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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비판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다
[321호 연중기획: 종교개혁 500주년,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화 08] 정치영역에서 한국 가톨릭의 개혁 과제
[321호] 2017년 07월 20일 (목) 15:48:33 김근수 가톨릭 신학자, 해방신학연구소장 goscon@goscon.co.kr

지난 7월호(320호)에 실린 박득훈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감동하고 감탄했다. “정의로운 정치참여는 교회의 고상한 의무다”라는 제목이 반가웠다. 박득훈 목사님께서 마치 가톨릭의 입장을 멋지게 요약한 것 같았다. 가난과 불평등이 신학의 문제라고 나는 말했는데, 박득훈 목사님은 정치 역시 신학의 문제라고 멋지게 덧붙이셨다. 마땅하고 옳은 말씀이다. 한국 개신교의 일부 빗나간 정치참여를 비판하고 정의로운 정치참여를 촉구한 것은 한국 가톨릭이 새겨들어야 할 충고다.

인간적인 교제뿐 아니라 학술적인 글에서도 개신교와 가톨릭의 만남은 소중하고 기쁘다. 이런 기회를 제공한 <복음과상황>에 거듭 감사드린다. 교리와 제도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은 차이점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노력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은 가까이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지난 500년은 개신교와 가톨릭이 서로 멀어진 시대라면 앞으로 500년은 서로 가까워지는 시대가 되길 소망한다. 개신교와 가톨릭은 사소한 점에서는 다르지만 중요한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예수와 정치, 정치와 가톨릭교회의 관계에 대해 짚어보려 한다. 예수는 정치를 어떻게 보았는가? 정치와 가톨릭교회의 관계는 어떠한가? 20세기 가톨릭교회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정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최근 교황들은 이 주제에 대해 무엇을 말하였는가? 이 주제를 다루는 가르침을 ‘가톨릭 사회교리’라고 부른다. 가톨릭 사회교리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오래되었다. 이 주제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공식 문헌만 보더라도 아주 많다. 신학자들의 책과 글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가톨릭 사회교리라는 낯선 산맥을 볼 때 앞산 뒷산 다 빼고 백두산 한라산 같은 큰 산만 보기로 하자. 그 정도만 알아도 충분할 것이다. 중요한 문헌의 일부만 간추려 소개하더라도, 이미 내 능력을 벗어난다. 지도를 들추다가 길을 걷지도 못한 채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중요한 주제와 문헌으로 좁혀 개신교 독자들에게 안내하고 싶다. 아울러 정치영역에서 한국 가톨릭의 개혁 과제를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다.

인간은 구원받아야 하고 사회는 쇄신되어야 한다
1965년 12월 7일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기쁨과 희망, Gaudium et spes) 머리말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사목 헌장 1)

우리 시대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의 슬픔과 고뇌를 가톨릭교회는 함께한다. 그것이 가톨릭교회의 존재 이유다.

또한 “인간은 진정 구원을 받아야 하고 인간 사회는 쇄신되어야 한다”(사목 헌장 1)는 선언은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우리 그리스도인 앞에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놓여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분이 누구신지를 구약성서는 고백하고 있다. 유대교 덕분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그대로 보여준 분이 나자렛 예수라는 사실을 신약성서는 증언한다. 그리스도교 덕분에 유대교는 하나님을 더 잘,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인간학적으로 두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진정 구원을 받아야 한다.
2. 인간 사회는 쇄신되어야 한다.


인간은 진정 구원받아야 한다는 점을 유대교나 그리스도교는 죽어라 강조해왔다. 그런데, 인간 사회는 쇄신되어야 한다는 점은 상대적으로 덜 강조해온 것 같다. 그러니 인간이 진정 구원받기 위해 인간 사회는 쇄신되어야 한다고 말해야 하겠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정치가 바로 ‘인간 사회는 쇄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 사회는 쇄신되어야 한다는 것이 구약성서 예언서의 가르침이다. 예언서는 한마디로 ‘정치 비판’이다. 구약성서의 일부인 예언서 분량이 신약성서 전체와 비슷하다. 인간 사회는 쇄신되어야 한다는 점을 구약성서는 끈질기게 강조해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즉, 예언서의 비판이 누구를 향하느냐다. 예언서의 주요 비판 대상은 딱 둘이다. 정치권력자들과 종교권력자들이다. 예언서가 가난한 백성들의 회개도 촉구하지만, 주로 겨냥하는 과녁은 정치권력자들과 종교권력자들이다.

