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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복원해야 할 언어, 거룩!
[322호 연중기획: 종교개혁 500주년,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화 09]
[322호] 2017년 08월 25일 (금) 14:24:22 박득훈 새맘교회 담임목사,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 goscon@goscon.co.kr

김근수 선생의 글은 항상 기다려진다. 왜 그럴까? 자기 몸을 통과한 글을 쓰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만의 향취랄까, 그만의 멋과 맛이 느껴진다.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얻는 기쁨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의 저서 《슬픈 예수》(21세기 북스)와 《행동하는 예수》(메디치미디어)를 읽으면서 때론 성경에 대한 이해나 바울신학에 대한 평가에서 나와는 다른 부분이 있다는 걸 발견하곤 했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게 참 재미있다. 묘한 매력이다. 이는 그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가난한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이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리라!

그의 지난 글에서도 그런 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왜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한 번도 비판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을 수십 년 동안이나 마음에 품고 성서를 공부했다는 점 자체가 우선 감동이다. 그리고 그가 얻은 답에 깊이 공감이 되었다. ‘다른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넘쳤기 때문에 꼭 해야 할 비판마저 자제하지 않았을까.’ 나도 최근에야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시고도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아니 여전히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체로 삼고자 하셨던 예수님의 속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함석헌 선생의 글을 통해서다.

나는 씨알을 믿는다. 끝까지 믿는다. 믿어주지 않아서 그렇지 믿어만 주면 틀림없이 제 할 것을 하는 것이 씨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하는 것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처 모르고 꼬임에 들어서 그랬지 본바탕은 착하다 믿는다. 까닭은 간단하다. 씨알이라니 다른 것 아니고 필요 이상의 지나친 소유도 권력도 지위도 없는 맨사람이다.1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신뢰했던 예수님이셨으니 그들을 짓밟는 정치권력을 어찌 비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가톨릭평신도신학자와 개신교목회자가 예수님 안에서 같은 목소리를 내는 건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심각하게 훼손된 언어, 거룩
이번에 얘기할 주제는 ‘종교와 거룩·경건’이다. 그런데 거룩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짧은 글에서 둘 다 자세히 다루는 것도 무리려니와, 거룩은 경건을 포함하면서 하나님의 속성까지 담아낼 수 있는 포괄적 용어란 생각 때문이다. 누군가를 거룩하다고 존경한다면 그가 곧 경건하다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라고 말할 순 있어도, 그분이 경건하시다, 라고 말하면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하나님의 백성은 위대한 사명을 동일하게 부여 받는다. 그건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그의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는 사명이다(출 19:5-6; 레 19:2; 벧전 1:15-16, 2:9-10; 벧후 3:11; 히 12:14).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것도 그들을 진리와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여 세상에 보내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교회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다(요 17:14-19, 20:21-22). 그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것을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잔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엡 5:25-27; 눅 22:39-44). 그러니 거룩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핵심적인 정체성이다. 그런데 슬프고 원통하게도 거룩은 한국교회가 심각하게 왜곡시킨 대표적 언어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그 원래의 의미가 너무나 훼손되어 가능하다면 일단 거룩에 대한 언어사용 유예선언이라도 하고픈 심정이다.

거룩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으로 이사야를 들 수 있겠다(사 6:1-5). 이사야는 성전에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을 뵈면서 스랍들이 큰 소리로 노래 부르며 화답하는 걸 들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6:3, 새번역, 이하 인용한 성경구절은 모두 새번역) 그 우렁찬 노랫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 연기가 가득한 광경을 보며 이사야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내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6:5)

거룩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란 입술의 언어로 범하는 죄를 직시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입술을 통해 나오는 언어 자체만 보면 그렇게 거룩하고 경건할 수 없다. 다 하나님의 언어다. 언어만 보면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존재는 하나님이 보실 때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부패하지 않은 곳이 없다. 온갖 사회불의와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괴롭힌다(사 1:2-17).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거룩을 본 사람은 그 죄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되기에 하나님 앞에서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을 경험한다.

