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호 내 인생의 한 구절]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 107:30, 개역한글)
아빠가 끌어주던 ‘고무 다라 보트’
어린 시절 여름이면 강원도 홍천 강가로 가족여행을 가곤 했다. 요즘 말로 하면 ‘캠핑’이겠지만, 그냥 텐트와 버너를 챙겨 떠나는 여행이었다. 강 바로 옆에 텐트를 쳐놓고는 물놀이와 먹는 일에 전념하면서 일주일 정도를 보내곤 했다. 물속에 오래 있으면 입술이 파래졌다. 그럴 때면 물속에 있던 나는 부모님께 끌려나왔다. 햇볕에 달구어진 돌 위에 앉아있다가, 몸에 물기가 마르기 무섭게 다시 물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커다란 고무 다라에 스티로폼을 붙여서 제법 멋진 보트(?)를 만들어주셨다. 그전에는 튜브를 타고 놀더라도 얕은 강가에서 참방거릴 뿐이었는데, ‘고무 다라 보트’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물놀이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아빠는 ‘고무 다라 보트’에 나를 태우고는 내가 가보지 못했던 꽤 먼 곳까지 끌고 다니셨다. 일부러 보트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파도를 타는 듯한 기분도 나게 해주셨다. 나는 매우 겁이 많은 아이였지만, 깊은 물 한가운데에서 경험하는 풍랑(?)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나에게 아빠는 유쾌한 슈퍼맨이었고, 아빠가 끌어주는 ‘고무 다라 보트’는 절대 위험하지 않은 안전하고 재미있는 놀이기구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고무 다라 보트’는 시편 107:30
나는 이제 ‘고무 다라 보트’에 올라타기보다는, 누군가를 위해 ‘고무 다라 보트’를 만들어서 끌고 다녀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가끔 ‘고무 다라 보트’에 올라탄다. 시편 107:30은 나에게 ‘고무 다라 보트’이다.
고대 로마 정치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는 “어느 항구를 향해 갈 것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노를 젓는다면 바람조차 도와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세네카뿐 아니라 수많은 위인은 명확한 목표를 세우고 인생을 살아가라고 조언한다. 대다수 목사도 시편 107:30의 ‘소원의 항구’를 그런 맥락에서 설교한다. 그렇지만 나에게 이 구절은 오히려 그 반대 의미로 읽힌다.
시편 107:30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 “목표가 없어도 괜찮아. 너보다 너를 더 잘 아는 내가 인도할 테니, 너는 나를 온전히 신뢰하고 여기 머물면서 평온해하고 기뻐하렴. 내가 데려가마.”
도무지 앞길을 알 수 없는 때가 있다. 이렇게 해야 할지, 저렇게 해야 할지 답을 알지 못할 때다. 그때마다 이 구절은 내가 힘을 풀고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도록, 나를 주님께 내어 맡기도록 해준다. 온갖 풀기 어려운 문제가 가득한 배 안에 갇혀 두려워 떨고 아등바등하던 나를 구출한다. 거대한 물결이 허상이었음을 알려주고, 세상의 주관자인 하나님을 신뢰하게 한다. 괴물 같은 세상과 대치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던 나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순간, 곧 유쾌한 슈퍼맨 아빠가 끌어주는 ‘고무 다라 보트’에 올라탄 어린아이가 된다.
목표를 세우고 달려갔더라면…
2013년 1월 신년 새벽기도회가 끝나갈 즈음 기도하다가 문득 ‘신학’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떠올랐다. 하라는 건지, 하지 말라는 건지 아무 설명 없이 그냥 ‘신학’이라는 말이 갑자기 찾아온 것이다. 내 안에서 나온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때 신학 공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신학 공부를 고민했던 때가 있기는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가장 재미있는 게 교회였지만, 그땐 여자 목사가 전무한 시절이었고, ‘신학교’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일반 대학교의 ‘기독교학과’를 두고 기도했고 답을 들었다. 결과는 예상과 달리 불합격이었다. 그 뒤로는 한 번도 신학 공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이 고민에 대한 항체가 생겨버린 셈이다. 나는 부르심에 응했고, 떨어졌기 때문에 내겐 책임이 없었다.
