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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정치참여는 교회의 고상한 의무다
[320호 연중기획] 정치영역에서의 한국교회 개혁과제
[320호] 2017년 06월 28일 (수) 14:15:07 박득훈 새맘교회 담임목사,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 goscon@goscon.co.kr

지난 6월호(319호)에 실린 김근수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어쩌면 이렇게 마음이 같을 수가 있을까, 참 신기하고 기뻤다. 우선 제목이 너무 반가웠다. “가난과 불평등은 신학의 문제입니다.” 평소에 늘 주장해오던 바다. 그리고 글 말미에 인용한 기도문도 정말 좋았다. “주님, 볼 수 있게 주십시오.”(눅 18:41) 그동안 얼마나 자주 한국교회1와 나 자신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던 바인가! 물론 김 선생과 내가 모든 면에서 일치하지는 않을 터이다. 하지만 이렇게 핵심적인 신학과 신앙의 주제에서 뜻과 행동을 같이 할 수 있는데, 왜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뉘어져 있어야 하는지 참 마음이 아프다. <복음과상황> 지면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 작은 대화와 만남이, 둘이 다시 하나로 되는 데 작은 밑거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기독교신앙은 인간 영혼·정서·관계, 그리고 내세만 다루는가?

이번 호와 다음 8월호에 이어지는 주제는 ‘한국교회와 정치’이다. 사실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문제를 다루다보면 자연스럽게 정치에 초점이 맞춰진다. 최근 이정전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의 새 책 《주적은 불평등이다:금수저·흙수저의 정치경제학》 서평을 흥미롭게 읽었다.2 거기에 인용된 저자의 글을 재인용해본다. “정부가 어떤 경제정책과 복지정책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경제구조는 달라진다.” “정치가 올바른 정책을 마련하고 힘 있게 추진한다면 불평등 경제도 평등한 경제로 바뀔 수 있다.”

‘경제학은 물리학처럼 정교한 과학이기 때문에 정치논리가 절대로 개입되어선 안 된다’는 주장은 허구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교수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듯이, 경제학의 연구대상인 오늘날의 자유시장체제 자체도 수많은 정치적 판단과 행동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국민이 정치적으로 합의하면 얼마든지 경제체제를 바꿀 수 있다. 그 정치적 합의가 정의롭고 지혜로우면 그만큼 경제가 나아질 수 있다.

그러니 가난과 불평등이 신학의 문제라면 정치 역시 신학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게다가 정치는 경제문제뿐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다룬다. 그 문제들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지느냐에 따라 정치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간의 권력관계 그리고 그에 따른 각자의 삶의 질이 완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만큼 정치가 중요하다.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정치적 과제를 기독교신앙의 책무로 여기는 견해를 매우 불편해 한다. 기독교신앙의 본질은 인간의 영혼과 정서, 소규모의 인격적 관계 그리고 영원한 내세에 관련된 문제들만 다룬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반공·친자본·친미 성향의 정치적 입장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여겨 수용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선택을 한다. 빗나간 정치참여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서 정의로운 정치참여가 교회의 고상한 의무라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이어서 정치 영역에서 한국교회가 개혁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짚어보려고 한다. 논의를 명료하게 이끌어가기 위해 우선 본 글에서 정치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부터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를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도록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인류역사가 발전해오면서 정치에 대한 다양한 입장과 철학이 서로 각축해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들 사이에 공통분모가 있다는 점이다. 그건 서로 다른 인간이 함께 모여 살아감으로써 발생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을 질서 있게 해결해나가는 것을 정치의 핵심 과제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정치란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느냐’를 다룬다고 한 미국의 정치학자 해롤드 라스웰의 정의가 아주 명쾌해 보인다.3 최저임금책정부터 동성결혼합법화에 이르기까지 오늘 한국 사회의 첨예한 정치적 이슈들을 보면 다 이와 관련된 문제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일부 이상적 공산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을 제외한다면 오늘날의 정치 핵심엔 국가가 자리 잡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선 오직 국가가 운영하는 경찰, 검찰, 군인 그리고 사법기관만이 무기와 공권력을 행사하여 국민을 합법적으로 통제하고 강제함으로써 공공질서를 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의 주요 기관들이 어떤 정책을 추진하느냐에 따라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느냐가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국가권력을 어떻게 형성하고 통제하는가는 오늘날의 정치에서 치명적으로 중요하다 할 것이다. 모든 정치적 대립과 갈등은 바로 그런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를 학문적으로 풀어보려는 것이 바로 정치철학이다.