그런데 거룩이란 언어를 심각하게 훼손한 이들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예레미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예다(렘 7:1-7). 그들은 성전을 드나들 때마다 듣는 소리가 있었다.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7:4) 그리고 그들의 반응이 놀랍다. “우리는 안전하다.”(7:10) 주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는 한, 그리고 그 성전을 드나들며 제사를 드리는 한, 자신들은 안전하다는 거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며 당당했다. 주님이 특별히 미워하는 죄들, 즉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불의와 우상숭배를 자행했으면서 말이다. 게다가 통렬히 회개하고 돌이킬 의향조차 전혀 없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거룩을 자신들의 욕망과 취향에 따라 이미 철저히 훼손해 버렸다. 이사야가 경험한 ‘거룩’과 예레미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다고 착각한 ‘거룩’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참으로 슬픈 건 대다수 한국교회가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타락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구약시대엔 건물을 주님의 성전이라고 부르며 거기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맛보고 싶어 했던 것 자체는 틀린 게 아니었다. 다만 건물과 제사에만 의존하고 자신들의 거룩한 삶을 등한시 한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성전은 건물에서 유대인의 경계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로 완전히 대체되었기 때문이다(엡 2:21). 그런데 아직도 아름답고 웅장한 교회건물을 지어놓고 주님의 성전이라고 부른다. 그 안에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고 확신한다.

아마도 자신들은 회개할 줄 알기 때문에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다르다고 믿기 때문이겠다. 맞다. 그들은 이런저런 개인적이고 소소한 죄들에 대해선 눈물콧물 흘리며 회개할 줄 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치명적인 죄에 대해선 무서울 정도로 모르쇠다. 불의한 법과 제도를 통치수단으로 삼아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짓밟아온 지배세력들과 한패가 된 것에 대해 절대로 회개하지 않는다. 기복신앙은 곧 맘몬숭배라는 걸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들이야말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뜨겁게 만난 거룩한 사람들이란 신앙적 자부심에 가득 차 있다. 거룩이란 소중한 용어를 철저히 훼손해 버렸기 때문이다.

언어의 복원과 교회개혁
한국교회는 어떻게 해서든지 거룩이란 언어를 훼손해온 온갖 오염 물질을 깨끗이 닦아내 그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복원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언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리도 결국 언어로 기록되지 않았는가? 언어 소통이 붕괴됨과 동시에 바벨탑 건축이 중단되지 않았는가? 세상의 어떤 힘도 언어 없이는 장기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다.

무기와 폭력은 잠시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어 복종시킬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듯이 복종하는 사람들의 자유의지까지 얻지 못하는 한, 그 지배력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그래서 뱀 같은 독재자일수록 자신이 언어의 달인이 되든지 아니면 언어의 달인을 심복으로 삼는다. 언어엔 사람들의 자유의지까지 장악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교회가 3,000억 원이 넘는 비용을 들여 대형교회건물을 건축할 때, 신학적으로 틀린 걸 뻔히 알면서도 굳이 ‘성전건축’이란 언어를 끝까지 고집한 것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다.

심지어 그렇게 유혹적이고 매력적인 맘몬조차도 장기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언어를 활용해야 한다. 이를 잘 아는 간교한 맘몬은 각 분야의 학문, 사회 그리고 심지어는 교회에서까지 천재적인 언어의 달인들을 하수인으로 거느리고 있다. 나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에게서 언어의 천재성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밀턴 프리드먼과 더불어, 1970년대 후반부터 세계를 흔들어 놓은 가장 노골적이고 냉혹한 형태의 자본주의라 할 수 있는 소위 신자유주의의 기반을 견고하게 다진 경제학의 대부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신학적 성격은, 부의 총체적 축적을 그 어떤 가치보다도 상위에 둔다는 점에서 맘몬숭배에 있다는 게 내 확신이다.