예수는 왜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포했을까
예수는 예언서 전문가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이사야서 전문가다. 예수가 가장 많이 인용한 구약성서는 바로 이사야서다. 절망을 선포한 예레미아서는 4복음서에 한 번밖에 인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희망을 선포한 이사야서를 예수는 왜 자주 인용했을까. 예수는 로마군대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시대를 살았다. 그렇다면 희망보다는 절망을 선포했어야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식민지 시대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예수는 희망 고문으로 사람들을 괴롭혔던 것일까. 가짜 예언자들은 언제나 거짓 희망으로 사람들을 속여오지 않았던가. 

수백 년 동안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온 이스라엘 민족의 뼈저린 교훈은 이것이다. 정치권력자들과 종교권력자들이 회개해야 한다는 것. 부패를 멀리 하고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수한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끊임없이 그렇게 외쳤다. 예수의 직접 스승인 세례자 요한을 보자. 그가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세례자라는 호칭이 붙었지만 그의 행동과 말을 보면 딱 예언자다. 헤로데(헤롯)는 그가 세례를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 비판을 했기 때문에 죽였다. 그래서 나는 세례자 요한에게 예언자라는 호칭이 사실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예언서에서 배웠고 스승 세례자 요한에게서 배웠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예언자가 되었는데,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예수처럼 예루살렘 성전에서 난동을 피운 예언자가 있었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루에 두 번 로마황제를 위한 제사가 바쳐졌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때, 그는 로마군대와 유대 지배층의 연결 고리였던 예루살렘 성전을 마음먹고 계획적으로 노렸던 것이다. 즉, 예수는 로마군대와 유대 지배층을 동시에 타격했다. 이쯤에서 일제 식민지 시절 명동성당에서 일본 군대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위해 미사를 바쳤던 부끄러운 역사가 떠오른다. 그때 어느 가톨릭신자가 명동성당 기물을 파괴하고 난동을 피웠다고 상상해보자.

희망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기다림? 기도? 하나님?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을 인간이 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인간을 비켜 가고 만다. 예수는 희망을 어디에서 찾았는가. 그는 희망이 저항에서 온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었다. 희망은 기다림에서 오지 않고 저항에서 온다. 저항하는 사람만이 희망을 앞당긴다. 저항은 아름답다. 저항(protest)이란 단어는 개신교의 독점 상표 아니던가.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개신교인(Protestant)이 아니다. 불의에 저항하다가 예수처럼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런 죽음은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며 끝이 아니다. 저항에서 예수의 죽음이 왔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부활시키셨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를 하나님이 선포한 것이 곧 예수 부활이다. 부활은 인간이 죽은 이후에 시신이 의학적으로 어떻게 변화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부활은 불의에 저항한 사람의 운명을 하나님이 잊지 않고 책임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고뇌를 치른 사람들의 삶을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말이다. 부활은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다. 예수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니라 승리의 죽음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은 개돼지들의 죽음이 아니라 참된 승리의 죽음이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예수의 차이가 하나 더 있다. 예언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회개 또한 촉구했지만 예수는 그런 적이 없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단 한 번도 비판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잘못과 약점을 예수가 몰라서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예수처럼 가까이서 접촉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잘못과 약점을 예수처럼 정확하고 자세히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잘못과 약점을 예수도 따끔하게 지적하고 훈계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수님도 한 성질 하는 분 아니던가.