정치의 제1 덕목, 정의

현대정치철학의 대가로 불리는 존 롤즈는 그의 명저 《정의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리가 사고체제에서 첫째 덕목이듯이, 정의가 사회기관들의 첫째 덕목이다.”4 여기서 정의는 정치와 경제영역을 아우르는 ‘사회정의’를 뜻한다. 물론 성경적 입장에서 보자면 진리와 정의를 이런 식으로 완전히 분리하는 건 적절하지 않은 면이 있다. 성경은 진리가 사고체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삶의 영역에도 깊이 관여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꺼이 동의할 만한 명제임에 틀림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도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정의를 지목한다는 점이다. 성경에는 다양한 형태의 정치공동체가 등장한다. 하지만 정의가 그 핵심 덕목이어야 한다는 데는 차이가 없다. 그런 정치사상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은 소돔을 향해 출발하면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창 18:18-19)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강대한 나라가 형성되고 그 나라를 통해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길 원하셨다. 인류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원대한 정치적 비전이다. 그런데 그 비전이 실현되려면 아주 중요한 조건이 있었다. 그건 바로 아브라함이 그 자식들과 자손들을 잘 가르쳐 그들이 ‘하나님의 도를 지켜서 의와 공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점이다.

‘의’와 ‘공도’는 구약성경에서 자주 한 쌍으로 등장하는 유명한 히브리어 ‘체다카’와 ‘미쉬파트’를 각각 번역한 단어다. 신학자들은 그 뜻을 다양하게 해석한다. 하지만 그 핵심은 시대마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사회적 약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주는 정치적 행동, 그리고 그런 행동에 의해 실현된 사회적 상황에 있다 할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구약학자인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두 단어를 가장 잘 아우르는 현대어로 ‘사회정의’를 들었다. 다만 체다카와 미쉬파트는 현대 정치철학에서 다루어지듯 철학적 사고에 의해 추론되는 추상적 개념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관계에서 비롯되는 구체적인 행동지침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5

정의로운 정치는 하나님의 중대 관심사

정의로운 정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한다. 출애굽의 해방 역사, 다양한 율법조항들, 수많은 예언자들의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에서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열정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열정을 이어받아 희년의 자유를 선포하러 이 땅에 오셨다(눅 4:18-19). 그 자유는 단순히 개인적인 죄를 용서 받아 죄책에서 자유로워지는 정도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경제적인 가난으로부터의 자유, 눈 멂으로 대표되는 온갖 질병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채무로 말미암은 감옥살이에서 풀려남, 불의한 사회체제의 억압에서 벗어남까지 아우른다. 이는 곧 정의로운 정치의 골간이다.

정의로운 정치는 예수님의 사역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을 먹이시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들로 부르셨다. 눈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실 뿐 아니라 각종 질병을 고쳐주셨다. 특히 많은 병자들을 굳이 안식일에 고쳐주심으로써 억압을 일삼는 회당 중심의 안식일체제에 분노하시고 저항하셨다. 그러니 이런 현장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선지자 중 하나로 여긴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막 8:28). 또한 예수님께서 한 산에서 변화되셨을 때 함께 대화를 나누신 상대가 수많은 구약인물 중에서 하필 모세와 엘리야였다는 점도 예사롭게 보아 넘겨선 안 된다(막 9:4). 그들의 공통분모는 하나님의 정의의 이름으로 불의한 권력에 저항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서를 읽으면서도 예수님에게서 그런 인상을 받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 독해력에 심각한 장애가 발생했다는 증거다. 아울러 ‘개인의 영혼과 내세문제에만 관심을 보이시는 예수님’이 오랫동안 우리들의 의식에 주입되어온 결과이다.

