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호 내 인생의 한 구절]

현금자동인출기가 혀를 내밀 듯 통장을 뱉었다. 통장 속지 마지막 줄엔 숫자 4가 찍혀있었다. 하필 4라니. 죽으라는 건가. 

“그래도 돈이 있어야 한다.” 신학대학원에 가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다. 스물여섯 살 청년은 어머니의 말씀을 불신앙이라 단죄했고, 고고한 믿음을 따라 신학대학원 진학을 가족들에게 선포했으며, 공부를 마치고 이주민 단체에서 전도사를 거쳐 지역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공부를 하고, 조직의 막내로 일할 땐 돈에 대해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다. 그만큼 받으면 족했다. 

목사가 된 지금, 조직을 꾸리고 작게나마 경영을 하면서 그만큼 돈을 마련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날마다 잔고를 확인하고, 이것저것 결제하려면 며칠이 남았고 얼마가 필요한지 계산한다. 날마다 말이다. 돈이 있어야 모임 공간을 유지할 수 있고, 손님을 접대할 수 있고, 평화를 위해 연대할 수 있고, 철마다 커가는 아이들 옷을 입힐 수 있고, 책을 살 수 있다. 그래서 말이다. 신학대학원 준비하는 아들에게 어머니께서 하셨던 말씀을 자주 되뇐다. “그래도 돈이 있어야 한다.” 

끼니가 되고, 옷이 되고, 책이 되는 돈이 참 좋다. 어머니 말씀이 맞다. 

있어야 할 돈이 얼마나 있는지 그렇게 절실하게 잔고를 확인하던 어느 날, 현금자동인출기가 숫자 4를 찍었고, 약 올리며 혀를 내밀 듯 통장을 뱉어냈던 것이다. 9년 전 10여 명이 모여 예배하던 때다. 현금자동인출기의 혓바닥 같던 통장 속지는 연보를 관리하는 통장이었다. 다시 봐도 숫자 4는 선명했다. 4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밥도, 옷도, 책도 살 수 없다. 손님을 대접할 수도 없다. 관리비를 낼 수도 없다. 4원은 숫자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죽으라는 건가. 

아닐 것이다. 잔고는 없지만, 생명이 있잖은가. 생명(生命)은 살아있으라[生]는 명령[命]이다. 죽으라는 건 아닐 것이다. 생명 주신 이가 죽으라고 하실 리 없다. 4의 뜻을 물어야 했다. 통장 속지에 4원이 찍혀 나올 때, 현금자동인출기 앞은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할 수 있는 성전 같았다. 좌우에 서 있는 다른 현금자동인출기는 날개 달린 그룹(cherubim)처럼 꼿꼿하게 서서 압박해왔다. H은행 365일 창구는 성전 중에서도 거룩한 곳, 지성소, 뜻을 물으며 기도해야 할 곳 같았다. 4원이 찍혔는데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장 무릎 꿇고 기도해야 마땅한 곳이었지만, 지성소는 자칫 제사장들이 죽기도 했던 곳이라니, 우선 자리를 피하고 볼 일이다. 한숨을 동력 삼아 창구를 신속히 빠져나갔다. 기도도 좋지만 살고 봐야지 않은가. 죽으라는 건 아닐 것이다. 

평소에도 바닥에 자리 잡고 무릎 꿇어 기도하지 않고 경건한 모습과 거리가 먼 목사인 까닭에 그냥 걸으며 기도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던 명대사를 남긴 영화가 나오기 전이었지만, 딱 그 마음이었다. 돈은 없어도 가오는 있어서 돈 달라고 기도하진 않았다. 명색이 목사 아닌가. 치사하게 돈을 달라고 기도할 순 없었다. 사실은 돈을 달라는 거지만, 그래도 돈을 달라고 대놓고 기도할 순 없잖은가 말이다. 거룩한 것을 구했다. 

“하나님, 성령을 주소서.” 