그런데 왜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한 번도 비판하지 않았을까. 이는 수십 년간 성서를 공부하면서 내 머리를 떠나지 않은 의문 중 하나였다. 어느 성서학자도 조직신학자도 그럴 듯한 설명을 하지 못한 것 같다. 다른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넘쳤기 때문에 꼭 해야 할 비판마저 자제하지 않았을까. 1.예수는 몸소 행동으로 로마군대와 유대교 지배층에 저항했다. 2.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한 번도 비판하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점에서 예수는 구약성서 예언자들을 뛰어넘었다.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을 단 한 번도 비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부패한 성직자나 목회자를 단 한 번도 비판하지 않은 성도들이 적지 않다. 예언서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다. 예수를 잘 알지 못한 탓이다. 부패한 종교인들을 예수처럼 험악하게 비판했던 이는 드물다. 예수는 추상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 비판할 대상의 이름과 그룹을 정확히 말했고, 그 행위를 하나하나 열거했다.

예수는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저는 예수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 저는 힘이 닿는 한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싸울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두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가 바라는 방식대로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장 코르미에 지음, 《체 게바라 평전》, 김미선 옮김, 35쪽)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28살 젊은 나이에 어머니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이다. 게바라와 그 어머니가 어떤 점에서 생각이 달랐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의 활동 방식에 대해 어떤 토론을 했었고 어디서 의견이 엇갈렸는지 성서학자들은 알아낼 수 없다.

예수는 세상에 공식적으로 등장하기 전에 수없는 번민을 한 것 같다. 예수가 자신의 활동 계획과 방식에 대해 많이 고뇌한 것은 틀림없다. 세상에 공식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예수는 이스라엘 정치 판도를 읽고 고뇌한 것 같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수가 충동적으로 요한에게 세례받으러 갔다고 추측하기는 어렵다. 세례자 요한 문하에 입문한 것에 몇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을 스승으로 모신 것은 예수가 다른 그룹에 가입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예수는 바리사이파에 가입하지 않았다. 바리사이파는 모범적인 평신도 그룹이었다. 성서공부, 기도, 단식, 자선 등에 열심인 성도들의 모임이었다. 예수와 바리사이파는 사상에서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그러나 예수는 바리사이파의 엘리트주의를 사절한 것 같다. 바리사이파가 가난한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업신여기는 모습을 예수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시간과 돈에서 바리사이파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예수는 사두가이파에도 속할 수 없었다. 유대교 평신도였던 예수는 고위사제 가족이 주축이던 사두가이파에 낄 자격이 없었다. 로마 군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사두가이의 정치 노선에 찬동할 수도 없었다. 예수는 은둔 세력인 에세네파에 합류하지도 않았다. 수메르어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헌 권위자인 조철수 박사는 《예수 평전》(김영사)에서 예수를 에세네파 회원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근거가 약하다. 예수는 세상과 단절한 에세네파의 삶과 크게 다르다. 무장독립파 젤로데파(젤롯당)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을 예수가 외면한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독립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 예수는 왜 세례자 요한과 함께했는가. 우선, 회개를 통한 예언이라는 세례자 요한의 표어에 찬성한 것 같다. 로마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된 데는 유대인의 부패가 큰 몫을 차지했으며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회개가 필수라고 여긴 듯하다. 그 바탕 위에서만 독립투쟁이 가능하다고 본 것 아닐까. 세례자 요한의 회개운동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 지배권력에 저항하는 상징적 의미도 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운동은 지방을 근거지로 하는 새로운 종교적 민중운동이었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출발했지만 세례자 요한을 넘어섰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운동에서 시작했지만 예수 고유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새로운 깃발을 든 것이다. 수도 예루살렘에서 지식층 중심이 아니라 시골 갈릴래아에서 무식한 어부 농부들,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시작한 것이다. 장소도 주축도 표어도 전혀 새로운 운동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예수가 이스라엘 정치 판도를 훤히 읽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어지간한 정치평론가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예수도 정치에 참여했다
무슨 쓸데없는 궤변을 늘어놓느냐고 항의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시대 의회민주주의 제도는 예수 당시 없었다. 투표와 선거를 통해 권력을 교체하는 법적 장치는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예수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정치에 당연히 참여할 수 없었다. 정치를 권력 쟁취의 수단으로 본다면 예수는 분명히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는 정치범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 그리스도교는 정치범으로 처형된 예수를 따르는 종교다. 그리스도교는 불의에 저항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종교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잘못된 정치에 대한 비판도 정치라고 한다면, 예수는 분명히 정치에 참여했다. 대부분 성서신학자들은 예수 죽음의 직접 원인을 예루살렘 성전항쟁으로 여긴다. 수만 명 순례자들이 비좁은 예루살렘 안팎을 가득 채우는 축제 때, 로마군대가 질서 유지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병력을 이동하는 축제에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난동을 부렸다. 성전항쟁은 당시 누가 보아도 정치투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군대가, 어느 정치인이 그런 예수를 그냥 놓아두겠는가. 성전항쟁은 불의에 저항한 예수의 행동이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다. 예수는 목숨 걸고 잘못된 정치를 비판했다. 예수가 성전항쟁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예수는 십자가 죽음에 처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정치범으로 처형된 예수를 따르는 종교다. 그리스도교는 불의에 저항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종교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잘못된 권력에 빌붙는 목사는 이미 무신론자나 마찬가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지적이 그렇다.