예수님은 마침내 타락한 예루살렘성전체제에 강력하게 항거하셨다. 로마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를 피라미드처럼 만들어 제국을 지배했으며, 그런 방식에 따라 유대 왕과 예루살렘성전의 대제사장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6 예루살렘성전체제는 로마제국에 충성한다는 조건하에 그로부터 통치권력을 위임받은 종교 및 정치경제체제라 할 수 있다.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로마제국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위치한 억압적 지배체제에 불과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전이 백성들의 주머니를 터는 강도들이 주인 노릇하는 곳으로 전락했음을 간파했다. 정의를 사모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와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눅 19:45-46; 사 56:1-7). 하여 예수님은 거기서, 김근수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항쟁’을 벌이신 것이다. 노끈으로 만든 채찍을 휘둘러 짐승을 성전에서 내쫓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고 상을 엎어버리셨다(요 2:14-15). 장사하는 사람들도 몰아내셨다(눅 19:45). 결국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다. 신학자들 간에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예수님은 어쨌거나 로마제국에 저항한 정치범으로 처형당하셨다. 예수님은 표면적으론 예루살렘성전체제에 저항했지만, 실질적으론 그 배후에서 후견인 노릇을 하던 로마제국체제에 항거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비정치적 예수’는 허구다

이런 예수님을 비정치적인 인물로 묘사한다는 건, 복음서를 철저히 왜곡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왜곡을 정당화하기 위해 단골로 인용되는 말씀이 몇 군데 있다. 오독을 바로 잡기 위해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다(막 12:17). 이 말씀을 너무나 많은 이들이 다음과 같이 이분법적으로 이해한다. ‘세금 받아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가이사를 비롯한 세속의 정치권이 하는 일이고, 영혼을 구원하여 내세로 안내하는 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이는 예수님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문맥을 완전히 무시한 곡해의 결과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몇몇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옳다’고 답하건 ‘옳지 않다’고 답하건 그를 궁지에 몰기 위한 덫이었다. 질문의 함정을 정확히 간파한 예수님은 ‘옳다’고 한 것 같기도 하고, ‘옳지 않다’고 한 것 같기도 한, 모호한 답변을 던지셨다. 그들에게 다시 공을 넘기신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느 한 쪽으로 몰아 공격할 수 없었다. 만일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나 예수님이나 가이사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이 깔끔하게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런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상황 자체가 벌어질 이유가 없었을 터이다.7

그런데 이 한 말씀을 근거로 삼아 ‘보라, 예수님께서 가이사 즉 세상 정치의 영역과 하나님 나라의 영역을 또렷이 구분하셨다!’라고 주장한다면 어불성설인 것이다. 이 말씀의 진의를 파악하려면 예수님 당시의 역사적 상황,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신 셈이다.

‘그렇다. 가이사는 일정한 지점까진 식민지 백성들에게 무언가 합법적으로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지점을 넘어서면 가이사는 권한을 잃는다. 그 지점이란 가이사가 자기 형상이 새겨진 동전을 사용하는 식민지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지닌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그 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백성은 가이사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8

