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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두께 144 규빗, 난공불락의 성
[322호 커버스토리] 한국교회로 배달된 요한의 편지 8 (계 21장)
[322호] 2017년 08월 25일 (금) 14:43:50 정재훈 용인 덕성교회 전도사 goscon@goscon.co.kr

한 건물이 있다. 정사각형 모형인데 한쪽 벽 길이가 무려 2,200km에 달한다. 벽두께는 무려 70여 미터. 상상을 초월하는 이 건물을 우리에게 소개한 이는 계시록의 저자 요한이다(21장). 계시록이 기록되기 약 20년 전 유대 공동체는 최고의 요새라던 마사다(Masada)에서의 마지막 패전으로 군사적 조직체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로마군이 그 높은 요새를 정복하려 비슷한 높이의 작전용 언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높은 고지대의 마사다는 평지처럼 되어버렸다. 유대인을 안심시켰던 높은 천연 담이 로마에 의해 평지가 된 것이다. 요한은 성령에 이끌려 높이가 2,200km인 새 예루살렘을 보았고, 불과 400m 높이의 마사다에 기대를 걸었다가 최후의 운명을 맞이한 옛 유대의 아픔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요한 vs. 플라톤
계시록 7장에서 ‘열두’ 지파 중에 단지파가 빠진 것을 두고 그 연원을 헤아리는 일이 여전히 유행이다. 이유를 추리하는 것은 학자의 지혜를 뽐내는 기회가 될 것이나 그러는 사이 무엇인가 놓치고 있다. 서양 고대 철학에서 무게 있는 학자들은 저마다 올림포스의 ‘열두’ 신들을 지명하는 나름의 기준으로, 누구는 빼고 누구는 다시 집어넣고 한다. 즉 인간이 신의 지위를 강등이나 격상시키는 일들이 있었고 대표적으로는 플라톤이 그러했다. 요한이 144,000의 기준점이 되는 ‘열두’ 지파의 우두머리를 나름의 원칙으로 새롭게 제시했다는 것은 예언자 요한의 권위가 그만큼 포괄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열두 지파가 계시록 7장에서 개별적으로 호명된 것과 달리, 21장에서 ‘열두’ 사도의 명패는 빈칸으로 남아있다. 

베드로, 야고보, 안드레, 요한… 독자의 머리에 스치는 이름들이 있을 것이다. 그 알만한 이름들이 ‘열두’ 사도의 내용이었다면, 요한은 한 번쯤은 각각 이름을 불러주었을 것이다. 21장 19-20에 상세히 ‘열두’ 보석의 이름을 거명한 것과 7장의 ‘열두’ 지파의 예를 열두 사도와 비교하면서도 ‘열두’ 사도의 명패를 공란으로 비워둔 것은 참으로 의아하다.

   
▲ 고대 로마 제단 기물의 테두리에 황도 12궁이 새겨져 있고, 각 별자리에 사람 머리 모양이 대응하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 (사진: 위키 미디어)

열두 사도는 누구인가?
계시록은 ‘사도’에 대한 남다른 정의가 존재하는 것일까? 계시록 2:2에 의하면 사도를 사칭하는 거짓말쟁이가 등장한다. 이름을 사칭한 것이 아니라 사도직을 사칭했다. 당시에 사도가 예수의 직제자 말고도 여럿 있었음이 엿보인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다운 사도를 가려내는 데 일가견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처음 교회들은 교회의 지도자를 ‘누구의 제자다’ ‘얼마큼 공부했다’ ‘공동체의 형성과정에 크게 기여했다’로 판단치 않고 그들을 시험하여 거짓을 드러냈다.(계 2:2)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신 첫 칭찬을 받았다. 교회에 목회자를 시험하고 검증하는 사명이 있음이 명확하다. 한국교회를 뿌리째 드러낸 추문들 속에 언제나 한 문장이 아귀처럼 도사리고 있다. “주의 종을 힘들게 하면 하나님이 진노하신다.”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목회자를 테스트하고 악을 증명하라고 촉구한다. 한국교회는 이 점에서 성경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사도에 관한 두 번째 언급은 18:20에 등장한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예언자들이여, 즐거워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을 위하여 그 도시를 심판하셨습니다. (계 18:20, 이하 표준새번역)

심판의 성취는 계시록 6장의 제단 아래 죽임당한 영혼들의 기도였다.

그 어린 양이 다섯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또 그들이 말한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큰소리로 “거룩하고 참되신 통치자님,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땅 위에 사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또 우리가 흘린 피의 원수를 갚아 주시겠습니까?”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계 6:9-10)

이 두 본문의 상관관계를 인정할 때 어쩌면 사도됨의 최종적 확인은 부패한 도성 바빌론을 규탄하다 죽임을 당한 후이다. 죽임당한 성도의 사후 청원의 의미도 되새겨야 한다. 성도의 사후세계가 현실만큼의 실제라는,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라는 뚜렷한 웅변은 감히 복음서 기자들도 넘보지 못했던 파격이다. 다니엘서는 이미 그 초석을 깔아놓은 바 있다.

