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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게 하는 배척
[323호 올곧게 읽는 성경] 일곱 편지의 마지막 경고 (계 3:16)
[323호] 2017년 09월 22일 (금) 16:16:30 정재훈 용인 덕성교회 전도사 goscon@goscon.co.kr

그 뱀은 그 여자의 등 뒤에다가 입에서 물을 강물과 같이 토해내서 강물로 그 여자를 휩쓸어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계 12:15, 이하 표준새번역)

귀신이 그 아이를 죽이려고, 여러 번, 불 속에도 던지고, 물 속에도 던졌습니다.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 (막 9:22)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계 3:15-16)

위 문장이 가지는 공통된 심상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배척’이다.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큰 힘이 순식간에 사람을 쓸어가던 그 우울한 모든 역사적 기억이 신화와 복음과 계시록 속에 공히 녹아든 것을 보면,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 정박해 있는가 묻게 된다. 인간의 무기력함이 역설적으로 존엄을 필요로 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으로서 가장 무기력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해산하는 여인이 용에게 쫓기고 있다. 장차 쇠 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리실 아기(계 12:5)를 낳을 여인은 결코 강하지 않았다. 머리 일곱 개와 뿔 열 달린 커다란 붉은 용(계 12:3)이 일곱 개의 산을 병풍처럼 두른 로마가 상징하는 제국 권력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막의 일곱 촛대와 솔로몬 성전의 열 촛대로 대표되는 유대의 호전적 율법주의를 의미하는 것인지 그 누가 판단하랴! 분명한 것은 예수가 그 둘의 협공으로 십자가를 졌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교회만큼 정치적인 곳이 또 어디 있으며, 한국의 권력만큼 종교적인 곳이 또 어디 있을까! 이 힘에 힘을 더한 복합체가 바로 용의 정체다. 이 용을 그리스도가 어떻게 극복했는지가 관건이다.

   
▲ Peter Paul Rubens 'Apollo and the Python'(1636-1637)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뱀이다. 대지의 신 가이아가 홀로 낳은 자식으로, 파르나소스 남쪽 기슭을 지배하다가 아폴론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 아폴론의 이 승리를 기념하여 델포이에서는 4년마다 피티아 제전이 열렸다. 레토는 티탄 신족에 속하는 코이오스와 포이베의 딸이다. 아스테리아와는 자매 관계이다. 사촌지간인 제우스의 사랑을 받아들여 그와의 사이에서 쌍둥이 남매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을 낳는다.(네이버 그리스로마신화 인물백과)


용이 물을 토해 산모와 아이를 죽이려 한 이야기(계 12:15)가 얼마나 피톤과 레토 신화와 닮았는지는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일반적인 상식이다. 짧게 설명하자면, 제우스의 부인이 낳은 아이가 피톤 자신을 죽일 거라는 신탁을 전해 들은 뱀 형상의 피톤 신이 제우스의 아이를 임신한 레토를 죽이려 했지만, 오히려 아이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내용이다. 이 신화는 요한이 살던 당시의 황제 도미티안의 프로파간다 중 하나였고,(Christopher A. Davis, 《Revelation》, 252쪽.) 요한은 이 신화를 변형해 피톤을 죽인 아이와 그리스도를 치환했다. 계시록 12장은 신화의 아우라를 뺏는 동시에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무력화하는 결정적 일격을 성공시켰다. 세상에 회람되는 유명한 이야기를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서 재설정, 재해석하는 형식은 최초의 홍수, 욥기의 레비아단,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이야기 등과 같이 이미 유대 문학사에는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신화는 아이가 출산 후 용을 죽이는 것으로 묘사한 반면, 계시록은 탄생 직후 승천하여 보좌에 앉는 것으로 용의 죽음을 차후로 미룬다. 용과의 싸움은 아이가 아니라 ‘형제들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계 12:11, 17)들로 대체된다. 계시록에서 신의 아들은 신과 하나님 앞에 설뿐 아니라, 형제들에게 용과 싸워 승리하는 영광을 수여했다. 신화가 레토의 아들 아폴로를 주인공 삼았다면, 계시록은 오히려 중심이 ‘형제들’에게 있다.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요한에게 ‘형제’란 죽음의 문턱을 같이 넘는 사람들이다. 가장 좋은 친구는 그리스도에게 죽기까지 충성하는 자들이다.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입에서 토해질 것이다. 피톤이 레토를 향해 가진 감정은 말 그대로 ‘원수’다. 그녀를 죽이기 위해 죽음의 물을 토해내던 용과 그리스도는 세부적인 사항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토’하는 이미지를 통해 묘한 대립 구도를 형성한다. 용이 물을 토해(쏟다)내는 것은 여자를 물로 쓸려가게 하려는 것인데,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것을 토하는 형상은 물을 토하는 것을 모방한 것이다.