한국교회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단순한 이분법적 곡해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예수님의 참 모습을 왜곡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또 하나의 구절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요 18:36a). 이는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 묻는 빌라도에게 답하면서 하신 말씀이다. 문제의 왜곡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나라는 세상 나라 및 그 정치와는 전혀 무관한, 좁은 의미의 영적 나라라고 말씀하신 거라고 해석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 근거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온 왕이라고 주장하셨다는 점을 든다(요 19:37). 그러나 이 역시 철저한 오독이다.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란 번역은 헬라어 원문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라 보기 어렵다. 직역하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오’이다. 예수님의 나라가 세상과 무관하다는 게 아니라 ‘그 기원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즉 예수님의 나라는 하늘 즉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 나라가 유지되고 운영되는 방식이 세상 나라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예수님은 그 구체적 예를 빌라도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요 18:36b) 예수님 나라의 왕을 그 적대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백성들이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분명히 하자.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가 세상 정치와 무관한 영적 나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다만 폭력에 기반을 둔 나라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단 세상 정치에서 탈출시켜 영혼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신 후, 죽은 다음엔 영원한 내세로 이끄시는 그런 분이 아니다. 우리에게 평화의 성령을 불어넣으신 후, 세상 한가운데로 보내셔서 폭력을 무력화함으로써 평화가 넘실대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게 하시는 분이다(요 17:18, 20: 21).

예수님 나라의 사람들은 세상의 빛

예수님이 먼저 결정적으로 새로운 나라를 여셨다. 그 나라가 바로 진리의 나라다. 진리의 핵심엔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님이 있다. 바울이 심오하게 노래한 것처럼, 하나님은 너무나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약함으로 세상의 강함을 무력화하셨다(고전 1:18-25). 그 약함이 세상의 강함보다 강한 이유는 그 약함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가시면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기도하신 순간 절정에 이른다(눅 23:34). 그 사랑의 약함 앞에서 세상의 강함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자기를 속이며 허풍을 떨든지, 수치 가운데 숨든지, 아니면 무릎을 꿇어 굴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죽음의 순간이 바짝 다가옴을 예감하시고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선언하셨다(요 12:23-34).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죽는 순간은 세상이 심판받아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며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2:30-33). 이를 염두에 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언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세워지는, 그래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9

이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초대교회(행 2:44-47, 4:32-37)와 바울(고전 11:17-34; 갈 2:10, 3:28; 엡 5:21, 6:5-9; 골 3:22-4:1; 몬 1:16-21) 그리고 바울의 교회들은(고후 8-9장) 결코 세상과 결별하지 않았다. 영혼의 세계와 내세로 도피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세상 한 가운데로 용감하게 스며들었다. 그들이 처한 역사적 환경과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정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실로 정의로운 정치참여는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상한 의무다.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행동을 강조하는 것은 자력 구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마이클 프로스트와 앨런 허쉬는 《새로운 교회가 온다》에서 선교적 행동엔 세례와 성만찬처럼 성례전적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10 그 선교적 행동에 그리스도인의 정의로운 정치적 행동이 포함된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정의로운 정치적 행동에 임할 때, 그 자신이 그 행동 속에서 그리스도를 깊이 만난다. 그리고 그 행동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발견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마 5:16) 여기서 사람들로 볼 수 있게 하는 ‘빛’으로서의 ‘착한 행실’은 마태복음 6:1-4에서 예수님께서 은밀히 행하라고 명하신 자선활동이 아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심이 이사야 9:1-2의 성취라고 해석한 마태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어 정의가 실현되게 하는 정치적 행동을 뜻한다.11 하나님은 바로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행동을 통해 정의로운 하나님 나라를 펼쳐 가신다. 프로스트와 허쉬가 잘 이야기한 것처럼 세계 역사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함께 써 나가는 하나님의 전기인 셈이다.12 

이제 이런 신학적·신앙적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을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개혁 과제를 찾아보자.

