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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빚어낸 괴물, 평화
[351호 커버스토리]
[351호] 2020년 01월 21일 (화) 15:28:02 이예은 goscon@goscon.co.kr

 

한때, 전공이 아님에도 기독교 관련 수업을 신청해 들을 만큼 신앙에 열의를 보인 때도 있었다. 한국교회에 희망 같은 건 일찍이 포기한 상태였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겠다. 나름대로 기독교계에서 명예와 실력을 인정받은 교수의 수업이었지만 신뢰는 머지않아 깨져 버렸다. 한 학우의 질문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이제 막 스무살 된 여자가 있습니다. 여자는 매일 술에 취해 있는 아버지와 남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매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약속한 1년이라는 시간이 다 되자 여성은 일을 그만두었고 후에 번 돈으로 남동생 대학 등록금까지 냈다고 합니다. 그런 여성도 하나님 나라에 갑니까?” 

교수가 답했다. “그 여자는 죄를 지었네. 아주 악한. 그 여자가 아버지와 남동생의 인생을 망친 거야.” 교수가 말을 마치자마자 손이 떨렸다. 타과 전공 수업이었지만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옆 학우들을 보니 손을 들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가끔 머리보다 빠른 내 손을 원망한다. “갓 스무 살이 된 빈곤 계층의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 죄라고 규명하시나요?” 교수는 웃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인기 있는 교수였기에 주위 학우들의 따가운 시선도 느껴졌다. “만일 그 여성이 교수님의 제자였어도 네가 네 아버지와 남동생의 인생을 망쳤다고 말씀하실 겁니까?”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강의실의 모든 눈이 나를 향했고 타과생인 나는 그저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응. 당연하지. 그게 내 도리야.” 

그날 이후 나는 ‘개혁적 신앙’이니, ‘학구적 신앙’이니 하는 지푸라기 같은 건 더는 잡지 않기로 했다. 중산층 이상, 중년 남성의 신앙에 가난하고 어린 여성은 없었다. 

   
 

삶의 일부이자 전부였던 교회
이게 비교적 ‘진보적’ 입장을 취한 교수이자 목사의 태도였다. 1년 전까지 내가 몸담았던 교회는 그보다 더 ‘보수적’이라 여겨지는 곳이었다. 그 안에서 나는 매주 어떤 말을 듣고 떨기를 반복하며 늘 손을 들 준비를 해야 했다.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나왔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나의 일탈에 대해 가볍게 말한다. 

23년 동안 삶의 일부이자 전부였던 교회를 떠난 일은 교회로부터 내 살점을 뜯어내는 듯한 고통만큼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떠났다. 나를 보호해야 했다. 최악과 차악 중 차악을 선택했다. 선택에 이르기까지 약 3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 글에 나의 3년의 여정을 담았다. 글을 쓰며 그날의 기억들로 괴로워졌다. 이어 놀랐다.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게 던져진 말과 말의 온도 그리고 말의 부스러기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말이라는 게 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지 않나. 뱉은 말에 상처 입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잘 아물지 않더라. 나를 교회 밖으로 몰아낸 숱한 가지 중 내치고 내쳐도 떨어지지 않는 가지가 있다면 그건 ‘말’이었다. 3년 동안 나와 자매들을 교회 밖으로 밀어냈던 말들을 지면에 옮겨본다. 

한동안 교회에 보이지 않던 자매들을 우연히 만났다. 그날 그 자매들을 우연히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들을 그저 주말에 ‘바쁜’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을 테다. 자매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교회만 오면 오빠들이 건네는 “◯◯이 곧 굴러다닐 것 같네”라는 첫인사 때문에 여태껏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충격적이었다. 이어서 그는 본인과 같은 자매가 여럿 있다고 말해주었다. 더욱 충격적인 건 그런 말을 쉬이 내뱉던 남성 청년들은 현재도 교회에서 찬양팀과 임원을 도맡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날부터 나는 교회 내에서 오가는 말들을 쉬이 지나치지 못했다. 피해자는 다시는 교회에 발붙일 수 없고 가해자는 아무런 뉘우침 없이 예배당에서 은혜받는 하나님 나라 같은 건 없었다.