하이에크는 “사회적 정의의 환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유명한 저서에서 사회적 정의란 언어가 신기루처럼 아무런 실체가 없는 허구임을 입증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서문에서, 도저히 부끄러워서 ‘사회적 정의’란 표현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게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서비스이자 의무임을 노골적으로 밝혔다.2 ‘사회적 정의’란 두 단어로 표현된 언어 하나를 무력화 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쏟아 부어 씨름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밑둥에서부터 흔드는 게 바로 사회적 정의란 언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부의 총체적 축적이 매력적이라 한들, 사회적 정의가 갖고 있는 언어의 힘을 이기지 못하면, 그 기반은 결국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맘몬은 언어의 달인을 적극 활용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거룩이란 언어도 맘몬에겐 너무 위협적인 언어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사회적 정의가 거룩의 핵심 내용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맘몬이 거룩이란 언어를 가만 놔둘 리가 없다. 거룩이란 언어를 훼손해온 다양한 세력들의 배후를 파고 들어 가보면, 맨 끝에서 맘몬을 만나게 된다. 소름 끼치는 일이다. 거룩이란 언어는 빛과 어둠, 교회와 맘몬이 지금도 치열하게 겨루는 전쟁터에 다름 아니다. 그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교회개혁의 길은 요원해질 것이다. 맘몬은 대다수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이미 왜곡되었기에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언어, 즉 거룩으로 무장시켜 교회개혁에 저항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과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거룩이란 언어를 맘몬의 손아귀에서 빼내어야 한다. 그리하여 원래 모습으로 잘 복원한 다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일단 거룩에 대한 가장 흔한 오류부터 극복해야 한다. 바로 하나님의 거룩을 반물질적(反物質的)으로 왜곡한 오류다.

거룩을 반물질적으로 왜곡한 오류
거룩의 원천은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 자신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모든 형태의 거룩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 무언가가 거룩하다는 건 그게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려면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부터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거룩을 ‘분리됨, 구별됨’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아주 틀린 건 아니다.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거룩으로 번역된 성경원어의 가장 기본적인 뜻이 ‘잘라냄, 분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위험성이 없지 않다. 그 자체로는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으로부터의 분리요 구별인지, 구별되고 분리된 상태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등이 불분명하다. 그래서 자기 나름의 내용을 채워넣는 경향이 있다. 가장 흔한 오류는 거룩을 소위 물질과 육의 세계로부터의 분리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분리된 상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성격을 지닌다. 거룩한 하나님은 인간의 몸과 물질세계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인간의 영혼만 집중적으로 사랑하신다. 복음전도사역이 ‘구령(救靈)사업’으로 불리게 된 연유도 여기에 있다. 한글개역개정 번역본이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은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은 결과 생긴 존재를 ‘생령’(生靈, living soul)이라고 번역한 것도 바로 그런 신학적 관점을 반영한다(창 2:7). 사람의 몸과 하나님의 생기가 만나니, 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영만 남은 셈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어진 일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교회가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된 근원적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최근 공관병에게 갑질을 너무 심하게 해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박○○ 육군대장 부부의 행태는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낸 사례라 할 수 있다. 박○○ 대장은 군복음화를 통해 우리 국민 75%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비전을 확산해온 장로이기 때문이다. 그들 부부는 자신들이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모든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믿었겠지만, 막상 수하에 있는 공관병의 인격을 무참히 짓밟았다. 더욱 슬픈 건 사태가 공개된 이후에도 당사자와 한국교회는 그 잘못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할 줄 모른다는 점이다. 심지어 ‘개도 부잣집 개가 낫다’며 오히려 공관병을 탓하는가 하면, 이제라도 잘못된 관행만 바꾸면 될 일이라며 그 부부를 옹호하고 나선 교계 인사도 있다. 그는 3년 전엔 자기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한 장본인으로서, 작년 한기총 등 교계 단체가 주관하는 제3회 한국교회 원로목회자의 날에 후배목회자들에게 귀감을 보였다는 이유로 ‘목회자 대상’을 수상한 인물이라고 한다.3 거룩의 참된 뜻이 훼손될 때,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한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얼마나 무감각해질 수 있으며,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창세기 2:7에서 영(靈)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네페쉬’에는 ‘영’뿐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 ‘생명’ ‘자아’ ‘인격’ ‘사람’ ‘소원’ ‘열정’ ‘감정’ ‘식욕’ 등 다양한 뜻이 있다. 최근의 번역본들은 대부분 ‘생명체’로 번역하는데, 이 번역이 성경전체의 맥락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면서 7번이나 ‘좋다’하신 것, 특히 인간까지 창조하신 후엔 ‘심히 좋다’ 하신 것과 잘 어울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주만물의 ‘좋음’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좋으심’을(시 100:5)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룩을 몸과 물질의 세계에 반하는 것으로 이해해온 한국교회의 오류는 반드시 교정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 거룩하신 분이실까?