재수하고 ‘무난한’ 전공으로 경영학을 선택했다. 재수할 때 만난 친구와 결혼도 했다. 7년간 직장생활을 한 후, 사진을 업으로 삼은 남편과 10년 동안 스튜디오를 운영했다. 아이도 둘을 낳아 키우고 있었다. 그런 다음에야 다시 찾아온 ‘신학’의 요청이었다. 신학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보다 어디서 할지가 더 큰 고민이었다.
당시 출석하던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 소속의 중형 교회였는데, 그즈음 목사와 교회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를 알게 되었다. 2014년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신학연구과정’에 입학했다. 본격적으로 ‘신학’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40대 중반에 신학 공부를 시작하는 중년 여자에게 목표란 있을 수 없었다. 그건 당치 않은 일이었다. 나는 목적이 있어서 신학교에 온 것이 아님을 늘 말하고 다녔다.
신학연구과정 2학기 차에 박득훈 목사님이 강의하시는 ‘경제윤리’ 과목을 들었는데, 학기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새맘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전도사’가 될 거라 생각해보지 않았던 터라 다음 날까지 고민해보기로 했다. 그날 밤 자리에 눕자마자 그전까지 본 적도 없는 새맘교회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일이 쉴 새 없이 떠올랐다. ‘이 일은 해야 하는 거구나’ 싶어 다음 날 바로 연락드렸다.
새맘교회 교육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한 지 3년이 되었을 때 박득훈 목사님이 은퇴하셨다. 또 다른 ‘박득훈’은 어디에도 없어서 청빙을 2번이나 실패하였다.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청장년 사역으로 옮겨서 이것저것 맡다 보니 목사 안수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3차 청빙 대상자가 되어 목회를 맡게 되었다. 일을 하기 위한 자격증처럼 작년에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올해 전임 목사로 다시 정식 청빙이 되었다.
나도 모르는 내 ‘소원의 항구’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새맘교회의 목사 이야기가 이렇게 사사롭고 매가리 없는 것이라 송구하다. 어쩌겠는가. 나는 목표하지 않았던 곳에 와있고, 나의 삶과 세상을 해석하는 렌즈는 ‘하나님이 온 세상과 인생들을 주관하신다는 실재관’에 근거해있는 것을. 그 실재이신 하나님이 약자를 특별히 아끼시고 작은 자들의 연대를 원하시니,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살고자 노력할 뿐이다.
나는 내 ‘소원의 항구’가 어딘지 모르겠다. 그냥 ‘고무 다라 보트’에 올라탄 아이처럼 주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평온함으로 기뻐하는 중에 언젠가 다다르게 되는 곳이 내 ‘소원의 항구’일 것이다. 사실 ‘평온함으로 기뻐하는 중에’라는 말보다 ‘내내 무섭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잠깐 평온함으로 기뻐하는 중에’가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지면에 적지 못한 수많은 일이 이를 증명한다. 다만 난 지난 일에 관해, 힘들었던 기억들은 곧잘 잊어버릴 뿐이다. 앞으로도 많은 일을 겪겠지만, 그때마다 시편 107:30은 나를 ‘고무 다라 보트’에 태울 것이다. 결국 다다를 나의 ‘소원의 항구’는 주님이 바라시는 바로 그 항구가 되길 간절히 바라본다.
이수연
아직 ‘목사’가 어색한 목사이다. 새맘 교우들의 인큐베이터에서 새맘의 목사로 자라나는 중이다. 결국 30여 년 전 지원했던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구약전공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 신학을 시작했던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기초 히브리어 문법을 강의한다. 내가 처음 신학을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영문을 몰라 당황하던 가족들은 지금 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