한국교회의 빗나간 정치참여

정치참여와 관련하여 한국교회를 한마디로 평가하긴 쉽지 않다. 그 안에 다양한 흐름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교회와 인물들이 정의로운 정치참여에 힘을 기울여 왔다. 그 핵심에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진보적 그룹과, 사회적 영성이 담겨 있는 로잔언약에 뒤늦게 눈뜬 일부 복음주의 그룹이 있다. 그들을 제외한 대다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빗나간 정치참여의 길을 걸어왔다. 후자의 경우 두 흐름이 있다. 하나는 정교분리 원칙 뒤에 숨은 비겁한 정치참여이고, 다른 하나는 87년 민주화 이후 등장한 기득권 수호를 위한 노골적 정치참여다.13

1. 정교분리 원칙 뒤에 숨은 비겁한 정치참여
대다수 한국교회는 정교분리 원칙을, 정치는 세속적 영역에 속하고 교회는 거룩한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각각의 활동반경이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상호불간섭의 원칙이 확립되어감으로써 비로소 교회는 부패한 중세교회의 어두운 터널로부터 벗어나 본연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비본질적인 정치문제는 세속정부와 일반 국민에게 맡기고, 교회는 본질적인 인간 영혼과 내세 문제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중세교회 부패의 본질과 정교분리 원칙의 원래 정신에 대한 왜곡이다. 이런 왜곡을 근거로 해서 그들은 70-8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에 뛰어든 기독청년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정죄했다.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많은 이들이 분노와 슬픔을 가슴에 안고 교회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더 큰 잘못은 이렇게 정교분리 원칙을 앞세웠던 교계 지도자들이 성경의 언어들을 활용해 독재자들을 적극 지지하고 옹호하는 정치적 발언과 행동을 일삼았다는 점이다. 조찬기도회, 성명서, 신문광고 등 수단도 다양했다. 정의로운 정치참여운동은 정교분리의 이름으로 억압하면서 반민주·군부독재세력과는 긴밀한 ‘정교유착’을 자행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군부독재세력은 사라졌다. 하지만 정교분리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반민주·기득권세력을 공적으로 옹호하는 비겁한 정치참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5월호에 쓴 글(“교회는 ‘평등경제를 지향해야 한다”)에서도 언급했지만,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는 누가 보더라도 탄기국 주관 탄핵반대집회의 사전 집회 성격을 띤 3·1만세운동구국기도회에 설교자로 참석해 뜬금없이 “공산주의는 멸망해야 합니다!’라고 외치며 반공·친미의 깃발아래 뭉친 탄핵반대운동에 정치적 힘을 실어주었다. 이후 정치적 성격의 기도회였다는 비난이 일자, 이 목사는 ‘탄핵 반대’란 표현을 일체 사용하지 않은 순수기도회였다고 강변했다. 정교분리 원칙에 충실했다는 논리인 것이다.

한국교계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인 김삼환 명성교회 원로목사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지난 3월 중순 교인들에게 교회 합병과 담임목사직 변칙세습을 강권하는 와중에 교인의 삼대의무는 ‘성수주일, 십일조, 전도’라고 작심 발언을 했다.14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치열하게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정치사회적 책임은 온데간데없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참여를 하지 않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타나 종교적 모양새로 포장된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옹호하는 정치적 행보를 서슴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한 달도 안 되었던 5월 11일 주일설교에서 그는 ‘세월호 참사는 침몰해가는 대한민국을 건져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이라는 망발을 하며 사태의 본질을 흐렸다.15 그런가 하면 같은 해 6월 명성교회에서 ‘세월호 참사 위로와 회복을 위한 한국교회연합기도회’를 열고 자신이 기도회 사회를 맡았다. 그 자리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초대되어 인사말을 전했다. 같은 해 3월에 열린 제46회 국가조찬기도회 설교에선 박 대통령에 대해 “고레스와 같은 지도자가 될 것”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울러 그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을 시종일관 찬양하였다.16 모두 비겁한 정치참여의 전형이다.