탐욕충족을 위해 이용해먹을 수 없는 분
첫째,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이나 언어로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초월성, 절대성, 영원성, 주권, 위엄 등을 지니고 계시다는 점에서 하나님 외의 모든 존재와 확연히 구별되시기에 거룩하시다(출 15:11-12, 19:10-25; 사 6:1-4; 계 4:8-11). 단순히 물질세계와 구별되기에 거룩하신 게 아니다. 함석헌 선생의 고백에 넓고 깊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거룩이 잘 담겨 있다.

하나님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믿을 이지. 다시 말한다면 받아들일 하나 됨이지 뜯어보고 알 물건이 아니다. 믿으면 아는 데 이르지만, 감히 알기부터 먼저 하려 하면 뒤집혀진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보면 죽는다고 했다. 그는 그 앞에 우리가 보일 이지 우리가 볼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앞에 나갈 때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야 한다.4

하나님을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처럼 단순히 인식의 대상으로 여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나님의 초월과 절대를 놓치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이 분석하고 조정하고 이용할 수 있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게 바로 우상이다. 표면적으론 절대자로 깍듯이 대우 받는 듯하나, 사실상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충족에 봉사하는 몸종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바로 기복신앙이 섬기는 하나님의 실체다. 구제와 자선을 빙자해 성공과 부를 향한 탐욕을 부추기는 기복신앙은 전형적인 우상숭배의 한 형태다. 하나님을 감히 내 손아귀에 넣어 내 뜻대로 조정하여 마음껏 이용해먹으려는 못된 짓이다! 한국교회는 그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을 즉각 중단하고 통렬히 회개해야 한다. 이제라도 얼굴을 땅에 대고 납작 엎드려야 한다.

정의로운 분
둘째, 하나님은 완전히 정의로우시다는 점에서 여타 모든 존재와 확실히 구별되시기에 거룩하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다. 특히 이집트 바로 왕의 억압체제에서 히브리노예들을 해방시키신 놀라운 사건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정의가 빛난다. 하나님은 모세를 그 해방운동의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 호렙산에서 그를 부르실 때, 그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이라 하셨다(출 3:5).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이집트 바로 왕의 불의한 통치하에서 억압과 착취를 겪어야 했던 히브리 노예들에게 주목하신다. 그들이 고통 받는 것을 똑똑히 보시고, 그들의 절규를 들으시고,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공감하신다(출 3:10).

그러기에 그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의도대로 인간 본연의 존엄성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억압체제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뿐임을 잘 아셨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 그들을 억압과 착취의 체제에서 해방시키는 정의로운 운동을 시작하신다. 이는 아브라함을 통해 정의와 공의가 꽃피는 세상을 만들어 가시겠다는 언약의 성취이다(창 18:18-19). 거룩하신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기에 하박국의 고백대로 “눈이 맑으시므로, 악을 보시고 참지 못하”신다(합 1:12-13).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알려주신 자신의 이름 ‘야훼’에 담긴 뜻이다(출 6:2-8).

예수님 역시 야훼 하나님의 거룩함을 온몸으로 보여주셨다. 대표적 사건이 안식일체제와 성전체제에 대한 저항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먹이시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는 데 머무르지 않으시고, 그들을 억압해온 불의한 지배체제에 정면으로 항거하신 것이다. 그로 인해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정의는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관찰하고 그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가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예레미야나 예언자 중 하나일 거라고 판단한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마 16:14). 그들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의한 지배체제에 항거한 이들이니 말이다.