교회는 결코 현세적 야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교회는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추구한다. 곧 성령의 인도로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려는 것이다. (사목 헌장 3)

그리스도교는 권력을 잡기 위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잘못된 정치권력을 비판한다.

정치에 대한 복음적 판단은 정당하다
20세기 중반 이후 정치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을 잘 드러내는 말이 다음 문장이다.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사목 헌장 4)

가톨릭이 주목하는 대상은 ‘시대의 징표’이며 판단 기준은 복음이다. “인간에게 날로 더 나은 봉사를 하고 개인과 집단이 본연의 존엄을 긍정하고 발전시키도록 도와주는 그러한 정치, 사회, 경제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인류의 의무라는 확신도 커져”(사목 헌장 9)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서 개인 구원은 최종 목표가 아니다. 지옥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데 나 혼자 천국에서 찬송가를 부를 수는 없다. 개인의 진보와 사회 발전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사목 헌장 25) 그렇기 때문에 “정신 개혁과 더불어 광범한 사회 변혁이 이루어져야 한다.”(사목 헌장 26) 가난한 라자로를 전혀 돌보지 않았던 부자를 닮아서는 안 된다. 가난한 라자로가 아예 생기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인간이 극도의 빈곤 속에 빠지게 되면 인간의 자유는 흔히 더욱 무기력해지고 만다.”(사목 헌장 31) “정의와 평등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면 기존의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을 더 빨리 제거하도록 줄기차게 노력하여야 한다.”(사목 헌장 66)

한국 그리스도교 안에 널리 퍼져 있는 잘못 중 하나는 종교 생활을 현세 활동과 별개로 여기는 인식이다. 그리하여 종교 생활이 “혼자서 하는 예배 행위와 도덕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뿐이라고 여겨, 현세 활동은 종교 생활과 전혀 다르다는 듯이 스스로 현세 활동에 몰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똑같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사목 헌장 43)

가톨릭은 정의와 공동선을 바란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국가와 공공 정책에 참여하여 많은 원칙, 개념, 이론을 발전시켜 왔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신자들뿐 아니라 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발표되어 왔다. 정의와 공동선은 가톨릭 사회교리의 주요 원칙이다. 정의와 공동선 추구를 위해 연대가 중요하며, 연대를 위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강조된다. 가톨릭 사회교리에 대한 가르침을 모아 교황청이 발간한 책이 있다. 《간추린 사회교리》(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by Pontifical Council for Justice and Peace, 2005)라는 책으로, 전체 3부, 12장, 583개 소제목에 250여 쪽 분량에 달한다.

가톨릭 사회교리에 따르면 국가의 존재 이유는 공동선 추구에 있다. 국가는 다양한 개인과 사회 집단 사이에서 공동선을 증진할 책임이 있다. 공동선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준다. 개인주의는 개인이 재산의 무제한 소유자임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유혹에 시달릴 수 있다. 집단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며 모든 것을 집단에게 헌납할 유혹이 있다.
‘연대’는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한 중요한 원칙이다. 198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사회적 관심>(solicitudo rei socialis)에서 연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연대는 친밀한 사람이나 친밀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여 많은 인간이 겪는 불행을 보면서 막연한 동정심이니 피상적인 근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 반대로 연대는 공동선에 헌신하겠다는 확고하고 항구적인 결단이다. 다시 말해 연대란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책임이 있는 만큼 전 인류의 이익과 각 개인의 이익에 헌신함을 의미한다.”(요한 바오로 2세, 사회적 관심 38항)

