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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통해 드러날 ‘144,000’의 비밀
[319호 올곧게 읽는 성경] 한국교회로 배달된 요한의 편지 6 (계 7, 14, 21장)
[319호] 2017년 05월 24일 (수) 17:15:47 정재훈 용인 덕성교회 전도사 goscon@goscon.co.kr

계시록을 기록한 이의 의도와는 다르게 ‘144,000’(십사만 사천)은 영생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분출시키는 숫자가 되었다. 비루한 자들을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선택’이 우월한 민족주의의 근원이 된 것, 십자가 보혈의 구속적 영구성이 죄지으며 살아도 구원은 보장된다는 방종의 근원이 된 것과 같은 선상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144,000’의 진정한 성경적 뜻과 시대적 의미를 되돌아볼 때이다.

구름 같은 관중의 수?
세기의 걸작이라는 칭송을 받은 영화 〈벤허〉(Ben Hur)는 2000년 전 로마에 실재했던 대전차경기장(Circus Maximus)에서의 유명한 전차 경기 장면을 남겼다. 주후 1세기 로마시의 인구는 최소한 45만 명에 이른다.(Lesley Adkins & Roy A. Adkins.) 대전차경기장에 관객석이 다 차면 14만 명에서 15만 명 사이가 들어갈 수 있었다니, 로마 인구 3분의 1이 한 경기장에 다 모일 수 있었던 셈이다. 요한이 보았던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수(144,000)와 초기 기독교 신자들을 처형했던 가장 큰 형장의 관객 수가 어찌 이리 비등한지! 혹 요한은 순교로 하나님의 이름을 지킨 사람들과 그들의 죽음을 구경거리로 여겼던 구름 같은 관중의 수를 교환하면서 처형된(될) 자와 처형을 즐기던 자들의 운명을 역설적으로 교환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불행히도 로마는 200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객석을 다 채울 만큼의 순교자를 내는 데 성공했다.

   
▲ 혹 요한은 순교로 하나님의 이름을 지킨 사람들과 그들의 죽음을 구경거리로 여겼던 구름 같은 관중의 수를 교환하면서 처형된(될) 자와 처형을 즐기던 자들의 운명을 역설적으로 교환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The Chariot Race from Ben-Hur by Wikimedia Commons)

수비학으로 읽어낸 144,000과 666의 함수관계
우리가 12간지로 부르는 열두 동물의 기원은 수메르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장구한 역사를 가진 학문 이전의 학문에 그 뿌리가 있다. 고대인들은 밤하늘 별빛 아래 하루의 반 이상을 보냈다. 하늘에 떠 있는 그 시계는 영원에서 영원까지의 시간을 보여주는 최고의 영물이었다.

필자는 요한계시록을 공부한 이래로 천문학의 역사에 착념하게 되었고, 그 결과 성서를 보는 시각이 움직이는 것을 감지하였다. 계시록은 마치 글로 쓴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라 생각된다. 바위에 새겨진 고대인들의 별자리 그림은 오늘날의 과학적 기법보다 그 그림을 그린 시점의 시간과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준다. 한 예로 일본이 훔쳐간 우리의 하늘 그림, 기토라 고분의 천문도는 그림은 일본에 묶여 있지만 그림을 그린 사람의 눈이 이 땅에 발을 디딘 고구려 사람이란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천문학은 기본적으로 태양과 달과 별을 살펴보는 학문인데 이는 고대인들이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유일한 창문이었다. 인간의 운명이 추위와 더위 그리고 땅의 작물 풍요에 달려 있었고 이것을 알려주는 모든 힌트가 하늘에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기하학은 태양이 뜨고 지는 원리를 땅의 건축에 활용하여 그들의 땅과 하늘을 잇는 수학으로 발전시켰으니 기하학과 천문학은 모든 학문의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666’이 기하학의 대표 상징 수라면 천문학을 대표하는 수는 2,160 또는 0을 뺀 216이다. 천문학에서 중요한 태양이 새해를 여는 춘분의 기준 별자리를 하나 옮기는 데 2,160년이 걸리는 이유로 해서(즉 12 별자리를 다 도는 데는 12×2,160년이 걸린다) 수 ‘216’은 천문학에서 독보적 의미가 있다. 시온의 어린양이 144,000명과 함께 있고 그들이 적그리스도(666)를 상대할 대척점에 있다는 요한계시록의 이야기 구조 속에서 수비학(Gematria, 數祕學)적 도식으로 ‘216’과 ‘144,000’과 ‘666’이 모종의 함수관계에 놓일 것 같다. 만약 이들 수 간의 함수관계가 성립한다면 수는 특정한 이야기를 상징하는 수비학적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숫자가 가지는 의미를 좀 더 유기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144,000÷666=216.2162162162162