이참에 중세교회 부패의 본질이 어디에 있으며 정교분리 원칙의 참 뜻이 무엇인지 간략하게나마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다. 중세교회의 문제는 교회가 정치까지 신앙의 본질적 영역으로 간주한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었다. 문제는 교회가 돈과 정치권력을 탐하였고, 그 힘으로 기독교 진리를 지키려다 부패한 데 있었다. 루터나 칼뱅을 비롯한 16세기의 주요 종교개혁자들은 결코 교회를 인간 영혼과 내세 문제만을 다루는 거룩한 기관으로 복원하려 한 적이 없었다. 교회와 정치의 바른 관계에 대한 견해차는 있었지만, 루터나 칼뱅 모두 정치를 기독교신앙의 본질적 영역으로 간주하고 정치를 변화시키려 했다. 미국헌법 수정 제1조에서 명시된 정교분리 원칙도 교회의 정의로운 정치참여를 금하는 게 아니다. 다만 의회권력이 국교를 정하거나 종교 행위를 금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17 미국 연방대법원은 1970년 한 판결문에서 “특정 신앙의 신봉자나 개교회는 자주 공적인 쟁점들에 대해 강한 입장을 취한다. … 당연히 교회도 세속적인 단체와 사적 시민들처럼 그런 권리를 갖고 있다”라고 명확히 밝힌 바 있다.18

교회의 본령을 아예 개인의 영혼 구원과 내세 보장으로 국한하려는 기독교신앙의 사사화(私事化) 현상은 이러한 정교분리 원칙을 왜곡한 것이다. 그 이면에는 여러 역사적 요인이 얽혀 있다. 무엇보다 중세교회의 부패에서 비롯된 비극적인 종교전쟁의 폐해가 한몫 단단히 했다. 교회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절대 정치에 관여해선 안 된다는 극단적인 계몽주의운동이 힘을 얻을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한 셈이다. 다른 한편, 교회 안에서도 그런 계몽주의운동에 보조를 맞춰 기독교신앙의 사사화야말로 교회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룹이 갈수록 강화되었다. 불행하게도 대다수 주류 한국교회는 바로 그런 흐름의 한복판에 자리 잡아 왔다.

2. 기득권 수호를 위한 노골적 정치참여
87년 민주화 이후 또 다른 흐름의 빗나간 정치참여가 서서히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건 바로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노골적인 정치참여다. 그 결정적 계기는 2002년 여름 미군장갑차에 의한 효순·미선의 압사 사건으로 촉발된 SOFA개정촉구촛불집회와, 같은 해 겨울 노무현 민주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었다. 강한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교회 지도자들은 한기총을 중심으로 반북·숭미의 깃발아래 대규모 광장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그들 중엔 정교분리의 시대는 지났으며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제 적극적인 정치참여의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 와중에 탄생한 것이 기독교정당이요, 신자유주의적 뉴라이트 정치노선과 흡사한 ‘기독교사회책임’이다. 이 모두 기독교신앙의 이름으로 기득권세력을 옹호하는 정치운동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타난 가장 부끄러운 노골적 정치참여 중 하나가 2006년 말에 있었던 개정사학법의 재개정운동이다. 개정사학법의 핵심은 개방형 이사제 도입이었다. 수많은 교계 지도자들이 삭발까지 하며 성도들을 동원해 한국교회의 상징인 영락교회 본당에 모여 개정사학법 재개정을 촉구하는 대형정치집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도 삭발식이 이어졌다. 표면적으론 기독교사학재단의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부르짖었지만, 실상은 기독교신앙과 자본이 결탁해 형성한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대다수 시민들이 다 눈치 채고 있는 상황이었다.

두 번째 부끄러운 빗나간 정치참여는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법에 대한 강력한 반대운동이다. 한기총을 비롯한 보수기독교계는 현행 국가인권위원회법이 규정한 차별금지 목록 중 ‘성적 지향’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인권단체가 현행 국가인권위원회법만으론 미흡하다며 제정을 촉구해온 차별금지법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이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동성애를 비롯한 다양한 성적 지향을 이성애와 법적으로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과 그에 따른 동성결혼합법화이다.