성령을 달라고 기도했다. 누가복음에서 읽은 예수의 말씀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9-13)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 기도하며 구하고 찾아야 할 것을 ‘성령’(πνεῦμα)이라고 특정해 말씀하셨다. ‘성령’을 구하고, ‘성령’을 찾고, ‘성령’을 만나기 위해 문을 두드리라는 것이 예수의 말씀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그렇겠다 싶다. 예수라면 그렇게 기도했겠다. 돈이 없어도 가오 있는 목사라면 돈이 아니라 성령을 청해야 하겠어서, 예수의 말씀 따라 ‘성령’을 주시라 기도했다. 

그러나 사실 성령을 구한 게 아니었다. 돈을 달라는 것이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작성한 청구서에 명목상 성령을 찍었지만, 내용상 돈을 청구하고 있었다. 기표는 성령이었으나 기의는 돈이었다. 내가 아는 내 마음을 하나님께서 왜 모르시겠는가. 내 기도는 예수의 가르침을 배반한 것인 줄 하나님께서 왜 모르시겠는가. “성령을 주소서” 하며 기도했지만, 그게 돈을 달라는 기도인 줄 왜 모르시겠는가. 가오 있어 성령을 구하는 사람이고 싶었지만, 당시에 나는 돈에 목말랐고, 잔고가 얼마인지 날마다 확인해야 하는 가난한 목사요 가장이었다. 내 수준은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올릴 땐, 항상 잔고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다.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드릴 때면, 늘 기표는 성령이나, 기의는 돈이다. 내가 뭐, 그렇다. 

그래도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걸 주신다.(눅11:13) 과연 하나님은 늘 좋은 걸 주셨다. 성령을 주셨다. 성령은 ‘숨’ ‘생기’ 등과 같은 뜻이다. 성령을 구한다는 건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는 것이요, 생기를 호흡하는 것이다. 성령은 통장 속지에 찍히지 않는다. 숨결은 통장 속지에 어떤 무늬도 남기지 않고, 생기는 통장 속지에 숫자를 새기지 않는다. 하나님께선 돈을 구하는 내 진짜 기도를 간파하셨겠지만, 항상 가장 좋은 걸 주신다. 성령을 주신다는 말이다. 그래서다. 날마다 잔고를 확인해야 한다. “그래도 돈이 있어야” 하니까.

 

오리고기를 가끔 사 먹는다. 양배추 잘게 썰어 익히면 하얀 배추 풋내가 고기에 스미고, 소금 뿌려 간만 맞추면 먹을 만하다. 거기다가 손가락 마디만큼 부추를 잘라 얹은 후에 바로 불을 끄면 부추가 뭉개지지 않는다. 청잣빛 접시에 담으면, 양배추 흰빛과 오리고기의 붉은빛이 청자색과 어울려 보기에도 좋다. 도시 마트에서 오리고기를 사다 먹을 수 있는 건 진공포장 때문이다. 냉장고 깊숙한 곳에 제법 오래 있어도 진공포장되어 있으면 맛에 큰 차이가 없다. 죽은 고기는 진공포장해야 오래 신선하다. 

죽은 오리는 진공포장되는 게 좋지만, 살아있는 오리를 절대 진공 속에 두어선 안 된다. 숨을 쉬어야 하고 공기에 노출되어야 산 생명이다. 성령이 ‘숨’이요 ‘생기’라면, 예수께서 기도할 때 성령을 구하라고 제안하신 건, 죽어서 진공포장되지 말고, 숨 쉬며 살아있으라는 말씀이겠다.

죽은 오리는 공기에 노출되지 않아야 신선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다. 죽은 오리는 ‘숨결’이나 ‘생기’에 닿으면 산화되어 썩는다. 예수께서 기도할 때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하신 건 맛있는 고기로 신선하게 진공포장되지 말라는 뜻이겠다. ‘숨결’이나 ‘생기’에 노출되어야 살 수 있는 산 오리로 진흙 도랑을 헤엄치며, 뒤뚱뒤뚱 걸으며 살아있으라는 뜻이겠다. 