다만 이러한 함수관계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낸다기보다는 당대 로마의 문화가 천문학과 수학을 신성시하는 특수한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저자와 독자는 이러한 주변 세계와 교류하며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수비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요한은 기독교인들을 피를 먹는 야만적 무신론자들로 매도한 로마의 종교가 기초로 삼은 천문학과 기하학의 근간, 144,000과 666을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승리를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기염을 토했다.

   
▲ 천상열차분야지도 일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천(全天) 천문도 가운데 하나로써 우리 역사의 대표적인 유산이며, 세계적인 보물이다.

천문학과 기하학으로 무장한 그리스 로마 문명이 기독교를 야만적인 종교라 부르는 그 시대에 요한은 수학을 역사에 접목시켰다. 이는 마치 단순 시계공으로 여겨지던 하나님을 우연과 필연이 뒤엉키는 드라마 연출가로 격상시킨 것과 같았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레스의 교육’이란 책으로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쳐 지중해 문명을 칼로 정복했다면, 모세와 예수의 제자인 요한은 요한계시록으로 교회를 가르쳐 인류를 복음으로 정복했다. 이것이 필자의 요한계시록 신학의 정리이다. 〈복상〉 1월호에 언급한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요 수학자였던 황실 종교담당 행정관 율리우스 피르미쿠스 마테르누스가 요한계시록을 읽고 그리스 로마 종교와 학문에서 진리의 학문인 복음으로 돌아선 주후 4세기의 인류 최초의 ‘종교개혁’은 그 결실이었다.

진리의 수 ‘144’
144,000이란 수가 요한계시록 7장에서 등장한 후 다시 한 번 14장에 등장하고 21장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의 벽 두께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144’라는 숫자가 또 등장한다. 144라는 숫자가 14장과 21장에 등장하면서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14장: 십사만 사천(144,000)이 서 있는데(1절) … 그들의 입에 거짓말이 없고(5절)

21장: 또 내가 보니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2절) …  그 성곽을 측정하매 백사십사(144) 규빗이니 … (17절) …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27절)

144라는 단어는 거짓으로부터의 완전한 단절 곧 진리를 가리키고 있다. 새 예루살렘의 백성이 거짓말이 없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지키는 성 새 예루살렘은 144 규빗(65미터 가량)이라는 놀라운 두께로 거짓말하는 자들로부터 방어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 진리의 성이 제외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자칭 사도라 하는 자(계 2:2), 자칭 유대인(계 3:9), 거짓 예언자(계 16:13) 그리고 그들에게 성경이 예언한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5) 이 진리의 성을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있을까? 결단코 우리 눈으로 이 성을 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 성은 어디에 있는가? 계 7:2에서 이르되 아멘(진리) 찬송, 영광, 지혜, 감사, 존귀, 권능,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아멘(진리).