또 한 번은 아침 기도 모임 시간 때에 일이다. 화장하지 않고 온 여성 청년 A에게 남성 청년들이 ‘오늘 많이 수척하네’ ‘어? 누구세요?’ ‘예의는 갖추고 나오자!’라는 말들을 쏟아냈고 자매는 곧장 화장품을 들고 화장실로 뛰쳐나갔다. 그러고 5분도 안 되어 기도회가 시작됐다. 역겨웠다. 기도라니. 하나님 나라와 사랑에 관한 기도 제목들이 나올 때마다 정신이 혼미했다. 당장에라도 기도회를 엎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기도회가 마친 후 그들에게 뭐라고 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기도회가 끝나고 나는 가해 남성 청년들에게 다가가기 전, 옆에 있는 언니에게 의견을 나누기로 했다. 여기서부터는 언니와 나눈 대화이다. 

나: 아까 A 언니한테 오빠들이 말하는 것 들었죠? 속상해요. 
언니: 그러게. 근데 이게 우리한테는 일상이잖아. 나도 주말만큼은 화장하기 진짜 싫은데 안 하면 하도 뭐라고 하니까.
나: 헐 언니한테도 그랬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언니?
언니: 뭘 어떻게 해. 웃고 말았지. 거기서 정색하면 분위기 이상해지잖아.
나: 저는 이따 가서 한마디 하려고요.
언니: 네가? 그러지 말고 회장 오빠한테 대신 말해달라고 하는 게 어때?
나: 왜요?
언니: 음. 아무래도 오빠가 나이도 있고 회장이고 또 장난친 사람들이 다 남자들이잖아. 그래야 말도 좀 듣지 않을까?
나: 언니 저는요, 어리고 일개 신도이고 여자여도 제 말에 경청해줄 수 있는 공동체에 있고 싶어요.
언니: 나도 그래. 근데 현실은 그게 아니잖아.

교회 밖으로 뛰쳐나와 울었다. 회장 오빠가 당시 문제 상황을 방관하며 웃고 있던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제부터 내가 사랑한 교회는 나이 차고 직분 있는 남성의 말에만 귀 기울이는 곳이 되었을까. 어쩌면 내가 사랑하기 이전부터 그래 왔는데 뒤늦게 알아 버린 걸까. 한참을 울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려던 발걸음이 무거웠다. 교회에 이렇게 가기 싫었던 적이 없었다. 발걸음을 내딛기까지 속으로 여러 결심들을 읊조렸다. 누구나 말할 수 있고 또 누가 말하든 상대의 말에 경청할 줄 아는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라고. 현실은 그게 아니지만, 그게 하나님 나라라고. 

다시 교회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 혐오 발언은 ‘폭력’이라 단언할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제 할 일을 하러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기도실 안에는 일부 청년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사실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많은 청년을 상대로 목소리를 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쉬움 반, 안도 반으로 서너 명 되는 청년들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문제 상황에 가해 청년이었던 형제 B는 나와 어렸을 때부터 각별한 사이였는데, 내 말을 듣더니 그는 곧장 이렇게 말했다. “A는 아까 나 보면서 웃던데? 그거는 그냥 장난친 거잖아.” 

B의 말을 들으니 교회가 더는 웃고 넘어갈 수밖에 없던 자매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교회 안이든 밖이든 피해자가 피해 당시에 저항하지 않았음에 집착하는 건 동일했다. 아무래도 형제 B는 불합리하고 불평등하다고 느껴지는 상황 속에서 그저 ‘웃고 넘겨야 할 수밖에 없’는 경험을 하기 어렵다. 이는 B가 젠더적으로 남성이라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B는 화장이나 다이어트를 하는 등 자신을 가꾸지 않았다는 이유로 타박을 당한 적이 없다. 이는 사회적으로 꾸밈 노동이 여성에게만 기형적으로 부여되어왔기 때문이다. 