성령이 없으면 사람은 흙뭉치에 지나지 않는다. 성령이 없으면 살아있으나 사는 게 아니다. 성령이 없으면 진공포장된 고기처럼 신선해 보일망정 살아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나님의 생기를 호흡하려면 죽은 고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하다. 깨끗하게 진공포장된 신선한 오리고기로 진열되는 게 아니라, 검은 흙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흐르는 도랑물에서 뒤뚱거리는 오리처럼 살아있으라는[生] 명령[命], 이게 생명이다. 살아 꽥꽥거리라고 하나님께서 날마다 명령하신다. 9년 전 찍혔던 4원은 죽으라 하셨던 게 아니라, 숨 쉬라 말씀하신 것이었겠다. 

9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 기도 속 기의는 돈이다. 하나님께서도 여전히 자식에게 좋은 걸 주신다. 성령을 주신다. 기표 속에 감추지 않고 톡 까놓고 돈을 달라 기도해도 성령을 주실 것이다. 가장 좋은 걸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니까. 숨 쉬길 바라실 테니까. 생기를 호흡하길 바라실 테니까. 

 

9개월 전 책방을 열었다. 매주 토요일 모자 가정이 책방을 방문해 책 읽어주는 선생님을 만난다. 선생님은 9살, 6살, 5살 세 자매와 함께 그림책을 읽고, 책에 대해 대화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렇게 매주 한 권 그림책을 맛있게 뚝딱 먹고, 집으로 가져간다. 선물이다. 세 자매의 엄마는 국경을 넘어 한국에 왔고, 현재 비자가 없다. 토요일에도 인력사무소로 아침 7시까지 나가 종일 일했다. 토요일에도 거의 12시간씩 아이들끼리만 집에 있다고 해서 엄마에겐 책방 하루 알바를 부탁했고, 아이들은 책방으로 초대해 함께 그림책을 읽고, 읽은 책을 선물하고 있다. 책을 선물하기 위해 책을 판다. 이렇게 책을 팔아서 책을 선물하는 비영리책방이 됐다. 책 팔아 남긴 돈은 아이들 간식이 되고, 그림책이 되고, 비자 없는 엄마의 일당이 된다. 

책방은 원래 카페였다. 카페에서 발달장애인 청년들이 바리스타 실습을 했고, 이주여성들이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이제 비영리책방을 운영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이 필요할 때마다 기도한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길 기도한다. 걸으며, 운전하며, 아쉬울 때마다 성령을 구하며 기도하지만, 분명 돈을 청구하는 것이다. 성령을 구하는 내 기도 속 기의가 돈인 줄 하나님께서 왜 모르시겠는가. 좋은 것을 정확하게 주신다. 성령을 주신다. 성령을 주시지만 “그래도 돈이 있어야” 하기에 날마다 잔고를 확인한다.

9년 전 4원이 찍혀있던 계좌는 작은 샘이 됐다. 물 마시기 위해 책방으로 당당하게 들어오는 이웃에게 인색하지 않을 만큼 넉넉하다. 그러면 됐다. 충분히 감사하다. 물 마시러 들어온 책방의 공기가 하나님의 숨결이 되길, 성령을 구하며 기도한다. 잔고가 줄어드는 불안한 마음 달래기 위해서라도 성령을 주시라고 쉬지 않고 기도한다. 잔고가 줄어 불안해도 쪼잔하게 돈을 달라 기도하진 않겠다. 우리에게 숨을, 성령을, 생기를 주소서. 이렇게 기도하며 글을 마무리하려는데, 짙은 한숨이 뱃속 깊은 곳에서 배어 나온다. 과연 성령은 ‘숨’이다. 

 

김영준
민들레교회 목사, 동네책방 민들레와달팽이 대표, 들꽃 같은 활동가의 남편, 사춘기를 지나는 딸과 사춘기가 올 것 같은 아들의 아빠. 김포에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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