그리고 땅 속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수치와 함께 영원히 모욕을 받을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 (단 12:2-3)

예수에게 영생이 오늘이라면(나사로의 부활, 요 11장) 요한에게 영생은 순교의 필연적 결과였다. 고로 ‘오늘의 순교=영생’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영원에서 오신 예수가 오늘이라는 시간을 파고들었을 때 영원한 생명은 오늘이라는 공간에 보금자리를 폈다. 사후세계의 약속은 순교를 떠나서는 종교적 미끼로 전락할 뿐이다. 영원을 오늘에 가둬버린 예수의 도발은 영원을 바라는 고난 받는 성도들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오늘 그리고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 영원이 들어왔다는 파격적 복음 선포다.

요한이 열두 사도의 이름을 적시하지 않은 것은 옛 사도가 아닌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도를 찾으라는 암시다. 사도에 대한 마지막 언급이 계시록 21장에 등장한다. 그 열두 사도의 이름이 이제 144 규빗의 성벽에 적혀 있다.

그 도시의 성벽에는 주춧돌이 열두 개가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계 21:14)

‘144’라는 숫자의 의미는 6월호(“사건을 통해 드러날 ‘144,000’의 비밀”)에서 밝힌 것처럼 ‘진리’를 뜻한다.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새 예루살렘의 144 규빗(약 70m) 난공불락의 성벽이 건재하려면 에베소 교회처럼 거짓말하는 가짜 사도들을 가려내는 교회들의 부단한 검증이 필요하다. 교회의 방관 속에서 가짜 사도들이 목회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내버려 둔다면 견고한 새 예루살렘은 그 성벽이 점점 얇아져 이내 허물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 그 어느 것도 기도하는 성도 없이, 피와 땀 없이 현실이 된 예가 없다. 우상 숭배의 반대편에 선 144,000 성도와 144 규빗의 하늘로서 온 성전은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가 예수(진리의 축) 안에서 총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수(144)로 나타낸 것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렇게 검증을 거친 진리 안에서 성도는 이길 수 있다. 이기면 무엇이 오는가?

자녀 삼으심 vs. 수로보니게 여인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받을 것이고,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계 21:7)

새 예루살렘의 모든 새로움과 지상복락(地上福樂)은 이긴 자들을 수혜자로 삼았다. 위 본문은 구약에서 성전의 궁극적 존재 이유를 설명할 때마다 등장하는 문장이다(레 26장, 렘 32장). 계시록은 새 예루살렘의 강림에 즈음하여 전통적 문구를 조금 바꾸었다. 내 ‘백성’이 내 ‘자녀’로 바뀐 것이다. 국가 공동체와 백성 간의 매개체 모델로 설명되던 성전이 이제 가족이라는 더 가까운 개념으로 밀도가 응축되었다.

예수는 이 문제에서 아주 옹졸한 사람으로 비치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 오명을 한 번도 벗은 적이 없다.)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사건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대리권자로서 예수가 하나님을 대리해 ‘인류를 자녀 삼으러’ 오셨는데, 그것이 ‘혈통을 근거’로 한정한 사건이었다는 오명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로 알려져 왔다. (모교인 독일 부퍼탈 신학대학에 지금은 은퇴하신 베르톨트 클라퍼트(Bertold Klappert)라는 교수님이 계셨다.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유대인과의 대화’를 이끈 신망 높은 분이셨다. 필자와 자주 인자론에 관한 토론을 해주셨는데, 나는 인자는 곧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허락받고 싶어 했고 그분은 늘 “Repraesentation”(대리)을 고수하셨다. 지혜 기독론을 연구하면서야 비로소 그분이 양보하지 않으신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이라면 예수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다. 배달 사고를 친 어리석은 대리자가 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수로보니게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시기를 예수께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이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을 옳지 않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기를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막 7:25-30)