역사가 오랜 가톨릭 사회교리에 대해 신학자들과 가톨릭 정치인 사이에 이해의 차이가 있다. 자유주의적 가톨릭과 보수주의 가톨릭 신학 전통 사이에 올바른 해석에 대한 의견 불일치도 있다. 일반적으로 좌파는 세계 평화, 노동자 권익 보호, 정부의 빈민 지원, 경제 정의를 주로 언급한다. 우파는 자유로운 기업 활동과 정치적 자유, 경제 발전 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가톨릭 우파는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가톨릭 좌파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가장 중시한다.(클락 E.  코크란 외 지음, 김희준 옮김, 《교회, 국가, 공적 정의 논쟁》, 새물결플러스, 2017, 62-63쪽)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가톨릭에서 아주 중요한 주제로, 20세기 후반까지 가톨릭 사회교리의 핵심 요소였다. 가톨릭 보수 진영 역시 가난을 극복하는 것이 기본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가난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톨릭 진영 사이에 의견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앞의 책, 71쪽)

1971년 주교회의 시노드에서 “정의를 위한 행동과 세상 변혁을 위한 참여는 복음 선포의 필수다. … 인류의 구원과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은 교회가 완수해야 할 사명의 필수 부분”(주교회의 시노드, <세상 안에서 정의>, 1971)이라고 선언했다. 참여를 통한 정의 추구 없이 교회는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 살해되기 한 달 전이던 1980년 2월 17일, 로메로 대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백성들이 학살당할 때, 함께 피 흘리는 교회는 존경받습니다.”

불평등은 단순히 개인의 악한 선택으로 생긴 결과만을 뜻하진 않는다. 불평등은 근대적 사회 방식에 들어 있는 “죄의 구조”(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85항)이다. 가톨릭교회는 그래서 개인의 무제한 사유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남보다 잘 사는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남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너그러이 일정한 자기 권리를 양보하여야 한다.”(교황 바오로 6세, 팔십주년, 23항)

“실제로 모든 이가 경제적 자유의 참다운 혜택을 누리게 하려면, 경우에 따라서는 더 많은 자원과 경제력을 가진 이들에게 제한이 가해져야 합니다. 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으며 고용 기회가 계속 축소되고 있는데, 단지 경제적 자유만을 요구하는 것은 정치에 명예롭지 못한 모순된 주장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찬미받으소서, 128항)

정치 비판을 하려면 교회부터 쇄신해야
그리스도교는 잘못된 정치에 대한 비판을 계속 해야 한다. 아울러, 그리스도교는 자기 비판도 해야 한다.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고 있다. 이 말을 들으면 한국 가톨릭은 몹시 부끄러울 것이다. 사회 쇄신을 위해 한국 가톨릭은 오랫동안 목소리를 높이고 행동해왔다. 그런데, 교회 쇄신을 위해 한국 가톨릭은 그동안 무엇을 해 왔는가. 기도? 침묵? 외면? 사회 쇄신을 위해 행동하고 애썼던 많은 사제들은 교회 쇄신에 대해 왜 침묵하고 있는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종교계 적폐를 청산하라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한국 가톨릭교회가 가는 방향이 올바른지 묻고 싶다. 가난한 교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 가톨릭교회에 요청한 내용이다.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1.지금 한국 가톨릭교회는 가난한 교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인가? 2.지금 한국 가톨릭교회는 가난한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로 가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가난한 교회”(gloria Dei pauper ecclesia)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으면 현재를 쇄신하기 어렵다. 과거를 반성해도 현재를 쇄신하기는 쉽지 않다. 과거 반성부터 제대로 하자는 말이다. 이를 위해 일제 식민지 시절 한국 가톨릭교회의 잘못부터 사과해야 한다. 지난 2000년에 한국가톨릭주교회의가 반성문 한 장 발표했다고 다 된 것은 아니다. 일제 식민지 시절 한국 가톨릭교회의 잘못을 감추지 말라는 말이다. 한국 가톨릭교회가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정권에게 얻었던 특혜를 반성하고 밝히라는 말이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정치권력에 기웃거리는 나쁜 버릇을 그만두어야 한다.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잘 보여 먹을 것을 바라는 못된 행태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예수가 로마군대에 먹을 것을 달라고 부탁하던가. “교회는 국가 권력이 부여하는 특권을 바라지 않는다.”(사목헌장 76)