이런 정치적 운동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성적 지향에 관한 열린 토론을 일체 허락하지 않는 교계의 경직된 구조와 풍토다. 기존의 성경 해석과 입장에 조금이라도 반하는 말을 하는 순간 그 주장의 정당성과는 무관하게 융단폭격을 가한다. 신학적 토론 자체가 불가능하다. 성경에 반하여 지동설을 주장했다고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소에 회부해 가택연금형에 처한 중세교회를 연상케 한다. 다른 하나는 그 수많은 법률 중에서 왜 유독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반대하는 데 그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붓는지, 그 이유와 동기가 불순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그들이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을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시키는 법률을 제정할 때 그렇게 반대해본 적이 있던가? ‘십일조’는 철저하게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린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꾸짖으셨던 예수님 앞에 서야 하지 않을까?(마 23:23)

세 번째 빗나간 정치참여의 예는 종교인과세시행에 이의를 제기하는 움직임이다. 필자는 지난 6월 2일 KBS 1라디오가 진행하는 <공감토론>에 패널로 참여해 종교인과세시행 유예를 주장하는 분들과 토론을 했다. 종교인은 성직자이기 때문에 근로소득세를 내는 근로자로 취급해선 안 된다는 것이 과세 유예를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성직자를 법률상 근로자로 취급하면 품위와 권위가 추락한다는 것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사례를 받는 종교인은 근로자가 아니다. 유예중인 종교인과세법에 따르면 근로소득세와 기타소득세 중 하나를 선택해서 납부하면 된다. 종교인에 대한 배려다. 그런데도 마음에 안 든다는 거다. 그분들이 원하는 바는 지금이라도 법률을 아예 폐기하여 자발적으로 납세하게 하든지, 아니면 ‘성직자소득세’ 같은 품격 있는 이름으로 변경하는 것이다. ‘성직자’라는 명칭으로 자신의 존엄성을 확보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 참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나님은 존재의 변화를 중요시 하셨건만, ‘명칭의 존엄성’에 매달리는 그들의 모습은 ‘표면적 할례’에 그토록 집착하던 유대인들과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을 연상케 한다.     

이렇게 빗나간 정치참여에 열을 올리는 기독교를 일반 시민들이 개독교로 비난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그동안 자행해온 이처럼 부끄러운 정치참여 행각에 대해 통렬하게 회개해야 마땅하다. 물론 거기엔 나도 예외가 아니다. 이사야가 고백했듯이 부정한 교회 안에 살면서 나 자신도 모양만 조금 다를 뿐 같이 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사 6:5)

정의로운 정치참여의 과제들

우리는 작년 10월 초부터 올해 5월 9일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길이 남을 놀라운 정치적 경험을 했다. 너무나 평화롭고 힘 있는 촛불시민혁명의 한 가운데 있었다. 이길승의 노래 <제주, 비>의 가사처럼 “상처 난 가슴 위로, 길 잃은 마음 위로, 사면에 내리는 비, 온 땅을 적시는 비”를 맞으며 “피할 수 없는 안식”과 “피할 수 없는 평화”를 맛보았다. 아직도 갈 길이 먼 현실을 너무나 잘 알지만,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하늘의 힘과 위로를 받은 것이다.

지난 19대 대선 기간 동안 ‘2017정의평화기독교대선행동’의 상임공동대표 중 한 사람으로 섬긴 일은 나에게 놀라운 축복이었다. 정의로운 정치참여의 과제가 선명하게 내 가슴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민주회복, 경제평등, 평화통일 그리고 생태환경이다. 그런 목표를 최선을 다해 실현해갈 수 있는 정책 54개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나라》라는 소책자에 만화와 함께 담아 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문재인 대통령이 잘 파악하고 있듯, 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통해 참된 민주주의의 기반을 견고히 다지는 일이다. 절대적·상대적 가난에 시달리다 보면 일상적인 두려움에 빠지게 되고 사기는 저하된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일조해보겠다는 의지조차 상실하게 된다. 그러면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는다.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판치는 불의하고 부패한 세상이 전개된다. 실제로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려면 경제평등이 최대한 실현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야 국민의 다양한 기본권을 강화하고, 선거제도를 개혁해 진보적인 국민의 뜻이 중앙정치와 지방정치에 반영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아울러 검찰, 국정원, 언론 개혁도 가능해진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일어나 정의로운 정치참여에 몸을 던질 수 있다면, 그래서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 맞추는 나라가 이 땅에 앞당겨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두 손 모아 기도해본다.