한국교회는 과연 이렇게 거룩한 야훼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 야훼를 뜻하는 ‘주님’을 입에 달고 살지만, 과연 그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있는 것일까? 구제와 자선까진 좋지만 해방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간 철지난 좌파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바보 내지는 반기독교적 인사로 몰리기 십상이다. 대다수 한국교회는 거룩한 야훼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체제가 열렬히 지지하는 하나님, 정의가 거세된 하나님, 즉 맘몬을 섬기고 있는 셈이다. 진정 거룩한 야훼 하나님을 믿는다면 적어도 자본주의라는 억압체제 아래서 신음하는 수많은 ‘을’들의 고통을 보려 하고, 절규를 들으려 하고, 그들의 고통을 내 것으로 삼으려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길을 가다보면 어느 날 구제와 자선에 머무를 수 없다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감히 해방운동에 직접 몸은 담지 못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마음속으로라도 지지를 보내야 한다는 걸 인식하게 될 것이다.

사랑이 넘치는 분
셋째,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시라는 점에서 모든 존재와 구별되는 거룩한 존재이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사랑이 넘치는 분이시다. 우리는 종종 정의와 사랑은 같이 갈 수 없는 것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다. 그건 우리가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에 대한 이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월터스토프는 한 저서에서 깊고 정교한 논의를 통해 정의로운 사랑이 어떻게 가능한지 잘 보여주었다.5 하나님의 사랑은 여타의 사랑과는 구별되는 초월성과 완전성을 지니고 있기에 거룩하다. 타락한 인간이 함부로 접근했다간 죽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거룩한 분이시지만, 하나님은 늘 그들과 가깝게 지내시길 원하신다.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도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에덴동산을 찾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다. 물론 정의롭게 책망하시고 심판도 하신다. 하지만 사랑이 결국 이긴다. 손수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신다. 자책과 부끄러움의 징표가 될 수밖에 없는 무화과나뭇잎 치마를 벗고 살 수 있게 해주신다. 그들이 희망을 품고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야기다. 죄를 범한 인간과 공동체가 거룩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회복할 수 있도록 희생제사제도를 허락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 제도까지 악용해 더 깊은 타락한 길을 갈 때조차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이사야가 그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그대로 전해준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앗시리아의 압제로부터 구원받는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인 주님만을 진심으로 의지할 것이라고 말한다(사 10:20). 그런가 하면 거룩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전달한다.

분노가 북받쳐서 나의 얼굴을 너에게서 잠시 가렸으나 나의 영원한 사랑으로 너에게 긍휼을 베풀겠다. 너의 속량자인 나 주의 말이다. (사 54:8)

호세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 (호 11:9)

하나님이 사람과 구별되는 거룩한 분이신 건, 그가 인간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사랑을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이다. 그 사랑의 압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행 4:27)이었기에 사랑이 넘치셨다. 그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마 11:19). 예수님은, 사랑이 결여되었기에 거룩의 이름으로 죄인들을 양산하고 소외시키며 자기 의에 도취해있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그 서기관들과는 전혀 달랐다(눅 18:11-12). 정의를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실 수 있었던 예수님은 너무 아름답고 매력적인 분이시다. 게다가 예수님은 반듯한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경제적 부라는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 청년까지 사랑하셨다(막 10:21). 강도들이 영적 지도자 행세를 했던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통곡하셨다(눅 19:41-46).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혀 깊은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자기를 조롱하는 이들의 죄까지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눅 23:34).

한국교회는 과연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사랑이 결여된 가짜 거룩이 판을 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교회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죄와 상관없는 행동이나 바른 행동을 죄로 만들고, 진짜 죄는 목록에서 제거하거나 오히려 의로운 것으로 둔갑시킨다. 금주, 금연, 주일성수, 십일조, 제사금지, 동성애금지, 교회 내 정치적 발언 금지, 정치중립 등의 수많은 율법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든다. 그들은 열등교인으로 취급받아 비난과 죄책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대신 그 율법을 열심히 선전하고 준수하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들로 인정받아 리더 행세를 한다. 하지만 그 리더들 안에는 거룩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박○○ 장로의 갑질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알지 못한다. 이런 기독교가 개독교로 욕먹고 있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 발견해야 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국교회가 이 지경이 된 근원적 이유를 성찰하면서 한국교회가 거룩을 복원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

