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가볍게 여긴 것이 걸림돌…죄책 고백 주장도 '시들'

   
▲ 군부독재 시절 기독교계의 살아있는 양심이라고 불린 한신대학교도 감추고 싶은 '친일'의 전력이 있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군부독재 시절 한신대학교는 기독교계에서 살아있는 양심이었다. 김재준 문익환 서남동 안병무 등 교수들이 민족과 민중의 현실을 신학으로 풀어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주도했다. 학생들도 거리로 나와 독재자와 맞섰다. 이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민주주의가 틀을 잡아가고 있고, 통일도 한층 가까워졌다.

그러나 빛나는 역사를 자랑하는 한신대에서도 '친일'이라는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다. 한신대는 1940년 조선신학교로 출발했다. 선교사들이 주축을 이룬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문을 닫은 직후 목회자 양성이 시급한 시점에 조선신학교가 문을 열었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는 교육할 수 없던 시기에 학교가 세워진 것이다. 당연히 초대이사장 함태영 목사를 비롯해 학장 김대현 장로, 김재준 교수, 송창근 목사 등 개교 공신들은 신사참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설립 위원으로 참여한 김관식 김길창 한경직 등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무인가 학원으로 전락하기도

설립위원장 겸 교수였던 채필근 목사는 당시 <청년>이라는 잡지에 '금일과 같이 우리에게 국민정신 총동원이 필요한 시절에는 어떤 종교의 신자이든지 이례가 없이 국가(일본―편집자 주)에 충성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밝혔다.

특히 함태영 이사장 이름으로 제29회 총회에 올린 '조선신학원 설립 보고서'를 보면 친일 의혹이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보고서는 '복음적 신앙의 기(基)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여 충량유위(忠良有爲)한 황국(皇國)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조선신학교가 일제의 굴욕적인 간섭과 통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견디며 목회자를 양성한 과정은 고난의 행군 자체였다. 총회로부터 직영 신학교로 인가받지 못하고, 경기도청에서도 학원이 아니라 강습소 인가증을 받았다. 이것도 나중에는 허가를 받지 못해 무인가 학원으로 전락했다.

교수들은 연행되고 학생들은 징용에 끌려가기 일쑤였다. 1945년에는 평양 군수공장에 징용되어 해방될 때까지 고된 작업을 해야 했다(<한국기독교100년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사편찬위원회 펴냄).

몇몇 교수는 일제 말기에 적극적으로 친일 행각을 벌였지만, 학교는 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진 탄압에도 목회자 양성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보아야 옳다. 또한 선교사의 '우민화 정책'에 맞서 민족 주체적인 신학 연구에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한신대와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장 김동원 목사)의 정신적 기둥인 김재준 교수를 비롯해 상당수 학자들이 신사참배 등을 가볍게 생각했다는 것이 후배들에게는 가볍지 않은 짐으로 작용했다.

김 교수는 <기독교 사상>(1972년 6월호)에서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를 반대한 것에 대해 '건전한 신학적 기반을 가지고 고수하기보다 대개 우상에 절할 수 없다는 계율주의적 입장에서 반대했다'라고 깎아내렸다. 이후 그는 신사참배 거부자들이 만약 일본 조상신이 아닌 한국 조상신을 예배하라고 요구했다면 그다지 항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하은 전(前) 한신대 교수도 '주기철 목사의 죽음은 독일 나치즘에서의 본회퍼 같이 사회에 대한 교회의 사명과 책임에서 옥사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근본주의 신학에 의한 사상의 동결 내지 교리에 의한 자기 소외의 희생이었을지도 모른다'라고 밝혔다(<기독교 사상>, 1965년 4월호).

신사참배 반대, 계율주의로 깎아내려

   
▲ 학교 설립에 공헌한 김재준 김대현 송창근 동판. ⓒ뉴스앤조이 주재일
나아가 1990년에 출간한 <한신대학 50년사>는 한신대의 초기 역사에서 일본과 관련 있는 중요한 부분을 생략하거나 축소했다. <한신대학 50년사>에는 초대 이사장이 진정률 장로(1948~1953)로 되어 있고, 이전 기록은 소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총회 회의록을 보면, 초대 이사장은 함태영 목사였고 뒤를 이어 마츠모토 다따오, 무라야마 키요히꼬 등 일본인이 이사장에 올랐다. 또 이사장 겸 교수인 마츠모토와 무라야마를 비롯해 미야우찌 아끼라, 하나무라 요시오, 무라기시 세이유, 야다구찌 다로 등 일본인 교수들은 전직 교수 명단에서 생략했다. 외국인 교수인 언더우드나 어윈이 소개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하나무라 이사 등이 교편을 잡은 것을 언급하며 '일제 말년에 학교를 일본 정치의 억압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읽을 수 있다'라고 해석했다. 특히 경성제국대학(1946년 서울대학교에 통합―편집자 주) 법률학 교수였던 하나무라의 제자들이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있어 학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을 쓴 최덕성 교수(고신대)는 "일제를 기만하기 위해 일본인들을 들러리로만 세웠다고 보기 어렵다"며, 일본인 교수나 이사에 대한 한신대의 해석에 대해 "친일파 전통이 고착된 한국 교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예"라고 꼬집었다.

물론 한신대 안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연규홍 교수(한국교회사)는 <신학연구>(제44집, 2003년)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 50주년을 맞아 죄책 고백을 통해 갱신운동을 펼치자며, 회개할 내용으로 신사참배 문제를 먼저 거론했다.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순교한 이들을 거론하며, 그들의 행동이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운동 성격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그는 '신사참배 계략을 간파하였든 간파하지 못하였든 간에 교육에 우선적 가치를 두었기에 피치 못한 결단이었건 오늘 우리는 순교적 저항 정신에 비추어 죄책 고백을 하여야 한다(이게 뭔 말이야). 그럴 때만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목숨을 바친 민주 투사들의 저항과 순교 정신을 자랑하는 기장으로서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불이익에 떨고 있는 기장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파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잠들었다. "김재준 목사를 신화적 존재로 추종하는 이들이 교단에서 큰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죄책 고백을 하자고 하면 권력자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것이 뻔한데 누가 나서겠는가."

한신대 교수의 고백은 한국 교회가 풀어야 할 매듭이 너무 단단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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