이렇듯 용이 여자와 아이를 죽음으로 이끌려는 것과 예수가 미온적 신앙을 배제하는 상관관계가 물을 토하는 구조로 형상화되었다. 내가 던지는 화두는 이것이다. 용에게 여자와 아이가 궁극의 분노를 일으켰듯이, 예수를 향해 미온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도 예수로 하여금 극도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가? 만일 그렇다면 계시록 3:16의 미지근한 사람들은 예수를 실망시킨 정도를 넘어선다. 미온적 신앙은 자체적 타협점을 갖고 있다. 그들은 나름의 하한선을 갖고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예수를 배척하지 않는다! 다만 적당히 인정할 뿐이다!”

죽기까지 충성한 사람들이 쓰러져 가는 와중에 적당히 타협하는 것은 동료의 죽음을 비웃는 것이다. 용에게 아이는 싫은 존재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앗아갈 공포의 적이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것은 예수의 호불호 문제가 아니다. 예수교라는 정신의 뿌리를 위협하는 도낏자루 같은 것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의 의미는 미온적인 사람들의 손에 끝장날 수 있다. 요한은 그 미온적 신앙의 위험성을 간파한 것이다. 경박해 보일 정도로 치열했던 예수의 이 경고는 일곱 편지의 마지막 경고를 장식하며 우리에게 큰 의미를 남겼다.

귀신에게 사로잡힌 아이(막 9장)        
아이를 불 속에도 던지고 물 속에도 던졌던 귀신의 이야기가 마가복음에 등장한다. 변화산에서 변형된 모습을 갖춘 예수 이야기 뒤에 배치되었다. 신의 아들의 위엄 가득한 모습을 갖춘 예수에게 피톤이 하던 일을 잘 완수하고 있는 귀신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똑같은 내용을 마가는 사례를 통해서, 요한은 신화를 통해서 재구성한 것이다.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것인데, 요한이 마음껏 신화를 사용한 것은 표절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화 속에 반영된 인류의 비애가 현재적이면서 보편적이었기 때문이다. 신화는 이것들의 총합이다.

미온적 신앙을 경고하는 지점에서 예수는 스스로 피톤(계 12장)과 귀신(막 9장)의 자리에 자기를 병치시켰다. 거스를 수 없는 권능을 극복하고 비극에 종지부를 찍던 예수가 아이러니하게도 권능의 자리에 섰고 비극을 예고했다. 미온적 신앙의 그 치명성을 달리 알릴 방법이 없었다. 칼뱅이 구 가톨릭과 개혁파 사이에서 양수겸장을 하고 있는 회색주의자들을 니고데모주의자들로 부르며 극도로 경멸했던 것처럼, 예수에게 미온적 신앙을 가진 자들은 니고데모파였던 것이다. 니고데모가 실제로 등장하는 장면을 자세히 살필 시간이다.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 ‘거듭남’을 배격하다
한국에서 요한복음 3장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만큼 자주 설교된 본문도 없을 것이다. 구원을 정의하는 최상의 본문이고 십자가 이전에 적이 회심하는 역동이 일어나는, 성서가 가진 보물 중의 보물이다. ‘거듭남’이 예수가 배격한 지점이고 예수 외에 하늘나라를 논할 자격이 지상 그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이 본문의 맹점이다.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보자.

3 예수께서 대답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5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 3:3-5)

말하는 순서는 예수(답변) → 니고데모(질문) → 예수(답변)의 순서로 되어있다. 어렵겠지만, 헬라어 성경의 구조를 볼 필요가 있다.

3 ἀπεκρίθη Ἰησοῦς καὶ εἶπεν αὐτῷ·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σοι, ἐὰν μή τις γεννηθῇ ἄνωθεν, οὐ δύναται ἰδεῖν τὴν βασιλείαν τοῦ θεοῦ. 4 λέγει πρὸς αὐτὸν ὁ Νικόδημος· πῶς δύναται ἄνθρωπος γεννηθῆναι γέρων ὤν; μὴ δύναται εἰς τὴν κοιλίαν τῆς μητρὸς αὐτοῦ δεύτερον εἰσελθεῖν καὶ γεννηθῆναι; 5 ἀπεκρίθη Ἰησοῦς·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σοι, ἐὰν μή τις γεννηθῇ ἐξ ὕδατος καὶ πνεύματος, οὐ δύναται εἰσελθεῖν εἰς τὴν βασιλείαν τῶν οὐρανῶν. 