이 진리의 성은 견고하고 완벽하게 건설되었다. 그것은 낡고 상하는 벽돌로 지은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지어졌고 지혜 그리스도가 건축했다. 지혜가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었다.(잠언 9:1) 아멘과 아멘 사이에 있는 하나님께 드려진 일곱은 진리의 일곱 기둥이다. “찬송, 영광, 지혜, 감사, 존귀, 권능,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음을 경배하고 사는 삶이 진리의 성안에서 사는 삶이다. 아멘 아멘, 즉 진리 진리가 바로 144 규빗의 새 예루살렘 성의 방어벽이다. 지혜 그리스도가 참 진리라면, 적그리스도는 무엇인가? 무서운 자가 아니라 어리석은 거짓말쟁이다.

어리석은 거짓말쟁이 적그리스도 666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계 12:9)

사탄에 대한 수식어는 하나뿐이다. 온 천하를 꾀는 자.(ὁ πλανῶν[꾀는 자] τὴν οἰκουμένην[천하] ὅλην[온]) 여기서 사탄이 꾀려는 천하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견고히 세우셨다.(잠 3:19) 지혜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대결은 처음부터 ‘세상을 만든 이’와 ‘세상을 망치는 자’의 대결이었다. 사탄이 거짓말쟁이인 것은 성경의 증언(요 8:44)이지만, 거짓말과 어리석음이 동일한 선상에 놓일 수 있을까? 성경은 양자를 다르지 않다고 본다.(“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_잠 14:8) 지혜는 세우고, 어리석음과 거짓은 허물어뜨린다. 사탄은 그래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경멸의 대상이다. 바보 멍텅구리이다.

유일무이의 진리 예수 그리스도와 144,000
거짓이 아닌 진리가 무엇인지 요한계시록 자체는 서술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어쩌면 요한1서가 답할 몫이다.(“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_요한1서 2:22)

144,000의 인침 받은 자들은 어느 종교 집단에 소속되어 교주의 승인을 받아 등재되는 게 아니다. (누구도 종교사기극의 희생물이 되어선 안 된다.) 그러기엔 개념이 너무 쉽고 간결하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한 가지 기준만이 144,000을 가르는 기준이다. 집회의 출석률, 헌금, 전도 등을 기준으로 144,000의 가입 여부를 확정지어 주겠다는 그 어떠한 말도 거짓말이다. 그 거짓말을 따라 144,000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모든 속은 자들은 속히 돌아서길 바란다.

필자의 지인 중에 고 이천석 목사를 숭모하여 그 교회에서 부지런히 방언을 따라 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축귀하는 종교에 들어가 부단히 제 몸에 귀신을 쫓더니 결국엔 144,000으로 사람을 호리는 종교에 자기와 딸을 내어주는 난감한 일이 일어났다. 그 오랜 시절 방언과 축귀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이 하나의 진리도 지킬 수 없다면 우리는 교회에서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인을 잘 지키고 있는가? 성도의 속옷을 벗기고 목사의 성욕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수장이 되겠다고 수많은 후학들을 억지로 고소하여 경찰서를 들락거리게 만드는 저들에게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진리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보수 교회는 몸으로 성도를 능욕하고, 진보 교회는 명예욕으로 성도를 가두니 이 시대 진정한 교회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종교개혁 500년을 축하한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부디 그만하옵소서!

예후의 종교개혁과 죽음의 144,000
열왕기하 10장은 예후가 바알의 종들을 죽이기 위한 계책으로 그들을 한곳으로 모아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에게는 예후가 내린 예복이 주어졌고 거룩한 대회를 열어 바알 신의 종들을 다 모았다. 바알의 종들에게 이번 대회는 바알의 인침을 맞는 중요한 행사였기에 자못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참가했다. 특별한 예복에 고무된 채 다 모이면 이제라도 성대한 예배를 드리려던 바알의 종들은 일거에 몰살되었다. 예후는 그것을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 불렀다.(왕하 10:15)