예수의 입에 든 말 “(내) 아이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을 옳지 않다”는 말은 사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삶의 태도로 보인다. 그 여인이 고향을 떠나 가난한 자들의 집에는 드문 상(τραπεζα 트라페자)을 언급하는 장면은 그녀가 상당한 재력가였음을 뜻한다. 그녀는 아마도 국제적 비즈니스를 했던 것 같다. 싼 임금을 위해 가난한 이스라엘 사람 등을 고용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도, ‘모든 것은 내 자식에게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 삶의 방식이 바로 딸에게 깃든 더러운 귀신의 정체다. 풍족한 양식을 아낌없이 다 먹은 그것이 문제였다. 이제 그녀가 딸에게 든 귀신을 떼어내기 위해 예수를 찾아왔을 때, 예수는 “내 자식만 내 것을 먹을 수 있다”라는 그녀의 잘못된 삶의 방식이 그 가정을 덮은 귀신임을 알았다. 그 귀신을 떼어내기 위해 예수는 그녀의 삶의 철학을 자신의 입에 담았다. 즉시 반박을 위해 그녀가 자식만이 아니라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개들도 먹는다는 입장에 서자 예수는 해방을 선언한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귀신이 떠났다”는 말은 이제 주변을 돌아보고 네 것을 남에게 나누어 주면 더러운 귀신이 떠난다는 것을 밝히 보여준다.(마태복음이 이 이야기를 조금 다른 형태로 다루면서 변형시켰다(“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_마 15:24). 이 때문에 예수는 지독한 국수주의자이며, 복음의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국 여인을 수용했다고 오도되었다.) 

예수의 비정해 보이는 글귀는 예수의 입장이 아니라 수로보니게 여인의 입장이었다. 자녀도 개들(가난한 이웃)도 먹어야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예수의 고육지책이었으리라. 그녀가 반문한 대로, 더불어 먹는 삶을 실천한다면 같은 귀신이 재차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예수는 더불어 먹는 삶이 더러운 귀신을 멸절하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우리는 그동안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는 편협하다’로 배웠다. 예수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마음을 읽었고 우리는 ‘예수는 원래 그런 놈이다’라고 읽은 것이다.(언젠가 대한성서공회에서 오래 일하신 노 교수를 만났다. 가장 존경하는 신학자이셨기에 연세를 핑계치 말고 계속 일해 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선배님 같은 분들이 한국교회를 똑바로 못 가르쳐서 후배들이 ‘개독교’라 불리는 교회를 물려받았다”며 읍소했다. 억울하셨을 게다. 그분만큼 바르게 가르치신 분이 또 어디에 있으랴! 한 말씀 더 드렸다. “한국인은 (성경을 읽는 일에) 99%가 문맹입니다.” 놀란 것은 그분이 아니라 흔쾌히 동의해주시는 모습을 본 필자였다.) 

만일 “아이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을 옳지 않다”는 말씀이 수사법이 아니고, 예수의 편협한 본심(예수 복음은 유대인에게 독점적 우선권이 있다!)이라면 신약 전체는 코미디다. 이러한 몰이해가 계시록 21:7에서 와해된다.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받을 것이고,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계 21:7) 이 번역도 실상 애매하다.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καὶ αὐτὸς ἔσται μοι υἱός)가 맞다.
 
이기는 모든 사람은 혈통과 국적에 상관없이 성 소수자건 아니건 관계없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긴 자들을 위한 처음(새) 예루살렘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였다.(요 2:19) 요한복음이 이것을 증언했고, 계시록은 이렇게 응수했다(“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도시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_계 21:22). 요한 문서들 간에 언어의 수사적 기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계시록 21:2은 이 예수라는 성전이 자리한 예루살렘을 새 예루살렘(Ἱερουσαλὴμ καινήν)으로 소개한다. 여기서 단어 ‘καινός’는 ‘처음 것’과 ‘교체된 것’ 사이의 미묘한 어의를 함유한다. 부득이 구분이 필요할 때, 요한일서 2:7은 세밀하게 설명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새 계명을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옛 계명을 써 보냅니다. 그 옛 계명은 여러분이 처음부터(ἀπ᾽ἀρχῆς-태초부터) 들은 그 말씀입니다. (요일 2:7)

요한일서의 ‘처음부터 들은’ 것이란 무엇일까? 답은 3:11에 있다(“이것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인데,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_요일 3:11). 그럼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의 또 다른 성서의 표현은 무엇일까? 예수가 직접 말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3:34) 그런 의미에서 새 예루살렘도 처음 예루살렘, 태초의 예루살렘일 수 있을까? 모세 이전의 처음 성막도 있었을까?

그러나 이 제사장들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조품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땅 위에 있는 성전을 섬깁니다. 모세가 장막을 세우려고 할 때에 “너는 명심하여, 산에서 네게 보여준 그 모형을 따라서 모든 것을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것입니다. (히 8:5)

 히브리서(8:5)와 출애굽기(25:40)에서 확인되는 것은 모세의 성막이 원형을 반영한 그림자 모형이라는 것이다. 요한이 본 새 예루살렘 속 성전이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라는 것은 이 새 예루살렘의 그 모든 것들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임을 확신하게 한다. 종말이란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결코 마지막이 아니다. 새 하늘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은 참 하늘 참 땅 그리고 참 예루살렘으로 불러도 좋으리라.