여기서 ἄνωθεν(아노텐, ‘위로부터’-한글 성경이 이것을 ‘다시’라고 번역한 것이 비극의 시작이다)과 ὕδατος καὶ πνεύματος(물과 성령으로) 그리고 ἰδεῖν(보다)과 εἰσελθεῖν εἰς(안으로 들어가다)이 쌍을 이루면서, 내용적으론 동일한 의미를 설명하는 구조다. 3절은 굵은 글씨의 주절과 ‘인용문 속의 인용문’ 구조를 가지고 있고, 4절은 πῶς(how)와 μὴ(not)로 시작하는 두 개의 의문문을 종속절로 가지고 있다. 5절은 3절을 반복하는 모양을 취하면서 몇몇 변화를 주었다.

비록 3절이 ἀπεκρίθη Ἰησοῦς(예수께서 대답하셨다)로 시작하지만 앞서 니고데모는 묻지 않는다(2절). 예수는 니고데모의 인사를 질문으로 간주하고 그가 가진 심적 고민을 이미 다 읽었다는 뜻이다. 표면적 구조는 예수의 답변이지만, 내용적으론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고백한 니고데모가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지, 오히려 답을 해야 하는 구조인 것이다. 적어도 예수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거룩한 무리의 편에 서 있다는 상투적 인사말에 어울리는 이가 아니라, 유일무이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ἀμὴν ἀμὴν은 요한복음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를 강조하는 특수 문구인데, 니고데모와 베드로에게만 2인칭 단수로 쓰였다. 이는 니고데모에게 주신 가르침의 깊이가 베드로에게 주신 것에 상응한다는 요한복음의 고려다.

본문 비평 상의 특이한 점은 고대 사본인 시내사본이 5절의 ‘들어가다’를 ‘보다’로, ‘하나님’의 나라를 ‘하늘’나라로 증거한다는 사실이다. 5절에서 ἄνωθεν(위로부터-다시)가 ὕδατος καὶ πνεύματος(물과 성령)로 바뀌면서는 이해가 쉬워졌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고, ἰδεῖν(보다)가 εἰσελθεῖν εἰς(안으로 들어간다)로 바뀌면서, 오히려 까다로워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니고데모의 반문 때문이다. 예수의 첫 번째 답변은 결과적으로는 답을 하면서 오히려 과제를 내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아노텐(ἄνωθεν)은 ‘다시’(NIV), ‘새로이’(독일-엘버펠트, 루터) 그리고 ‘위로부터’(막 15:38)로 해석될 수 있는 다의적 의미를 던진 것이다. 물과 성령이란 말은 “위로부터”에 더 어울린다. 성령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다시’라는 뜻의 해석을 선택하면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을 내비친다. 예수는 거기에 대한 응수로 “하늘나라를 들어가는 것”(어미의 뱃속에 들어가는 것의 상응구)이라고 답한 것이다. ‘하늘나라를 본다’는 좀 더 쉬울 수 있는 이미지에서 어려운 이미지로 교체되었다. 예수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으면 쉬워지는 ‘하늘나라’가 자기 생각을 고집하면서 어렵게 엉키는 순간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니고데모의 μὴ(메, ‘아닌가요?’) 의문문(4절)은 부정의 답변을 기대하는 의문문이다. 예수의 말이 얼토당토않다는 반문인 것이다. 예수가 좋게 답변할 이유가 없어졌다. (“..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는 어법은 요 3:3, 5에서 구원의 필요 충분을 설명하는 말의 틀로 기능한다. 이 문법이 요 13:8에 또 한번 등장 한다. 베드로가 다시 예수께 말하였다. 아닙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요 13:8) 나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해보고자한다. 발을 씻겨주는 것을 사랑의 봉사로 정의한다면, 이 사랑의 봉사는 종교적 의미의 위로부터 남과 물과 성령의로의 의미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길이 있으니 사랑의 봉사를 하는 사람은, 져스틴이 말한바 철학자들은 예수 이전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본 것과 같은 의미의 선상에서 우리에게 예수를 믿는 것과 예수처럼 사는 것의 거리가 과연 얼마인가를 평생 묻는 끊기 힘든 꼬리표다. 교리상으론 일고의 가치도 없으나 예수의 이 말씀은 우리의 상식을 이렇게 도발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2절에 니고데모의 의문문이 없는데 예수가 ‘답했다’고 나오는 표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두 가지를 가정해 볼 수 있겠다. 하나는 2절 이후에 니고데모의 질문 사실이 누락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가 니고데모의 어리석은 답변을 기대하면서 유도한 것이다. 첫 번째 가정은 사본학적으로 아무런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 같다. 두 번째 가정은 5절에서 아주 즉각적으로 교정이 되고 설명되는 것을 보았을 때 설득력이 있다. 3절과 5절이 나란히 구조적 짝을 이루며 병행구를 형성하면서 하나의 개념을 잘 강조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예수가 말한 “위로부터”(ἄνωθεν)는 결과적으로 ‘물과 성령으로’로서 해명이 되었다. 어머니의 뱃속이 땅의 일이나 육의 일을 말한다고 하면, 물과 성령은 영적인 것과 하늘의 것을 의미한다. (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요한복음 책 전체가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물과 성령 즉 사람의 노력과 투쟁의 결과가 아닌 오로지 “하늘로부터”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성도의 가슴속에 깊이 심어져야 한다. 예수는 단호히 니고데모와 예수 사이의 간극을 설명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요 3:6) 후에 요한이 이 대화를 정리한 것은 이렇다.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요 3:27)