144,000이 인증받은 주님의 종이라는 상징성을 갖듯, 어쩌면 그들도 바알의 사제단에 포함되는 영광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후가 있는 수도 사마리아로 상경하였다. 예수의 144,000이 죽임당한 어린양과 시온에 모였다면 바알의 ‘144,000’은 사마리아에 바알을 섬기러 모인 것이다. 그들은 예후가 준 예복을 입고 다른 이들과 또렷이 구별된 채 한 날에 죽임당해 밖에 던져졌다.(왕하 10:25) 그 예배가 자기들을 제물로 삼을 것인지 알았더라면 결코 그곳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바알의 종이라는 표식으로 입은 예복이 거짓의 예복인지 알았더라면 그 예복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바알은 당대에 하나님으로 추앙되었다. 예후만 하나님 열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들도 하나님 열심을 가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예후도 더러운 자였고 속은 자들도 더러운 자들이었다.

누구도 더 이상 거짓의 144,000에 들지 않기를 소망한다. 또다시 하나님의 종들을 부르는 자가 있다면, 그가 죽임당한 어린 양인지 물으라. 어린 양은 재물을 탐하지 않고 음란하지 않으며 거짓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이 땅의 어떤 집단은 거짓으로라도 통째로 교회를 집어삼켜 자기 휘하에 두는 것이 진리를 위한 하나님 열심이라 한다지만 성경의 이 한 말씀이 저희를 심판하리라!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계 21:27)

144,000명 이마에 찍힌 하나님의 도장
3,000배(拜)를 올리고 성철 스님을 만난 어느 청년이 있었다. 성철 스님이 그 청년에게 던진 화두는 이랬다.

“밥은 먹었는가? 차나 한잔 하고 가시게!”

144,000명 안에 들어 인침을 받으려는 사람들도 무엇인가 열심을 내어, 그 종교의 수장에게 인정을 받으려 안간힘을 쓴다. 수장들은 그 열심이 탐나 그 열심을 뿌리치지 않는다. 전도하러 보내고 헌금 벌어오라 보내고 만사에 순종을 독촉한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성도가 밥은 먹었는지 차 한잔 여유는 갖고 사는지 묻는가? 3,000배를 해야 부처를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부처가 아니듯이 헌금을 해야, 신도의 수를 늘려야, 특정인에게 복종해야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도장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도장이 아니라 마귀의 궤계가 새겨진 도장이다.

144,000의 이마에 있는 하나님의 도장(계 7:3)엔 무엇이 새겨져 있는가?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계 14:1) 그렇다!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

동그란 원 안에 ‘예수 & 하나님’ 이렇게 찍혀 있을까? 아, 상상만 해도 엽기적이어라! 어떠한 문자도 하나님과 예수의 이름을 대신할 수가 없다. 예수와 하나님의 이름은 부적이나 문신이 아니다. 그들의 이마에 있는 이름은 땅에서 그들을 구원할 실행력을 가지고 있다. 궁극적 실체를 가지고 있는 이름이어야 한다. 그 어떤 신앙 고백의 선언, 문자, 문양도 그 실존을 담을 수 없다. 귓가의 소리가 채 가시기 전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배교할 것이다.

사건 속에 드러나는 이름
144,000의 이마에 새겨질 이름은 ‘사건’ 속에서 드러날 것이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 17:12)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6)

요한복음 17장 12절의 말씀으로 예수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성도를 보존하고 지키는 비결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17장 26절은 예언을 담고 있다.(ἐγνώρισα[알게 했다-과거] αὐτοῖς τὸ ὄνομά σου καὶ γνωρίσω[알게 할 것이다-미래]) 이름을 알게 하겠다는 선포가 있었고, 곧 18장으로 이어져 예수의 체포당하는 장면에 이른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요 18:4-5)

여기서 “내가 그니라”라는 말로 예수는 스스로 체포되길 허용하시고 예수 외에 다른 이들은 수사망을 벗어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호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자인 자백으로 사람들을 보호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보호한다던 하나님의 이름’은 어디 있는가? “내가 그니라”는 원문에 Ἐγώ εἰμι로 되어 있다. 직역하면 “나다”가 된다. “나다”(Ἐγώ εἰμι)는 히브리어 하나님 이름 여호와(אֶֽהְיֶ֑ה)를 헬라어로 옮겨 적은 것이다. 요한복음 18장 5절은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 즉 자기 확인이 겹쳐서 발생한 사건을 담고 있다.