목사, 신부부터 쇄신을
이제 한국 가톨릭교회는 교회 자신을 쇄신해야 한다. 미루고 늦출 수 없다. 재판관 자리에만 있지 말고 스스로 피고석에 앉을 줄도 알아야 한다. 남에게 훈계만 하는 버릇을 없애고 반성하는 습관을 먼저 들이자는 말이다. 정신적 신앙적으로 쇄신하자는 말을 훨씬 넘어서자는 말이다. 특히 성직자부터 쇄신되어야 한다. 성직자라 하여 비판 대상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구약성서 예언자들의 비판 대상에 성직자들이 1순위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자들이 성직자들을 많이 걱정하고 있다. 성직자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불쌍한 양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언론에 한국 가톨릭의 부끄러운 모습이 드물지 않게 등장하고 있다. 최근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비리와 추문에 가톨릭 신자들은 말을 잃었다. 가톨릭 신자라는 자존감은 줄어들고 자괴감은 늘고 있다. 그 비리와 추문에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신부와 수녀 등 직업 종교인이 연루되어 있다. 둘째, 잘못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 아니라 발각된 것이다. 셋째, 개인 비리도 있지만 조직 비리도 있다. 넷째, 오랜 기간 진행된 일이다. 다섯째, 들킨 후에도 반성이나 처리 면에서 당사자나 지도부가 정직성에서 많이 부족하다.

우리가 사회 비판을 멈추자는 말이 전혀 아니다. 사회 비판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비판을 더 하자는 말이다. 자기 비판을 하지 않기 위해 사회 비판에 몰입하는 작전은 정직하지도 않고 신뢰받지도 못한다. 예수도 로마군대에 저항하기 전에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했다. 예수는 유대교 성직자들을 단 한 번도 칭찬한 적이 없었다.

지금 성도들이 성직자들을 몹시 걱정하고 있다. 신부와 목사가 길을 잃고 헤매는 불쌍한 어린 양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을 개신교와 가톨릭 성직자들이 곰곰 생각하길 바란다. 부자와 권력자들과 어울리며 즐겁게 살아가는 목사나 신부는 왜 교회와 정치가 갈등하고 다투는지 이해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순교가 무엇인지 박해가 무엇인지 알거나 경험할 기회도 없다. 

“교회가 왜 박해를 받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신부들이 박해를 받고 모든 단체들이 공격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 헌신한 일부 신부와 일부 단체만 공격받고 박해받았습니다.”(로메로 대주교, La voz de los sin voz, 1980, 182) 

 

김근수
가톨릭 성도신학자.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광주가톨릭대학에 입학, 2학년 때 독일 마인즈 대학에 유학하여 신약성서를 전공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는 예수’를 주로 공부하다가 ‘예수를 보는 가난한 사람들’을 연구하기 위해 남미 엘살바도르 UCA 대학에 유학했다. 해방신학의 대가 혼 소브리노(Jon Sobrino)에게 해방신학과 기독론을 배웠다. 서양철학사, 4복음서, 해방신학에 관심이 있으며 종교 간 대화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제주시에서 가족과 살고 있다. 《슬픈 예수》 《행동하는 예수》 《교황과 나》를 썼고, 《해방자 예수》 《희망의 예언자 오스카 로메로》를 번역하였다. 공동 집필로 《교황과 98시간》 《쇼!개불릭》 《지금, 한국의 종교》가 있다. 〈가톨릭프레스〉  초대 편집인이었고 해방신학연구소를 만들어 소장으로 있다. 팟캐스트 “쇼!개불릭”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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