짝퉁 천국 vs. 참 예루살렘
하나님과 예수가 성전 자체라면 ‘성전 건축’이란 표현은 성립 가능한 것인가? ‘성전 건축 헌금’은 어떤가? 목회자의 본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느헤미야를 보자.

나는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에 유다 땅 총독으로 임명받아서, 아닥사스다 왕 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 총독으로 있었지만, 나와 나의 동기들은 총독으로서 받아야 할 녹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총독을 지낸 이들은 백성에게 힘겨운 세금을 물리고, 양식과 포도주와 그 밖에 하루에 은 사십 세겔씩을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였다. 총독들 밑에 있는 사람들도 백성을 착취하였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두려워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 나의 식탁에서는, 주변 여러 나라에서 우리에게로 온 이들 밖에도, 유다 사람들과 관리들 백오십 명이 나와 함께 먹어야 했으므로, 하루에 황소 한 마리와 기름진 양 여섯 마리, 날짐승도 여러 마리를 잡아야 하였다. 또 열흘에 한 차례씩은, 여러 가지 포도주도 모자라지 않게 마련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내가 총독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녹까지 요구하였다면, 백성에게 얼마나 큰 짐이 되었겠는가! “나의 하나님,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하는 모든 일을 기억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느 5:14-19)

성전 건축을 위해 말라기가 수없이 목회자들의 입에서 인용될 때, 이 말씀은 왜 세상에 들려지지 않았을까? 느헤미야가 포로에서 귀향하여 예루살렘을 새로 지으며 백성의 땀과 눈물, 가난한 형편을 얼마나 사랑으로 감싸 안았는지는 목회자들의 입에서 결코 발설되지 않는다. 필자는 작게나마 느헤미야의 본을 따르려 했다.(본지 2016년 8월호 세상읽기(천정근)에 J 전도사로 짧게 소개되었다. - 편집자 주) 한국교회는 이제라도 느헤미야라는 목회자 상(想)이 주축이 되어, 애타는 마음으로 성도를 사랑하는 목회자가 많아져 더 이상 “개독교” “먹사” 같은 표현들이 사라지길 빌 뿐이다.  

단언컨대 십일조를 많이 거두어들이는 목회자를 우대하는 풍토가 없어지지 않는 한, 한국교회가 계시록 이단들을 배척할 자격이 없다. 엄연히 하나님과 어린 양이 존재하는 성전이 있는데 또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기성 교회와 어린 양이 자기들 교주라는 이단들의 차이를 도무지 못 찾겠다. 십일조는 이제 ‘비성경적’이라 말하는 것도 경거망동이다. 십일조의 강제성은 예수의 강림으로 그 의미가 달라졌다. 아니 처음 의미로 잘 되돌아갔다. 우리에겐 공동체의 과부와 고아를 돌보라는 하나님 명령에 영원히 이바지해야 할 사명이 여전히 남아있다. 성도의 신앙을 돌보는 목회자의 생활도 고려되어야 마땅하다. 문제는 성경을 인용하며 거둔 성도의 헌금을 하나님 말씀과는 무관하게 지출하는 못된 한국교회 관행이다.(전주에 ‘깡통교회’로 알려진 교회가 선교비로 70%를 쓰면서 자랑인양 떠벌리는 동안, 공동체 내의 필요를 등한시한 오류는 모른 체하는 것을 보면 예배당만 깡통이 아니다.)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일에 사용되지 못하는 십일조는 십일조가 아니다. 십일조는 소외된 이들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 명령은 이 땅에 새 예루살렘이 온전히 서는 그날까지 계속 유효하다. 십일조 분여의 대상인 이들에게 십일조를 거두어들이는 모순을 타파하고, 거둔 후엔 ‘내 맘대로 쓰겠다’는 거룩한(?) 횡령을 멈추라. 자비량 목회자를 보고 “목사님 멋져요” 하면서, 목회자의 생활고를 방치하는 분들은 가던 길 가시길 빈다. 요한이 본 네모반듯한 새 예루살렘, 그 성벽이 144 규빗인 진리의 성은 아직 이 땅에 내려오지 않은 듯하다! 참 예루살렘은 참 하늘에서 참 땅으로만 내려올 것이다.

 

정재훈
대한신학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 독일 뷔르츠부르크와 튀빙겐 대학교를 거쳐 부퍼탈 신학교를 졸업(Mag.Th)했다. 10여 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한신대 신대원을 졸업(M.Div)하고 현재 용인 덕성교회에서 청년학생부를 지도하고 있다. 토요일 밤마다 대치교회 성서학당을 통해 요한문서들을 강해하고 탁상담화를 진행한다. 전공 논문은 〈요한계시록 인자 기독론〉이며, 현재는 ‘요한계시록’ ‘지혜’ ‘기독론’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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