예수의 “나다”라는 답변 속에 “예수” “여호와” 이 두 이름이 한꺼번에 용해되어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두 이름이 하나가 되지 말았어야 했다. 왜? 주님이 잡혀 죽었으니까. 그럼에도 예수가 “나다”라고 선언하면서 생긴 두 이름의 ‘하나 됨’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보존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일찍이 예수가 태어났을 무렵 예수와 같은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이 헤롯의 손에 떼죽음을 당한 일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때 아기 예수는 살았으나, 많은 아기가 죽었다. 이제 예수는 같은 일이 두 번 일어나지 않길 바라신다. 그래서 예수 자신만 잡혀 죽고 모두를 살렸다. 예수만 잡혀 죽고!

   
▲ 그리스도의 체포 '사건' (Caravaggio 그림)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예수가 자기를 고백하는 순간, 예수의 신원 확인과 하나님의 성호가 드러나는 일이 동시에 터졌다. 이것이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144,000의 이마에 새겨지는 것이라면, 그 이름은 사건을 동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사형(순교) 집행 대상자를 찾는 그 질문에 누군가 “나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의 실존(이마)에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동시에 새겨진다. 요한복음 17장 26절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겠다던 예수의 선언과 예언은 예수가 잡히던 밤에 예수가 “나다”라고 승인하는 순간(요 18:5) 비로소 성취되었다고 필자는 단언한다. 이로써 하나님, 예수, 이긴 자(순교로 박해를 이긴)들은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되고 한 보좌에 앉게 된다.

이기는 사람은 마치,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계 3:21, 표준새번역)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은 소리도 아니고 글자도 아니며 ‘사건’으로만 존재한다. 이것이 예수가 알게 하겠다던 하나님 이름의 실체다. 하나님의 이름이 사건으로서만 존재하지 않고 말과 글로도 유효하다면 즉각 마술의 재료가 되고 말 것이다. 한국교회는 반복되는 방언으로, 축귀의 주문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마술의 재료처럼 유용해왔다. 그다음은 이름을 주겠다는 꾐에 넘어가는 차례만 남았다. 이단을 만들어 낸 것은 샤머니즘적 한국 기독교다. 그들은 사람 두개골이 빠개지고 바다에 수장되고 아기들이 독가스를 마시고 죽거나 전신 마비가 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들이 144,000에 들기만을 바라며 골방에서 기도했다. 바알에게 열심을 바쳤다. 염병할! 입으로만 시인하여 위선에 이르고, 마음으로만 믿어 회의에 이르렀다. 방언, 축귀, 144,000으로 사람을 꾀던 자들은 유독 ‘사건’에는 관심이 없다.

사건의 중심에서 신앙 양심을 고백한 자들만이 세상에서 따돌림당하는 대신에 하나님과 예수와 하나가 되는 신령함을 체험했다. 이것이 성령 체험이다. 사건은 골방에선 절대로 벌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골방에 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로 임하는가?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 나라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계 1:9). 

 

정재훈
대한신학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 독일 뷔르츠부르크와 튀빙겐 대학교를 거쳐 부퍼탈 신학교를 졸업(Mag.Th)했다. 10여 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한신대 신대원을 졸업(M.Div)하고 현재 용인 덕성교회에서 청년학생부를 지도하고 있다. 토요일 밤마다 대치교회 성서학당을 통해 요한문서들을 강해하고 탁상담화를 진행한다. 전공 논문은 〈요한계시록 인자 기독론〉이며, 현재는 ‘요한계시록’ ‘지혜’ ‘기독론’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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