한국교회가 거룩을 복원하는 길
그 첫걸음은 한국교회가 거룩이란 언어를 치명적으로 훼손해온 것이 거룩을 지배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임을 깊이 깨닫고 회개하는 일이다. 이는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맘몬이 교회에서 노리는 빈틈은 언제나 지배욕망이다. 거룩의 윤리적 본질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정의와 사랑인데, 정의와 사랑은 모두 자기 비움을 통해서만 실현이 가능하다. 정의의 핵심은 모든 이웃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인데 이는 탐욕을 내려놓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사랑의 핵심은 모든 이웃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인데 이 역시 이기적 자기애라는 욕망을 내려놓지 않고는 실현될 수 없다. 맘몬이 자기 비움을 흔들어 우리 안에 있는 지배욕망을 부추기는 데 성공하면 거룩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교회가 거룩 자체를 부정한다면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 거기서 자신도 모르게 왜곡의 욕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거룩을 실현할 수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그 언어만큼은 계속 사용하고 싶으니, 그 의미와 내용을 왜곡하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왜곡에 익숙해지는 순간 자기조차 완벽하게 속이게 된다. 전혀 거룩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거룩한 존재라고 확신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쯤 되면 거룩은 더 이상 자기 부인의 길이 아니라 지배욕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럼 거룩이 왜곡되어 지배욕망의 종교적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무엇일까? 그건 제의적 거룩만 강조되고 정의와 사랑을 추구하는 거룩은 도외시 되는 것이다. 이게 가능할 수 있고 또 매력적인 건, 구약을 보면 제의적 거룩도 하나님께서 요청하신 바라는 사실에 있다. 예컨대 안식일을 비롯한 각종 절기, 십일조, 성막제사제도 그리고 음식, 옷, 농사, 접촉 등에 관련된 정결규정도 모두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제의적 규정을 열심히 지키다 보면, 그걸 자신의 거룩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로 삼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착각이요 자기기만이다. 왜냐면 제의적 거룩은 정의와 사랑을 추구하는 거룩과 함께할 때만이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제의적 거룩만 강조되면 지배자들에게 아주 편리한 상황이 된다. 사회적 약자들의 등을 처먹으면서도 제의적 거룩을 실현함으로써 자신을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의적 거룩이 거룩의 모든 것이 되는 순간, 거룩은 불의한 지배자들의 편리한 통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예언자들이 맹렬하게 비판하는 바였다. 이사야는 유다의 통치자들을 소돔의 통치자들로, 유다 백성을 고모라 백성이라고 호명한다. 그러고는 그들이 이런저런 제의적 거룩에는 충실하지만 정의와 사랑을 추구하는 거룩을 도외시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를 전한다(사 1:10-17). 예레미야(렘 7:1-12), 아모스(암 5:21-27) 그리고 미가(미 6:6-8)도 마찬가지다. 예수님도 바로 그런 전통과 맥락에서 예루살렘성전에 기반을 둔 지배세력에 강력히 저항하신 것이다. 이 점을 마커스 보그가 명확하게 짚었다. 그는 예루살렘성전에 거점을 둔 지배세력이 거룩을 제의적 정결로 축소함으로써, 성전중심의 정치경제적 지배체제를 정당화하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전락시켰다고 분석했다. 그 지배세력은 가난한 백성들이 드리는 십일조와 성전 안에서 벌어지는 각종 매매를 통해 벌어드린 수익을 착복하면서도, 이스라엘의 거룩을 수호하는 지도자 행세를 한 것이다.