정말 페미니즘이 우리를 교회 밖으로 내몰았을까?
여성들은 회사든 교회든 성실히 스스로를 꾸며야 하고, 결혼 전에는 시집 잘 가기 위해서, 결혼 후에는 ‘유부녀 같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가꾼다. 하다못해 포털 사이트 머리기사에 ‘연예인 H, 애 낳은 여자 몸매 맞아?’ 같은 내용이 비일비재한 것만 해도 그렇다. 사회는 덜 꾸미는 여성을 게으른 사람, 남성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로 해석하고 타자화한다. 이러한 여성 혐오적인 표현은 교회 내 인사치레에서부터 설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발화됐다. 이를테면 외모 평가로 주고받는 인사(여기에는 ‘예뻐졌네’와 같이 보편적으로 ‘긍정적’이라 생각되는 발화도 포함된다. 좋은 칭찬은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존중하는 일이다)나 여성을 나이에 따라 분류하는 말(‘여자 나이 35세면 재혼 기대해야지’ ‘여자 나이 30 넘어가면 기도 많이 해야 해’)도 마찬가지이다. 여성을 나이에 따라 대상화하는 혐오 표현이다. 

그뿐 아니라 여성 신도의 옷차림을 지적하는 표현도 여성 혐오적인 발화라고 볼 수 있다. ‘자매들은 형제들이 시험 들지 않게 옷차림을 단정히 해야 한다’는 발화의 경우 여성 신도를 하나의 주체적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여성의 차림과 외형, 더 나아가 여성 존재 자체는 남성을 위한 부속물이나 보조물로 해석될 이유가 없다. 이는 사회 내에서 성폭행 피해자에게 ‘네가 차림을 그렇게 하고 다니니 그런 일이 생기지’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실제로 교회 내 성추행 사태가 있었는데, 담당 교역자가 내게 피해 자매의 평소 모습과 행실을 탓한 사례도 있었다. 자매는 교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했고 그 이후 교회에서 볼 수 없었다.)

한 번은 부흥회 초청 강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형제들, 자매들과 교제하면 스킨십 문제 때문에 힘들죠? 아 왜 다들 참기 힘들잖아. 그럼 결혼하세요. 모든 터치가 OK!” 100명 가까이 되는 청년들을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자신 있게 발화한 그 목사는 크리스천 연애관 강의로 이미 스타 강사진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에게 결혼은 주체적인 두 인간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해당 발언은 여성이 남성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라 규정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차별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말들이 21세기 한국교회 부흥회 설교 내용이다. 

교회 안에서 자매들은 이런 말들에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실제로 지난 2-3년 사이 주변에 많은 자매들이 교회를 떠났다. 어렸을 적부터 함께하던 벗들을 잃는 절망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사방이 적인데 내 편이 아무도 없는 일처럼 두렵고 고독하다. 애석하게도 나는 떠나는 자매들을 적극적으로 붙잡을 수 없었다. 자매들을 교회 밖으로 내몬 이들에게도 제대로 된 일침을 가하지 못한 내가 그들을 붙잡는 건 순서적으로 오류였다. 훗날 전해 듣기로 교회는 나를 포함하여 떠난 자매들을 ‘페미니스트’라고 명명했고 이 모든 비극이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이 기독교보다 앞서 나갔기 때문이라 이야기했다고 한다. 정말 페미니즘이 우리를 교회 밖으로 내몰았을까. 

침묵이 빚어낸 괴물 ‘평화’
많은 벗을 떠나보내고 지난 3년간 외로운 주일을 견뎠다. 내가 곧장 교회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이유는 나의 신앙이 저들보다 훌륭하거나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단지 교회를 안전한 곳으로 되돌려놓고 싶었다. 우리의 추억이 묻은 사랑하는 교회, 그곳에서 다시 그리운 얼굴들을 마주하고 싶었다. 교회가 누구에게나 자유롭고 안전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면 떠난 내 벗들도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에서 교회가 해내야 할 역할이라고 믿었다. 

안전한 곳, 내가 나로 오롯이 존재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교회 내에서 오가는 대화들에 예민해지기로 했다.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했다. 상대가 나이가 많든 직책이 높든 남성이든 내겐 중요치 않았다. 어쩌면 지금껏 교회 내에서 ‘잘못됐다’고 말할 사람이 없었던 게 가장 큰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나의 말에 사람들이 귀 기울여주기를 기대했다. 결론적으로 기대는 실망을 안겨주었지만.

