나 가능하고, 투자가 아니라면 최소한 손해 보지 않을 정도의 교환가치라도 있어야 한다”는 식의 노골적인 말을 수없이 한다. 그러니 목숨까지 내놓으며 이웃에게 헌신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려줘도 감동과 교훈이 생기지 않는다. ‘이해 불가능한 인물’이라며 ‘나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거리를 두거나, ‘이기적이어서 이타적인 인물’일 뿐이니 ‘나와 전혀 다를 것 없다’고 아예 거리를 없애버린다.
순수한 나눔을 존경하는 시대가 저문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누군가의 순수성을 철썩 같이 믿고 따랐다가, 뒤늦게 드러난 위선적 행실에 깊은 좌절과 분노에 빠진 경험이 많다. 그래서 나누는 자의 순수성에 기대어 나눔 문화를 전파하려고 한다면 공든 탑이 무너지듯 한순간에 실패하기 쉽다. 존경받는 사람의 나눔 동기가 순수한 사랑이나 이타심에서만 나올 것이라고 믿는 것은 대중의 막연한 희망일 뿐이다. 나눔의 동기로서 순수성은 불교 용어로 ‘찰나’에 인간 마음에 깃들 수는 있겠지만, 어느 누구도 그러한 순수성 자체로 평생을 살 수 없다. 정말로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순수하게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일수록, 절대적 기준 앞에 자신의 마음이 온전히 순수하지 못함을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자기가 행한 나눔의 순수성을 떠벌리는 자일수록 가짜일 확률이 다분하다.
왜 이렇게 나눔의 순수성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거나 믿지 않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일까? 다시 말해, 왜 나눔을 나의 유익과 상관없이 해야 하는 ‘옳은 행위’로 보지 않고, 내가 살기 위해 하는 ‘본능적 행위’로 강등하여 이해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일까? 나눔 윤리학의 본론에 첫 발을 내딛으며 나는 이 문제를 먼저 다루고 싶었다. 사실 이 문제야말로 생물학과 시장경제의 원리가 윤리학과 종교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을 이전과는 어떻게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지 근본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핵심 질문이기 때문이다. 윤리학이 가장 무능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나눔 윤리학’을 다시 써보자는 도전이 스스로 생각해도 다소 애처롭기는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윤리학의 담론이, 또 기독교 신앙이 꼭 필요하다고 다독인다.
나눔의 순수성을 믿지 않는 시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