한국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거룩이 제의적 정결로 축소됨으로써 거룩은 교계지도자들의 편리하면서도 강력한 지배수단이 된 것이다.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는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 교인들의 ‘거룩한’ 종교적 감성을 불러일으켰다. 거대하고 화려한 ‘성전’ 건축에도 성공했다, 하여 교회개혁을 열망하는 이들의 강력한 비판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자기 교회와 주류교계에서 자신의 리더십을 공고화할 수 있었다. 명성교회 김삼환 원로목사는 지난 3월 19일 주일예배 광고시간에 교인들에게 ‘교회세습찬성’ 투표를 강권하면서 교인의 3대 의무는 ‘성수주일, 십일조, 전도’라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교인의 3대 중심은 ‘하나님, 교회, 담임목사 중심’이라고 선언했다.7 제의적 거룩으로 거룩을 대체함으로써, 그는 거뜬히 하나님과 교회 수준으로 자신의 리더십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흐름에 합류한 목사들은 종교개혁정신에 정면으로 반하여 ‘성직자’란 표현을 고집한다. 소득세와 관련해서도 특별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며 교회와 국회와 정부를 향해 외친다. 거룩이 지배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정의와 사랑을 추구하는 거룩을 잣대로 이들 목사들과 교회들을 평가한다면 예언자들과 예수님의 맹렬한 비판을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깨닫고 통렬히 회개하지 않고는 한국교회는 개혁의 첫걸음조차 디딜 수 없다.  

맺음말
한국교회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거룩을 둘러싼 맘몬과의 싸움에서 한국교회는 치명타를 입었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 거룩을 지켜내지 못했다.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룩은 훼손되었다. 거룩은 인간의 몸과 물질세계를 등한시하는 것으로 둔갑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욕망에 따라 교묘하게 조정할 수 있는 우상으로 대체되었다. 정의와 사랑을 추구하는 거룩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제의적 거룩만 앙상하게 남아 ‘거룩 노릇’을 하고 있다. 맘몬의 유혹에 넘어가 이런 상황을 주도한 장본인들은 교계의 지배세력이다. 왜냐면 그렇게 훼손된 거룩은 자신들의 탐욕적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교인들이 자신의 욕망과 교계지도자들의 꼬임에 넘어가 지배 수단으로 전락된 거룩을 기꺼이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그런 거룩을 제시하는 우상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였다. 그 우상 앞에서 대다수 한국교회는 마치 금송아지 앞에서 대축제를 벌인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환호하고 있다. 사회적 불의를 비롯한 치명적 죄악 가운데 빠져 있으면서도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안전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머리되신 거룩하신 예수님은 애통하는 마음으로 거룩을 잃어버린 한국교회의 문을 오늘도 두드리고 계신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계 3:20)
아! 한국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거룩한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인가 보다. 아직도 한국교회를 포기할 수 없는 예수님! 그분 앞에서 실컷 울자! 거룩을 상실한 죄를 통렬히 회개하자! 우리의 문을 활짝 열어 거룩한 주님을 온 몸과 마음으로 영접하자! 그 분과 풍성한 사랑을 나누자! 건강을 회복하여 그가 기뻐하실 거룩한 교회로 다시 태어나자! 

 

각주)
1. 김진 엮음, 《너 자신을 혁명하라: 함석헌 명상집》 (오늘의 책, 2003), 116쪽.
2.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저, 민경국 역, 《법 입법 그리고 자유 II: 사회적 정의의 환상》 (자유기업센터, 1997), 8쪽.
3.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2472 (17.8.7.에 접속)
4. 김진 엮음, 《너 자신을 혁명하라》, 174쪽.
5. Nicholas Wolterstorff, Justice in Love (Eerdmans, 2011). 조만간 IVP에서 번역서가 출판될 예정이다.
6. Marcus J. Borg, Conflict, Holiness and Politics in the Teaching of Jesus (Continuum, 1998), pp. 10-16. 내 글에서 언급된 내용은 마커스 보그가 새 판본을 출판하면서 표명한 자신의 바뀐 입장을 요약한 것이다.
7.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9686 (17.8.7. 접속)

 

 

박득훈
한국 개신교의 교회개혁운동을 대표하는 실천적 지성인이자 목회자. 한국사회의 빈부격차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지니고 연세대 경제학과에 진학했으나, 선교단체를 통해 예수와의 깊은 인격적 만남 이후 경제학보다는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에 몰두했다. 영국 런던바이블칼리지(현 런던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국제장로교회(IPC)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이후 영국 더럼대학교에서 ‘경제정의’를 주제로 기독교사회윤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새맘교회 전임목사,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로 섬기면서 한국 사회에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길을 깊이 고민하며 삶으로 씨름하고 있다. 《돈에서 해방된 교회》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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