화법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공격적이었나, 무례했나, 인신공격을 했나. 기대와 다른 차가운 반응들에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 돌렸다. 어떻게 하면 저들의 무자비한 발설을 막을 수 있나. 나는 그것을 왜 막지 못하나. 스스로에 대한 검열이 짙어질수록 해결점은 보이지 않았다. 안갯속에서 길 잃은 내게 어떤 말이 발을 걸었다. 

“예은아, 나는 평화롭게 살고 싶어. 네가 교회 안에서 그런 불편한 말들을 할 때마다 평화가 깨지는 기분이야. 그리고 나는 네 말들이 너무 폭력적이라고 생각해.”

내가 앞서 그에게 무슨 말을 했었는지에 대해 서둘러 생각했다. ‘아, 화장하고 오지 않은 자매들의 얼굴을 평가하지 말라’고 했었지. 나는 그에게 공격적이지도, 무례하지도 그렇다고 인신공격을 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폭력적인 말은,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는 말보다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는 일을 저지하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나의 동력을 완전히 앗아간 말은, 나로 인해 교회의 평화가 깨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평화. 모든 것이 안녕한 상태, 나는 그것을 깨버리는 사람에 불과했다. 나와 내 자매들의 목소리가 평화를 깨뜨리는 소음이었고, 교회에서의 평화는 자매들의 침묵이 빚어낸 괴물이었다. 우리가 조용한 만큼 교회는 평화로웠고 나는 더 이상 그 끔찍한 평화 속에 머물 수 없었다.  

강요받은 침묵은 평화가 아니다
불편한 소리를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교회를 변호해왔다. 혐오 발언을 폭력으로 인지하게 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이러한 변호는 혐오 발언의 생산을 막을 힘이 없었다. 교회는 그 어떤 곳보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공동체이고 피상적 평화에 집착한다. 전통과 질서라는 명목하에 혐오 발언쯤은 가볍게 지나칠 줄 알아야 하는 게 오늘날 신자의 숙명이다. 그러나 강요된 침묵은 영원할 수 없다. 교회의 이러한 방식이 앞으로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교회가 혐오 발언을 폭력이라고 인지하지 않는 한 여성들은 계속해서 교회를 떠날 것이고 머지않아 교회엔 이에 둔감한 이들만 남게 될 거다. 

예수는 어떠했나. 최근 예수가 페미니스트였나, 아니었나에 관해 논하는 글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 중요한 일인지 모르겠다. 그가 페미니스트였다면 혐오 발언을 멈추고 아니었다면 혐오 발언을 지속할 것인가. 그를 인생의 지침으로 삼고 선한 가치를 따라 사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선한 가치를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어떤 생명도 대상화하지 않는 일은 기도하고 말씀 읽고 전도하는 일만큼 중요하다. 이를 자각할 때 혐오 발언은 더 이상 ‘그깟’ 혐오 발언이 되지 않는다. ‘뭘 이런 말 하나 가지고 그래’ ‘장난이었잖아’라는 말이 면죄부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더욱 오가는 말들에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불편함’과 ‘예민함’이라는 수식이 교회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끼는가. 그렇다면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게 살아왔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교회는 어떤 공동체보다 소수자, 약자들을 향한 고통과 억압, 착취에 예민해져야 한다. 

오늘날 고통은 전쟁과 기근과 같은 물리적 폭력에서부터 지금 내 옆에 있는 자매에게 흘린 장난스런 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어떤 고통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보다 지금의 나는 어떤 고통을 생산하고 방관하고 있는지, 그래서 앞으로 그것을 어떻게 근절할 것인지 묻는 일이 시급하지 않을까. 강요받은 침묵을 평화로 해석하지 않는 교회야말로 모두가 안녕할 수 있는 교회이리라. 


이예은
쓰는 사람. 페미니스트이고 반려견 샬롬과 함께 살아가는 중이다. 무엇보다 무용(無用)한 것들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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