 

각주______
1) 본 글에서 특별한 설명이 없는 한 한국교회는 한국개신교회를 가리킨다.

2) 이대희 기자, ‘이정전 교수의 진단 “한국의 진짜 주적은 불평등이다”’ 『프레시안』 (2017.6.6.)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60210

3) 해롤드 라스웰, 이극찬 역, 《정치: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얻는가?》 (전망사, 1979)

4)  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 (Oxford University Press, 1972/1991), p. 3. [필자 번역]

5) 크리스토퍼 라이트, 김영재 역,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IVP, 2006), 353-357쪽.

6)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보려면 리처드 호슬리 지음, 김준우 옮김, 《예수와 제국》(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48-51, 61-66쪽을 참조하라.

7) 호슬리, 《예수와 제국》, 33쪽에서 힌트를 얻었다.

8) Tom Wright, God in Public (SPCK, 2016), pp. 168-169에서 도움을 받은 해석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님께서 200여 년 전 유다 마카베오와 그 형제들이 시리아 제국의 통치에 저항할 때 사용한 좌우명을 활용했다고 본다.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받아 마땅한 것을 갚아주어라,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라(마카베오서 상권 2:68).’ [필자 번역]

9) 이러한 관점은 Wright, God in Public, pp. 39-44에서 배웠다.

10) 마이클 프로스트·앨런 허쉬 지음, 지성근 옮김, 《새로운 교회가 온다》(IVP, 2009), 245-266쪽을 참조하라.

11) 스티브 모트 지음, 이문장 옮김, 《복음과 새로운 사회》(대장간, 2008), 215-216쪽에서 배운 관점이다

12)  프로스트, 《새로운 교회가 온다》 , 212-213쪽.

13) 업데이트가 필요한 상황이긴 하지만,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기록과 저자 나름의 평가를 보려면, 김지방, 《정치교회》(교양인, 2007)를 참조하라.

14)  김삼환 목사 “교인은 결정할 때 목사 말 따라야,”’ <뉴스앤조이>(2017.3.17).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9686

15)  하나님이 학생들 침몰시켜 국민에게 기회 줘”, <오마이뉴스>(2014.5.2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96753

16)  ‘김삼환 목사, “박근혜대통령, 고레스 같은 지도자 될 것,” <뉴스앤조이>(2014.3.6.)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6259

17)  미국헌법 수정 제1조: 의회는 종교를 만들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금지하거나, 발언의 자유를 저해하거나, 출판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의 권리, 그리고 정부에 탄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만들 수 없다.

18) Walz v. Tax Commission of the City of New York, 379 U.S. 670, 90 S. Ct. 1409 (1970); Philip Wogaman, Christian Perspective on politics (SCM Press, 1998), p.199에서 재인용. [필자 번역]

 
 

박득훈
한국 개신교의 교회개혁운동을 대표하는 실천적 지성인이자 목회자. 한국사회의 빈부격차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지니고 연세대 경제학과에 진학했으나, 선교단체를 통해 예수와의 깊은 인격적 만남 이후 경제학보다는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에 몰두했다. 영국 런던바이블칼리지(현 런던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국제장로교회(IPC)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이후 영국 더럼대학교에서 ‘경제정의’를 주제로 기독교사회윤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새맘교회 전임목사,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로 섬기면서 한국 사회에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길을 깊이 고민하며 삶으로 씨름하고 있다. 《돈에서 해방된 교회》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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