그렇다면 인간의 운명은 어찌 되는 것인가? 요한복음 3:16이 복음 중의 복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요 3:16)

이미 니고데모의 고백(2절)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 즉 예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이 선포돼야 한다. 후일 ‘빌라도의 행전’에서 니고데모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된 것으로 확인된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으면 토해낸다는 주님 앞에서 니고네모는 전향했을까?

‘거듭남’을 지고의 덕목으로 가르쳐온 교회들도 전향하길 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듭남이 아니라 믿는 것뿐이다. 요한복음 전체가 이것을 말하고 있다. 거듭남을 통한 구원의 확신이 하늘에서 났다고 자부하는 순간, 우리는 남에게 손가락질하며 “쯧쯧쯧 저 사람은 아직 거듭나질 못했어”라 말하는 신앙의 변질을 피하기 어렵다. 믿음을 통한 구원은 ‘거듭남’이라는 존재론적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구원은 오히려 “믿는다”는 신앙고백을 죽기까지 충성하는 시간의 연장선에서만 유보적으로 자각할 수 있는, 긴장의 연속성에 가깝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요한의 형제라 할 만하다.

거듭남의 확신만큼 한국교회를 치명적으로 무너뜨린 것도 없다. 심지어 구원의 확신을 교주가 ‘인증’하는 시스템이다. 그 확신이 교회를 사교 집단으로 전락시켰다. 구원의 확신을 획득한 교회는 이제 부를 통한 영락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청부론도 나왔고, 매년 100대 기업의 순위를 매기듯이 큰 교회 리스트가 작성되었다. 돈 없는 사람들은 십일조의 벽에 가로막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있는 자가 모아서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는 십일조가, 있는 자들만 교회로 모으고 없는 자들은 밖으로 내쳐지는 역겨움을 만들었다.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전당이 아니다. 은행 잔고가 충만한 자들의 친목 단체가 되었다. 종교성을 가진 자들에게 서비스하는 사교장이 되었다. 한국교회 대다수가 (어쩌면 전부가) 그러하다고 필자는 단언한다.

어린 시절 서울 어느 판자촌에 있는 교회에 다녔다. 45년간 교회를 담임하신 노 목사님의 은퇴식에 반란이 일어났다. 퇴직금과 사택을 둘 다 기대하셨던 목사님께, 교회는 하나만 선택하라 했다. 왜냐고 묻자 성도들이 이렇게 답했단다.

“이 가난한 동네에서 저희는 자식들 못 먹이고 못 입히고 못 가르치면서 교회를 섬겨 십일조와 성미를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목사님의 자식들은 우리와는 달랐습니다. 목사님이 우리를 돌보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목사님을 돌봤습니다. 그러니 이제 다 가지려 하지 마시고 하나만 취하세요!”
내가 어린 시절 느낀 것을 우리가 모두 다 보고 있었구나! 돈 때문에 망해가는 한국교회를 26년째 신학을 공부하며 지켜보았다. 믿음이 부족해서 교회가 망한 것이 아니었다. 돈을 사랑해서 망했다. 한국교회는 절대 다시 일어설 수 없다. 부자 교회가 되는 것을 부흥이라 외쳤던 교회가 ‘부흥’을 맛보고 전신불수에 빠졌다. 교회의 부흥은 가난해지는 것에 있음을 알지 못했던 교회에 내려진 당연한 처벌이 아닌가.

 

정재훈
대한신학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 독일 뷔르츠부르크와 튀빙겐 대학교를 거쳐 부퍼탈 신학교를 졸업(Mag.Th)했다. 10여 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한신대 신대원을 졸업(M.Div)하고 현재 용인 덕성교회에서 청년학생부를 지도하고 있다. 토요일 밤마다 대치교회 성서학당을 통해 요한문서들을 강해하고 탁상담화를 진행한다. 전공 논문은 〈요한계시록 인자 기독론〉이며, 현재는 ‘요한계시록’ ‘지혜’ ‘기독론’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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